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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서양을 접하고 있는 유럽의 서남부로 향한다. 12시간 30분의 비행 끝에 네델란드 암스테르담에 도착한 우리는 다시 이 비행기를 타고 2시간 30분을 비행해서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로...호텔에 투숙 내일 아침 일찍 스페인속의 고대 로마 "메리다"로......
"브에노스 디아스" (안녕하세요) 스페인 인사말이다..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서 메리다까지 버스로 4시간 가도 가도 차창밖엔 대부분 오렌지 나무만 보인다. 고로 식사후 디저트로 오렌지(현지에서 익어서 달고 맛있다)는 실컷 먹는다.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는 고원지대(해발 635 M)에 위치해 있어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눈이 쌓여 있다가 4월부터 10월사이에 녹아 내리는 눈을 식수로도 사용한다고 한다. 이른 아침 햇살을 받으며 마드리드에서 메리다로 이동중 한 휴게소에서 백설에 덮힌 산을 배경으로.....
메리다는 인구 4만 5,000명으로 살라망카와 세비야, 마드리드와 포르투칼의 리스본을 연결하는 교통의 중개 지점으로 기원전 25년에 로마 제국의 부속인 루시타니아 주의 중심 도시로 건설되어 당시에는 톨레도와 리스본, 그리고 세비야와 히온을 잇는 <은의 길>의 요충지로 번영을 누렸다고 한다. <작은 로마>라고 불릴 만큼 2000년의 세월을 넘어 아직도 고대 로마의 유적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중세 스페인을 지배했던 로마의 문화가 남겨져 있는 도시지만 아쉽게도 폐허가 되어 예전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그래도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재되어 관리되고 있는 곳이라 한다.
타원형의 경기장은 수용 인원이 15,000명으로 추정된다 하니 그 당시 얼마나 번성된 도시였는가를 짐작하게 해 준다. 경기장 중앙부에 있는 투기장에 검투사 대기실과 맹수 우리 따위가 배치 되어 있고 경기장의 비문에는 기원전 8년에 완성 되었으며 나중에 프라비우스 왕조때 대대적으로 확장되었다고 새겨져 있다는 가이드의 설명이다.
로마 극장은 집정관 아그리파가 기원전 15년부터 14년에 걸쳐 구릉지에 건설했다는 반원형극장으로 약 6,000명을 수용 할 수 있는 계단식 관람석이 있다 나중에 대대적으로 복구 했다고 한다. 고대 로마인들의 건축 기술에 다시 한번 감탄하게 된다.
메리다의 로마 유적지 입구 광장에 있는 조형물 기이한 모양을 하고 있으나 무엇을 나타내는지는 아무도 모른단다. 아쉽다? 현지인에게? 말이 안통하니......그냥 갈 수 밖에.....
로마 신전들의 잔재와 이 도시를 둘러싼 거대한 벽의 잔재가 조금 있으며, 이외에도 흔히 '아르코데트라하노'라고 불리는 로마 개선문과 제2로마교(橋)가 있다고 한다. 야자수가 크고 멋있지요? 스페인속 로마를 뒤로 하고 다음 장소로.....
세비아(Sevilla)는 마드리드에서 남서쪽으로 540Km 떨어진 곳에 있는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내 세비아 주(州)의 주도로, 스페인에서 4번째로 큰 도시이다. 도시를 북에서 남으로 가로지르는 과달키비르강(Guadalquivir)의 상류 연안에 자리 잡은 이곳에는 오늘날 약70만 명에 가까운 인구가 거주하고 있다. 과거에 이 곳 세비아 항은 스페인과 아메리카 대륙 간 무역거래에 있어 매우 중요한 기지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후 새롭게 생겨난 항구들에 의해 중요도가 과거보다 약화되긴 하였으나 현재까지도 세비아는 이베리아 반도의 항구 중 대표격으로 그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다. 이곳은 스페인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투우와 풀라멩고의 본고장이기도 하다.
세비아 대성당 : 세로 116m, 폭 76m의 이 성당은 스페인에서 최고로 폭이 넓은 특이한 형태로 모스크의 잔재라고 한다. 세계에서 크기로는 세번째이고 고딕 양식으로는 제일 큰 사원으로 이슬람을 내친 기념으로 이슬람 사원이 있던 자리에 1401년에 착공하여 1511년에 완성되었다.
