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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월 2일 주일메시지(잠언 제 12 강)_아산UBF
자기 마음을 제어하는 사람
말씀 / 잠언 25~26장
요절 / 잠언 25:28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25장부터는 솔로몬의 잠언을 히스기야의 신하들이 편집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히스기야왕은 아하스 시대의 타락을 청산하기 원하였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 나라다운 공평과 정의의 나라로 세우기 원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의 나라를 세우는데 있어서 먼저 왕과 백성이 마음을 제어하여야 함을 핵심 주제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제어하는 것으로부터 언어생활의 열매 맺고 성숙한 인격의 열매가 나올 수 있습니다. 사회를 개혁하고 나라를 새로 세우는데 있어서 거창한 국가개조, 원대한 목표치를 제시하기보다 개인의 마음의 절제를 제시한 것은 올바른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마음을 제어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 하늘의 높음과 땅의 깊음 같이 왕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자연의 원리, 사건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숨기셨습니다. 지도자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연구하고 찾아내는 것이 본분입니다. 영적 지도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자신의 본분을 다하고자 부지런히 하나님을 찾고 연구하기를 지속하여야 합니다. 자신의 우월함을 드러내는 방편으로 이용하려 하지 말고 순전하게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지도자가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연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하늘 문을 열어 주십니다. 땅에서 이익에 눈 멀어 집착하고 사람들 속에서 자랑하고 싶어 하며 사람 앞에 사는 사람은 하늘의 높음과 땅의 깊음 같은 지혜와 통찰력을 갖기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목자로 부르심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며 살 때, 먹고 사는 문제나 걱정하고 돈 밝히고 사람에게 자랑하려는 인생과는 차원이 다른 위대한 인생을 살게 해주십니다.
4,5절을 보십시오. “은에서 찌꺼기를 제하라 그리하면 장색의 쓸 만한 그릇이 나올 것이요 왕 앞에서 악한 자를 제거하라 그리하면 그의 왕위가 의로 말미암아 견고히 서리라” 지도자 주위에 위선자가 있게 마련입니다. 위선자는 능력 없는데 있는 척, 충성하지 않는데 충성하는 척 합니다. 자기유익 구하면서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는 척 합니다. 지도자는 이런 사람을 구별해야 합니다. 자기 영광 구하는 리더는 이런 사람에게 속아 넘어갑니다. 자기에 집착하는 리더는 이런 사람에게 속습니다. 그러면 뛰어난 인재, 충성하는 사람이 떠나가게 합니다.
6,7절을 보십시오. 리더가 식별해야 할 사람은 자기를 높이려는 사람입니다. 본인 능력, 충성도에 비하여 분에 넘치게 사람들 앞에 드러나 보이기 원하고 사람에게 인정받기 원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이 인정해 주지 않으면 일 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이 알아주지 않을 것 같은 일은 대충 해버립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에 인정받을 말을 하려고 합니다. 리더는 이런 사람을 식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편, 반대편에서 본다면, 사람들은 통상 리더 앞에서 자기를 높이고 싶어 합니다. 훌륭하다고 정평이 난 사람, 높은 사람을 만나면 그 앞에서 자기를 어필하고 싶습니다. 열매와 실적으로 인정받으려 하여야 합니다. 열매도 없고 실적도 없고 아직 때가 되지 않았는데 성급하게 자기를 높이려 하면 본질이 드러나 부끄러움 당할 뿐 아니라 신뢰 자체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이상 2~7절까지는 수직적인 관계, 상하 관계에서 어떤 말이 지혜있는 것인지 정리하였습니다.
