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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지키는 것
방수미, 서울 서부장애인종합복지관
김사장님은 아는 사람이 없는 이 동네를 떠나고 싶다고 하셨다. 그런데 이제는 이웃도, 동네에서 지내는 것도 좋다고 하셨다. 이웃들과 어울려 식사했던 날을 떠올리며 그 공간을 빌릴 수 있는지도 물어보셨다. 김치찌개를 잘 끓이니 어르신들 모셔다가 식사를 대접해 드리고 싶다고 하셨다. 40쪽
“같이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사람이 생겨서 좋아요. 그동안 커피를 아무 말 없이 혼자 마셔왔잖아요. 근데 선생님을 만나서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생겨서 좋아요. 선생님은 식구 같아요. 나를 알아봐 주는 사람이 생긴 것 같아요.” 94쪽
「핵사곤 프로젝트」 (구슬꿰는실, 2024)
인간은 때때로 외로움을 느낀다. 혼자여서 외롭고, 혼자가 아닌데도 외롭다. 많은 사람과 함께 있어도 진정 ‘나’를 보는 이가 없다면 그 역시 혼자가 맞다. 언젠가부터 혼자가 싫은 사람들은 비슷한 욕구를 가진 누군가를 찾아 허기를 달랬다. 그런데 또 어떤 이들은 숱한 관계에 지쳐 혼자를 택한다. 어쩌면 외로움을 자청할 수 있는 건 나름의 권리와 힘일지 모르겠다. 진짜 소외되고 고립된 사람에게 당신의 혼자인 삶은 선택이냐는 질문 같은 건 할 수 없을 테니까.
김 사장님은 어울려 밥 먹을 사람이 생겨 계속 동네에 살기로 했다. 강 선생님은 커피 마시는 식구 같은 사람이 있어 즐겁다 했다. 너무 소박하고 단출해 그제야 만나진 게 야속할 정도다. 시커먼 아저씨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잠 못 들게 하고, 익지도 않은 계란을 삶게 한 건 ‘한 사람’이 일으킨 소망과 구실이었다. 사회복지사는 으레 하던 일을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두 사람에겐 그동안 만나온 다른 이들과 사뭇 달랐던 모양이다. 욕구를 듣고, 그 안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관계 맺는 속도의 기준이 모두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 그런 것들.
‘김씨 성을 가진’, ‘혼자 사는’, ‘성인 남성’ 같은 말들 위로 한 사람이 스쳤다. 몇 년 전이었다. 그는 김씨 성을 가진 60대 초반 남성이었다. 취업을 도와달라며 직업 팀으로 전화가 왔는데 얘기를 나눌수록 자꾸 이 아픈 얘기만 하더란다. 결국, 상담은 구산동 사례지원 담당자인 나에게 연결됐다. 김 선생님은 예전부터 치아 건강이 악화되는 걸 알고 있었지만 아픈 곳이 한두 군데도 아니고, 수급비는 생활비로도 빠듯해 병원 갈 엄두가 안 났다고 했다. 치과 치료를 포함한 사례지원 계획을 위해 긴 대화를 나눴지만 선생님은 한사코 다른 도움은 더 어려운 이에게 주고, 당신은 치과만 해결해 달라고 하셨다. 연신 염치없다 미안하다 하며 고개를 떨구는 모습에 복지관을 찾기까지의 긴 망설임이 느껴졌다.
김 선생님의 소원은 김치를 먹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김 선생님은 윗니 여섯 개와 아랫니 두 개가 없고, 있는 치아도 대부분 흔들리거나 치료가 필요했다. 최대한 빠르게, 최대한 많은 자원을 찾아야 했다. 지역에서 교류해 온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의 문을 두드렸지만 시기가 맞지 않았다. 추후를 도모하기 위해 조합이 운영하는 치과에 진료 기록을 남기려 했으나 그마저도 예약의 벽 앞에 무너졌다. 다행히 연중 진행되는 보철지원 사업을 찾았지만 선정되지 않았다. 바로 다른 사업을 신청하기엔 애석하게도 대부분의 의료비 지원은 성인을 포함하지 않는다. 있다 하더라도 원하는 시기와 금액을 맞추기란 하늘의 별 따기이다.
