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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변화산상의 사탄
‘베드로가 예수께 (대답하여)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막9:5,6).
모든 일들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가 점진적으로 발전해 가면서 새로운 날마다 그것이 어느 정도 발전해 가는 것을 보여주는 꼭 그것처럼, 그리스도의 수난의 역사 속에서도 하나의 명백한 절정으로 인도하게 되는 점진적인 발전(a gradual evolution)이 있습니다. 그리고, 좋은 동기로 구성된 그런 드라마에서처럼, 이 역사에 있어서도 그 절정은 정반대편에 있는 길항세력들을 날카롭게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들 앞에 있는 본문이 이러한 절정의 한 예를 제시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언급하기 전에, 우리는 앞장에서 떨어뜨렸던 사건들의 실오라기를 집어 들어야 합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성령에 의해 가이사랴 빌립보로 이동하셨고, 그곳에서 당신의 역할을 완수하는 것을 방해하려는 “사탄”의 무리 가운데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그 분을 다시금 관찰해보아야 합니다. 이번에는 성령께서 그 분을 변화산으로 몰고 가십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현저한 일은 이 사탄이 그 분과 함께 다시금 동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분과 함께 동행하고 있다구요? 아니, 사실은 그것보다 더욱 놀랍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과 함께 당신이 사탄이라고 불렀던 바로 그 사람을 데리고 가셨던 것입니다: 사실, 당신께서 친밀한 관계 속에서 볼 수 있는 사랑받는 그 세 제자들 중의 하나로 부르십니다. 인간적으로 말해서, 이 이야기가 그렇게 감동적으로 극적인 효과를 갖게 하는 것이 바로 이 점입니다.
요나의 아들 시몬의 인격 안에서 사탄은 주님께서 가르치셨던 설교단 위에 손을 얹게 함으로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과 죽으심의 불가피성을 가르치시고자 할 때에 훼방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때는 예수께서 침착하고 대화적인 태도로 그리고 그 당시의 언어로 그 가르침을 행하셨습니다. 하지만 지금 - 경이로운 차이가 있습니다 - 하늘 자체가 열려서 그 불가피함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한 높은 산꼭대기에 내려 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은 예수님에게, 사람들에게가 아니고, 당신의 수난과 죽으심의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에 부시도록 하늘의 영광이 빛남이 십자가의 그림자와 날카롭게 대조되고 있는 바로 이 때 조차도, 그 육신과 피의 사탄이 예수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may accompany). 아닙니다, 동행할 수 있다(may)가 아니고, 동행해야 한다(must)고 말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선택하셔서 데리고 가십니다. 성령님께서 그리스도가 시몬을 선택하여 데리고 가도록 몰아가십니다. 그것은 인자께서 당신의 희생을 곧바로 수행하셔서 당신의 신부가 되는 교회의 그 사탄적인 저항의 목소리에 대항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요나의 아들 시몬이라 부르는 사탄은, 부정적인 방식으로 수난과 죽으심의 개념에 반대하였습니다. 이제 긍정적인 방식으로 그가 수명의 연장을 요청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두 경우 모두, 그는 하나의 사탄임을 드러내고야 맙니다.
영적으로 대립되어 있는 세력들과 능력들의 이 싸움 속에서, 자연 역시 그 고유한 방식으로 그 지독한 대조를 묘사하는게 공헌해야 했던 것 같습니다. 예술가들 중에 최고의 예술가이신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자연과 성령이 주어진 순간에 동일한 언어로 말할 수 있게 할지를 언제나 알고 계십니다. 그 분께서 그러한 기술을 특별히 예수님의 수난의 역사 가운데서 드러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왜 어떤 이들이 그리스도의 변화산상의 변모가 밤중에 일어났다고 추측해 왔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누가의 진술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그 산에 오르신 것이 부분적으로는 기도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것은 힌 반 이상 저녁나절이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제자들은 얼마 뒤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그것 역시 밤중의 사건을 암시합니다. 더욱이 그 산에서 내려 왔을 때 주님과 제자들이 절망에 빠진 아버지와 죽음 직전의 아들의 장면과 맞닥뜨려지게 되는 것을 기억한다면, 그 사실 역시, 변모의 사건은 밤 중에 일어났다는 의견을 확증해 줍니다. 최소한 이런 해석은, 그 아래로의 여행, 그리고 그리스도의 변모하심과 산 아래에서의 그 애처로운 장면 사이에 있었을 것임에 분명한 시간적 여지를 남겨 둡니다.