8~10절을 보십시오. 수평적인 관계 이웃관계에서의 언어생활과 지혜를 강조합니다. 마음이 하나님께 있지 않고 자기에게 집착하는 사람은 쉽게 다투는 특징이 있습니다. 죄 짓는 사람의 특징은 쉽게 감정을 말로 드러냅니다. 다툼 있을 때, 갈등의 본질적인 것, 분쟁의 팩트만 다루어야 하는데 선을 넘습니다. 내가 옳고 상대방이 잘못이라는 것을 기어코 증명하려 하다가 갈등과 상관없는 상대방 인신공격까지 들어갑니다. 이렇게 하면 더 많은 것을 잃습니다. 상대방과 화해할 길이 영원히 막힙니다. 분별 있는 사람들에게 신뢰를 잃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 평소 머리에 떠오르는 말을 생각없이 내뱉고 보는 습관이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기가 인식하는 내용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겸손하게 다시 확인해보려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들 속에서 연단을 받은 사람은 그렇게 합니다. 사람들 속에서 연단 받은 것을 내면에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렇게 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슬기로운 자의 책망은 청종하는 귀에 금 고리와 정금 장식이니라” 나이가 들어서까지 경우에 맞는 말 할 줄 모르면 부끄러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 나이 들어서까지 그렇게 경우에 맞는 말 할 줄 모를까요? 젊어 미숙할 때 주위에서 해주는 지적이나 책망 받아들이기 거부한 사람입니다. 오랜 시간 많은 기회가 있었습니다. 시정하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본인이 듣기 거부하였습니다. 금 고리 같고 정금 같은 조언과 지적과 책망 듣기를 거부하거나 귀로만 듣고 마음으로 거부하기를 반복한 결과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 충성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충성은 무슨 일이든 하나님께서 보신다고 믿고 사는 사람에게 따르는 덕목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기 때문에 보든지 보지 않든지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믿고 하나님께 상급받기를 원하기 때문에 누가 인정해주든 그렇지 않든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충성은 곧 드러납니다. 중요한 일을 맡겼을 때 충성된 사람의 진가가 나타납니다. 평소 사람들 앞에서 살던 사람은 갑자기 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의식하고 선별적인 충성을 해오던 결과가 누적되어서 망하는 것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실천이 중요합니다. 실천하기 전, 실적이 나타나기 전에 자랑하는 것은 신뢰를 상실하는 일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진실함과 충성을 유지하며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시간을 두고 인내하면 까다롭고 인색한 사람도 인정하는 때가 옵니다. 충성하고도 알아주지 않고 진실한데도 인정해주지 않더라도 불평하거나 원망하는 말을 내뱉지 말아야 합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좋은 것, 만족한 것도 적당한 수준까지만 얻어야 합니다. 좋은 것도 너무 많으면 탈 날 수 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자기에게 집착하는 사람의 특징은 자기 말을 들어주는 사람, 자기를 받아주는 사람에게 너무 의지하고 찾아갑니다. 나를 받아주고 친절한 사람도 자기 생활이 있고 자기 생각이 있습니다. 자기에 집착하는 나르시스트는 그런 사정을 알지 못합니다. 결국 친절한 사람에게 마저 폐가 되고 짐이 되고 맙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여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면 결국 본인에게도 화가 있습니다. 한편, 환난 당할 때 다급하다고 해서 아무에게나 도움 청하는 것도 큰 고통 당할 수 있습니다. 다급하고 힘들어도 절대 마음을 열어 주면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더 큰 재앙을 불러올 사람은 다급하고 힘들어도 분별해야 합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자기중심인 사람은 곁에 있는 사람이 환난 중에 있는지 어려움 속에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알아도 배려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관계가 무너지게 합니다.
이상의 말씀은 관계를 잘 유지할 수 있는 지혜, 지혜로운 언어생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21,22절 말씀은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사람에 대하여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지혜입니다. 21, 22절을 보십시오.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 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 그리 하는 것은 핀 숯을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 네게 갚아 주시리라” 적대적인 사람, 원수관계가 된 사람이 어려움을 겪을 때, 오히려 호의를 베푸는 인격의 탁월함을 보여야 합니다. 택한 백성, 영적지도자가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 영광돌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격적 탁월함을 실천하는 사람에게 선물로 갚아 주십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옳고 그름을 떠나서 다른 사람의 허물과 죄를 함부로 드러내어 말하는 것은 후에 화가 되어 돌아옵니다. 타인의 죄를 드러내어 말할 때 그것이 꼭 필요한 것인지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24절을 보십시오. 가장 가까운 가족, 그중에서도 배우자와 관계가 좋아야 합니다.
25절을 보십시오. “먼 땅에서 오는 좋은 기별은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와 같으니라” 멀리 떨어져 있어도 소식전하는 일에 게으르지 말아야 합니다. 가까이 살면서도 소통하지 않는 사람이 많은 시대입니다. 자기에 집착하여 관계에 무관심하고 소홀한 것입니다.
26절을 보십시오. 끝까지 믿음으로 살고자 하여야 합니다. 주변에서도 끝까지 믿음으로 살도록 용기를 주는 배경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살고자 하다가 인간적인 방법을 쓰고자 하는 것은 주변과 후대에 악영향을 남기는 것입니다.
