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신세동 칠층전탑경북 안동시 신세동. 국보 제16호. 높이 17m, 기단 너비 7.75m. 통일신라시대 전탑.
지정종목 |
국보 |
지정번호 |
국보 제16호 |
지정일 |
1962년 12월 20일 |
소재지 |
경상북도 안동시 법흥동 8-1 |
시대 |
통일신라 |
종류/분류 |
전탑 |
크기 |
높이 17m, 기단 너비 7.75m |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6호로 지정되었다. 길이 28cm, 너비 14cm, 두께 6cm의 벽돌로 정교하게 쌓아 만든 벽돌탑으로, 탑의 높이 17m, 기단의 너비 7.75m이다.
기단은 방형(方形)으로, 지상에 8부신중(八部神衆)을 양각해서 동·남·북 3면에 각 6장씩 세우고 초층 옥신 밑면의 공간은 원분(圓墳) 모양으로 이루어졌으며 정면 계단은 단층기단 형식이다. 또한 8개의 계단 위에는 높이 90cm, 너비 54cm의 감실(龕室)이 있다. 판석 조각의 수법은 시대가 동일하지 않고 탑신부는 무늬 없는 회색 벽돌로 축조되었고, 옥개 상면에는 곳곳에 기와를 입혔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상륜부는 노반(露盤)만 남아 있는데 원래는 금동제(金銅製) 상륜이 있었다고 한다.
1487년에 개축되었으며 원형이 보존된 한국 최고(最古)의 전탑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안동 신세동 칠층전탑 [安東新世洞七層塼塔] (두산백과)
안동 조탑동 오층전탑
영양 봉감동 오층 모전석탑
제천 장락사지 7층 모전석탑
인도 사르나트의 굽타시대 다메크 불탑 외부에 감실이 보인다.
중국 시안 흥교사의 규기, 현장, 원측 스님의 승탑들.
탑 안에 감실을 만들고 승상을 봉안하였다.
3층 감실에는 지금도 불상을 봉안하고 있다.
자은사 대안탑
탑 안에 공간이 있고, 불상을 봉안하였다.
자은사 대안탑
향적사 선도대사 승탑
탑 내부에 공간이 있고 올라갈 수 있다.
1층 입구를 들어가면 선도대사와 법연의 상이 최근에 봉안되어 있다.
선도대사탑
2층부터는 감실 좌우에 금강경을 새겨 두었다.
화엄사
화엄종 제4조 청량징관 스님의 승탑
화엄종 초조 두순 스님의 승탑
의상조사는 제2조 지엄 스님 문하에서 수학했다.
소림사의 승탑군
중국 뤄양 백마사의 송대에 조성한 석가사리탑(제운탑)
11세기 송대에 세워진 카이펑의 전탑.
유약처리한 벽돌(적유전). 감실과 불상. 기와. 풍경. 벽돌의 불상, 공포, 내부에 올라가는 계단 등을 볼 수 있다.
전탑이 목탑의 번안임을 보여준다.
80미터 높이(아파트 30층) 황룡사 9층 목탑도 이렇게 장엄하였을 것이다.
요나라가 세운 응현 목탑을 나중에 한 번 보고 싶다.
2014년 1월 경주문화연구교사모임 중국답사여행 때 촬영한 사진들입니다.
중국여행에서 하나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면,
전탑들이지만, 불탑과 승탑의 규모나 양식에서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것이었다.
벽돌이 황토색이 나는 것도 고색창연하고 뭔가 모르게 질박하고 순박한 미감을 주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진전사지 도의국사 승탑의 기단부는 신라석탑의 불탑양식이고
그 위는 후대에 정형화되는 팔각원당형 승탑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후 보조선사 체징이 당나라 때 조성된 초당사 구마라집 승탑을 모델로 하여
신라 선종 불교 문화의 승탑 양식의 원형이되는 염거화상승탑을 탄생시킨다.