정보를 찾고, 역할을 나누고, 각자의 일을 하는 과정이 반복됐다. 끝내는 비영리단체와 지역 협동조합, 복지관, 주민센터, 김 선생님까지 십시일반 하여 치료는 잘 마무리됐다. 꼬박 1년이었다.
1년이란 시간만큼 김 선생님과 나의 관계도 달라져 있었다. 사실, 처음에는 선생님 댁에 방문하는 것이 편치 않았다. 김 선생님은 정신 질환이 있었고, 나는 겁쟁이였다. 정신 장애를 편견 없이 바라보는 건 장애인복지관 직원에게도 쉽지 않다. 더군다나 평소 방문하던 집이 아니라 심리적으로 더 큰 에너지를 써야 했다. 김 선생님도 편한 척 웃는 내 얼굴 뒤의 경계를 느꼈을지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란 놈은 착실했다. 새로운 정보를 전하며, 준비된 서류를 받으며, 복날엔 삼계탕, 겨울엔 김장 김치, 때때로 전하고픈 물품을 나르며 긴장은 사라졌다. 일부러 나로부터 멀리 떨어져 앉는 선생님의 계산된 배려에, 어느 날 생긴 내가 앉을 방석에, 선생님의 젊음 바친 수제 구두 이야기에, 무거우니 서로 가겠노라 실랑이하는 새에 관계는 편해져 있었다. 선생님은 더 이상 염치없다 미안하다 말하지 않았다. 대신, 없는 살림에 주스를 사다 두고, 서울 끝에서 끝으로 가야 하는 먼 병원도, 빠르게 필요한 서류도, 귀찮고 까다로운 경과 공유와 사진도 단숨에 해결하는 것으로 마음을 표현했다.
사례지원을 종결하며 김 선생님은 말했다. 복지관에 나 같은 사람은 필요 없냐고, 나도 다른 사람을 돕고 싶다고. 관악구 김 사장님처럼 은평구 김 선생님에게도 남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 자연스레 피어났다. 실제로 선생님의 봉사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 마음이 진짜였다는 걸 나는 안다. 그걸로 됐다. 이제 김 선생님은 이가 아플 때 고민 없이 찾아갈 동네 치과가 생겼고, 우리에겐 혹여나 수제구두와 관련된 지식이 필요하면 언제든 물을 수 있는 이웃이 생겼다. 그거면 됐다.
가족이 보았을 때 김사장님은 그대로일지도 모른다. 가족이 생각한 ‘문제’는 큰 변화가 없는 건 사실이다. 음주, 재정관리 등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문제만 보면 잘 느껴지지 않지만 김사장님의 일상에 변화들이 생겼다. 44쪽
「핵사곤 프로젝트」 (구슬꿰는실, 2024)
‘만성적이고, 복합적인 욕구와 문제를 가진 사람’
우리가 만나는 당사자 중에는 오래되고 해결하기 어려운 욕구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매년 비슷한 목표가 세워진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아니라 몇 년 동안이나 당사자 역시 해결을 원해 왔다는 것이다.
어려움의 내용이 당사자 개인에게 집중되는 경우, 가족들은 반복돼 온 일상에 큰 피로감을 보인다. 그리고 말한다. “니가 그렇지 뭐.”, “그럴 줄 알았어.”, “어차피 또 그럴 거야.” 한숨처럼 내뱉는 그 말엔 사실 ‘니가 왜 그랬을까?’, ‘이번엔 다를 줄 알았는데.’, ‘다음엔 안 그랬으면 좋겠어.’라는 바람이 들어있다. 그 마음을 읽고, 일깨워주며, 우리는 당사자와 가족이 스스로 회복하는 힘을 기르도록 조력한다.