세계문화유산인 이 성당은 원래 회교사원이었던 것을 탑과 정원을 제외한 모든 건물을 125년에 걸쳐 세워졌다. 또한 이 성당은 세계에서 가장 큰 고딕양식의 건축물로 로마의 성베드로(SANPIERTRO 산 피에트로)성당, 런던의 성바오로성당과 함께 유럽에서 3번째로 큰 교회라고 한다
세비아 대성당에 안치된 콜럼버스의 관을 들고 있는 4인의 성인. 콜럼버스는 이탈리아 사람이었지만, 국부를 일으킨 위업을 달성한 인물로 스페인에서 1506년에 세상을 마쳤다. 그러나 자신이 발견한 신대륙 산토도밍고에 묻어 달라는 유언 때문에 콜럼버스의 유골은 멀리 신대륙에 묻혔다가 프랑스, 영국 등이 신대륙에 진출하자, 다시 스페인 세비아 대성당으로 돌아오는 우여곡절을 겪었는데, 유골의 진위 여부 때문에 DNA 검사까지 했었다는후문이 있다고 한다.
당시 이사벨 여왕이 집권하고 있었는데 콜럼버스는 여왕의 마음을 얻어 대서양을 항해하는 지원을 받았다고한다. 콜럼버스는 성격이 강하고 타협을 몰라 주위에 적을 많이 만들었지만 형제들과 함께 금과 향료가 많다는 중국으로 가기위해 대서양을 출발했다. 모진 고생 끝에 지금의 미국남쪽의 어느 섬을 발견하여 상륙한다. 그곳에서 30만 정도의 원주민이 있었다는데 3년 만에 3만명이 될 지경으로 많은 학살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카톨릭 신앙이 깊었던 그는 그곳에성당을 세우고 식민지 통치를 하며 많은 은금을 탈취하여 스페인으로 보낸다. 세비아 성당 내부는 특별히 화려하여 그 많은 은금으로 도배를 했다고 한다.
위 사진은 성모 마리아의 생애를 표현한 세비아 대성당의 주제단이다. Giralda로 알려진 The Almohade Minaret은 르네상스 부흥 시기인 1568년에 만들어졌고 대성당은 1401년에 건축이 시작되어 약 110 년간에 걸처, 5개의 본당 회중석과 25개의 예배당을 갖춘 사원으로 건축 되었다.대성당 내부에는 15세기의 스테인드글라스, 정교한 15세기의 성가대석, 교회 제단 위쪽에 있는 고딕양식의 장식벽화 같은 예술적인 건축물들로 가득 차 있다.
세비아 대성당은 세비아의 거리 어느 방향에서나 보이는 거대한 건축물로 이것이 중세 고딕 건축물로는 지구상에서 가장 크고 로마의 바티칸 대성당과 런던의 세인트 폴 성당과 더불어 유럽의 3대 성당이다. 성당의 크기를 쉽게 비교하면, 우리나라의 명동 성당이 배 1척의 크기라면, 세비아 대성당은 배 11척의 크기라니 그 거대한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세비아 대성당 바닥에는 이런 모양의 묘비가 여러군데 있다.
세비아 대성당 보물실에 보관되어 있는 세비야 성모상 대관식에 사용했던 관이다. 순금과 진주, 루비, 에메랄드 등 수 많은 보석으로 장식이 되어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한때 전 세계를 호령하던 최고의 부를 누리던 도시 임을 느낄 수 있다
히랄다(바람개비)탑. 바람이 불면 청동으로 만든 상이 회전 한다. 이 탑은 원래 이슬람 사원의 첨탑으로 건축한 것인데 16세기에 상부를 증축하여 성당의 종루로 완성했다.
높이 97m의 히랄다(바람개비라는 뜻)탑은 이슬람 건축과 기독교 건축의 훌륭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아름다운 조화처럼, 지구 상의 우리 인종들도 싸움없이 전쟁없이 조화롭게 살 수는 없는 것일까....68m에 종들이 있는 곳까지 올라 갈 수 있어서 올라가 보기로 했다.
히랄다 탑의 68m 종들이 있는 곳까지. 올라 가는 곳은 계단이 아니고 나선형으로 비스듬하게 만든 좁은 통로로 사람이 겨우 비켜갈 정도다.