의성 빙산사지 석탑
고구려에서 신라의 경주로 이어지는 길목인 경북 서북부 지방에 이러한 탑들이 조성되었다.
중국-고구려-신라로 이어지는 불교문화의 전파 루트에 벽돌로 쌓은 전탑들이 있다.
이 탑은 전탑에서 석탑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것으로 짐작된다.
탑에 감실을 만들고 불상을 안치한 것은
탑에서 불상으로 신앙의 중심이 변이해가는 과도기에 생겨난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저기 유호인이 빙산사에 머물며 남긴 시가 문집에 실려 있다.
18세기에 간행된 동여비고에 빙산사가 나타난다.
19세기에 폐사가 된 것으로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함경도 갑산도호부>에 "白塔洞有塼塔"고 하였다.
이 기록의 전탑이 발해 또는 고구려 시대 것임을 배제할 수 없다.
*
題惠山鎭
一江天塹向西流。
孤壘要衝據上游。
擊柝巡城愁度夜。
連烽列障苦防秋。
寒雲塞草迷胡路。
落日邊風撼戍樓。
古寺應隨兵火滅。
尙餘層塔在山頭。
鎭越邊。有塼塔在山上。高十餘丈。父老相傳山下有寺基。是爲寺洞。不知何代所創。何年廢亡云
-민제인(閔齊仁, 1493~1549)의 立巖集(1610년 간) 권3
仁遮外堡。在三水府北二十里。城周三百六十三尺。舊屬甲山。置權管。明孝宗弘治十五年。我燕山君。
八年也。移屬三水。陞萬戶也。羅暖堡。在三水府西北五十里。城周三千三百六十尺。燕山君六年。置萬戶也。〇其北合之水。源發界外。
卽白山之西南麓。南流由崔天己洞。入于淥水。勝覽云。大水出白頭山下馬竹洞。
卽綠水。經惠山鎭暨仁遮外。與崔天己洞水合流
也。余按界外之地。
下편040自白山沿淥水。而下至義州。今皆爲船廠將軍之所管轄。而地僻人稀。山巒層疊。不可以周知。考諸輿圖。自惠山至羅暖。沿淥水以北界外。有車軍
萬편041洞、藥水洞、泡石洞、
白塔洞、有磚塔虎橋洞、朴龍洞、尹水洞、三可洞、蘆洞、深洞、禾洞及回山寨、葛山、黑山等諸名。而所
末편042詳也。
정약용, 대동수경
觀寂寺 有雨花堂大師舍利塔碑。康煕年立。
관적사, 우화당대사사리탑비가 있는데 강희 년간에 세웠다.
舍利藏甎塔。사리를 벽돌탑에 갈무리하고
金身閉石龕。금불을 돌 감실에 봉안했네.
看碑人小立。서서 사리탑비를 잠시 읽자니
花雨落毶毶。꽃비가 사르르 내리는구나.
警修堂全藁冊二 東陽申緯漢叟
分甘集 乙亥正月。至丙子四月。象山四十詠
자하 신위가 곡산부사 시절에 지은 황해도 곡산 40제영시
황해도 곡산 오륜산 관적사(관세음보살 봉안한 절)
<<삼보감통록三寶感通錄>>에 기재되어 있다.
고구려 요동성 옆에 있은 탑은 옛노인들의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렇다.
옛날 고구려 성왕聖王이 국경을 순행하다가,
이 성에 이르러 오색구름이 땅을 덮는 것을 보고 가서 그 구름 속을 찾아보았더니
중이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 가면 홀연히 없어져버리고 멀리서 보면 도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 옆에 삼중三重의 토탑土塔이 있었는데 위는 가마솥을 덮은 것 같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다시 가서 중을 찾아보니 다만 무성한 풀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곳을 한 길쯤 파보니 지팡이와 신이 나오고,
또 파보니 명銘이 나왔는데 명 위에는 범서가 씌어 있었다. 시신侍臣이 그 글을 알아보고 말했다.