만약 하나님 당신께서 그 산 위에서의 사건이 어둠 후에 일어났어야 되도록 계획하셨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 상황은 그 이야기의 극적 효과를 더욱 증진시킵니다. 왜냐하면 그것으로 우리는 성탄의 전야를 회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대낮보다도 더욱 아름다운” 그 밤 말입니다. 그 날 밤 어둠이 베들레헴의 들판에 내려덮어 있을 때, 천사들이 내려와 하늘의 빛으로 그 어둠을 흩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이런 차이점이 있습니다. 베들레헴의 밤에서는 천사들이 하늘의 빛을 가져온 반면, 이 경우에는 하늘빛을 두르고 그것을 지상에 가지고 와 환하게 비추고 있는 자들은 사람들입니다. 천사들도 대단하지만 사람들이라면 더욱 엄청난 일입니다. 게다가 성탄절의 천사들은 그리스도, 그 당시 어린아기였던 그리스도에 대해서(about) 말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두 사람, 곧 구속받은 인류가 천사들보다 더 가까이 하나님 곁에 있듯이 하나님의 현존 앞에 매일같이 서 있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단순히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들과 함께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닙니다. 성인입니다. 그 위대한 일을 행하실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늘이 위력을 펼쳐 이 장면에 비상한 특징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노라면 얼굴이 붉어집니다. 하늘이 이 장면에 최적으로 어울리는 반투명의 광선을 비추는 분위기를 창조하는데 있어서 그 모든 것을 남김없이 발휘하고 있는데, 언제나 그렇듯이, 사람들은 그 완전한 아름다움에 너무나 흉한 것을 보태고 있는 것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사탄은 충분히 나빴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변화산 위에서의 사탄은 더욱 나쁩니다. 내일 죄를 짓는 것은 언제나 오늘 죄를 짓는 것보다 더 나쁩니다. 왜냐하면 매일은 더욱 풍성한 은혜를 제공해 주고 있어서, 그러므로, 범죄한다는 것은 더욱 풍성한 그 은혜를 외곡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 자세히 살펴볼 것이 없겠습니다. 너무나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두 개의 발광체, 나중에 모세와 엘리야로 알려진 존재들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하셨던 그 산 위에 나타났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빛의 광휘로 인자를 둘러쌌습니다. 여전히 그들의 때였습니다. 어둠이 여전히 지면에 짙어지고 모든 곳에서 예수를 둘러싸고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평범한 사람들 - 특권이 전혀 없는 사람들 - 은 그들의 영광을 인자와 나눠가지게 됩니다. 자신들의 빛으로 그 분을 빛나게 하는 것입니다.
세 제자들,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은 넘치는 하늘 빛에 놀라 갑자기 깨어났습니다. 그들의 눈이 잠이 와서 거의 감겨 있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눈을 비비면서 그만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오랫토록 참을 수 없었습니다. “랍비여” 그가 말합니다.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너무나도 행복하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주와 주님의 객들을 위해서 그렇게 합시다. 이것이 그가 한 말의 뜻입니다. “초막”이란 임시적인 거처를 말합니다. 그 자리에서 구할 수 있는 나뭇가지나 풀 같은 것을 갖고 임시적으로 만든 것 말입니다.