히랄다 탑 위에서 내려다 본 세비아, 옛 서고트 왕국의 수도였던 세비아가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온 무어 인에게 정복된 것은 712년. 이후 이 도시는 500년 넘게 이슬람 문화 번영의 무대였다.
하얀색으로 칠해진 안달루시아의 고색창연한 집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시원한 바람에 여행의 묘미를 마음껏 느껴본다......
콜럼버스의 탑 : 두 기둥은 이사벨 왕 타이 왕국과 페르난도 왕의 아라곤 왕국을 상징한단다
두개의 기둥 중앙 부분에는 콜럼버스가 타고 갔었던 산타마리아 호의 모양을 한 배가 있다
스페인 광장은 마리아 루이사 공원과 마주 보고 있는 세비아의 대표적인 명소중 한 곳이다
광장 정중앙에는 분수대가 설치되어 있으며 건물은 건축가 아나발 곤잘레스의 작품이다
이 광장은 1929년 이베로 아메리카 박람회 때 만들어졌으며 콜롬버스 신대륙 발견 500주년을 기념해서 1992년에는 세계 엑스포가 열리기도 한 쟝소란다
자금은 정부청사가 들어가 있으며 광장은 반원의 형태로 둘러 싸여진 거대한 건물로 아래 부분은 여러 칸으로 분류되어 스페인 모든 도시의 지도와 특색이 타일로 장식 되어 있다. 스페인은 워낙 도시도 많고 큰 나라이기 때문에 반원의 형태로 거대한 스페인 광장을 둘러싼 것이다. 지방성이 강한 스페인 사람들은 이곳을 꼭 방문하여 자신이 속한 도시 앞에서 사진 찍는 것을 매우 좋아 한다고 한다.
채색된 타일로 다리를 장식하는 이 방법은 아줄레주 양식이라고 하는데 매우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극장식 반원 형태의 건물에 둘러싸인 광장은 아줄레주 양식으로 이슬람의 영향을 받았으며 채색된 타일로 건물을 장식하는 양식으로 지어 졌는데, 건물을 따라 늘어 선 58개의 벤치에는 스페인 각 지역의 지도가 그려져 있어 이채롭다.
스페인의 문화는 곧 광장(廣場)문화다. 유럽의 이름난 스페인 광장들, 바르셀로나. 마드리드에도 스페인 광장이 있고, 이탈리아에도 스페인 광장이 있다. 그 가운데서도 세비아의 스페인 광장을 제일로 친단다.
황금의 탑(Torre del Oro).1221~1222년 사이에 적 군함으로부터 도시를 보호하려고 세비아를 흐르는 과달키비르 강어귀에 세운 황금의 탑은 12각형 모양으로 Alcazar에서 강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방어벽의 일부분으로 만들어졌다. 예전엔 탑 상부가 금색의 도자기 벽돌로 되어 있어 금빛이 났다고 한다. 강의 통행을 검문하던 곳으로. 맞은 편에 있던 8각형의 은색 탑과 사이에 쇠사슬을 걸어 침입자를 막았다고 한다. 지금은 유명한 스페인 항해자와 선박의 모형과 그림 등이 전시되어 있는 해군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황금의 탑 곁을 유유히 흐르는 과달키비르 강가 풍경............. 세비아는 안달루시아의 주도. 스페인 4번째 도시. 컬럼버스가 도착한 곳이 인도가 아니라 신세계라는 사실을 증명한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바로 이 세비아 항에서 출범한 것을 시작으로 신세계와의 교역독점권을 확보하고 옛 까스띠야 왕국의 번영을 주도했던 도시라 한다.
투우장 : 투우경기가 열리는 날이라서 투우장 근처에는 사람들이 많다. 이곳 세비아 사람들은 투우라고 하면 스페인 어느 지방에 뒤지지 않는다고 한다. 스페인에서 가장 큰 마에스트란 (Maestranza)투우장으로 세계적인 투우장이란다
훌라멩고 춤은 스페인을 대표하는 춤으로서 통기타와, Tableta를 두드리면서 연주하는 음악에 맞춰서 추는 춤으로서 유래는 스페인 남부지방인 Andalucia (중심수도:Sevilla 세비아) 지역에서 사는 짚시(Gitano 기타노)들의 거리에서 추는 춤에서 유래 되었다고 한다.