이것은 불탑입니다.
......
성왕은 이로 인하여 신앙심이 생겨 칠중목탑七重木塔을 세웠는데 그 후에 불법이 전래하자 그 시말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 지금 다시 그 높이를 줄이다가 본탑이 썩어 무너졌다......
-<<삼국유사>> 제4 탑상편, <요동성의 아육왕탑(遼東城育王塔)>
*일연 스님은 삼보감통록의 기록을 인용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지금도 탑의 층 수를 표현할 때 몇 중重이라는 표현을 쓴다. 삼중이라는 말은 3층이라는 말이다.
*지금도 인도에 가면 벽돌로 쌓은 스투파들이 흐물어져 경주의 왕릉을 닮은 흙무덤으로 보이는 것을 볼 수 있다.
네팔 천비성의 불타 8대 스투파 중의 한 스투파에는 나무와 풀이 자라고 있다.
3층 위의 탑신이 흐물어져서 마치 가마솥을 올려 놓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위에 올린 대안탑, 현장탑, 선도탑 등 현존하는 중국의 전탑들을 보면
그 빛깔이 완연히 흙색이다.
*아래 자료(출처: http://blog.ohmynews.com/cornerstone/157456)는
경주 덕동의 전탑에서 나온 범자가 명된 벽돌이다.
위의 삼국유사 기록에서 더 파보니 銘이 나왔는데 명 위에는 범서가 씌여 있었다는 기록을 뒷받침하는
대단히 소중한 자료이다. 흙에는 벽돌처럼 범서를 새길 수가 없음에 주목해야 한다.
정영호는 위의 삼국유사 자료들을 인용하며 고구려에 토탑, 목탑, 석탑이 있었다고 하였다.
나는 3층의 토탑이 곧 오래되어 흐물어진 전탑으로 생각한다.
인도나 아프가니스탄이나 티벳의 불탑은 동아시아의 탑처럼
기본적으로 층이 없기에 3층 토탑이 이런 탑일 가능성은 없다.
후한대에 처음으로 고루거각에서 출발한 것으로 짐작되는
중국의 목탑이 전탑으로 번안되었다.
현재 중국에는 목탑이나 전탑이 남아 있으나
수, 당대 이후의 것들이다.
목탑, 전탑이 삼국으로 들어와 석탑을 탄생시킨다.
고구려에 불교를 전파한 중국의 불탑 양식이 전파되었어도
인도, 아프가니스탄, 티벳의 불탑이 전파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삼국유사에서는 아육왕(아소까)탑이라고 여기고 있다.
황룡사 장육존상의 모델을 아육왕이 보낸 것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인식이다.
<<고승전>>에 중 보덕의 자는 비법이면 전 고구려 용강현 사람이라고 했다.
자세한 것은 이 아래의 <본전>에 나타나 있다.
스님은 늘 평양성에 살았는데, 산방의 노승이 와서 불경을 강연해주기를 청하니
보덕은 굳이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가서 <<열반경>> 40여 권을 강연했다.
강연을 마치고 성 서쪽 대보산大寶山 바위굴 밑에 이르러 참선을 하니
신인이 와서 청하기를 이곳에 사는 것이 좋겠다 하고
지팡이를 앞에 놓고 그 땅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 땅속에 8면 7급 석탑이 있을 것이다."
그 땅을 파보니 과연 그러했다. 그로 인하여 절을 세워 영탑사라 하고 그곳에서 살았다.