베드로의 이 열망에 대해서 실제보다 과장해서 말하는 것을 잘못된 일일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아주 대담하게 베드로의 즉흥적인 발언에 대해서 추측합니다. 어떤 이들은 시몬이 그렇게 말함으로써 모세와 엘리야로 대표되는 구약성경과 그리스도로 대변되는 신약성경을 결합시키고 있다고 합니다. 법적으로 적합한 사건의 개입도 없는 채로 말입니다. 다른 이들은 베드로가 세상으로부터의 도피를 청원하고 있다고 가정합니다. 그 해석은, 충분히 의미심장하지만, 그가 제안한 초막을 수도원주의와 수도원제도의 전형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이와 비슷한 다른 많은 제안들이 있습니다. 실제의 기록이 보장해주지 못하는 것들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추측들에 빠져들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베드로의 발언이, 그 순간에 터져나온 것이라고 해서, 의미심장하지 못하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그는 자신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도 못했습니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에 의미를 실으셨습니다. 이 눈에 보이는 기적의 장면으로 하나님께서 베드로로부터 그 안에 잠재되어 있는 것을 이끌어 내셨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역사를 조성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그리스도와 모세, 그리고 엘리야를 베드로의 동료들 가운데로 부르셨는데, 베드로의 말에 심오한 의미를 실으신 분도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비추셨던 그 빛 가운데서 그 말들을 상고하게 되면 우리는 금방 두 가지 사실에 주목하게 됩니다. 첫째는 베드로의 제안의 어리석음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천상의 방문자들을 위해서 임시적인 초막을 짓기를 바랬습니다. 하늘의 메신저들을 위해서 시시껄렁한 임시막사를 짓다니요! 거푸집 속에 유동성의 햇빛을 잡으려고 하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예, 베드로는 실제로 어떤 종류의 환영, 곧 하늘의 자녀들을 위한 환영식을 준비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마치 땅이 하늘을 맞이할 수나 있을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다르게 가르치셨던가요! 그 분께서 가르치셨던 것은 하늘의 환영식, 곧 하늘이 땅을 받아들이게 될 환영이었습니다. 그 분께서는 신자들에게 어느 날 구속받은 자들이 땅의 자녀들을 받아들이고 환영하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환영하되 베드로의 그 초라한 헛간으로가 아니라, 위에 있는 그 영원한 맨션들로 말입니다. 그러니, 이 제자의 제안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습니까!
어리석었습니다 - 하지만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의 말은 죄악된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그것을 죄악된 것이라고 하지는 않으셨지만, 베드로의 말은 앞서 받았던 그 책망을 한 번 더 받아 마땅했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말씀 말입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당연히, 잠시 우회해서, 시몬의 말이 큰 사랑을 나타내고 있음을 지적해야 하겠습니다. 봉사하려고 준비되어 있는 그를 주목하십시오. 그는 얼마나 비이기적입니까! 자기 자신과 다른 두 제자들의 초막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그가 신경쓰고 있는 것은 주님과 함께 있는 두 손님들입니다. 진정으로 그것은 정확하게 순수한 동기에서 자발적으로 솟구치는 것이어서, 자기자신을 아낌없이 주는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에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주어져야 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여러분도 눈치채시듯이, 자기가 나뭇가지와 풀들을 집어들기 시작하면 다른 이들도 즉각적으로 열심히 자신을 도와줄 것이라고 추측했습니다. 초막을 만듭시다, 고 그는 말합니다. 우리가 여기 있다는게 얼마나 행운입니까. 물론, 이것이야말로 자신의 스승을 섬기는 것을 즐거워하는 학생의 표현입니다.
지금까지 잠시 우회했습니다. 베드로의 제안이 죄악되었다는 사실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그 안에 죄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보았던 그 순전한 행복을 영구화하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열망으로 그는 그리스도와 그 방문자들이 논의하고 있는 그 위대한 주제에 대해 반대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엘리야와 모세는 그리스도 앞에 십자가를 놓고 있습니다. 그 분께서 죽음을 직면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가공할 만한 시간에 베드로는 이 현란한 면류관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이 명징스러운 아름다움, 빛의 현란함을 영구히 소유하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태양이여, 이 산 아래 정지해 있기를, 하고 그는 기도했을 것입니다. 너 달이여, 이 물결치는 영광의 광채 위에 영원토록 멈추어 있을지로다.
그리스도께서는, 천상의 빛과 생명이 넘치는 바로 그 분위기 속에서 자발적인 죽음과 지옥의 어둠을 선택하고 계시는 순간에, 육체와 피가 있는 그 사탄은 일어서서 그 분을 대항하여 말합니다: 랍비여, 이 빛과 생명의 시간을 연장하소서. 이 순간을 영원이 되게 하소서. 세상과 사람들을 잊어버립시다. 성전도 잊어버리고, 수천수만의 사람들도, 이스라엘도, 그 깊고 어두운 인간 고통의 골짜기도 모두 잊어버립시다. 오소서, 지금의 축복된 순간을 완성시키소서. 이 지나가는 순간을 붙잡으셔서, 아, 잠시 멈추어 서라고 말하십시오. 당신은 그렇도록 아름다우십니다.