27절을 보십시오. “꿀을 많이 먹는 것이 좋지 못하고 자기의 영예를 구하는 것이 헛되니라” 꿀이 좋다고 많이 먹었더니 당뇨가 오더라는 경험을 이야기한 연예인이 얼마전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칭찬해주고 사람들이 환호해 준다고 해서 마냥 좋아하다가는 심각한 문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계속 사람의 환호를 얻고자 무리한 언행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요구를 맞춰주려는 실책을 저지르고 그것을 지속할 위험이 있습니다.
28절 말씀을 다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오늘 말씀의 요절입니다. 오늘 말씀은 25장에서 언어생활 때에 맞는 말에 대해서 많이 다루고 있고 26장에서는 좋은 영향력을 가지는 인격에 대한 지혜를 다룹니다. 말이든지 겉으로 드러나는 인격이든지 바탕이 되는 것은 마음입니다. 마음에 품은 것이 말로 나타나는 것이며 마음의 행로를 따라 사람의 됨됨이가 사람들 속에서 인격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마음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마음은 그대로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마음에 대해서는 통제하여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마음에 나서고 싶어하는 소원이 있으면 그대로 나섭니다. 마음에 타인에 대한 혐의가 떠오르고 미움이 떠오르면 자기의 판단이 맞다고 여깁니다. 내 마음이 편견에 빠지고 분노에 빠지고 집착에 빠지고 오해와 고집으로 흘러가도 내 마음은 옳고 타당하고 마땅하다고 간주합니다.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잠언 말씀은 마음을 제어할 대상이라고 정의합니다. 오늘 요절 말씀은 사람이 마음을 제어하여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나의 마음은 제어하여야 하는 대상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을 제어하지 못하여 때에 맞지 않는 말을 합니다. 마음을 제어하지 못하여 존경하는 분 앞에서 쓸데 없이 잘난 체 하여 신뢰를 까먹습니다. 마음을 제어하지 못하여 이웃이 화가 날 말을 내뱉는 바람에 다툼을 일으킵니다. 마음을 제어하지 못하여 해서는 안 될 타인의 인신공격의 말까지 확대합니다. 마음을 제어하지 못하여 누가 인정해주고 칭찬해주면 과도하게 매달리고 좋아합니다. 대적하고 대립하던 사람이 어려움을 겪으면 그 신나는 마음을 제어하지 못하여 떠들고 좋아하다가 영원히 원수 맺습니다. 마음은 통제하여야 할 대상입니다. 자기의 마음을 제어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의 마음은 자기가 제어하여야 합니다. 마음을 제어하여야 성벽을 두른 성읍과 같이 안전할 수 있습니다.
아하스 왕 시대의 문제의 근본은 우상숭배였습니다. 우상숭배는 이기심과 탐욕이 드러난 결과입니다. 바알은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 주는 우상입니다. 바알숭배는 물질생활의 풍요, 당장의 이기적인 소득을 바라는 욕심의 결정체입니다. 남유다가 바알숭배에 빠진 것은 이기심과 욕심을 지도자든 백성이든 모두가 제어하지 않는 사회가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학생회 청년들이 청년의 때에 예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진리를 절대적으로 사랑하도록 배우고 연단받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학사회 목자님들이 사람들 앞에 자기 영광 구하지 말도록 예민하게 날카롭게 지적받고 연단받는 것 역시 하나님 앞에서 큰 은혜입니다. 이기심, 탐욕을 통제하지 못하는 개인에게 얼마나 많은 문제가 나타나는지 모릅니다. 이기심과 탐심을 제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는 의미없는 괴로움, 파괴적인 공동체의 문제가 심각하게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6장 1절부터 12절까지는 어리석은 자의 특징을 열거하여 지혜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지혜가 없는데 영예를 얻는 것은 본인에게도 독이고 주변 사람에게도 괴로움입니다. 무능한 자가 직위가 높은 것, 그 사람이 부지런한 것을 그 공동체로 하여금 최악의 상태가 된 것이라 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미련한 자는 까닭없는 저주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참새가 떠들고 제비가 날아가 듯 효력 없는 것입니다. 어리석고 미련한 자의 저주에 대해서 마음 쓸 필요 없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말에게 채찍, 나귀에게 재갈이 필요하듯 미련한 자에게는 매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뜨거운 것을 맨손으로 집어 뜨거움을 경험하여야 뜨겁다고 그제서야 깨닫는 사람입니다. 부작용, 반발, 저항을 심각하게 겪어야만 다른 사람이 무엇에 상처받는지 뒤늦게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4절부터 12절은 미련한 자를 대하는 방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말에 동일하게 대답하지 말아야 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미련한 자가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지 않도록 그의 어리석음을 지적해주어야 합니다. 6,7절을 보십시오. 