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돈이다-마지막 회
뉴욕은 원래 네덜란드 땅이었다. 1572년 네덜란드인의 저항운동은 독립전쟁의 양상으로 발전했다. 제식훈련과 화승총이 만든 강력한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네덜란드는 신대륙 아메리카에 상선을 보냈다. 서인도회사는 회사라 부르지만, 사실은 군대였다. 유대인이 서인도회사와 손잡고 사탕수수를 본격 재배했다. 유럽으로 가는 설탕과 럼주의 원료인 당밀의 규모는 급격히 늘었다. 영국이 네덜란드 영토인 북아메리카 뉴암스텔담을 공격했다. 제주도에 표류한 ‘하멜’의 표류기는 사실은 체불임금 청구서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네덜란드의 거래였다. 그 후 네덜란드는 1855년까지 200년 동안 일본의 유일한 유럽 창구가 되었다. 조선에 13년 억류되었던 ‘하멜’은 일본으로 어선으로 탈출하고, 귀국하여 <1653년 바타비아발 나가사키행 스페르베르호의 불행한 항해일지>라는 보고서를 낸다. 이것이 하멜 표류기로 유럽에 조선의 도자기가 알려진다. 당시 백자를 생산할 기술은 중국과 조선뿐이었다. 이 도자기가 한국과 일본의 역사를 바꿨다. 조선의 도자기가 유럽에 가면 일본의 도자기는 손해를 볼 것이 자명하니, 일본은 조선의 도공을 우대하고 잘 대접하였다. 조선의 천민 대우를 받던 도공이 일본에서 귀국하지 않고 조선 도공은 자생치 못하여 역전된 것이다.
암스테르담은 17세기 유럽 최대의 자금시장이자 금융시장이었고, 국채 시장이면서 국제 외환시장이었다. 그러자 네덜란드인은 해외 무역보다 금융 투자를 더 선호되었다. 금융업을 선택하고 무역업을 포기한 대가는 침체와 쇠퇴였다. 기업과 부자가 무역에서 손을 떼고 부동산이나 금융업으로 옮겨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바다에서 육지로, 일터에서 놀이터로, 절약에서 과시 소비로, 기업가에서 지대수취인으로, 부르주아에서 귀족으로 전환이 이뤄졌다. 암스테르담 부르주아들은 “그들은 더 이상 상인이 아니다, 행상에서의 위험을 감수하는 대신 자신의 주택, 토지, 증권에서 얻음으로써 네덜란드가 해상권을 상실하도록 만들었다.” 꼬집었다. 창의력과 도전정신을 잃은 국가는 늙는 것이다.
영국, 해적의 나라에서 해상 무역 국가로 변신한다. 섬나라 ‘바이킹 노르만’족의 후손 유전자를 가진 영국 귀족들은 적을 공격하고 전리품을 얻은 정복 활동을 찬양하는 문화가 강했다. 영국 상선은 해적과 구별되지 않았다. 영국 왕실은 해적 배에 함포를 설치하고 적선을 나포할 사략선 면허를 내주었다. 헨리 8세는 교황청과 결별한 것은, 표면상은 이혼 문제지만, 십일조를 두고 교황에 주지 않고 차지하려는 욕심이었다. 교회에서 토지를 빼앗아 시민에게 팔았고 이로 형성된 산업 자본가가 후일 ‘부르주아’ ‘젠트라’ 계층이다. ‘엘리자베스 1세’는 아버지 ‘헨리 8세’가 간통죄로 어머니 ‘앤 불린’을 참수할 때 3살이었다. 영국은 대포 혁신으로 청동에서 주철로 대포를 만들어 장거리에 발사 간격도 짧았다. 이 대포로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칼레해전’에서 격파하고 승리한다. 설탕 때문에 일어난 영란전쟁은 해상권의 네덜란드 독주에 영국이 건 제동이었다. 달콤한 설탕은 흑인 노예의 피눈물이었다. 노예무역의 주도자는 영국의 유대인들이었다. 미국 국가인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영국 성공회 사제인 ‘존 뉴턴’이 흑인을 학대한 것을 참회하며 1772년에 쓴 가사다. “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 that saved a wretch like me”(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으로 시작한다. 영국의 중앙은행이 ‘영란’이란 칭호를 쓴 이유는 잉글랜드의 중국식 발음 ‘잉란’을 음차한 중국어 ‘英蘭’이고 이것이 우리나라에 그대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아마도 영란전쟁 때문에 영국과 네덜란드 합성어로 착각하지 마라. 필자는 주장한다.