베드로의 열망이 그리스도의 인간의 영에 대단히 실제적인 유혹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우리들이 냉정하기 때문입니다. 그 분의 완전한 인간성은 빛을 사랑하였고, 충만한 생명을 갈망하였습니다. 그의 혼도 역시 만일 그 공적인 소명과 무관하였더라면 이 천상적인 환상을 영원토록 붙잡고 싶어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말은 하나의 사탄, 유혹자의 말의 특징을 너무나도 닮고 있었습니다. 만일 구주께서 당신의 생각 속에서조차 겟세마네동산과 골고다에서 당신에게 쏟아부으시는 고통의 산사태로부터 도망가기를 원하셨다면, 그 분께서는 당신의 직문에 불충성하셨음이 드러났을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당신의 복종의 과정에서 하나의 잘못을 범한 것이 되었을 것이며, 우리들 모두 그 분과 함께 멸망당하였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이후에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하지만 십자가 이전에 영광 받기를 원하셨을 수 있는 그리스도라면 그것은 사탄에게 정복당한 그리스도였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산 위에서 대표되었던 그 대조를 어떻게 말해야 하는 것일까요? 여기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교회에 둘러 세워 있습니다. 전투적인 교회와 승리적인 교회 모두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둘러 서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전투적 교회를, 모세와 엘리야는 승리적인 교회를 대표합니다. 승리적 교회는 영원한 원리로부터 행동합니다. 전투적인 교회는 순간적인 변덕을 따라 행동합니다. 전자는 인자 앞에 하나님의 영원한 공의의 확정된 결정사항을 제시합니다. 후자는 비참하고 잘못인도된 인간의 심정의 순간적인 욕망을 제시합니다. 하늘은 서두르려고 할 것입니다. 모든 것이 완성되기 전에 하늘이 얼마나 애쓰는지를 보십시오. 예수께서 기다리시며 기도하시는 장소에 그 최상의 대표자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여유만만합니다. 우주 가운데서 영적인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당신의 죽음으로 몰아가는데 베드로는 기도로 연기를 유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영적인 실재에 대해서 민감한 사람이라면 지금이야 말로 하나의 결정적인 순간임을 인정할 것입니다. 시간과 영원 사이에 갈등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베드로의 어리석은 상상을 이렇게 진지하게 고려하는 그 목적이 무엇인가고 질문한다면, 반대질문을 던짐으로 답변을 할 수 있겠습니다: 왜 성령께서는 이 사건을 우리들을 위해 성경에 기록하여 남겼겠습니까? 분명히 이 기록은 어떤 아마추어들에게 심리학적 성격묘사를 위한 점핑보드판을 제공하기 위해서 성경 속에 남겨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그리스도의 빛에서 그리고 성경의 나머지 빛에서 그것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록된 것입니다.
로마의 바티칸에 가면 보게 되는 라파엘의 그림들 중 하나를 생각해 봅시다. 그 그림은 빛과 어둠의 대조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짙은 그림자의 어두운 배경 속에 미친 젊은이 한 명이 있습니다. 절망적인 아빠의 모습도 보입니다. 한 무리의 제자들이 절망적으로 웅크리고들 있슴니다. 그런데 이 무리들 중 한 명이 위를 향하여 손가락을 가르키고 있습니다. 빛이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산 위 높은 곳에 선생께서 빛 가운데서 서 계십니다. 그렇게 라파엘은 빛과 어둠을 나눴습니다. 빛은 위에 있고 어둠은 아래에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복음서에서 이 사건을 다르게 묘사하셨습니다. 그 분의 도판에는 빛과 어둠이 산 위 정상에 동시에 존재합니다. 하나님편, 하늘편, 그리스도편에는 빛이 있습니다. 하지만, 시몬 베드로의 편 그리고 전투적 교회의 편에는 모두 어둡습니다. 우리들이 볼 수 있도록 배워야 할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오직 양편을 동시에 보는 것으로 말미암아 그 도판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어떻게 필요하신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구원에 대항하고 있는 것을 현실적으로 깨닫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전형적인 사탄들(satans)과 같아서 잔인하게도 하나님의 결정적인 계획에 대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변화산의 밤은 성탄절의 밤을 그 의미상으로도 뛰어넘습니다. 하지만 그 뛰어남을 상고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 부끄러워 해야 합니다. 성탄절의 밤과 비교해서 이 밤의 독특성은, 이제 그리스도께서 인류, 당신의 교회, 곧 당신의 신부와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애처롭게도 분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하늘에 있는 승리적인 교회의 열망은 하늘의 것과 일치합니다. 그래서 예수에게 “예루살렘에서 그가 성취해야 할 죽음”에 대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투적인 교회는 시몬으로 대표되는 바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의 광대함 그 한 가운데 공명정대하게 심겨져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중요성에 대해서 전혀 무감각한 것입니다. 아니, 무감각한 정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의 적절한 말을 시도합니다. 그래서 그 뱉어놓은 말을 보면 어리석음과 죄악으로 가득차 있는 것입니다. 서글픈 다툼 속에 있는 일들이 그렇습니다. 전투적인 교회가 승리적인 교회가 다툽니다. 육신이 성령에 대해서 다툽니다. 인간적인 천진난만함이 하늘의 법에 대항해서 다투고 있는 것입니다.