-<<삼국유사>> 제4 탑상편 <고구려 영탑사(高麗靈塔寺)>
<<삼국유사>>의 이 기록은
고구려 요동성에 3층 이상의 전탑, 성왕이 세운 7층 목탑, 평양성 대보산 영탑사에 8각 7층 석탑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자료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박상현 | 조회 14 |추천 0 | 2003.07.13. 04:45
// 우리문화이웃문화(16) ■ 고구려 다각탑
중-일에 전파된 해동피해 방지공법 / 지반침하시 사각형 보다 변형 -파손될돼/ 송-명-청시대 6각탑 일 법륭사 8각 전각/ 백제 9각건물 지 신라 흥륜사 8각목탑 등/ 동토의 지혜 전한 흔적 상당수
금년으로 두 번째 중국의 심양지역에 가서 석불사의 탑을 보았다. 심양시에 서 서북쪽으로 약 50㎞쯤 가면 석불사로 불리던 절터가 있다. 절터는 어찌되었는지 알 길이 없는데 평원에서 우뚝 솟아오른 독산이 있고 그 위에 석불사 탑이 있다. 고구려 탑이라고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 호칭하고 있다. 탑에서 돌아오는 길의 큰길가 마을에 들러 주민들에게 물었더니 한결같이 그 쪽을 손짓하며 고구려 탑이라 하였다. 전에 왔을 때는 막연히 8각형의 벽돌로 쌓은 고구려 탑이라고만 알았다. 금년에는 동행한 분들의 정밀 조사가 있었다. 성균관대 건축과 교수이며 북경의 청화 대학 건축과 교환교수로 중국에 체류하고 있는 이상해 선생과 문화재 보수 시공을 30여년간 계속하여 온 김영일 건축기사도 조사에 참여하였다. 탑은 다 깨어지고 1층과 하부 기단 일부만이 남아 있는 형편이어서 완형을 다 볼 수는 없었다. 전으로 쌓은 탑이다. 말하자면 회색빛의 벽돌로 축조한 다층탑이다. 보존 상태가 좋지 않아 얼마나 그 자리에 있을지 걱정스럽다. 깨어지다 남은 부분의 모서리에서 120도의 각도를 검증하였다. 육각(여섯 모)으로 쌓은 탑이라는 판단이다. 육각이라는 말을 듣고 나는 다시 검증하기를 요구하면서 혹시 나 칠릉(일곱 모)은 아닌지 살펴봐 달라 하였다.
삼국사기에 이런 기록이 있다. 고주몽의 유복자 유리가 아버지가 숨겨둔 신표를 찾아내었다. 일곱모 난 주춧돌 위에 세운 소나무 기둥 사이에서 칼의 한 조각을 찾아내었다. 신표를 확인한 고주몽이 태자로 삼고 등극하게 하니 그가 바로 유리명왕(유리명왕) 이라는 내용이다. 일곱모 난 주춧돌이 내게는 큰 과제가 되었다. 일곱모는 여섯모나 여덟모에 비하여 작도하기가 매우 까다롭다. 한 때는 도면 그리기가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있어서 아마 삼국사기가 육이나 팔을 칠릉으로 잘못 쓴거나 아닌지 하는 의문을 가졌었다. 후에 작도가 가능하다는 점과 작도법도 익히게 되어서 의문은 가셨지만 실제로 일곱모 난 주춧돌이 고구려에서 나타나지 않을까 해서 탐색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었다. 행여 나 일곱모 난 탑이 아닌가 해서 재조사하였으나, 그 탑은 육각탑이었다. 육각의 탑은 중국에도 상당수 현존하고 있다. 그들은 대부분 12세기의 송나라 때의 작품이거나 명, 청대의 전탑들이다. 내가 갖고 있는 48기의 중국의 탑자료 중에 47기는 대략 이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진 것이다. 그 중의 하나. 호북 마성백자탑만이 780년에 만들어졌다 한다. 