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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선보의 3/8, 6/8, 9/8, 12/8과 같은 박자표는 민요와 같은 ‘빠른 템포의 간단한 선율’을 기보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다. 하지만 ‘느린 템포에서 간단한 선율과 빠르고 복잡한 선율이 섞여서 나오는 곡’을 오선보에 기보하려고 할 때 정확한 3분박을 나타내기 어렵다. 정간보로 기록된 느린 템포의 곡(예를 들어 ‘상령산’)을 오선보에 기보하려고 할 때, 한정간의 박을 한 박(♪․♩․)으로 하면 빠른 잔가락을 기보하기 어려워진다. 정간보에서 한 정간을 아홉 개의 박으로 쪼개는 것은 가능하지만 오선보의 한박(♪․♩․)을 아홉 개의 박으로 쪼개는 것은 힘들기 때문이다. 다른 방법으로 한 정간의 1/3박을 한박(♪․♩․)으로 하면 한정간의 1/9박에 들어간 음의 시가(․․) 까지 정확하게 기보할 수 있다. 하지만 4정간 이상 똑같은 음을 연주할 때 의미 없는 공간을 낭비하게 된다. 또 정간보에 익숙한 사람들은 한 정간을 하나의 호흡으로 파악하는데 1/3정간을 한 박으로 기보하면 박의 개념이 달라진다. |
정간보에서 정간은 수학적인 개념으로 ‘분할’되는 것이기 때문에 2분박과 3분박 계열의 모든 음악을 기보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정간보에서 정간은 한 박이라는 기본단위가 되는데, 한 정간을 2개, 4개, 6개로 나누면 2분박 계열의 음악을 기보할 수 있고, 정간을 3개, 6개, 9개로 나누면 3분박 계열의 음악을 기보할 수 있다. 따라서 3분박 리듬이 주로 사용되는 우리나라 음악의 리듬기보에는 정간보가 더 유용하다고 할 수 있다.
정리하면 전통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오선보를 사용하는 이유는 ‘음’을 표기하는데 있어서 복잡한 문자를 사용하는 정간보보다 기호(음표)로 음을 표시하는 오선보가 간편하기 때문이고 반대로 불편한 문자보인 정간보를 버리지 않는 이유는 정간보가 한국음악 리듬의 특징(3분박 리듬구조)을 잘 나타낼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점점 다양해지는 한국음악을 폭넓게 기보하기 위해서 리듬을 제대로 표현하는 정간보의 장점을 살리면서 간단한 음기호를 만들어 보완해야 할지, 오선보를 사용하면서 한국적인 리듬구조를 잘 표시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지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다음 장에서 지금 사용하는 정간보가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서 옛날 사람들이 복잡한 한자로 음을 표시하던 문자보에 만족하고 있었는지 악보를 좀 더 간단하게 기보하여 편리하게 사용하려고 했는지 살펴보겠다.
2. 음정에 대한 기보(한자)를 단순화 시키려는 노력
옛날 사람들은 문자보를 오선보의 음표와 같은 기호로까지 단순화 시킬 수는 없었지만 복잡한 문자에서 간단한 문자악보로 또는, 복잡한 문자에서 간단한 숫자악보로 바꿔보려는 시도를 했었다. 중국과 고려시대에 사용된 공척보와 중국에서 사용된 약자보, 조선시대 세조대에 사용된 오음약보가 그 예이다.
1)율자보, 공척보, 약자보
율자보와 공척보, 약자보는 중국 송나라 때에 사용하던 악보로 고려시대에도 사용되었다. 율자보는 12개의 한자로 12개의 음정을 표기한 것이고, 공척보는 율자보의 16개 한자(12율 4청성)를 10개의 좀 더 간단한 한자로 줄여 만든 것이고 약자보는 공척보의 한자를 좀 더 간단한 10개의 초서체로 바꾸어 만든 것이다.
