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천에 산책 나온 사람들 발길이 경쾌하다. 긴팔 셔츠를 입었는데도 팔에 와 닿는 공기는 서늘하다. 이른 아침 한산한 야탑 광장은 비둘기들만 분주하다. 도촌동을 출발해서 정류장으로 들어오는 누리 1번 버스에 올랐다. 단 한 명이던 승객이 내리자 궁내동까지 승객은 나 혼자 뿐으로 전세 낸 거나 다름없다.
궁내동과 쇠골 마을 사이 진재산 줄기로 접어드는 들머리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빽빽한 잡목 사이로 너른 등로가 나타났다. 마른 나뭇가지 하나를 들고 얼굴 앞쪽을 휘저으며 거미줄을 걷어내며 숲으로 든다. 모기 한 마리가 어느새 손등을 물었다.
금세 두 동네를 가르는 능선 마루로 올라서니 길이 한결 넓고 편하다. 등진 경부고속도로에서 차량이 내닫는 소리가 요란하다. 궁내동 톨게이트는 고속도로 차선보다 게이트 수가 많지만 병목처럼 차량 흐름이 느려졌다가 다시 빨라진다.
오홍석의 책 <땅 이름 점의 미학>은 기묘사화의 주역 남곤이 "붉은 비 내리고 녹음은 살찌는데 거센 바람이 물결을 치매 조수 소리가 장하구나"라고 울돌목을 묘사한 시를 남겼다고 한다.
썰물과 밀물 때의 좁은 바닷길 울돌목을 지나는 바닷물의 아우성 소리가 저럴까? 소음은 긴 능선 줄기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잠잠해지며 멀어진다.
궁내동과 쇳골 방향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왔다. 그 옆에 놓인 스틱 하나가 자신을 두고 간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모기에 물린 손등이 따끔거리고 가렵다. 귀를 시원하게 해 주거나 계절을 알려주는 귀뚜라미가 산객에게 위안을 주는 친구인 반면 모기는 성가신 존재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서로 파괴하고 죽이려는 천적관계가 아니라 악어와 악어새처럼 서로 도움을 주는 공생 관계면 좋으련만...
갑갑하게 숨을 막고 있던 마스크를 잠시 벗으니 공기가 좋다. 진재산 능선도 귀뚜라미 소리뿐 인적은 없어 내 혼자서 전세를 낸 듯하다. 추사도 밝은 달을 불러 산과 셋이서 벗을 이루었다고 하니, 누비길을 걷는 나도 귀뚜라미와 나무, 산과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벗 삼지 못할 것도 없지 싶다.
且呼明月成三友 好共梅花住一山 (차호명월성삼우 호공매화주일산)
잠시 밝은 달을 불러 세 벗을 이루고, 서로 좋아 매화와 함께 한 산에 사네.
<추사 김정희의 대련 글씨 中>
진재산 정상 턱밑 즈음에서 내려오는 산객 한 분과 가벼운 인사를 주고받았다. 맨손 차림으로 보아 산 아래 동네 주민이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저마다 복장과 행색이 제각각이다.
어떤 이는 야트막한 뒷산을 오르면서 크고 무거운 배낭을 둘러메고 있는가 하면, 해발 천 미터가 넘는 외진 산을 배낭이나 변변한 준비물도 없이 오르는 산객도 있다. 대개 전자는 높은 산을 오르기 위한 훈련을 하는 경우이지만 후자의 경우 산행 경험이 일천하거나 혈기방장 한 젊은이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궁내동 쪽 산기슭을 타고 넘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달아오른 몸의 열기를 식혀준다. 아침 햇살과 성긴 숲이 빛과 그림자로 빚어내는 그림이 여느 유명 화가의 추상화 못지않다. 산행 시작한 지 채 한 시간이 되지 않아 세 능선이 하나로 만나는 꼭짓점에 당도하며 성남 누비길로 들어섰다.
입 속의 마른침의 쓴맛을 느끼며 배낭 속에 든 시과의 새콤한 맛과 복숭아의 달콤한 과즙을 떠올려본다. 들판의 농부들은 새참을 들면서도 추수할 생각으로 마음이 바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은 일하기 위해 먹는다기 보다는 먹기 위해서 일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땀과 고된 육체노동은 짧은 휴식과 잊고 있던 소소한 일상의 소중함은 물론이요 때론 입맛까지 되살려 주니 말이다. 어제 아내에게 특별히 요청해서 맛본 갱시기 맛도 등산 후에 먹었으면 옛 맛이 났을까?