항상 강했지만, 늘 2인자였던 프랑스. 유럽에서 가장 비옥한 큰 땅인 프랑스를, 로마는 ‘갈리아 지방’으로 부르고, 중세에는 ‘프랑크 왕국’ 중심지로, 분리된 후는 ‘서프랑크왕국’이었다. 17세기 ‘루이 14세’, 18세기 ‘나폴레옹’의 왕국이었다. 프랑스는 신용이 최악이라 금융이 발달하지 못했다. 그리고 다문화를 배척했다. 근대 유럽의 3대 버블은 네덜란드의 ‘튤립 버블’, 프랑스의 ‘미시시피 버블’, 영국의 ‘남해 버블’이다. 근세의 마지막을 뒤흔든 2개의 투기 사건인 ‘미시시피 버블’을 보자. 미시시피 땅값에 연동하여 발생한 주식이다. ‘존 로’의 은행이 발행한 은행권은 고객의 요구가 있으면 은화로 교환해 줄 의무가 있었다. ‘존 로’는 금속을 화폐로 쓰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가 은행권 발권의 근거로 삼은 것은, 미국의 미시시피 오늘날 ‘아칸소주’였다. 왕실은 ‘존 로’에게 공작 작위를 주고 후원했다. 왕실은 북미의 담배농장 수입도 미시시피회사에 넘겼다. 국가 대신 개인들이 투자해서 재정사업을 벌이자, 국채에 대해 국가가 제공한 일종의 담보였다. 담보가 국세 수입의 55%가 넘었다. 주식모집이 지지부진하자, 존 로는 자신의 은행에 2%의 금리로 대출을 받아서 주식을 살 수 있게 해주니 마다할 사람이 없었다. 2년에 5차례 발생했다. 오늘날의 콜옵션을 산 사람들은 주식이 오르기를 바랬고, 주식은 올랐다. 현지를 다녀온 사람들이 말라리아, 원주민, 모래땅 등의 이야기를 하자, 악재가 퍼진다. 환상은 깨지고 거품도 꺼졌다. 주식은 휴지 조각이 된다. ‘존 로’는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고 58세에 죽는다.
1804년 나폴레옹은 ‘나폴레옹 법전’이라 불리는 민법전을 만든다. 근대적인 각종 권리관계를 규정한 이 법전의 핵심은 소유권의 절대성, 계약 자유의 원칙 등 부르주아의 재산권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나폴레옹전쟁 이후 프랑스 산업의 변화. 1848년 2공화국이 들어서면서 ‘나폴레옹’의 조카 ‘루이 나폴레옹’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지만, 쿠데타를 일으켜 제2 과정을 선포하며 1852년 황제로 즉위하여 ‘나폴레옹의 3세’가 되었다. 그는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확립하고 식민지 팽창에 노력하였으나 1870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에 폐위당한다.
은에서 금으로, 세계 통화의 기준이 바뀐다. 금본위제도는 고전적 금본위제도인 금화본위제도, 금화의 유통이 없는 금지금본위제도, 금환본위제도로 나뉜다. 금환본위제도는 각국의 화폐를 특정한 기축통화와 연결하고 그 기축통화만 금괴와 바꿀 수 있는 시스템이다. 금본위제가 세계적 표준이 되다. 어쨌든 금화가 실제로 유통되는 방식이었던 당초의 금화본위제는 이제 통용되지 않았다. 중앙은행이 법정통화인 지폐나 주화를 발행하고 국가 전체의 금 공급을 중앙에 집중화하는 한편, 은화의 중요성을 보장하기 위해 예비 자산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바뀐 것이다. 금 태환은 국제무역에 따른 외부 결제 시에만 가능했다. 각국 화폐가 금괴와 태환 되면 금지금본위제이고, 기축통화 하나만 금괴와 태환 되면 금환본위제라고 부른다. 금환본위제는 1944년 ‘브레턴우즈체제’에서 채택되었다.