유명한 '세비아의 이발사'를 연기하는 배우들...훌라멩고 전 출연진들 가운데 남자의 춤이 가장 열정적이었다.(우리는 1인당 70유로(123,000원)을 주고 1시간 30분 관람)
훌라멩고 춤은 남과 여 각각 혼자 추는 춤이 있으며, 남녀가 한쌍이 되어서 추는춤과 그리고 단체로 추는 춤 으로 구분이 된다. 이 춤은 바닥을 두드리면서 그 소리에 더욱 흥을 돋구며 추는 춤이라서 춤을 추는 장소는 반드시 바닥이 나무로 되어있다. 스페인 사람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길가다가도 훌라멩고 음악인 Sevillana(세비아나)가 흘러나오면 손뼉을 치면서 어린아이 어른할것 없이 모두 모여서 추는데 어디서 정식으로 배우지 않아도 기본 자세가 바로 나오는 본질적으로 이 춤에 관해선 타고 났단다.
알함브라 궁전 압구
알함브라 궁전은 해발 740m의 고원에 위치하는데 너비는 205m에 달한다. 서북서, 동남동 방향으로 건물이 뻗어 있으며 전체 면적은 142,000 m²이다. 견고하게 쌓아진 벽이 있으며 주위에는 13개의 타워가 있다. 다로 강이 흘러가며 깊은 골짜기를 이루며 그라나다 지역을 양분한다. 아사비카 계곡이 있으며 주위에는 알함브라 공원이 남서 지역에 자리하고 있다..
알함브라 아랍어 말 그대로 "붉다"라는 뜻을 지닌 궁전과 성곽의 복합단지이다. 스페인 남부의 그라나다 지역에서 머물던 아랍 군주의 저택이었던 곳으로 그라나다 시의 남동쪽 경계에 있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문화 유산이다. 우리말로는 알함브라 궁전이라고 쓰는 경우가 많지만 알함브라는 영문 식으로 그냥 읽는 경우이다. 아랍어가 스페인어로 굳어져서 쓰이고 있는 Alhambra라는 이름은 스페인어에서 h가 묵음이므로 "알람브라"라 읽는 것이 바람직하다. 따라서 공식명칭은 알함브라 궁전이 아닌 알람브라 궁전이다.
현재는 이슬람 건축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으며. 르네상스식 건물이 신성 로마 제국의 찰스5세 때 추가 되었다. 알함브라 성은, 나사리 왕조 궁전과, 군사요새 지역, 술탄의여름별장, 산책로 등으로 구분 할 수 있다.
알함브라 궁전의 성벽은 2km이고 길이가 740m, 넓이가 220㎡에 달하고 있다. 나사리 왕조의 번영기였던 14세기에 지어진 이 건물은 주로 세 개의 정원, 즉 맞추카의 정원, 코마레스의 정원, 그리고 라이온의 정원을 기본 축으로하여 설계된 정원 형식의 건축물이다. 내부는 왕궁, 칼로스 5세의 궁전, 헤네라리페 정원, 알카사바(성채)로 구성되어 있다. 스토커공법이라 해서 회반죽을 해서 굳혀서 붙힌 가장 많이 사용된 공법이란다. 이슬람 역시성경의 구약을 믿는 사람들인지라, 우상 숭배가 철저히 금지 되어서 소재의 한계성 때문에 기하학 문양이 많이 쓰였다고........
건물의 세공도 뛰어나지만 곳곳의 연못이나 분수로 꾸며진 정원이 대단히 아름다워 달빛이라도 비치면 최고의 장관을 연출한다고 하네요.
벽마다 모두가 다른 타일장식이 정교했다. 그리고 그 섬세함과 웅장함에 입을 다물 수가 없다. 사진에서는 느낄 수 없는 아름다움이 눈을 통해 전해졌다. 아..그래서 알함브라궁전이 유명하구나
아라야네스 사각 정원의 잔잔한 수면 위로 코마레스 탑이 드리우면 어느새 궁전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 된 느낌이다. 물에 비친 아름다운 건물과 빛, 그리고 궁전의 모습..그 모든 인공적 조화가 완벽한 수학 공식을 이룬 도형 처럼 정확했다.