미련한 자에게 중요한 일을 맡기는 일은 자해행위와 같고 심각한 피해를 불러오는 일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미련한 자에게 영광을 주는 것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술 취한 자의 손에 든 가시나무가 얼마나 상처 줄 수 있는 위험입니까? 미련한 자가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며 간섭하고 나서고 방향을 주면 공동체 전체가 상처를 받고 위험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미련한 자에게 일을 맡기면 그 사람과 주변 사람 전체가 괴로움과 고통과 상처를 경험합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 미련한 자 중에서도 최악은 같은 문제를 계속 발생시키고 그로 인한 대가를 반복하여 경험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 행하여 문제를 일으켰으면 다른 사람에게는 그런 문제를 일으키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었다면 저기에 가서는 그 문제가 일어나지 않게 하여야 합니다. 미련함의 극강은 이 사람에게 한 잘못을 저 사람에게 행하고 저 사람에게 행한 잘못을 또 다른 사람에게 행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변화와 성장이 과도하게 느리거나 아예 없는 것은 미련함 중에서도 최악이라 할 수 있습니다.
13-16절은 게으른 자의 특징을 이야기 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게으른 사람은 리스크, 부담을 상존하는 것으로 말하며 그 핑계를 댑니다. 일하지 않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게으름의 또다른 양상은 늘 하던 대로만 하는 것입니다. 늘 하던 패턴대로의 일 외에 새로운 도전이나 부담이 추가되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여러 사람의 천안시 공무원들이 떠오릅니다. 충청남도 도청에도 그런 사람들을 여럿 경험해보았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이런 사람이 있겠나 싶습니다. 상을 차려놓아주어도 그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는 것도 귀찮다고 하는데, 천안 중앙고 졸업한 산업자원부 서기관이 자기 고향 천안에 대해서 천안시청 공무원들에 대해서 오늘 말씀과 같은 평가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게으르면서도 가능성이 완전히 없는 사람은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여기는 사람입니다. 변화를 거부하며 전래답습적으로만 사는 것을 고집하는데 그러면서도 내가 잘하고 있다 내가 최고다 여긴다면 그에게는 미래의 개선 가능성도 완전히 사라진 것입니다.
17절부터 28절은 언어생활과 관계에 대한 잠언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다른 사람의 다툼에 참견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남을 속이고는 농담이었다고 하는 것은 미친 사람이 화살을 소는 것과 같습니다. 20절에서 22절을 보십시오. 공동체 내에서 다툼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분쟁의 소지가 되는 말을 옮기는 사람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다른 공동체보다 훨씬 더 개인의 내밀한 문제를 서로 알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처럼 제자양성 하는 모임에서는 더욱 각 사람의 내적인 문제를 알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절대로 개인의 내밀한 문제를 불필요하게 전파하지 말아야 합니다.
23절부터 26절은 악한 마음을 감추고 아첨하는 말 하는 사람을 경계할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리더가 사람 기분 좋으라는 말 하는 사람의 마음 중심을 통찰하지 못하면 그 공동체에서 진실한 사람, 충성스러운 사람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아첨하는 말보다 진실한 삶이 뒷받침 되는 말을 하는 것도 중요하고, 진실성 없이 하는 아첨의 말을 식별해내는 것도 중요합니다. 분별력을 상실하게 하는 것은 욕심이며 자기중심임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27,28절을 보십시오. 다른 사람을 넘어 뜨리려고 하다가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지는 일이 생깁니다. 다른 사람을 해하려 거짓말 하는 것과 아첨하는 말은 결국 패망의 결과를 가져 옵니다.
26장에서는 주로 어리석음, 게으름 그리고 언어생활의 위험성을 다루었습니다. 어리석음, 게으름, 관계를 파괴하는 언어생활은 모두 겉으로 드러나는 그 사람의 인격입니다. 어리석음, 게으름, 관계를 파괴하는 잘못된 언행이 지금 나와 별로 관련성이 없거나 아직 나는 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되십니까?