〈표 1〉세 가지 문자악보(율자보, 공척보, 약자보)가 표시한 음정
12율 |
4청성 | |||||||||||||||
율자보 |
黃 |
大 |
太 |
夾 |
故 |
仲 |
蕤 |
林 |
夷 |
南 |
無 |
應 |
潢 |
汏 |
汰 |
浹 |
공척보 |
合 |
四 |
一 |
上 |
句 |
尺 |
工 |
凡 |
六 |
五 | ||||||
약자보 |
ㇺ |
マ |
ヽ |
ㄥ |
人 |
フ |
リ |
ク |
ウ | |||||||
오선보 |
도 |
도♯ |
레 |
레♯ |
미 |
파 |
파♯ |
솔 |
솔♯ |
라 |
라♯ |
시 |
율자보와 공척보는 조선시대 이후 정간보와 결합하여 고악보로 남아있는데, 이 두 악보는 음의 길이(시가)를 나타낼 수 없었다는 점에서 악보로서 불완전하였으나 정간보와 만나면서 음정과 음의 시가를 모두 표시하는 완전한 악보로서 기능하게 되었다. 하지만 공척보와 약자보는 두 개 이상의 음을 하나의 기호로 쓰려고 했던 점과 12율 4청성을 10개의 문자로 쓰려고 했던 점 때문에 지금까지 사용되지 않고 있다. 12음을 모두 표기하는 복잡한 율자보만 정간보와 결합된 형태로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어쨌든 우리는 고려시대 사람들이 공척보와 약자보를 통하여 율자보의 복잡한 한자 음정 표기를 좀 더 단순하고 읽기 쉽게 만들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음정을 숫자로 표현한 오음약보
오음약보는 정간보가 만들어진 이후 《세조실록》에 기록된 악보인데, 복잡한 율명을 버리고 숫자로 음정을 표기한 악보이다.
‘(오음약보는 중심음을 나타내는 궁(宮)이라는 한자로부터 출발하여), 한음 윗음을 상1(上一), 두음 윗음을 상2(上二), 상3, 상4, 상5로 표시하고 한음 아래음을 하1(下一), 두음 아래음을 하2(下二), 하3, 하4, 하5로 표시한 숫자보이다. (한자로 된) 중국식 율명이 있었지만 그것이 모두 음악에 쓰였던 것이 아니었기에 이 중 (주로 쓰이는) 다섯 음을 골라서 문자보다 간략한 숫자 악보를 만들어 편리함을 도모했다.’
김해숙, 백대웅, 최태현 공저, 《전통음악개론》
오음약보는 다섯 음을 주로 쓰는 우리나라 음악을 기보하기에 유용했지만 음계(음질서)가 다른 다양한 음악을 기보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
오음약보의 이런 문제점을 간단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표 2〉음정을 표시라는 오음약보의 숫자 기호와 율자보의 문자기호
오음약보의 음 |
① |
하5 |
하4 |
하3 |
하2 |
하1 |
궁 |
상1 |
상2 |
상3 |
상4 |
상5 | ||||||
율자보의 음 |
② |
황 |
태 |
중 |
임 |
남 |
황 |
태 |
중 |
임 |
남 |
황 | ||||||
황태중임남의 음정관계→ |
장2도 |
단3도 |
장2도 |
장2도 |
단3도 |
|||||||||||||
③ |
황 |
태 |
중 |
임 |
무 |
황 |
태 |
중 |
임 |
무 |
황 | |||||||
황태중임무의 음정관계→ |
장2도 |
단3도 |
장2도 |
단3도 |
장2도 |
|||||||||||||
④ |
황 |
협 |
중 |
임 |
무 |
황 |
협 |
중 |
임 |
무 |
황 | |||||||
황협중임무의 음정관계→ |
단3도 |
장2도 |
장2도 |
단3도 |
장2도 |
〈표 2〉를 보면 오음약보에 나타나는 숫자는 궁을 중심으로 오른쪽 방향과 왼쪽방향으로 배열 되어있다. 오음약보에 나오는 숫자는 음의 높낮이에 따른 순서를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궁과의 거리 관계(먼가 혹은 가까운가)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음 높이가 낮은 순서부터 살펴보면 숫자의 배열이 5-4-3-2-1-궁-1-2-3-4-5가 되는데 이러한 숫자 배열 때문에 옥타브 위, 아래의 같은 음은 다른 숫자로 표시된다. 오음약보가 숫자보이기는 하지만 숫자로 음정을 파악하기는 어렵게 되는 것이다.
또, 오음약보의 숫자 기호는 ②의 음계 ③의 음계 ④의 음계를 모두 대체하여 표시할 수 있지만, 숫자 기호로 표시된 음악을 다시 율자보로 옮겨 적으려고 할 때는 ②의 음계로 적어야 할지, ③의 음계로 적어야 할지 ④의 음계로 적어야 할지 헷갈리게 된다. 따라서 《세조실록》악보에는 오음약보 앞에 평조, 계면조 등의 음계 이름과 음높이(청, key)를 써 넣었다.