고구려가 668년에 멸망하였으니 석불사탑이 그때 만들어졌다해도 호북탑보다 1세기를 앞서고 있다. 마성백자탑은 송나라 때 다시 쌓았다. 다시 쌓으면서 육모로 바꾸었다고 할 수 있다. 육모의 건축은 고구려 이래로 지속되어 조선조에서는 서울의 동궐(창덕-창경궁) 후원에 작은 육모정으로 구성된다. 고구려에는 다각탑이 많았다. 팔각도 그 중의 하나이다. 백제에서도 다각의 건물을 지었다. 한강변의 이성산성에서는 한양대가 발굴한 터전에서 9각 건물지가 나왔다. 신라 서라벌의 첫 번째 본격적인 사원인 흥륜사 목탑은 8각탑이었다. 삼국의 문물로 배양된 토양에서 발아한 왜국의 사원에서도 8각의 건물이 보인다. 법륭사 일곽에 따로 건축되어 있는 성덕태자(성덕태자)의 몽전(유메덴)도 팔각의 단층전이다. 다각형 건물은 무섭게 추운 지방에서 시작되었다고 나는 주장하려한다. 바이칼호 인근에서 시베리아에 이르는 동토 지역의 집들 중에 목조건물이라도 직사각형 평면의 대형건물들은 대부분 어그러져 있다. 그에 비하여 유르트(Yurt)등 유목민족의 살림집들은 평면이 다각형이거나 몽고포(몽고빠워)처럼 원형 평면이어서 심한 변형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원리가 추운 고구려에서 적용되었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동토의 땅도 땅속은 포근하다. 지표아래 1∼2m 깊이의 땅은 해동되어 있는 것이다. 지표 위의 땅은 여름, 가을까지 녹아 있다가 추워지면 다시 언다. 고구려의 지독한 겨울 추위도 땅 속 상당한 깊이까지 동결시켰을 것이다. 동결되었던 땅이 녹으면 침하가 생겨난다. 이때 지상건물들이 영향을 받는다. 이런 자연의 섭리를 잘 활용해서 의연히 버틸 수 있는 유형이 다각형 평면의 건축물이다. 고구려의 육각, 팔각은 그래서 크게 발전하였던 것이고 그 경험이 이웃나라에 전파되어 호평을 받았다. 그리고 후대에 맥이 이어졌던 것이라고 해석하려는 것이다. 목조건축에서 6각, 8각, 9각은 그 작법이 까다롭다. 이들에 비하면 북경의 천단에서 보는 바와 같은 둥근 평면의 원형건물은 차라리 짓기가 쉽다. 둥글게 돌아가는 부분은 직선의 재목 여럿으로 짜맞추어 합성하면 완성되는 것이어서 별다른 어려움이 없다. 천단의 건물들에서는 합성된 부분을 가리기 위하여 헝겊으로 싸바르고 색 을 칠하였다. 그에 비하면 6각, 9각은 참으로 기둥 위에 짜기가 어렵다. 이런 어려움을 딛고 잘 짠 다각을 보면 우리는 신공이라 찬탄한다. 벽돌 구조도 마찬가지이다. 고구려 석불사 6각탑은 그래서 고구려 인들의 창의가 돋보이는 귀한 작품이라 칭찬해서 조금도 더함이 없다고 할 수 있다. |
빙산사지의 불전 건물 기단터
빙혈
빙혈의 얼음
풍혈
세종실록지리지에 지리정보가 실려 있다.
불정대 아래 빙계 가의 빙계서원 빙월루
첫댓글 김 선생님 고맙습니다
어디서 중국 자료를 찾아내어 편집하였는지 ....많은 시간 들였을 것이네요
네, 선생님! 지난겨울에 경주문화연구교사모임 중원문화답사여행 때 촬영한 사진들이고, 인도 사르나트 굽타시대 다메크탑은 2001년 1월에 법륜스님 지도 받으며 다녀온 인도성지순례 때 촬영한 것입니다. 삼국유사 탑상편에 참 재미있는 대목이 나오네요. 삼국유사를 읽어보면, 일연 스님은 대장경, 역사서들을 섭렵하고 한문, 범어까지 마스터한 당대 일급 지성인으로 현장 답사와 문헌 조사를 하고 많은 전승을 메모한 메모광? 이었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