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화
- 사랑은 자기희생 -
친애하는 봄님에게
- 조영진
그대
동장군의 위세를 떨쳐내고
어김없이 돌아온 그대
참으로 애쓰셨습니다
길고 지루한 겨울이 물러가고
산들거리는 봄바람에
한껏 움츠렸던 영혼이 기지개를 펴봅니다
매서운 겨울바람에 새끼와 생이별한
어미 소의 절규하는 울음소리가
몇 날 이어지고
한숨짓던 농부의 얼굴이 애잔해서
유난히 겨울이 길었답니다
나는 오늘도
따사로운 햇빛 샤워하며
그대를 마중 나가고 있답니다
친애하는 봄님
계절의 여왕답게 당당하고 화려하게
성큼성큼 오시기를
* 조영진: 산청에 귀촌하여 현재 필봉 문학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지리산으로 들어온 지 일주일 만에 나는 목발을 벗어 던졌다. 그뿐만 아니라, 육체에 못지않게 정신적으로 안정을 찾아갔다. 나는 자연의 치유를 믿었으며 실제로 모든 면에서 치유가 되었다. 그 와중에 유희의 문자와 전화는 내게 큰 힘이 되었다. 그녀는 매일 밤 자신이 수집한 격언과 아름다운 시 그리고 자신의 심경을 담은 짧은 글을 보내주었으며, 간간이 사랑이 듬뿍 담긴 이모티콘도 보내주었다. 나는 이 정도만으로도 기뻤고 만족했다.
나는 외삼촌을 도와 낮에는 펜션 주위의 풀을 뽑는 등 육체적인 일을 했고, 밤에는 수기로 작업 된 고객 관리 장부와 매출 장부를 전산으로 바꾸는 작업을 했다. 외삼촌은 이런 나의 행동에 꽤 고무되어 있었다. 언젠가 자신이 죽더라도 이 직을 이어갈 수 있는 혈육이 있다는 것에 너무 기쁜 나머지, 한날 술을 마시다가 운 적도 있었다.
유희는 내가 지리산 펜션으로 들어온 지 이주가 채 되지 않은 어느 토요일 오후에 홀로 버스를 타고 왔다. 처음 외삼촌 댁을 방문할 때 잠시 차를 세웠던 원지, 라는 곳이었다. 그녀가 어제 이곳으로 오겠다는 문자가 왔을 때, 사실 나는 마음이 두근거려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매일 전화통화와 문자를 통해 그녀의 근황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녀가 보고 싶었다.
늦봄이었지만 이곳은 초여름 같은 날씨였다. 외삼촌 차를 운전하여 원지에 도착하니 오후 3시가 막 넘어가고 있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그녀가 올 거였다. 그전에 나는 외삼촌이 좋아하는 정종 몇 병과 우리가 밤에 먹을 돼지고기 그리고 소주와 맥주를 사두었다.
시외버스터미널은 토요일이라 약간 복잡했다. 여러 대의 버스가 지리산 방면으로 들어가기 위해 들어오고 있었고, 반대편인 진주 방면으로 나가는 차들도 많았다. 마침내 지리산행 버스가 먼지를 내며 들어왔다. 그녀는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한결 아름다워진 모습에 나는 벌써 가슴이 뛰었다. 그녀는 정류소 앞에 서 있는 날 발견하자 어린아이처럼 달려왔다. 그대까지만 해도 나는 그녀가 설마, 이런 사람 많은 곳에서 내게 안기리라는 상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 그녀는 나의 예상을 뛰어넘어 내게 꼭 안기더니 심지어 내 뺨에 입을 맞추었다. 차를 기다리던 시골 노인들이 이 광경을 보더니 혀를 찼다.
“그만해. 사람들 본단 말이야.”
“어때요? 여긴 우리를 아는 사람도 없을 건데. 그동안 잘 있었어요?”
그녀는 무척 밝아져 있었다.
“그럼, 그대 생각만 빼고 온종일 일하느라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어. 와주어서 정말 고마워.”
그러자 그녀는 잠시 눈을 흘겼다.
“내 생각을 온종일하고, 일은 나머지 시간에 하는 게 맞죠.”
“그런가?”
나는 그녀의 농담에 머릿속이 맑아졌다.
“어서 가자. 외삼촌이 불 피워두고 기다리고 있어.”
“잠시만요. 급히 오느라 외삼촌께 드릴 선물도 못 사 왔어요.”
“아니야. 이미 내가 외삼촌이 좋아하는 정종을 샀는걸.”
“그래도 그건 아녜요. 어디 보자.”
유희의 눈이 시외버스 정류소 앞을 스치더니 무엇인가 발견한 모양이었다.
