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니 햇살이 참하다.
연한 잎사귀가 하늘거리고 산에는 늦은 산벚꽃이 한창이다.
금요일 오후에 출발하여 컴컴한 구룡령을 넘어 아홉시가 다 되어서야 도착한 갈천 야영장이 아침에 바라보니 영 딴 세상으로 보였다. 만여평이나 된다는 캠핑장을 혼자 독차지하자 소꿉장난이 따로 없다. 곳곳에 쏟아지는 지하수 수도꼭지에 내 집이라는 표시로 고무장갑과 설거지 도구를 놔두고 나무 여기저기에 매어놓은 빨랫줄에 이불과 식탁보까지 널고 보니 이젠 낯설음보다 호젓함에 흐뭇해지기까지 한다. 계곡에는 아래로 내려가면서 작은 수영장이 되도록 돌들을 정리한 흔적이 있어 여름철 아이들 데리고 놀기는 더 이상의 장소가 없을 듯 물빛도 청명하다.
새로 장만한 넓은 라운지에 수세식 변기까지 새로 장만하여 넣어 놓으니 전천후 캠핑이
두렵지 않다. 사실.....여자들이 캠핑하며 제일 곤란한 것은 재래식 간이 화장실 아닐까.
그것을 극복하고자 애썼지만 적벽강에서 나 화장실 간다고 써붙이지 않아도 잔디밭을 가로질러 언덕 위의 화장실에 다다르면 모두가 알아보는 듯한 그 민망함을 겪고 난 후 수세식 변기는 필수품목이 되었다.
아이들 떼어놓고 둘이서만 떠나는 설레임에선지 남편이 선뜻 장만한 화로와
내가 갖고 싶던 도끼가 빛을 발한다. 십만원이 넘는다는 도끼의 윤기나는 검은 빛이
도도하기까지 하다.
얼른 도끼를 들고 나무를 찍어대는 나를 보고 남편이 말한다.
<자기는 무슨 선녀가 그렇게 도끼질을 좋아해?>
나...이를 악물며...
<그 뒷이야기를 생각해봐. 보잘것없는 나무꾼한테 시집온 선녀가 뭐하고 살았겠어?
아이 셋 낳고 사느라고 나무하고 장작 패며 고생했겠지!!>
의미심장하게 말했는데...영 반응이 없다....둔하긴...쉽게 콕 찍어 너 만나서 이 고생이다...이래야 알아들으려나....ㅡ.ㅡ;;
아침 먹더니 하품하고....남편은 낮잠을 잔다...어차피 그를 위한 캠핑이니 곱게 재워야지,
토요 휴업일에도 갈데없어 애처롭던 친정 조카를 캠핑에 데리고 다니니 친정엄마는 내심
고마우셨는지 사위 고생한다고 애들 떼어놓고 둘이 오붓하게 다녀오라고 선처해 주신다.나로서도 자기의 취미도 아닌 캠핑에 몸바쳐 고생하는 남편에게 나의 고마움을 전하고 싶었던 터...
그러나...
오후 네 시가 되도록 코를 곤다....ㅜ.ㅜ
저녁거리를 장만하러 장보러 가던 중....나는 말했다.
<나...아까 도끼 보고 생각한 건데....우리 진짜 선녀와 나무꾼 해볼까. 밤에 앞의 계곡에서 목욕하자....>
<추울텐데...자기 감기 걸리면 어쩌려구...참으세요.>
<그러면...자기 혼자 하면 되지....내가 원래 도끼 더 좋아하니까 자기가 선녀해..>
<.............>
밤이 젖어들자 새로 산 화로에 불을 피웠다. 역시 불 앞에 둘이 앉으면 대화가 절로 풀어질 듯하다. 여기에서 이야기를 잘해 춘천 전국 캠핑 대회를 참가해야 한다...일단 주변부 이야기부터 ....분위기를 잡자..
<자기는 나보다 릴캠에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아...그런데 이번 릴캠은 달궁에서도 했잖아.
거기는 18팀이 공동취사도 했대. 대단하지? 남부군의 결집력이나 열정은 정말 놀라워. 우리도 섬진강에서 봤잖아. 닌자님 이하..무달님...가이버님..난감자님.. 땡이님...어쩐지 그곳이 주가 된 듯한 느낌이 들 정도야>...(열정을 본받으라는 뜻...)
그런데..남편 뜬금없이...
<어차피 릴캠은 날이 갈수록 분산될 수밖에 없어. 오캠 발전을 위해서도 그런 팀이 더 많아져야 해..>
(이건 뭔 소리?? 그거야 오캠이 알아서 할 거구...자기가 왠 걱정??)
다시...캠핑의 열정을 위해..
<그 중에서 땡이님은 정말 대단해...나의 이상형이야...내가 남자라면 살고 싶은 인간형이라고나 할까....그러나 반대로 여자 입장이라면..절대 노우~야...남자 혼자 그러구 다니면
난 속상해 죽을 거야...부부가 취미가 같아야지...서로 50%씩은 맞춰야 하지 않나? 그러니까 우린 꼭 붙어서 같이 다니자!!!>
(서로 함께 캠핑하는 분위기와 타당성을 위해....^^)
<그러면 자기도 혼자 다녀...>
(헉...이건 또 뭔소리...정말 동문서답이 따로 없다ㅜ.ㅜ)
정말 대화 안 풀린다....나이 사십이 넘으니 부부간에 대화가 길어지면
오해와 불신...고성이 오간다.
다시 심기일전..