결국 율자보를 오음약보로 옮길 때 기록의 편의는 보장이 되지만 원래 악보로 환원하려고 할 때 어려움이 따른다. 이 음악이 어떤 음계로 구성되었는지 어떤 조(key)로 되어있는지 정확하게 기록하지 않으면, 음악의 본 모습은 악보에 드러나지 않는다. 만일 음계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는 오음 약보가 있다면, 그 악보는 조이동(key 혹을 scale)을 통해 수십 가지의 음악으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또, 오음약보가 5음음계만 기록할 수 있는 악보라는 점에서 지금 다시 사용할 수는 없겠지만, 조선시대의 사람들도 복잡한 율자보를 간단한 숫자보로 바꾸려는 노력을 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3. 한글 자음을 활용한 음 기호와 한글 구음보
악보의 사용을 좀 더 쉽게 하기위해 정간보에 한글기호를 써서 복잡한 선율을 기보한 예와 한글 구음으로 음을 표시한 ‘육보’를 살펴보겠다.
1) 정간보의 한자와 한글기호
요즘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정간보는 고려시대부터 사용하던 율자보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정간보가 결합된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1960년대 이후에 만들어진 김기수에 의한 ‘정악보’들에는 한글의 자음을 사용한 기호가 나타나는데 이것은 복잡하고 빠르게 진행하는 관습적인 선율 등을 기보하는데 활용되고 있다.
한자는 음악의 맥락을 짚어주는 주된 음을 주로 표시하고, 한자외의 여러 가지 기호로는 부가적인 꾸밈음이나 빠른 잔가락을 나타낸다. 음의 중요도를 따지지 않고 설명한다면, ‘좁은 정간에 많은 한자를 넣어야 할 경우 여러 가지 기호로 간단하게 표시하고 있다’고 설명할 수 있다.
음을 표시하는 기호는 ①한글 자음을 그대로 가져다 쓴 것과 ②한글 자음의 모양을 조금 바꾼 것, ③한글자음과 관계없는 기호로 분류할 수 있다. 음을 나타내는 여러 가지 기호를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표 3〉정간보에서 음을 나타내는 여러 가지 기호
1. 한글 자음을 그대로 쓴 경우 | |||
한글기호 |
나타내는 음 |
연주방법 |
기타 |
ㄱ |
하나 아래음(하1) |
앞에 연주되던 음보다 하나 아래음을 시가만큼 연주한다. |
|
ㅋ |
두음 아래음(하2) |
앞에 연주되던 음보다 두음 아래음을 시가만큼 연주한다. |
|
ㄴ |
하나 윗음(상1) |
앞에 연주되던 음보다 하나 윗음을 시가만큼 연주한다. |
|
ㄷ |
하나아래음+하나 윗음 |
원래 음 앞에 나오는 짧은 꾸밈음 2개를 표시한다. |
|
ㅅ |
두음 윗음 |
두음 윗음을 원래음 앞에 짧게 연주한다.(서양의 앞 짧은 꾸밈음과 같은 시가로 연주한다.) |
|
△ |
쉼표 |
시가만큼 쉰다. |
|
2. 한글 자음을 변형한 기호 | |||
? |
두음 윗음(상2) |
앞에 연주되던 음보다 두음 윗음을 시가만큼 연주한다. |
ㄴ을 변형한 기호 |
⌴ |
본 하일 상일 본 |
앞에 연주한 음+한음아래음+한음윗음+원래음을 순서대로 시가만큼 연주한다. |
ㄷ을 변형한 기호 |
? |
상이 상일 본 |
앞에 연주되던 음보다 두음 윗음 +한음 윗음+원래음을 순서대로 시가만큼 연주한다. |
ㄴ을 변형한 기호 |
? |
하일 하이 하삼 |
앞에 연주되던 음보다 두음 아래음+한음 아래음+원래음을 순서대로 시가만큼 연주한다. |
ㄴ을 변형한 기호 |
∧ |
하나 윗음 |
하나 윗음을 원래 음 앞에 나오는 짧게 연주한다. (서양음악의 앞짧은 꾸밈음과 같은 시가로 연주한다.) |
ㅅ을 변형한 기호 |