일년동안 비오는 날이 극히 적다는 안달루시아 지방에 물을 끌어둘여 이토록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고 물이 흐르게 하고 그늘을 만들고, 정교한 기하학적 건물을 지은 이슬람의 건축 기술에 감탄한다.
사자의 정원, 124개의 황금빛 대리석 기둥과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다. 12마리 사자상은 유대인이 술탄에게 뇌물로 준 것. 이슬람은 절대 우상 숭배 금지이기 때문에 궁전 안에 사자상이 놓일 수는 없었으나, 이곳은 술탄의 여인들의 거처다, 그래서 출입하는 남자라고는 술탄 뿐인 곳이라 이곳에 암사자 12마리를 놓았다고 한다. 여인들의 거처에 남자의 손길이 필요할 때에는 내시나 흑인노예를 썼다고 하는데, 만약 술탄의 여자가 사고(?)를 쳐도 아기를 낳으면 탄로가 나기 때문에 그들을 썼다고..ㅎㅎ... 한 방에는 여인 2, 3명이 함께 기거했고 시중드는 시녀들도 있었다고 한다
12 마리의 사자들은 당시 그라나다에서 살던 유태인 12부족을 나타내는 것으로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수리 중 이라 분수대를 바치고 있는 12 마리의사자를 볼 수 없다. 이쉽다
이 사자의 정원도 이슬람의 자취가 강하게 남아있다. 아프리카 북부 모로코를 통해 넘어온 이슬람교도들이 15세기말까지 약 800년에 걸쳐 지배했던 이슬람 왕국이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유럽에서 가장 세련되고 부유한 도시 중의 하나였던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그라나다. 그 곳에 남아있는이슬람궁전이 알함브라이다 에스파냐의 마지막 이슬람왕조인 나스르왕조의 무하마드 1세 알 갈리브가 13세기 후반에 창립하기 시작하여 역대의 증축과 개수를 거쳐 완성되었으며 현재 이 궁전의 대부분은 14세기 때의 것이다
두 자매의 방, 똑같은 대리석 두개가 깔려 있어서 붙은 이름. 왕비가 쓰던 방. 두 자매의 방 천정은 유명하다. 여기는 사자의 정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라고. 천장의 종유석 장식은 궁전 안에서 가장 섬세하고 정밀한 아름다움을 지닌다. 뾰죽 뾰죽한 것이 5000개. 원래 유리 호리병인 물병을 거꾸로꽂아 놓은 것을 따온 것이라 한다. 천장이 뾰죽한 것은 캐스타라고 한다는데 사막의 천막에서 따온 것 이라고. 아무래도 고향 집을 본 따서 해 놓은면 고향같은 기분이 들 것 같다.
알함브라의 또 다른 재미는 궁전에서 내다보는 그라나다의 외곽인 알바이신지구다. 알바이신 지역은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어, 지금도 이 언덕의 외관을 해치는 건축이 금지되어 옛 모습이 그대로 보전되고 있다. 원래 알바이신은 성채 도시로 설계되었기 때문에 길이 미로처럼 구불구불하여 방향 감각을 잃기 쉽다고 한다.
알함브라를 보기 위해 세계 각처에서 1년에 천만명이나 되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유명한 일화로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이 마드리드 정상회담 후, 시간이 촉박 했음에도 불구하고, 꼭 알함브라 궁전을 봐야 된다고 해서, 헬기로 다녀 갔다고 하는 얘기가 있다. 위 사진은 궁전 중앙에 있는 정원 이다
유리가 아닌 크리스탈로 덮여진 이상한 지붕이 보인다. 그 아래는 사우나방이라고 하는데 태양열을 받아서 온욕했다고.......
아랫층에는 우리나라와 비슷한 찜질방이 있는데, 왕실 가족들이 이곳에서 사우나를 하는 동안 악단이 와서 연주도 해 주었다고 한다.