80년대 대학생과 지금 대학생들을 한 번 비교해보겠습니다. 80년대 대학생들은 대부분 아버지와 대화가 없었습니다. 술을 많이 마시는 아버지, 가족들과 다정한 대화가 없는 아버지들이 많았습니다. 당시 어머니들은 초등학교 졸업이나 중학교 졸업한 분들이 많았습니다. 가족들끼리 근사한 레스토랑이나 맛있는 식당에서 가족 외식을 정기적으로 하였다는 친구들을 들어본 적 없습니다. 지금 대학생들은 어떠합니까? 부모님들은 대학졸업한 분들이 많습니다. 가족들과 외식도 자주 하고 일본이나 동남아 가족여행 정도는 다녀온 집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가족들과 유대감이 깊고 태어나면서부터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터넷을 사용하며 자랐습니다. 정보획득 능력이 좋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이런 대학생들을 대하는 방식은 어떠합니까? 선교하는 분들이 대학생들을 어떻게 상대합니까? 80년대 대학생들 대하는 것과 무엇이 달라졌는지 체크해보았습니까? 대학생들을 바라보는 관점은 어떠합니까? 대학생들과 인격적인 교류를 하는 내용과 방식은 어떠합니까?
저의 아버지는 제가 어릴 때는 말할 수 없이 저를 잘 데리고 놀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초등학교 취학하자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아주 엄격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고교에 들어가자 다시 엄격함은 바뀌어서 ‘이 사람’이라며 호칭이 바뀌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교수님도 박사학위를 취득하자 그분 아버지가 가족회의 열어서 이제 부터는 가정내에서도 ‘이 박사’라고 호칭 바꿀 것을 가족들에게 지시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시골에서 나고 자라신 옛날 저의 아버지도 유아기의 자식, 취학시기의 자식, 청소년이 된 자식을 다르게 대하였습니다. 그 어느 교수님 아버지도 박사학위를 따자 자식을 다르게 대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왜 80년대 중졸 부모에게서 가족 유대감 없고 정보에 취약한 청년들 대하던 방식 그대로 21세기 대졸 부모와 깊은 유대감 속에서 자라나고 정보획득에 탁월한 청년들을 변화없이 대하고 있는 것 일까요? 이것이야말로 변화를 거부하는 게으름 아닐까요? 이것이 혹시 세상은 변하고 사람도 변하였는데 나는 뛰어나다 나는 훌륭하다 나는 아무 문제가 없다 자부하며 바뀌기를 거부하는 어리석음 아닐까요?
신박한 프로그램, 획기적인 방법 찾기에 앞서서 먼저 나의 마음을 제어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말이 바뀌고 인격이 먼저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와 그 공로를 드러낼 수 있는 말과 인격이 나에게 자리하고 있어야 합니다. 유치한 자기연민, 자기집착, 통제 되지 않는 자기 자랑, 자기영광 추구, 집요한 명예욕, 정욕, 물질욕을 버리지 못하여 입만 열면 자기 유익 구하는 말 그리하여 신뢰받지도 존경받지도 못하는 인격을 노출하고 있으면 어떤 일도 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쓰실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을 받으시며 자기의 원을 버리고 제어하는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의 본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배우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사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주신 자기의 원 제어하는 것을 우리의 삶과 우리의 생활에 적용하는 것까지 말하는 것입니다.
제발 이 세대가 영적이지 못하다고 말하지 말기 바랍니다. 변하여야 하는 것은 나의 말 습관입니다. 성장하여야 하는 것은 나의 인격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배워서 내가 먼저 내가 통제하지 않고 방치해 둔 나의 마음의 이기적인 소원부터 자제할 힘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아산UBF에서는 자기 자랑의 마음을 통제하지 못하여 어리석은 말, 수준낮은 인격을 노출하는 일이 없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아산UBF에서는 명예욕, 정욕, 물질욕을 제어하지 못하여 나이 들도록 입의 열매가 없고 인격의 열매가 없는 사람이 없기를 기도합니다. 21세기의 새롭고 영특한 청년세대를 겸손하게 대하고 그들로부터 존경과 신뢰 받는 좋은 목자들이 배출되어 새로운 캠퍼스 제자양성역사, 새로운 세계선교의 길을 개척해 나가고 하나님께 모든 영광 돌리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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