3. 한글 자음과 관계없는 기호 | |||
℧ |
하이 상일 본 |
두음 아래음+하나 윗음+원래음을 시가만큼 연주한다. |
|
∞ |
상일 상이 상일 본 상이 |
하나 윗음+두음 윗음+하나윗음+원래음+두음윗음을 순서대로 시가만큼 연주한다. |
|
|
하일 본 상일 본 |
하나 아래음+원래음+하나 윗음+원래음을 시가만큼 연주한다. |
|
? |
상일 본 하일 본 |
하나 윗음+원래음+하나 아래음+원래음을 시가만큼 연주한다. |
|
𐑍 |
상일 본 |
하나 윗음+원래음을 시가만큼 연주한다. |
|
𝝛 |
하일 본 |
하나 아래음+원래음을 시가만큼 연주한다. |
2) 구음을 이용한 육보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악기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 악기 소리를 흉내 내어 ‘음을 말하는’ ‘구음’이 있었다. 피리는 ‘나, 누, 너, 노, 느’ 등의 음을 사용하고 가야금은 ‘청, 홍, 당, 징, 동’, 장구의 구음은 ‘덩, 쿵, 기덕, 더러러러, 다’, 거문고는 ‘덩, 둥, 등, 징, 당, 동, 징 쌀갱, 싸랭, 슬기덩, 슬기둥, 슬기등, 슬기징 등의 구음이 있다. 이중에서 피리, 거문고의 구음은 정간보의 한자보와 결합되어 지금까지 쓰이고 있다. 거문고의 구음법은 음간의 관계를 나타내고 있어서 서양음악의 계이름과 같이 활용될 수 있을 것 같다.
① 거문고의 구음
얼핏 거문고의 구음을 살펴보면 음을 내는 방법, 즉 연주법을 설명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왼손을 한자리(괘)에 고정시켜놓고 손가락을 움직여 그 구음대로 연주한 곡과 왼손을 다른 자리(괘)로 옮긴 후 같은 구음대로 연주한 곡은 청(음높이, key)만 달라질 뿐 같은 곡이 된다. 단 괘위에 올려져 있지 않은 현을 연주했을 때 나오는 음을 지칭하는 구음은 옮겨진 음계의 영향을 받지 않는 음이 된다. 따라서 괘만 옮겨 같은 구음으로 연주했을 때 원곡과 다른 음악으로 변주될 수 있다. 하지만 때때로 거문고의 구음은 서양음악의 계이름과 비슷한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거문고의 구음은 정간보의 율명과 병행하여 쓰고 있는데, 그 이유는 정확한 자리에 한자를 넣어서 리듬을 분명히 해야 하기 때문이다.
② 대마루
대마루 구음법은 죽헌 김기수 선생이 만든 전통음악에 사용할 수 있는 계이름으로 5음 음계 구음법과 7음 음계 구음법이 있다. 대마루 구음법은 가곡, 시조, 가사와 같은 노래, ‘정가’의 시창 연습용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대마루 구음법은 ‘나누너노느’나 ‘라누러로루’로 동일한 자음에 모음만 바꾸어 발음하기 쉬운 한글로 바꾸어 발성할 수 있도록 한 장점이 있다.
‘황, 태, 중, 임, 남’ 과 ‘태, 고, 임, 남, 황’의 음정관계는 장2도, 단3도, 장2도, 장2도로 동일한데 모두 ‘나, 누, 너, 노, 느’로 읽을 수 있는데 한자가 다른 두 개의 악보가 있을 때도 구음이 같으면 그 선율이 같고 청(음높이, key)만 달라진 것이므로 ‘나, 누, 너, 노, 느’는 서양음악 이론의 방식으로 설명하자면 5음 음계의 계이름으로 볼 수 있다.
〈표 4〉
오선보의 음계(계이름) |
정간보의 음계① |
정간보의 음계② |
대마루의 구음법 |
솔, 라, 도, 레, 미 |
황, 태, 중, 임, 남 |
태, 고, 임, 남, 황 |
나, 누, 너, 너, 노, 느 |
거문고나 대마루의 한글 구음은 정간보의 ‘한자 음’보다 쉽게 읽을 수 있고, 계이름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구음보 역시 오음약보와 마찬가지로 5음 음계에 한정적으로 사용된다는 단점이 있다.