반복적인 어려움에는 부정과 탈락의 경험이 따른다. 그 중 다수가 ‘문제’ 되는 행동을 하기 때문인데, 정답이 존재하는 비장애인 중심 사회에서 규칙을 지키지 않는 장애인은 손쉽게 배제된다. 몇 번의 형식적인 배려 뒤에 기회를 잃은 건 당신이라고 배제의 이유도 못 박는다. 그렇게 자신에게도 가족에게도 ‘어차피 안 되는 사람’이 되어간다. 반복된 어려움에 갇힌 당사자가 힘을 되찾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건 완벽한 해결책이 아니다. 그동안의 노력을 인정하고, 앞으로는 내가 당신을 돕겠다는 약속이다. 삼세번의 기회 뒤에 종결을 외치지 않을 거란 믿음이다.
얼마 전 ‘강점관점 사례관리’ 교육을 들었다. 강사는 10번이나 쉼터에 온 가출 청소년에게 무슨 질문을 하고 싶은지 물었다. 속으로 떠오른 가장 빠른 질문은 ‘너는 왜 자꾸 집을 나오니?’였다. 주제가 주제인 만큼 최대한 긍정적인 시선으로 마더 테레사 같은 질문을 떠올리기 위해 애써 봤다. 떠오르지 않았다. 얼마나 ‘문제를 발견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지 실감했을 뿐이었다. 강사는 가출 청소년을 가리켜 10번 가출한 사람이 아니라 9번 집에 들어간 사람이라는 표현을 썼다. 아뿔싸! 나는 강점관점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강점이 문제 바로 뒤에 있다는 말에는 크게 공감했다.
내 안의 테레사를 깨웠다. 기억도 함께 눈을 떴다. 엄마와 쌍둥이 자녀 모두 성인인 세 식구 명의로 통신 3사 연체금이 두둑한 집이었다. 최신 기종의 핸드폰은 개통해야 직성이 풀렸고, 미납이 쌓이면 친절한 매장 직원의 안내로 다른 통신사를 이용했다. 내 명의가 막히면 약속한 듯 가족 명의를 사용했다. 세 사람이 세 통신사를 활용하니 몇 년 새 미납금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있었다. 더 이상 어떠한 돌려막기도 불가하고, 빗발치는 고지서와 협박 같은 안내 전화에 시달리고서야 복지관에 도움을 청해왔다. 그전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몇 번이나 찾아가 만나고 복지관 이용을 권했던 터라 가족이 보내온 신호는 오히려 기회처럼 느껴졌다.
‘작은 일에 충실 하라’한 테레사 수녀 말처럼 가족이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성공 경험을 설계했다. 금융복지센터 상담에 동행해 조언을 구하고, 신용회복위원회에 방문해 개인워크아웃 제도를 신청했다. 아깝지 않을 만큼, 평소와 비슷한 소비를 유지할 정도의 상환 금액과 절반만 갚으면 나머지를 삭감해 주는 파격적인 제안에 가족들은 흔쾌히 서명했다. 이제 성실한 납부와 새로운 빚을 만들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연체금의 규모를 파악할 당시 방문했던 대리점이 떠올랐다. 가족들이 자주 오가는 길목에 있어 몇 번 가본 눈치였다. 번쩍거리는 금목걸이와 팔 곳곳에 그림이 가득한 점장은 문제의 주범이 아닐까 하는 불안을 낳았지만, 막상 얘기를 나눠보니 발달 장애인 등쳐먹는 모양 빠지는 짓은 안 할 사람이었다.
“앞으로 얼마가 있어야 빚 없이 핸드폰 개통할 수 있는지는 여기 사장님하고만 상담하는 거예요. 할부 안 끝났으면 다른 핸드폰 못 사는 거예요.”