궁전의 화려한 내부 장식들은 유수프 1세(1354년에 사망)때 만들어 졌다고 추정되는데 1492년 무어인들이 축출된 뒤 대부분의 내부 장식이 없어졌으며 가구들은 파괴되거나 철거 되었다고 한다
카를로스 5세 궁전의 외관, 알람브라 궁전을 무혈로 입성한 카톨릭 왕 부처의 손자 카를로스 5세에 의해 세워진 그의 이름을 딴 카를로스 5세 궁전이다. 외벽이 볼록 볼록 튀어 나온 사각형 건물인 데 외관과 달리 안으로 들어서면 원형의 정원을 2층의 회랑이 둘러싸고 있는 독특한 특징의 건물이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유행했던 르네상스 양식을 도입, 사각형의 건물 속에 원형 정원을 배치했다고 한다. 건축에 관심이 많았던 카를로스 5세는 신혼여행지로 알람브라 궁전을 찾았을 때 이 곳에 새로운 궁전을 지을 결심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궁전 건설의 자금원이었던 모로인들의 반란으로 자금 조달이 어려워져 그의 꿈은 미완성으로 남고 말았단다, 1층은 도리아식, 2층은 이오니아식 건축 양식을 띄고 있다.
알카사바 성채로 들어가는 입구로, "오직 한 분, 알라만이 승리자다"라고 새겨 있는 포도주의 문.
포도주의 문을 경계로 하여 알함브라 성 안은 나스르 왕조 궁전을 중심으로 하는 주택지와 군사 요세인 알카사바로 양분 되어 있다.
적이 공격해 오면, 일단 성 위의 돌 대포알과 화살을 쏘고 성벽에 난 구멍 사이로 뜨거운 물이나 기름을 부어서 방어했다고 한다. 만약 1차 방어가 무너지면, 창과 칼로 전쟁을 치르는식이었다. 돌 대포알을 맞아서 머리가 터지고, 뜨거운 기름에 심한 화상을 당했을 병사들의모습이.....
알카사바의 가장 높은 탑인 벨라 탑(Torre de Vela)이다. 알카사바는 알함브라에서 가장 오래된 부분으로, 9세기에 로마시대의 성채 자리에 무어인이 쌓은 것으로 기독교 국가의 공격을 막기 위헤 알카사바의 군사 기술이 집약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고 한다.
알카사바에서 내려다 본 군인들의 막사, 식량 창고, 목욕탕, 무기고터 등등 흔적만 남아 공간들이 바둑판 처럼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알카사바에서 보이는 알바이신 언덕은 기독교도들에 의해 쫒겨난 아랍인들이 최후까지 항거한 곳이다. 현재까지 이슬람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는 곳으로, 하얀 집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집시들의 동굴 주거지도.......
내궁 밖에 있는 "천국의 정원"이란 뜻을 가진 14세기에 건설된 나스르 왕조의 여름 별장 "헤네랄리페 정원"이다.
나스르 왕조 궁전 옆에 잘 다듬어진 측백나무 숲 길....파르탈 정원으로 이슬람 시대에는 귀족의 궁전과 주택, 이슬람 사원들이 서 있던 녹지였다고 한다
파르탈 정원 안에 있는 "귀부인의 탑"이 전면에 거느린 연못에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궁전의 정원수는 어찌 그리도 예쁘게 다듬어 졌는지, 사진기를 들이대면 예술이다. 맑은 하늘과 선선한 바람이 더욱 기분좋다. 알함브라의 테마는 물과 하늘 나무다. 어느곳이나 물이흐르고 있고, 그 물에는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비추어져서 아름답다. 정성껏 가꾸어진 키 큰나무와 작은 꽃들도 함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정원은 나스르인들이 알함브라 궁을 너무 천국에 가깝게 만들자 신 알라가 이들을 이곳에서 쫓아 내기로 결정 했다는 전설이 담겨있는 정원이란다
무어 인 출신의 시인들은 궁전을 "에메랄드 속의 진주"라고 표현했다. 건물의 반짝이는 광채와 고급스러운 배경 때문이었다. 여름에는 꽃과 잔디가 자라나며 대개 장미와 오렌지 나무 등 자민족이 좋아하는 작물을 많이 심었다. 그러나 1812년 웰리턴 공작이 영국산 느릅나무를 비롯한 다수의 종을 들여 오게 되었다. 공원 주위에는 유럽산 지빠귓새인 나이팅게일이 노래하며 분수대가 많이 있다. 죽은 나무를 문지르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전설.. 여기 오는 모든 사람이 나무를 문질러 반질 반질거린다.