누비길을 잠시 벗어나서 해발 310.5 미터 태봉산 정상을 밟고 내려오는 길, 젊은 러너 셋이 달려오며 누비길 방향을 묻는다. 짧은 팬츠에 반팔 셔츠의 그 러너들이 순식간에 태봉산 정상을 그쳐 내 옆을 스쳐 대장동 쪽으로 뛰어 내려간다. 뒤 따라 달려오는 러너에게 물어보니 누리길 종주 달리기 중이라고 한다.
청계산 인릉산 남한산성 검단산 영장산 불곡산 등 7개 구간 62.1km 긴 코스를 한 번에 달린다니 절로 혀가 내둘러진다.
기실 인조의 태를 묻었다는 태봉은 대장동 쪽으로 뻗어 내린 능선 위 둔지봉 아래쪽 250여 미터쯤에 자리한다. 둔지봉에서 내리 뻗다가 누에머리처럼 우뚝 멈춰 선 곳이다.
둘레길을 잠시 벗어나 태봉으로 예상되는 곳으로 가니 담장이 둘러쳐진 묘지가 자리하고 있다. 옳거니 하며 인조의 태릉을 확인할 수 있겠거니 했는데, 문무인석과 묘비명이 위세롭게 도열한 묘역,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을 도운 이예장(1406-1456)과 그 후손의 묘역이 자리하고 있어 의아하다.
둔지봉 쪽으로 되돌아와서 우후죽순처럼 아파트 군락이 들어서고 있은 대장동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조금 때 이르다 싶게 땅에 떨어져 뒹굴고 있는 밤톨을 몇 개 주었다.
태봉산과 응달산을 가르는 두밀로 우측 태봉산 기슭에 '남서울 파크힐'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그 입구에서 관리책임자와 몇 마디 주고받았다. 마을에는 100여 호가 거주한다고 한다.
하산운동으로 넘어가는 두밀로의 능고개에 못 미쳐서 길 건너 응달산 자락으로 올라섰다. 산기슭에 우계 이 공 복현의 묘비명은 우계 이 씨가 경주 이 씨와 한 뿌리임을 알려준다. 산 자와 죽은 자가 좁은 길 하나를 사이에 둔 산자락에서 서로 마주 보며 영겁 중 순간을 향유하고 있다. 망자들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도시나 마을을 등지고 전원이나 산중으로 파고든다.
응달산 능선으로 올라서자 송전탑 주변에 칡넝쿨이 물결처럼 넘실댄다. 송전탑 주변에는 으레 칡이 우거져 있는데, 사람들의 접근을 막으려고 일부러 심은 건지 아니면 높은 나무나 구조물을 타고 오르려는 본능을 가진 칡이 뿌리와 줄기를 더듬이 삼아 이곳으로 뻗어온 건지 아직 그 궁금증은 풀리지 않았다.
응달산은 제법 가파른 비탈과 평탄한 능선을 번갈아서 서너 차례 내놓으며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게 한 후에 길고 평탄한 능선으로 맞이하며 숨을 고르게 한다. 등로 옆 벤치에 앉아 궁내동 슈퍼에서 산 밀크 커피로 때 늦은 모닝커피를 대신하고 다시 발을 옮긴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아침 드시나 보다.
예. 귤 하나 드세요.
고맙습니다. 하나만 주세요.
운중 마을에서 올라온 걸까. 여인 셋이 탁자가 딸린 벤치에 앉아 음식을 들며 담소하는 모습이 여유로워 보인다. 그중 한 분이 귤 두 개를 손으로 집어 내민다.