그 혼란에 통일을 가져올 수 있는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그 분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에서 개인적으로 배워야 할 것을 찾아내야 합니다. 만약 우리 안에 시몬 베드로가 가졌던 좋은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들이 훈련받아야 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와 더불어 함께 가지고 있는 악한 것은 청산해 버려야 합니다. 베드로에게 좋은 점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추가적으로 말씀드려 할 때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행위로부터 유익을 취하기를 바랍니다. 본문은 한 단어를 독특하게 사용함으로 인하여 유익한 도움을 우리가 받을 수 있게 합니다. 베드로가 자기의 제안을 제시하면서, “대답하여 고하되”(answered and said)라고 합니다. 무엇에 대해서 대답한 것일까요? 그는 아무런 질문을 받은 것이 없습니다. 사실, 그가 말하였을 땐 눈을 비비면서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은 명백한 함축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베드로는 산 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사건들 모두가 바로 자기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관계된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단순한 진리입니다. 모든 구속적 사건, 하늘로부터의 모든 메시지, 은혜의 모든 표명, 심판의 모든 선언, 간단히 말하자면, 계시되는 모든 것마다 우리들에게 개인적으로 관계가 됩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시는 순간에 우리들도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는 일에 섬길 수 있었습니다. 사근들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우리는 대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적절한 반응을 보여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과 열기를 어떻게 지성적인 열정으로 바꿀 수 있을까요? 아마도 우리는 본문의 사건이 결론적으로 말하는 것을 따라서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마지막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읨 말을 들으라! 그의 말을 들으라!
정확하게 그것이 바로 이 시점까지 베드로가 범했던 잘못이었습니다. 충분히 듣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듣는 일에 실패하게 된다면,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도적으로 집중하지 못하게 된다면, 우리의 사랑과 열기는 서글프게도 비이성적인 채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그 지순한 거룩하심을 계속 오염시키게 될 것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설교되는 말씀에 주목하는 힘든 훈련을 받지도 않은 채로 어떤 가치있는 일을 예언할 수 있었다면, 베드로는 이 순간에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자격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사랑도 했습니다. 반응도 순발력이 있었습니다. 사태가 그럴 때마다 즉각적으로 대답하는 기질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것은 참 놀라운 일입니다만, 비범한 통찰력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시력을 밝혀 주셨던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여러분들은 이 한 가지 점을 놓쳐서는 안될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지금 산상에서 예수와 함께 있는 자들이 누구인지 베드로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당장에 그들이 누구인지를 알아채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본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하나는 모세였고, 다른 하나는 엘리야였습니다. 그들 중 누구도 이전에 보았던 이들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확신했습니다. 그의 이런 확신은 바로 하나님께서 하나의 육감에 의해서 그의 시력을 분명하게 해주고 종말론적 순간에만 사람들에게 허락되는 특권을 그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그 순간에 영원이 시간을 통해서 돌진해 들어오는 것입니다. 분명히 이것은 특별한 특권입니다. 그것을 베드로는 누구보다도 더욱 향유하였던 것입니다. 예, 만일 어떤 사람이 진리에 대해서 통찰력을 순간적으로 가질 수 있고, 설교되는 말씀에 주목하지 않고도 그럴 수가 있다면, 이 순간 바로 베드로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의 결과는? 그 자격들을 갖고선 이룬 모든 것은, 결국 어리석음과 죄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머리에 모자를 벗고 구름에서부터 들리는 음성에 떨어야 합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으라”.