프란세스코 타레가는 콘차 부인을 사랑하게 되었는데, 그의 사랑은 그 여인으로부터 거부되어 상심한 그는 이곳 저곳으로 여행을 떠나는데, 여행지 중의 한 곳이 스페인 남부의 그라나다, 그는 그곳에서"알함브라 궁전" 이라 불리는 곳을 가게 되었고, 그곳의 아름다움에 자신의 상처를 담은 노래가 유명한 "알함브라궁전의 추억"이란다
꼬르도바도 무슬림 스페인의 수도였었다. 마드리드 근처 똘레도를 수도로 삼아 스페인을 지배하던 무슬림들은 스페인의 국토 회복 운동에 의해 밀려나 꼬르도바를 수도로 삼는다. 무슬림 통치말년 2세기 동안의 중심지가 꼬르도바다. 위 사진은 메스키타 출입문 (용서의 문-이 문을 통과하면 모든 죄를 사 해주고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한다)
고대 로마제국에서 어린 네로의 스승과 국가 법무관의 소임을 맡았고, 54년 네로가 제위에 오르자 섭정이 되었다. 한 동안 부족함 없는 생활을 하였으나, 시대의 추이를 알고 네로의 과욕에 위태로움을 느낀 나머지 62년 네로에게 간청하여 은퇴, 캄파니아에서 오로지 학문과 문필을 가까이하며 거기에서 보다 큰 세계를 발견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65년 네로에게 역모를 의심받자 스스로 혈관을 끊고 자살하였단다. 로마 제국의 황제 네로의 가정교사이자 철학자로도 유명한 세네카가 이곳 꼬르도바에서 태어났음을 기념하는 동상.
도시의 이름은 옛부터 활발하게 생산되던 '코르도반' 이라는 가죽 제품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바그다드에서 도망쳐 온 우마이야 왕조의 한 사람인 '아브데 라만 1세'가 세운 후, 이슬람 왕인 '칼리프'와 '아브데 라만 3세'때 전성기를 맞이 했다고 한다
오랜지가 주렁 주렁.....오렌지 나무에서 퍼지는 향기와 수 많은 관광객들의 수다 소리도 다 포용하는 메스키타 회교 사원의 작은 골목 골목....
메스키타란 스페인어로 '모스크'라는 뜻이다. 아브줄 라흐만 1세에 의해 서고트 왕국의 교회가 있던 자리에 건립 되었고 그 후 3차례에 걸쳐 확장되었다. 10세기에는 여러가지 화려한 건축물들이 보충 되었다고 한다. 알라가 숨쉬고 알라가 기거하던 공간으로 알라의 흔적을 보러 사람들이 모인다. 800년 영광이 살아가는 곳, 알라베스크 문양이 뜯어지고 덧 입히고 붉고 흰 아치가 살아 미로 처럼 아스라한 길을 만든다
785년에 건설하기 시작해서 도시의 발전과 더불어 848년, 961년, 987년 세 번의 확장 결과 마침내 2만 5천의 신자가 기도하는 규모가 되었다는데, 여러 시대에 걸쳐 개축 증축되었기에 양식도 재질도 다양하다. - 오랜지 정원에서 본 사원의 상징인 미나렛(알미나르 탑)
미나렛(알미나르 탑) 높이가 93m나 되는 이 종탑은 회교사원의 광탑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으며 스페인에 세워진 것 중에서 가장 장대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건축물에 사용된 색깔의 의미는 적색 : 혈연, 흑색 : 마호멧, 청색 : 풍요, 천국, 백색 : 평화, 순결, 노랑 : 부귀 를 뜻 한다고......
성직자들이 카를 5세를 설득하여 16세기에 건물의 일부가 파괴된 사원의 중앙에 대성당이 들어서게 되었다. 완공 후에 카를 5세가 탄식하며 말했다고 한다. "당신들은 어디에도 없는 것을 부수고 어디에나 있는 것을 지었다" 그러나 이슬람 문화와 그리스도 문화의 양식이 혼제 한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로 "어디에나 없는 건축물"이 되었단다.
1523년 대성당을 짓기 위해 사원의 일부를 없앤 만큼 화려하고 정교함이 그 위용을 자랑한다. 이 성당은 에르난루이스가에 의해 설계 되었다고 한다.