“저거예요.”
나는 그녀가 뭘 보고 그러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는데, 그녀는 날 아랑곳하지 않고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곳은 순대와 족발을 파는 간이 포장마차였다. 그녀는 무척 만족하는 눈치였다.
“산골엔 이런 건 없잖아요? 그죠?”
나는 그녀가 외삼촌이 순대와 족발을 좋아하는지 어떻게 알았나 싶었다.
“좋아! 이제 출발하자구.”
날씨는 약간 더웠으나 바람은 시원했고 풍경은 그저 그만이었다. 유희는 달리는 차 창을 바라보며 연방, 신록으로 물든 자연에 감탄을 쏟아냈다.
마침내 펜션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번엔 외삼촌이 의외로 유희를 반겼다. 그만큼 그녀의 표정이나 어른에 대한 예의, 발랄함이 그의 심경을 사로잡은 모양이었다. 그는 유희를 마치 조카며느리가 되는 양, 그녀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주는 등 살갑게 굴었다. 유희 역시 오고 싶은 곳에 오니 살 맛 나는 모양이었다. 마당 구석을 돌아다니며 그새 핀 꽃이 있는지 살피는가 하면, 펜션 뒤쪽까지 누비며 외삼촌이 가꾼 텃밭을 구경했다. 그때마다 외삼촌은 그녀의 옆에서 세세하게 이건 뭐며, 저건 뭐며, 하며 설명해주었다.
우리는 그때처럼 잘 피운 불 위에 돼지고기를 굽고 소주를 마시면서 통기타를 치며 즐겁게 놀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외삼촌은 유희가 가져온 순대와 족발에 환장하여 돼지고기를 한 점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인지 여느 때보다 외삼촌이 술에 많이 취하였다.
“오늘 너희들 보니 참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생각했다. 내 조카가 유희가 오더니 표정이 바뀌었어. 그동안 말은 안 했지만, 내가 이 녀석 걱정을 많이 했거든. 결혼생활 내내 자신보다 많이 배우고 경제력 있는 처 때문에 힘들고, 주말도 없이 돈 벌겠다고 직장에서 무수히 고생한 내 조카, 최 림. 제 꿈은 그런 게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꾸역꾸역 일상을 이어가는 조카 때문에 나도 사실은 마음이 언짢았어. 그런데 가만히 보니 녀석이 유희 너를 바라보는 모습이 참 애틋하고 아름다워. 이제야 제대로 된 짝을 만난 것 같은 느낌이 든단 말이야. 어쨌든 유희가 이런 누추한 곳에 와주어 너무 고맙구나.”
외삼촌은 술과 분위기에 젖어 나와 유희의 관계에 관해 그만 도를 넘고 있었다. 나는 이 상황이 너무 민망해서 고개를 들 수 없었는데 그녀는 달랐다.
“그렇게 봐주시니 너무 고마워요. 전 외삼촌이 우리 관계를 이상히 여기시진 않나, 하고 내심 걱정했거든요. 예쁘게 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도 이이랑 외삼촌께 더 잘할게요. 그리고 여긴 누추한 곳이 아니에요. 저는 태어나서 이렇게 아름다운 곳은 처음이거든요. 여기 이렇게 앉아있으니 세상의 모든 근심과 걱정이 사라지듯 해요. 제가 더 고맙죠. 좋은 분들과 함께 있으니.”
나는 그녀의 말 중, 나에 대한 호칭이 아저씨에서 이이라고 지칭한 것에 대해 기분이 묘했다. 보통 그런 호칭은 결혼한 부부 사이에서나 나오는 말인데, 그녀가 이 부분을 정확히 알고 그러는지, 아니면 실수로 그러는지 잠시 헷갈렸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외삼촌은 정확히 나의 결혼생활을 파악하고 있었다.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은, 늘 지루한 일상을 사는 나의 삶을, 그는 같은 남자로서 알고 있었다는 점이 정말 고맙게 느껴졌다.
“그래? 그러면 이 외삼촌과 유희만 둘이 건배할까?”
그 말에 유희는 네, 하며 잔을 부딪치며 즐거워했다.
“내가 오늘처럼 즐거운 날이 없다. 평생을 혼자 살면서 나름대로 잘 살아왔다고 자부하지만, 어떤 땐 이루어 놓은 것 하나 없고, 이 펜션을 넘길 혈육 하나 없어 내심 걱정했건만. 좋아. 오늘 내 약속하마. 내가 죽으면 이 펜션을 내 조카, 최 림에게 넘긴다. 너희 둘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유희도 이곳에서 조카를 도와 함께 운영하면 좋겠어.”