③ 장구의 구음
장구의 구음은 장구의 ‘음’을 표현하는 여러 가지 기호와 함께 쓰인다. 장구 궁편을 치는 것을 ‘○’로 표시하고 ‘쿵’이라 읽는다. 장구의 열편을 치는 것을 ‘ l '로 표시하고 ‘따’라고 읽는다. '○'와 ' l '를 한꺼번에 표시하면 ‘덩’이라고 읽는다. 채편을 가볍게 치는 ‘ ․ ’은 ‘다’라고 읽는다.
4. 한국인이 ‘음’을 대하는 방식
1. 음을 연주하는 타악기
서양음악에서 타악기는 ‘리듬을 연주하는 악기’지만 한국음악에서 장구는 리듬을 연주하는 악기이면서 동시에 ‘음을 연주하는 악기’이다. 이 때문에 만일 학생이 장구를 제대로 못치면 선생에게 음이 틀렸다’라는 지적을 받는다.
장구의 쿵은 낮은 음이고, 따는 높은 음이다. 덩은 낮은 음과 높은 음이 부딪치면서 나는 소리로 가장 크다. 장구의 쿵을 치면 낮게, 원을 그리면서, 가라앉듯이 울리는 소리고 따는 높고, 짧은 소리로, 멈출 듯 하다가 날아가는 여운을 남긴다. 이러한 장구의 구음은 거문고, 가야금 등의 타현 악기 소리와 관련이 있으며 대금, 피리, 해금과 같은 관악기와 찰현악기 소리에도 영향을 준다.
따라서 연주자는 악기를 치거나 연주할 때, 음을 내는 순간의 소리뿐만 아니라 악기를 치고 난 후에 남는 소리에도 신경을 써야한다. 음과 음 사이의 빈 공간은 사람이 감정을 표현할 때 드러내는 호흡에 의해 각양각색의 다른 모양으로 채워진다. 그 여운에 대한 표현의 특징 때문에 우리나라 음은 서양음악과 다른 개성이 있는 음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2. 수묵화와 닮은 선율
해금 연주자인 김영재 선생의 설명에 의하면 “해금 선율을 연주하는 것은 동양화를 그리는 것과 같다. 음은 붓 끝의 먹이 화선지에 닿을 때 번지는 모양을 따라 흘러간다.”고 한다. 때로는 그 선이(음이) 힘 있는 점에서 시작하여 가늘게 이어지다가 굵은 선으로 바뀌기도 하고 하늘을 날듯 곡선을 그리다가 뚝 떨어져 땅과 인간과 만나기도 한다. “연주자는 연주를 통해 순간순간 만들어지는 음을 끊임없이 따라가면서 그 음이 만들어내는 선을 상상해볼 수 있다.” 김영재 선생이 해금의 선율을 붓이 그리는 선에 비유한 것은 해금이 단선율을 연주하는 악기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수묵화의 여백과 같은 의미로서 음을 둘러싸고 있는 공간에 대한 해석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3. 성격을 가진 음
또, 우리나라 사람들은 서양 사람들이 가진 음에 대한 개념보다 더 다양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 서양 사람들이 음의 높이(높다, 낮다)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나라 사람은 음의 높이뿐만 아니라 음의 무게(가볍다, 무겁다)나 두께(가늘다, 두껍다), 명암(어둡다, 밝다)과 같은 다양한 개념으로 해석하려고 한다.
예를 들어 전라도의 민요에서 ‘라’는 평평하게 내는 음으로 가늘고 가벼운 음이고, ‘미’는 떠는 음으로 두껍고 무거운 소리이다. ‘도시’는 항상 함께 이어져 연주되는 꺽는 음으로 첫소리는 힘이 있지만 그 음이 시로 이어져 지속될 때는 ‘라’처럼 가늘고 가벼운 음이다. ‘라’와 ‘도시’는 가볍고 밝은 음이고 ‘미는 무겁고 어두운 음이다. 연주자들은 이것을 ‘각각의 음의 가진 기본적인 성격’이라고 이해하고 음이 나올 때마다 음을 가볍게, 무겁게, 날듯이, 밝게, 어둡게 등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한다. 이런 표현이 잘 되는 연주를 ‘성음이 좋다’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4. 움직이는 음 : 추성, 퇴성, 농현
우리나라의 음들은 끊임없이 움직이려고 한다. 윗음을 향해서 점차로 올라가는 음을 추성이라 하고 아래음을 향해서 흘러 내려오는 음을 퇴성이라고 하고 추성이나 퇴성이 반복되는 것을 농음이라고 한다. 서양음악에서는 도와 레 사이에 음이 도♯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사이에 수많은 음(미분음)이 있다고 생각한다.