붉은 벽돌과 흰 벽돌이 번갈아 정교하게 쌓은 회랑이 끝없이 이어지는 메스키타 내부가 인상적이다. 화강암과 대리석의 회랑이다. 적과 백으로 칠한 것처럼 보이는 그 유명한 말굽모양의 아치는 사실 흰색 돌과 쐐기 구실을 하는 붉은 벽돌을 교대로 조합한 것이라 한다. 전신은 서고트족이 사용하는 교회였는데, 아브데 라만 1세가 모스크를 건설했고, 2세는 확장을 통해 카데드랄로 바꾸고, 카를로스 5세는 시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모스크 중앙을 떼내고 카데드랄을 건설해 코린트와 고딕과 로마네스크와 바로크 양식이 혼재한다고 한다.
사원안에는 화강암, 벽옥, 대리석으로 된 850개 이상의 원주가 천정을 받치고 있어 숨이 막힐 듯 아름다운 장관을 연출한다. 화려하게 장식된 미라브(Mirab)와 기도하는 사람 벽감이 메스키타회교사원의 또다른 볼거리이다.이 사원의 건축양식이 남미와 페르시아 건축물의 기준이 되었다 한다. 사원의 기둥을 보면 기존 모스크 사원의 모습과는 판이한 모습을 보이는데 짧은 시간에 회교사원을 지으려 주변에 있는 그리스 양식의 건축물에서 기둥을 뽑아 건축을 했기에, 기둥 모습을 보면 그리스 양식인 이오니아, 도리아, 코린트 식의 기둥모습이 보인다. 2중의 아치를 만들어 견고함을 더 했으며 흰색은 대리석이고, 붉은색은 벽돌로 만들어져 850 여개의 기둥은 환상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천장의 정교한 모자이크는 비잔틴 제국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아름다운 원주와 붉은 문양의 아치들을 따라 걷다보면 그 안에 나타나는 예수상이 있다. 이처럼 화려한 성당이 모스크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다.
기독교도들의 Catedral 종루모형을 순 금으로 만들어 보호막안에 보관하고 있다.
성상이나 성구를 필요로 하지 않는 이슬람교 사원의 밝은 분위기와, 성상과 성화에 둘러 쌓인 카톨릭 사원의 어둡고 신비한 분위기가 대조 된다.
대성당 성가대 의자 1758년 뻬드로 두끄 꼬르네호가 조각한 추리게라 양식으로 재질은 호두나무
성당이나 모스크에 가면 느끼는 것, 어떤 마음이 이런 공력과 예술을 태어나게 했을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종교라는 것.. 위 사진은 성당안에 있는 파이프 오르간
메스키타 부근에 있는 미로 같은 좁은 골목을 지닌 [유태인의 거리]로.........
마치 미로처럼 길이 얽혀 있는 지역. 일찍이 꼬르도바 칼리프 제국의 경제를 떠받치는 존재로 여겨져 역대 칼리프에게 후하게 대접받던 유대 인은 1492년에 포고된 유대인 추방령에 따라 이 마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집집마다 하얀 벽의 발코니에 화분을 내놓아 골목길을 다채롭게 장식하고 있다.
[작은 꽃길]이라 명명된 유태인의 거리다. 꼬르도바를 소개 할 때 자주 나오는 바로 그 곳이다. 좁은 길의 하얀 벽에 걸린 꽃 화분들이 도시를 아끼고 가꾸는 그 들을 말해 준다. 그 좁은 골목에도 가게나 바, 호텔 등등 다양하게 있다.
하얀 집들이 좁은 골목 양쪽 벽에는 빨간 제랴늄 화분이 집집마다 놓여 있다. 붉은 제라늄을 걸어 놓는 데는 슬픈 전설이 있다. 헤라라는 유태인 처녀가 스페인 귀족 사나이를 사랑했는데 신분상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한 그들은 귀족 부모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치게 되었다. 헤라는 유서를 쓰고 죽음의 길을 선택했단다. 헤라의 부모는 헤라의 목을 베어 귀족의 집 창가에 걸어 두었는데 탐스럽게 피어난 빨간 꽃 제라늄. 섬뜩함이 느껴지는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유럽의 창가에 놓인 아름다운 꽃들이 보통의 아름다움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위 사진은 유테인 거리의 꽃길에 있는 역사가 아주 오래된 우물 이란다
유태인 골목 그 슬픈 전설이 있는 곳의 제랴눔은 여전히 건물의 벽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유태인의 거리라 하지만 지금은 유태인이 거의 없단다. 그 대신 좁은 골목을 누비는 관광객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