기대는 하고 있었지만, 나는 외삼촌의 결정에 의안이 벙벙했다. 그런데 정작 기뻐하는 사람은 그녀였다.
“정말이에요? 그럼 저도 여기서 살 수 있는가요? 아저씨, 아니 최 림 씨! 말 좀 해봐요. 외삼촌이 이 펜션을 우리에게 넘긴대요. 안 기쁜가요?”
“뭐? 최 림 씨? 이 녀석이.”
그러자 그녀는 탁자 밑에 있는 자신의 발로 내 발을 찼다.
“뭐 어때요? 호칭이 그리 중요한가? 기쁘죠? 지금 말을 못 해서 그렇지 날아갈 것 같죠?”
그제야 나는 그녀 역시 술에 취한 것을 알았다. 그녀는 과장하여 손을 흔들고 외삼촌에게 술을 권하는 등 평소답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나는 그런 그녀가 한편으로 우습기도 하고, 한편으론 귀엽게 생각되었다.
“감사합니다. 삼촌.”
나는 외삼촌의 손을 꼭 잡았다.
“그래. 직장 생활하기 싫으면 언제든 이곳으로 와. 나도 네 덕분에 말년은 좀 편하게 지내보자. 여기가 비록 깊은 산골짜기에 있어도 여름 한 철 장사로 일 년은 먹고살 수 있어. 그러면 여름을 제외하고 너는 좋아하는 시를 쓰고, 음악을 하는 거야. 그게 원래 네 꿈이잖니? 내 꿈이기도 했지만.”
“그럼 저는 이곳에서 뭘 할까요?”
그녀가 예상외로 우리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런 그녀가 외삼촌은 기특한지 지긋한 표정으로 일러주었다.
“유희는 이곳 마당과 펜션 뒤쪽에 지리산에서 가장 예쁜 정원을 만들면 되겠네. 봄이면 산수유와 매화가 피어나고 가을엔 국화와 맨드라미가 놀고 있는 지리산 정원! 어때? 생각만 해도 아름답지 않아?”
그러자 그녀의 표정은 세상에서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은 얼굴로 변했다. 그녀는 상상만 해도 즐거운 모양이었다.
“그런데 외삼촌! 요새 건강이 안 좋으십니까?”
“나만 그런가? 내 또래는 거의 다 그렇지. 젊은 시절에 너무 못 먹어서 그래. 그땐 누구나 다 힘들었잖아. 그때는 음악 한답시고 배곯이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 한 거야. 게다가 술을 먹어도 값싼 술만 먹었지. 인제 와서 후회한들 어쩌겠나? 난 그냥, 어느 날 모 시에 잠들 듯 편안하게 저세상으로 가면 좋겠어. 이게 내 마지막 소원이자 꿈이지.”
외삼촌은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새 캄캄한 밤이 왔고 초여름의 밤은 깊어갔다. 외삼촌은 피곤하여 먼저 들어갔고 마당엔 그녀와 나, 둘만 남았다. 그녀도 꽤 취한 것 같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사무실은 어때? 안 바빠?”
“많이 힘들죠. 어쩌겠어요? 그만두면 백수인데. 그래도 오늘은 다행인가싶네요. 그만둬도 올 곳이 있으니까.”
그녀의 말은 진담인지 농담인지 분간이 안 되었다.
“그 남자는 지난 주말에 만났겠네.”
나는 은근슬쩍 그녀의 마음을 떠보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말이 나왔다.
“누구? 그때 그 사람? 아뇨. 지난 주말에 바빠서 서울에 못 갔어요.”
그러고 보니 기억이 났다. 그녀의 문자에다 주말인데도 바빠서 한수와 함께 지방 출장을 간다고 하소연한 게 떠올랐다. 나는 이런 이야기도 그녀와 태연히 할 수 있다는 나 자신에 놀랐다.
“질투하는 건 아니죠?”
“내가?”
“네. 그 사람은 나와 얽힌 사람이니 아저씬, 신경 쓰지 말아요. 우리 그러기로 했잖아요. 우리는 우리에게만 집중하기로 해요.”
그녀의 말에 수긍하면서도 나는 마음이 불안했다. 아까의 행복한 기분은 온데간데없고 또 마음이 흔들리는 건 왜일까.
“나도 내 마음을 잘 몰라.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날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그 말이 무슨 의미인 줄은 확실히 모르겠지만 그녀 또한 나와 마찬가지로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안아줄까?”
“네.”
그녀는 가만히 자신의 어깨를 내 품속으로 구겨 넣었다. 그렇게 행복했던 지리산의 초여름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