추성은 ‘◟’으로 퇴성은 ‘◞ ’으로 표시한다. 전통음악을 가르치는 선생들은 ‘추성은 기와집의 추녀의 모양을 생각하면서 연주하라’고 하고, ‘퇴성은 우리나라 산등성이의 부드러운 곡선을 생각하면서 연주하라’고 학생들에게 가르친다. 그렇기 때문에 음악을 배우는 학생들은 한국적인 자연과 사물을 속에서 음악적 표현을 찾아내려고 노력한다. 한국적인 사물과 자연속에 한국음악의 여유와 멋이 깃들어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정간보에 사용되던 추성, 퇴성, 농음의 기호는 오선보에서도 빌려쓰고 있는데, 음과 음 사이에 있는 수많은 미분음을 악보에 모두 기보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초보자의 경우 정간보나 오선보에 표시된 추성, 퇴성, 농음을 곧바로 소리내기 어렵다. 그 소리를 여러 번 듣고 따라하면서 어떤 음들을 어떤 속도로 끌어올리고, 흘려 내리는지 익혀야만 한다. 어떤 농음은 부드러운 능선을 닮아 편안하기도 하고, 어떤 농음은 재발라 간드러지기도 하고 어떤 농음은 폭포수가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 같은 모양이기도 하다. 제각기 다른 농음을 단순한 하나의 기호로 기보할 수밖에 없으니 여전히 악보와 음악실제의 간극은 좁혀지지 않는다.
전통음악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연주자가 민요의 농음을 연주할 때 경기도 민요인지 전라도 민요인지에 따라 그 농음의 표현을 달리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것을 ‘농음의 색깔이나 맛, 깊이, 그림이 다르다’라고 표현한다.
마치는 글
나는 이번에 이 글을 쓰면서 한국인이 생각하는 ‘음’과 서양 사람들이 생각하는 ‘음’이 같은지 생각해 보았다. 한국인들에게 ‘전통음악의 추성이나 퇴성, 농음은 ‘음’임에 틀림없지만 서양 음악이론에서 말하는 ‘음’의 범주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서양 사람들은 음의 높낮이만을 비교하여 음을 정의 내리지만 한국 사람들은 음의 색깔, 농도, 두께 등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타악기에도 음이 있다고 생각하고 소리가 나지 않는 여운에 그 음의 생명력이 지속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사람의 감정에 따른 호흡을 통해서 표현된다.
서양 음악이론에서 음악의 기본요소로 정의된 것이 ‘음’과 ‘박’인데, 만일 한국인이 생각하는 ‘음’과 서양 사람들이 생각하는 ‘음’의 성격이 다르다면, 또, 음악의 실제와 좀 더 가까운 창의적인 악보를 만들려는 바램이 있다면, 서로 다른 음악을 동일한 방식으로 악보화 할 필요가 있을까?
지금은 근대이후 기보된 전통음악에 오선보의 사용이 빈번한 것이 사실인데, 어떤 사람이 정간보의 활용을 더욱 폭넓게 하고자 한다면 오선보의 장점을 잘 활용할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또 나는 고려시대 이후 사용한 다양한 악보(율자보, 오음약보, 정간보, 육보)들은 ‘악보 발전사’라는 관점을 통해 재조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좀더 간단하고 간편한 악보를 만들고자 한 바램과 노력이 악보발전사 속에 녹아있기 때문이다.
한국 음악을 기록하기에 적당한 악보는 어떤 것인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만일 새로운 악보를 만들거나 한국음악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방향으로 정간보, 오선보에 보완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한국음악의 특징을 무엇이라 규정할 수 있는지, 그것을 어떻게 악보를 통해서 나타낼 수 있을지, 참 궁금한 것이 많이 생긴다.
오선보의 편리함을 버리지도 못하고, 정간보의 장점을 버릴수도 없지만 한국의 소리깔을 드러내는 창의적이고 실용적인 악보를 누군가 새로 만들 수 없을까? 라는 생각도 잠깐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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