<자기 요즘 고생 많았어. 아들에 조카까지 챙기느라 쉴 틈이 없지. 엄마가 자기 그렇게 쉬지도 못하고 고생하면 싫증난다고 둘이서도 다니라잖아.>
(위로와 감사..치하를 곁들여....서로 겸양과 배려로....분위기 좋은 대화를 기대기대...)
그런데..남편...
<정말 내가 머슴이냐? 텐트 치고 나면 먹이고, 먹고 나면 또 뒤치다꺼리....
자기는 이거해라 저거해라...그래도 어머님이 자기보다 낫네..>
(어머니가 낫다니...다 내가 자기 고생한다고....조카한테까지 너무 잘한다고...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해서 엄마가 아는 거지...그래도 참자)
<그래도 자기 많이 변했어..뭐..전에는 나 커피 마시고 있으라고
미리 커피 타놓고 짐챙기고, 난 움직이지도 못하게 하더니...
이젠 거들면 장갑끼고 하라고 목장갑 주더라...>
아니...그런데 잘못 건드렸다...더 큰소리다...
<다른 집은 다 여자가 음식하더라...옆집에 건달님 사모님은 산에 다녀와서도
해물전 만들어 먹이더라...나처럼 일하는 남자가 어디 있냐???>
아...뭔가가 잘못되었다. 우리끼리 다닐 때는 다 남자가 해야 한다고 혼자 열심히 하면서 난 손가락 까딱도 못하게 하더니......릴캠 두 번 다녀오더니 사람이 변했다.
그래도 참자...아니..조금씩 오른다...스팀이...
<누가 하기 싫어 안했나? 자기가 못하게 하고선..솔직히 내가 가스 버너 불 못 켜서 음식못하지...그리고 뭘 해도 자기보다 잘한다...우선 장비를 자기가 먼저 익혀야 캠핑 재미가 붙을 것 같아 지켜보고 있었더니...이런 오만함이란...>
내 눈길이 도끼에 이르자 남편은 슬그머니 구석으로 도끼를 밀어넣는다. 다시 눈길이 화로에 멈춰....<그럼..장작불 들고 지금 한번 싸워보자는 거야??>
목소리가 달라지자 남편은 서둘러 화로불을 끈다....<불나면 큰일이야...>
그래...캠퍼는 자나깨나 불조심이지...참자...
아무래도 조짐이 수상하다. 그간에 장비 사느라 들어간 돈을 꼼꼼히 들이대지를 않나...
차라리 생일날 옷을 사달라고 하라고....그게 싸다는 둥.....(난 내 생일 선물로 장비를 사달라고 했다...난 주민등록 생일..양력 생일..음력 생일을 다 치른다^^ 생일은 3, 4월에 겹쳐있다......) 그러더니...이제 차는 나한테 사란다. 차 안사주면 캠핑은 힘들거라나...
심사.....몹시 뒤틀린다. 생일 선물을 돈으로 환산하며 따지니 서러움이 몰려든다. 분위기 바꿔 보고자 시도했던 말들이 점차 가정사에 이르자...평소에 서운했던 내 모든 감정이 솟구쳤다...일 벌어졌다... 이젠 만여평 내 야영장이 전쟁터가 되려 한다.
내 입이 서서히 다물어지자 그제사 분위기 파악한 남편이 들어가서 자잔다.
성질 나서 안 잔다고 토라지니......이런...혼자 들어가버리네...
(역시 두 번 권하는 법이 없다...)
깜깜한 그믐밤에 별은 반짝이고 눈에 익은 어둠 속에 쭉쭉 뻗은 솔잎들이 서러워 맥주를 홀짝홀짝 다 마셔버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다시 나온 남편...
<추워..들어가자...> 나직한 그의 목소리...들어가더라도 이렇게 들어갈 수는 없다.
난 남편의 팔을 살짝 끌어당기며 한껏 은근하게 말했다.
<우리 목욕하자...우리가 언제 이런데서 둘이 목욕하겠어...
좋은 추억이 될거야..하자..응???>
이쯤이면 둔한 남편도 많은 생각이 오갈거다...여기서 싫다하면...
밤새 라운지 폭파하던지 아니면 날 꼬박새고 나의 독설을 견뎌내야 할걸!!!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이하 생략...)
물에서 나오는 남편의 손이 부들부들 떨릴 때 난 어둠 속에서 씩.....웃었다.
난 술먹고...열받아서 추운줄 몰랐다...훗...음주후 계곡물에 심장마비될까..위험감수했지만..
컴컴한 구룡령을 넘어오며 이곳 갈천을 소개해 주신 푸른하늘님을
먹구름이라 원망도 했지만 이제는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더불어 밤에 마중까지 나와주시고 다음날 산두릅까지 건네주신 맘좋은 주인 할아버지,
떠나는 날 자기 없는 새 와서 불편했겠다며 인사하던 인상 좋은 주인 아저씨, 지도까지 그려주며 안내해준 남한강님 덕에 운두령에서 송어회를 먹고....내가 사진도 없는 후기를 올리는 이유는 감사한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다. 캠핑을 다닐 때마다 고마움을 느끼지만 그 마음을 제대로 전할 길이 없어...후기에서나마 그 마음을 전하게 된다.
갈천을 다녀오며...난 스노우 캠핑을 꿈꾼다. 무슨 봄날에 겨울 이야기일까마는 역시 선녀와 나무꾼은 겨울에 스토리를 엮어야 제 맛이 아닐까...그 겨울 계곡에서 서로 역할 바꾸기를 한다면 더 좋은 추억은 없을 것 같다.
<자기는 선녀....난 나무꾼...얼음 깨고...입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