다른 지역 다른 이름의 둘레길처럼 누비길도 그 인근에 사는 주민들에게 휴식과 위안을 주는 쉼터다. 휴식(休息)은 글자 그대로 인간(人)이 산(木)과 어울려 자신(自)의 마음(心)을 들여다보는 시간이랄 수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시 「꽃」에서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던 그가 이름을 불러주자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길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김춘수의 「꽃」처럼 이름 없던 동네 뒷산 둘레길이 제각기 제 모습에 걸맞은 이름을 찾아주자 인간에게 가까이 다가와서 꽃이 되고 위안이 되었다. 그 이름은 거창하거나 으스대지 않고 하나같이 소박해서 다가가기 쉽고 편하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회장 사장 국장 박사 실장... 완장 냄새가 나는 이런 이름들 대신에 노루 들풀 범생 스네일 산토끼...처럼 순수하고 친근한 산우(山友)들의 닉네임은 오랜 친구처럼 친숙하고 정겹다.
아무런 표식도 없고 송전탑이 자리한 응달산 정상부를 스쳐 지난다. 좌측 능선 아래 한전 성남전력지사의 변전시설이 자리하고 그 너머 멀리 백운산 줄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추석이 머지 않아 한 무리의 벌초를 하는 사람들도 눈에 띈다. 누리길 5코스는 석운로로 내려서서 여우고개로 향하며 종점인 하오고개를 향해 막바지로 치닫는다. 여우고개로 오르는 라이더들의 페달질이 힘겨워 보이고 고개 아래쪽으로 향하는 산객들 발걸음은 가벼워 보인다.
반대편에서 한 무리의 라이더들이 막 여우고개 위로 올라서고 있다. 먼저 고갯마루에 올라선 선두가 뒤이어 오르는 동료들을 스마트 폰에 담는다. 뛰거나 라이딩을 하면서 중간중간 떠오르는 생각의 단편들을 잡아두기는 어렵지 싶다. 그에 반해 걷기는 생각의 편린들을 주워 모아 담기에 제격이다. 악몽을 걸러주고 좋은 꿈만 꾸게 해 준다는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드림캡처라고나 할까.
여우고개를 지나 하오고개를 사이에 두고 청계산 국사봉과 마주 보고 선 바라산 자락으로 올라선다. 길 옆 참취 꽃송이 위에 나비와 벌이 어우러져 꿀을 탐하기에 여념이 없다.
누리길은 하오고개 건너편에 우뚝 솟아 있는 청계산의 국사봉과 키재기라도 하려는 듯 막바지에 가파르고 높이 치오르는 계단 길을 내놓는다. 숨을 몰아쉬며 다리를 채근하다가, 그 싸움판에 휩쓸리지 않으려, 나무 계단에 앉아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이마에서 땀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그 비탈을 올라서자 청계 고개를 넘는 도로들과 차량들이 소음과 함께 눈 아래 들어온다. 주중 출퇴근길 매일 넘나드는 고개다. 제2경인고속도로, 수도권 제1순환고속도로, 안양 판교로, 하오개로 등 여러 도로들이 지나는 청계 고개 위 청계산과 바라산 묘원의 망자들은 시끄러운 차량 소음으로 밤낮 정신이 어지럽지 싶다.
누비길 5코스 기점이자 청계-광교 종주의 중간 지점답게 지나는 산객들이 제법 많다. 목구멍에 걸린 삶은 계란을 생수 한 모금으로 밀어 내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능선 마루에서 급전직하 고갯마루로 내려서며 누비길 퍼즐의 마지막 한 조각을 끼워 맞추며 매듭을 짓는다.
구불구불한 하오개로는 라이더들의 천국이다. 차로 금세 넘던 고개를 걸으서 내려오는 길이 제법 길다. 여러 버스들이 회차하는 한국학 중앙연구원 정류소에서 350번 버스를 기다리며 복숭아 하나를 배낭에서 꺼내어 베어 물었다. 맛이 다디달다. 부르카 차림 아담한 체구의 젊은 여성이 정류장으로 와서 차를 기다린다.
하이, 굿 에프터눈!
하이!
아유 스타딩 히어?
예스. 이임 스타딩 히어...
요르단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러 왔더란다. 전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학생 5-600명이 이곳에서 공부를 하고 있단다. 짧은 대화에서 가끔씩 눈에 띄던 외국인들의 정체와 광역버스를 비롯 여러 노선버스가 이곳에서 회차하는 이유에 대한 궁금증이 일거에 해소되었다. '질문 속에 답이 있다'는 말도 있지만 질문이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지나온 능선과 그 위를 수놓은 새하얀 뭉게구름이 한 폭의 그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