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28 주일
한국종합사회조사(KGSS)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여러분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건강(39.2%), 가족(28.9%), 돈(16.2%), 친구(4.8%) 순으로 비중이 크며 종교는 2.8%라고 합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돈’의 비중은 점점 더 높아지고 있으며 다른 연구조사에서 “나는 물질주의자”라고 대답한 비율이 50.4%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째 부분은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물은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추종하기를 거부한 이야기(17-22절)이고, 둘째 부분은 부자는 구원받기 어렵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이 놀랐다는 이야기(23-27절)이며, 셋째 부분은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에게 주어질 보상에 관한 이야기(28-31절)입니다.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17절)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어떤 사람’을 우리는 흔히 부자 청년이라고 말합니다(22절 참조). 그런데 오늘 복음의 병행 구절인 마태오 복음서에는 단순히 ‘젊은 이’(마태 19,22)로, 루카 복음에서는 ‘권력자’(루카 18,18)로 언급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묻는 이 사람에게 십계명의 제5계명(살인 금지), 제6계명(간음 금지), 제7계명(도둑질 금지), 제8계명(거짓 증언 금지), 제4계명(부모에 대한 효도)과 함께, 십계명에 언급되지 않은 “횡령해서는 안 된다.”(신명 24,14; 집회 4,1)는 계명을 첨부하십니다. 아마도 당시 많은 권력가들이 자기 혼자만 살려고(이사 5,8) 가난한 이들에게서 빼앗은 재산을 쌓아두는 것(이사 3,14; 미카 4,1-4)을 예수님께서는 경계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부자 청년은 예수님께 이 모든 계명들을 어릴 때부터 다 지켰다고 말합니다(20절).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21절)고 명하십니다. 그러나 그는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 말씀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예수님을 떠납니다(22절).
당신을 떠나는 부자 청년을 보시며 예수님게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르 10,25)고 말씀하십니다.
일부 성경학자들은 본문에서 ‘낙타’로 언급된 히브리어가 ‘굵은 밧줄’이라는 뜻을 지닌 아람어를 잘못 표기한 것으로 보는 이들이 있습니다. ‘낙타’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 가말(גָּמָל)을 마르코 복음사가가 그리스어 ‘κάμηλος’로 번역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예수님께서 당신이 주로 사용하시던 아람어를 쓰셨다면 ‘가말’이 아리라 ‘감라’(gamla: גמלא), 곧 ‘밧줄’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발음이 비슷한 ‘가멜라’(gamela: גמלא, 곧 ‘낙타’로 잘못 옮겨 썼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들은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밧줄로 바늘귀에 궤는 것이 더 쉽다.”고 번역합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팔레스티나 지방에서 가장 큰 짐승인 낙타와 가장 작은 구멍인 바늘귀를 연결시켜서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설명하신 듯합니다.
오늘 복음을 자세히 살펴보면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이 말씀에 제자들이 놀랐다고 두 번이나 기록합니다(24절과 26절) 그러면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랐을까요? 예수님 시대에 유다인들에게 부와 재물은 하느님의 축복을, 가난과 빈곤은 하느님의 저주를 의미했습니다. 유다인들은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복을 받았다는 증거를 ① 부, ② 건강, ③ 무병 장수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고에 빠져 살았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26절) 하고 서로 말합니다. 이 말은 “하느님께서 복을 많이 내려 주신 부자들도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면, 누가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인가?” 라는 뜻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27절)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인간의 구원이 자신의 힘으로(自力)으로 스스로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권한이고 은총입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바로 ‘회개’하는 것입니다. 즉 지금까지의 재물을 섬기던 생활을 버리고 하느님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구체적인 예가 바로 예리코의 세관장이었던 자캐오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참된 구원을 체험한 자캐오는 자신이 소유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혹시 자신이 부당하게 다른 사람들의 재산을 횡령한 것이 있다면 네 곱절로 그것을 갚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셨던 이스라엘에는 두 개의 큰 바다(호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북쪽에 있는 갈릴래아 호수이고, 다른 하나는 남쪽에 있는 사해(死海: Dead Sea)입니다. 유다교 라삐들은 이 두 호수를 빗대어 우리들의 삶을 묵상하게 합니다. 갈릴래아 호수와 사해는 모두 요르단 강의 물이 유입이 되는 곳입니다. 그런데 갈릴래아 호수는 온갖 생명이 살아 숨 쉬는 생명의 물인 반면, 사해는 아무것도 살 수 없는 죽음의 물입니다. 이 둘의 가장 큰 차이점은 갈릴래아 호수는 자신이 위쪽에서 받은 요르단 강의 물을 다시 아래로 내어주지만, 육지보다 400-600미터 아래에 있는 사해는 그저 받기만 할 뿐 자신이 받은 물을 결코 내어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들이 소유한 모든 것은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들입니다.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것을 다른 이들과 나눌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느님의 생명으로 살아갈 수 있지만, 반대로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우리 곁에 있는 이웃 형제들과 나누지 못할 때 우리는 사해처럼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의 사랑하는 제자 티모테오에게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1티모 6,10)라고 권고합니다.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남들과 나눌 줄 모르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부자들에 대한 암브로시오 성인의 말씀으로 오늘의 강론을 갈무리합니다. “부자들이여, 그대는 가질수록 더 원하고, 벌어들일수록 여전히 그대에게는 부족합니다. 돈 욕심으로 타오른 탐욕은 꺼질 줄을 모릅니다. … 그대가 지금보다 덜 가졌을 때는 자신의 재산을 가늠하여 절도 있게 벌어들일 줄 알았지만, 그대가 소유한 재산이 늘어날수록 그대의 탐욕도 커집니다. … 그리하여 탐욕스러운 부자는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시기하고 자신의 가난을 탄식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