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的 言術의 시간
서사와 과거의 시간
일반문장론에서 시간의 문제는 敍事의 문장에서나 적용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서사의 문장이라면 대표적인 것이 소설이고, 희곡이나 수필도 있을 수 있다. 논설문이나 논증문에서는 시간이 중요하지 않다. 무엇이 있다, 없다, 또는 이다, 아니다로 설명되고 증명되어야 하는 문장이기 때문에 무시간의 언술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소설 같은 경우는 어떤 인물의 행위가 있어야 하고, 행위는 반드시 시간의 경과 속에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꼭 시간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소설의 시간이나 희곡의 시간에서는 어떤 인물이 어떤 시간 속에서 벌어진 사건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형식이기 때문에 이야기의 내용은 과거의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형식을 완결형식이라고도 말한다.
사실 현재의 사건들이란 늘 우연적인 것들이 많고, 무질서하게 전개된다. 그러나 문학에 속에서 사건은 무질서해서는 안 된다. 비록 그것이 허구적인 사건이지만 독자로 하여금 논리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사건, 즉 완결성이 있는 사건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자기 총족적이요, 유기적인 경험을 재구성하여 질서정연한 줄거리를 가진 완결된 형식울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서사(narration)적인 문학 양식은 과거 시제나 과거완료 시제를 사용하는 것이 기본적인 조건이 된다.
(1)
사흘이 지났다. 밤중 복녀의 시체는 왕 서방의 집에서 남편의 집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시체에는 세 사람이 둘러앉았다. 한 사람은 복녀의 남편, 한 사람은 왕 서방, 또 한 사람은 어떤 한방의사- 왕 서방은 말없이 돈주머니를 꺼내어 십 원짜리 지폐 석 장을 복녀의 남편에게 주었다. 한방의사의 손에도 십 원짜리 두 장이 갔다.
이튿날 복녀는 뇌일혈로 죽었다는 한방의의 진단으로 공동묘지로 실려갔다.
-김동인 「감자」에서
(2) 조선달 편을 바라는 보았으나 물론 미안해서가 아니라 달빛에 감동하여서였다. 이즈러는 졌으나 보름을 가제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뭇이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칠십 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이효석 「메밀꽃 필무렵」에서
인용한 (1)의 소설문장 종결어는 모두 과거 시제를 취하고 있다. ‘지났다’, ‘옮겨졌다’, ‘둘러앉았다’, ‘주었다’, ‘갔다’, ‘실려갔다’ 등이 그것이다. 과거에 경험한 등장인물들의 행위를 현재의 독자에게 전달하는 언술행위로서는 당연한 업법일 수밖에 없다. (2)의 문장에서도 등장인물의 행위에 대한 언급은 과거형을 쓰고 있다. ‘감동하여서였다’와 마지막의 ‘젖었다’가 그것이다. 그러나 상황이나 심리를 묘사하는 경우에는 ‘흘리고 있다’, ‘산허리에 걸려 있다’와 같이 현재형을 쓰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행위를 말하는 서사문학은 기본적으로 과거형의 시제를 선택하게 된다.
서정시와 현재의 시간
그러나 서정시는 서사문학의 양식인 소설이나,주인공의 행위를 중심으로 언술하는 서사시와는 달리 시인이 자기 자신의 순간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과거의 사실을 인과 관계나 서사적인 순서에 의해서 언술하는 서사문학과는 달리 현재의 시제를 사용하는 것이 원칙이다. 시는 사건이나 인물의 행위를 전달하는 형식이 아니라 사건이나 인물의 인상이나 정서를 감각적 이미지를 통하여 ‘어떠하다’고 표현하는 것이지 ‘어떠했다’고 전달하는 방식이 아니라는 말이다.
문학에서의 시간을 말할 때는 진술하는 시간과 진술되는 시간을 구별하기도 한다. 여기서 진술하는 시간이란 저자가 작품의 내용을 진술하는 실제의 시간이고 진술되는 시간은 작품 속에 꾸며진 허구의 시간이다. 진술하는 시간은 현재이지만 진술되는 작품에서의 시간은 이미 일어난 것을 나중에 진술하는 경우도 있고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진술할 수도 있다. 이렇게 진술하는 시간과 진술되는 시간에는 오차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서정시의 경우, 그것이 비록 진술되는 시간일지라도 서정시의 본질상 현재시제를 채택하는 것이 원칙이라는 말이다. 그만큼 서정시는 완결된 형식의 문학이 아니라 순간의 형식을 요구하는 문학이며, 내용을 전달하는 보고형식의 문학이 아니라 순간의 감정과 인상을 표출하는 것으로 족한 문학이다. 서정시가 현재의 시재를 사용하는 것은 반드시 시의 내용이 물리적으로 현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사실을 가상적으로 현재화한다는데 그 특성이 있다. 이는 허구적 현재라는 말이다. 과거의 사건이든 미래의 사건이든 모두 현재의 감정이나 인상인 것처럼 가장하는 시의 장치라고 말할 수 있다.
(1)
주름의 집이 기우뚱 하수구 위로 기운다.
금방 쓰러져 캄캄한 하수구 맨홀 속으로
빨려들 것처럼 구부린다.
아주 주저앉는다.
집이, 오랜 세월 견뎌온 주름의 집이.
그리고는
차창에 스치는 붉은 꽃을 마구 토해낸다.
환한 대낮, 수많은 주름이 집을 의지한 채
길가에 비틀비틀 부지런히 방향을 찾고 있다.
-유강희 「노인」
(2)
한 개의 원이
굴러간다.
천사의 버린 지환이다.
그 안팍으로 감기는 별빛과
꽃잎들…….
금빛, 수밀도만한
세 개의 원이
천 개의 원이
굴러간다.
-문덕수 「圓에 관한 소묘」에서
(3)
대구 근교 과수원
가늘고 아득한 가지
사과빛 어리는 햇살 속
아침을 흔들고
기차는 몸살인 듯
시방 한창 열이 오른다
애인이여
멀리 있는 애인이여
이런 때는
허리에 감기는 비단도 아파라,
-박재삼 「무제」
인용한 시들은 모두 현재형의 시제를 사용하고 있다. (1)의 시는 노인을 ‘주름의 집’으로 비유하여 표현한 시다. 노인에 대한 이야기라면 과거를 쓰는 것이 자연스럽겠지만 이 시에서는 철저히 현재형이다. 즉 노인의 지난 삶을 현재화하여 보다 생동감 있는 언어가 되고 있다. (2)의 시에서도 ‘圓이 굴러간다’는 상상력이 몇 개로 나뉘지만 모두 현재화시키고 있다. 그런데 (1)과 (2)의 시는 진술하는 화자의 시점이 고정되어 있다. 한 곳으로 시선을 고정시켜 놓고 다양한 연상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3)의 시는 같은 현재형의 진술이기는 하지만 화자의 시점은 이동하고 있다. 처음엔 대구 근교의 과수원의 가지가 아침을 흔들고, 즉 과수원에 시점을 맞췄다. 다음엔 열이 오른 기차 쪽으로 시선을 옮기고 마지막엔 멀리 있는 애인 쪽으로 시선을 돌린 것이다. 대상을 현재화하면서도 소재를 바꾸고, 동시에 시선을 이동하여 시적인 진술을 한다. 이러한 경우 이동시점이란 말을 하기도 한다.
첫댓글 파일이 필요하신 분이 계신다기에 이번엔 파일을 함께 올립니다.
앞서 내용의 파일이 필요하신 분은 메일을 올려주시어요^^*
감사합니다. 교수님.//역쉬 쨩쨩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