사전 예고도 없이 은근슬쩍 사회정의 구현에 역할을 주었다. 감사하게도 맞다며, 언제든 여기 와서 물으라고 동조하는 바람에 조력자가 생겨 버렸다. 맛있는 거 한 번 덜 먹는 값으로 직접 빚을 해결한다는 사실이 뿌듯했는지, 책임과 역할을 멋지게 해내고 있다는 칭찬과 인정의 맛을 본 건지, 쌍둥이 동생은 상환일이면 꼭 전화해 가족 모두의 납부 사실을 자랑했다. 전화한 김에 형이 핸드폰 가게에 구경을 갔다 왔고, 해외 직구로 뭘 샀는지도 친절히 이르는 통에 어느 정도 위험 요소를 파악하는 정보가 되기도 했다.
사실, 상환 계획 앞뒤로 관계를 두텁게 만들 구실들이 있었다. 장마에 폐허가 된 집을 수리하거나 가족 모두와 알고 지내던 요양보호사를 쌍둥이 형제의 활동지원사로 배치하고, 먹는 약만 세어도 약국을 차릴 어머니의 종합건강검진을 연계해 병원에 동행하는 일들은 가족의 마음을 움직였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통신사 연체금 외에도 해결할 숙제는 여럿이었고, 힌트조차 보이지 않는 영역도 있었다. 그래도 더 이상, 만나서 얘기 나누자는 제안에 세 명이 팔짱을 끼고 골목 앞에서부터 나를 기다리지는 않게 되었으니 실로 눈부신 변화였다.
TV시트콤보다 더 맥락 없고, 예측하기 어려운 사례지원 과정에는 소위 얻어걸린다는 긍정적인 변수도 있지만 대게는 다 왔다고 생각했는데 원점이거나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경우가 더 많다. 그래서 어떤 일에도 의연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끈기가 필요하다. 사회복지사가 의지를 잃으면 당사자는 다시 반복된 어려움에 갇히기 쉽다.
관악구에 사는 김 사장님 동생 보기에 고민하던 진짜 문제는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다. 일생을 뒷바라지해도 깨진 독에 물 붓는 것 같은 동생에게는 김 사장님에게 생긴 친한 이웃, 그깟 게 무슨 대수일까. 하지만 우리는 김 사장님에게 생긴 변화를 봤고, 어쩌면 그 작은 변화가 일으킬 파도도 안다. 세상은 혼자 살 수 없고, 곁을 나눈 사람 한 명이 얼마나 큰 힘을 가진 지도 알기 때문에.
달걀 실험을 위해 고무줄을 연결하고 튼튼히 붙잡아 고정하는 것처럼 정 선생님의 주변 관계를 살리고, 연결하고, 강화한다. 여러 줄을 연결해 관계가 더욱 견고해지고, 안정되는 것이다. 136쪽.
「핵사곤 프로젝트」 (구슬꿰는실, 2024)
보고 배운 대로 살아서 결국 사회복지사가 된 나는 연결된 고무줄의 힘을 믿는다. 우리 대부분이 알 것이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을. 그 말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고, 우리들의 어린 시절이 그걸 증명한다.
나는 점과 선과 면의 논리를 좋아한다. 점과 점을 연결하면 선을 만들 수 있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 관계를 만드는 우리 일과 제법 닮아있다. 점은 마치 각자 빛나는 별 같고, 선은 꼭 느슨한 울타리 같다. 흩어진 선들을 모아 잊지 않고 잇는 것, 넘지 않고 지키는 것, 그리하여 선(善)을 이루는 것. 그 선을 연결하면 필요한 만큼의 큰 면을 만들 수 있겠지. 그 안에 우리가 사는 것이다. 건강하고 튼튼한 관계가 모여 드러날수록 누구나 살기 좋은 마을이 되어간다.
우리는 모두의 점이고 선이자 면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