‘링컨 암살’의 배후는 정말 금융 세력이었을까. 1861년 미 남북전쟁은 노예제도에 대한 이견으로 벌어진다. 노예제를 반대하는 공화당의 ‘링컨’이 당선되어 남부 7개 주가 탈퇴한 남부 연합, 11주와 싸움이다. 1865년 남부군 ‘조셉 존스턴 장관’이 연방군의 ‘윌리엄 셔먼 장군’에게 항복하면서 남북전쟁이 종식된다. 북부는 남부처럼 노예가 필요치 않았다. 19세기까지 약 1천만 명의 아프리카인이 아메리카로 건너왔다. 같은 기간 유럽의 인구는 340만 명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5일 후 1865년 4월 14일 ‘링컨’이 ‘포드 극장’에서 ‘존 월크스’에게 암살당한다. 이 배후는 국제금융 세력이었다는 의혹이 있다. ‘링컨’은 ‘로스차일드’ 등 국제금융가들에게 전쟁 자금을 빌리지 않았고, 최초의 법정 지폐인 그린백‘을 발행함으로써 금융가들에게 손실을 입혔다. 더욱 남부군에 돈을 댄 세력은 돈을 돌려받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링컨‘ 암살 후, ’그린 백‘의 신규 발행이 금지되면서 이 주장의 개연성은 높다. 금융 세력의 사주를 받았다는 증거는 없지만, ’링컨‘의 정책이 국제금융 세력에 부담이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유대인 금융제국의 탄생과 성장을 보자. 독일 ’프랑크푸르트 게토‘ 출신의 유대인 ’메이어 암살 로스차일드‘가 금융업에 뛰어든 것은 18세기 말이다. 다섯 아들을 뒀는데 첫째 아들 ’암셸‘은 ’프랑크푸르트‘에서 사업을 이어받고, 둘째 ’살로몬‘은 빌헬름 9세의 재정자문관으로, 셋째 ’나탄‘(네이션)은 영국으로, 넷째 ’칼‘은 나폴리로, 다섯째 ’제임스‘는 파리로 보냈다. 나폴레옹전쟁 시 ’메이어‘의 재산은 엄청나게 불었다. 빌헬름 9세가 덴마크로 피신하면서, 자신 재산 300만 탈레스를 ’메이어‘에 맡겼는데 그는 땅에 잘 묻어 숨기고, 자신의 돈 4만 탈레스는 압수당한다. 전쟁이 끝나고 빌헬름 9세는 자기 재산, 모두를 ’로스차일드‘에 맡긴다. 영국에서 무역업을 하던 ’나탄‘은 금융업의 이익이 많이 난다는 것을 알았다. 나폴레옹은 전비를 마련하기 위해 ’루이지애나‘ 땅을 팔고 금을 받았다. 전쟁이 끝나자, ’로스차일드‘ 일가의 자산은 1억 3천 파운드였다. 그 가운데 ’나탄‘의 재산이 왕실 재산 500만 파운드보다 많은 9천만 파운드였다. ’나탄‘은 영란은행의 주식 대부분을 사들이고 은행 공채 발행의 실권자로 등극한다. 영국의 화폐 발생과 금 금 가격을 포함한 중요 결정권이 ’로스차일드‘ 가문의 수중으로 들어간 것이다.
’로스차일드‘를 등에 업은 J.P. 모건 은행의 모태는 영국의 ’조지 피바디 주식회사‘다. ’나탄‘의 손자 ’네이션 로스차일드 남작‘과의 만남이 전환점이다. 자식이 없던 ’피바디‘는 청년 ’주니어스 스팬서 모건‘을 영입하여 사업을 물려준다. 주니어는 회사명을 ’주이너스스펜서모건사‘로 바꾸고 그의 아들이 ’존 피어폰트 모건‘, 즉 ,J.P.모건이다. 미국의 대륙횡단 철도가 완성되자 모건이 설립한 ’노던증권‘은 ’로스차일드‘의 자금력을 활용해 철도회사의 지주회사가 된다. 화폐 전쟁은 금융위기가 탐욕스러운 금융가들이 음모와 획책에 의해 발생하는 양털 깎기와 같다고 주장한다. 중요한 것은 양털을 깎는 시기다. 이 시기를 아는 사람은 소수의 금융전문가란 점이다.라고 필자는 주장한다.
2024.10.29.
역사는 돈이다-마지막 회
강승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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