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그렇게 설교단을 개요적으로 오염시켰던 그 사탄이 이제 부끄러움을 당합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그 수난과 죽으심의 불가피성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에 대해서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늘이 서두르고 있는 일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음성이 베드로와 전투적인 교회의 마음 속에 있는 짙은 혼동의 구름 사이로 천둥을 치면서 들리는 것입니다: 그의 말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결코 그 설교단을 버리지 마십시오. 그것은 교훈합니다. 결코 예수님께서 앉으셔서 당신의 죽으심의 필연성을 설명하시는 그 예언적 의자를 떠나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육신이 되신 말씀을 성경의 말씀과 결합시키십니다. 어느 것에서도 서로 분리되지 않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종교적인 열광주의자들이시여, 여러분은 듣고 계시는 것입니까? 신비주의적 영혼들이여, 충동적인 본성을 지닌 분들이여, 천진난만한 어린이들이시여, 여러분은 듣고 계십니까? 여러분, 순발력을 숭배하는 이들이여, 당신 자신의 성운 속에서 더듬거리면서 무언가를 찾고 있는 자들이여, 여러분은 구름 속에서 들리는 음성을 듣습니까? 그의 음성을 들으세요! 베드로가 그 하늘로부터 파견된 손님들을 순간적으로 파악했던, 그 육감적인 통찰력, 그 직접적인 지식의 습득, 아마도 이런 것을 여러분은 원해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그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 말씀은 베드로의 통찰보다도 더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그의 순발력있는 발언을 질투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여러분은 하늘의 진실성을 수용하는데 있어서 가장 가능성이 있는 두려움과 경이로움의 그런 분위기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구름 사이로부터 들리는 음성에 집중하십시오. 여러분은 그 말씀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만약 이것이 그 사건의 평범한 가르침이라면, 우리는 이것에 만족해야 합니다. 우리는 설교단을 십자가 옆에 세울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우리는 훈련받지 못한 충동과 어리석은 천진난만성을 제어하여 예수님의 거룩한 현존 앞에서 해서는 안될 그런 말을 하는 일이 없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늘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우리를 영접하여 그 영원한 성막으로 들어 가기 전에, 우리는 순발적인 표현은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어리석음과 죄가 전투적 교회로부터 제거되어지는 그 날은 더 좋은 날이 될 것입니다.
그 날이 오게 되면, 충동을 자발적으로 따르게 되는 것이 우리에게 다시금 허용될 것입니다. 그때에는 우리들 심령에 율법이 새겨질 것입니다. 그러면, 낙원을 즐거움의 장소가 되게 하였던 그 충동적 행위의 권리가 우리들에게 다시금 주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말입니다. 우리가 파악하게 될 어떤 형태의 순간도 거룩한 일들의 본질을 표현할 것입니다. 그 스승의 모든 가르침을 듣고 들었던 베드로는 그 생명의 그리스도에 의해서 모세와 엘리야를 완전히 닮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 초막을 세우되 자기가 원하는 만큼 재빨리 세우게 될 것입니다. 그 영역에서 모든 초막마다 그 형태를 전시할 것이며, 위대한 한 아버지의 집의 지배적인 색조를 따라서 특징지워질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거하시는 온 시온산과 모든 집회 위에 낮이면 구름과 연기, 밤이면 화염의 빛을 만드시고 그 모든 영광 위에 덮개를 두시며 또 초막이 있어서 낮에는 더위를 피하는 그늘을 지으며 또 풍우를 피하여 숨는 곳이 되리라’(이사야4:5,6).
우리들이 베드로에게만, 아니 그리스도에게만 우리 눈을 고정시키면, 성경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통해서 구체화시키고자 하시는 중요성을 보지 못할 것을 알면서, 그 그림을 떠나고자 합니다. 우리가 렘브란트의 그림들 중의 하나를 보면서 그에게 감탄하는 것처럼, 성령님에 대해서도 감탄해야 합니다.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면, 빛과 어두움의 대조를 한 눈에 보게 되는데, 그 예술가의 정신을 우리들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히십시오. 시몬의 어리석음과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로 옆에 두고 동시에 묘사하고 계시는 성령님 말입니다. 그는, 죄인의 어리석음과 동시에 우리의 위대한 선지자의 지혜를 묘사하십니다. 그 저주를 불러 일으키는 천진난만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결정적인 도모하심의 불가피한 진전을 묘사하십니다. 그 도모하심으로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님을 통해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첫댓글 오늘 한 마디라도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되고, 듣는다고 하더라도 순종하지 않는 날이라면, 우리의 오늘 하루는 영원의 관점에서 진정 아무 의미가 없는 날이 될 것입니다. 때가 악합니다. 때를 사십시오.페이스북에 들어와서 글을 올리는 이 시간이 영원에 이어지게 합시다.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이 페북에 올려지는 모든 글들이 지옥의 불쏘시개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인생은 너무 짧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