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약봉지를 달고 산다
松堂 박성환
J군과 가끔 만나 식사하면서 나누는 담소는 즐거운 한때를 제공해 준다. 대화의 내용은 다양하지만 건강 이야기가 메뉴에 오르는 경우가 많다. 고령화 시대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최근에 감기를 앓고 있는 한 친구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J군은 “그 친구, 약봉지를 달고 산다” 하였다. 흔히 듣는 관용구적인 한마디지만 그날따라 그 말이 새삼 느낌에 와 닿는 것이었다. 기대수명이 늘어나니 병이 잦아지고 “삼시 세끼” 약 챙겨 먹는 일이 일상 중의 하나가 되었다. 병원에서 처방 받아 약국에서 비닐봉지에 넣어주는 약은 왜 그리 많은지. 한 보따리 가득하여 두툼하다. 약을 제때에 챙겨 먹는 일도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다. 진화론의 자연선택은 내가 번식을 잘 할 수 있는 수준까지만 나의 건강을 챙겨 준단다. 그래서 번식의 가망이 줄어든 노인네들은 자주 병원에 가게 된단다.
약봉지를 달고 사는 늙은이에게 남아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캄캄한 밤 어둠 속에서 이런저런 잡념 때문에 뒤척이다 겨우 잠들게 되지만 어김없이 아침은 오고 영락없이 잠은 깨인다. 그러면 생명의 풍선에서 하루치의 생명이 핫바지 방귀 새듯 기척 없이 새 나간다. 생활은 질병 친화적으로 진행된다. 병이 생기면 나타나는 통증은 사람을 괴롭게 한다. 프랑스 소설가 알퐁스 도데는 “통증은 언제나 내게는 새롭지만, 지인들에게는 금세 지겨운 일로 여겨진다. 너무나 주관적이어서 타인에게 전달할 수도 증명할 수도 없는 개인적 경험이다” 하였다. 누워도 불편하고 앉아도 불편하고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불편함, 나 혼자만 고통스러운 것 같은 외로운 마음, 웃음기 없는 나날들...! 통증의 고통은 이렇게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체험이어서 하소연해봐야 남들은 참고 견뎌라 할 뿐 별로 귀 기울여 주지 않는다. 그런데 진화론적, 생물학적 관점에서는 통증은 신체의 조직 손상을 경고하여 생명체의 삶을 보호해주는 적응 현상이라 한다. 질병이나 부상의 신호로서 시급히 휴식을 취하라는 메시지이며 다시 그런 위험한 상황에 놓이지 않도록 우리 마음을 훈련시킨다고 한다. 자동차의 연식이 오래되면 고장이 잦고, 집이 오래되면 여러 군데 비가 새는 것. 늙은 몸도 몇 십 년 동안 리모델링 한번 하지 않고 썼으니 여기저기 고장이 날 수 밖에. 약봉지로 겨우 고장 난 곳을 땜질해가며 지탱해가는 것 아닌가. *
신화에 의하면 약(藥)은 동서양 공히 태초에 풀(草)이 그 연원이라 한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약의 연원을 “신농씨상백초시유의(神農氏嘗百草始有醫)--신농씨께서 모든 풀(草)을 맛보시고 병 고치는 일을 처음 시작하셨다”하였다. 약은 풀에서 만들어내기 시작했다는 기록이다. 삼황(三皇)의 한 사람인 신농씨는 백성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약초를 찾아내어 병을 고치는 약을 조제하는 법을 가르쳤기 때문에 의료, 약사(藥師)의 조신(祖神)으로 받들어진다.
고대희랍에도 약은 풀에서 찾아졌음을 시사하는 신화가 있다. 선지자 폴리이도스(Polyidos)란 자가 크레타의 미노스 왕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을 때, 미노스의 어린 왕자가 꿀 항아리에 거꾸로 처박혀 죽는 일이 있었다. 미노스 왕은 현자(賢者)인 폴리이도스에게 죽은 왕자를 살려내라며 왕자의 시체와 함께 지하무덤에 가두었다. 폴리이도스가 어둠 속에 하염없이 앉아 있는데 난데없이 뱀 한 마리가 나타났다. 놀란 폴리이도스는 칼로 뱀의 머리를 찔러 죽였다. 그런데 조금 있으니까 또 한 마리의 뱀이 다가 왔다. 이 새로 온 뱀을 다시 칼로 죽이려 하자 뱀은 돌 틈새로 사라졌다가 이름 모를 풀을 한 입 물고 다시 나타나 그 풀을 죽은 뱀의 머리에 문지르자, 죽은 뱀이 다시 살아나 두 마리가 함께 돌 틈새로 사라졌다. 폴리이도스는 뱀이 떨어뜨리고 간 풀로 왕자를 문질러 보았더니 기이하게도 왕자도 뱀처럼 되살아나 털고 있어났다. 이렇게 어떤 풀에는 약효가 있어 약초로 쓸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단다. (뱀은 의술을 상징한다.)
그런데 약은 병든 사람을 ‘활인(活人)’케 하는 치료의 약효(藥效)뿐만 아니라 죽음과 연관되는 독(毒)의 요소도 들어있다고 알려져 있다. 국문학자 양주동 박사는 한문자인 ‘藥’자를 해자(解字)하여 ‘죽음’과 연관 있다고 풀이하였다. ‘藥’자를 해자하면 풀 초(艸) 아래 실 사(糸糸) 사이에 흰 백(白)자가 있고 그 밑에 나무 목(木)으로 되어있다. 양 박사는 이를 풀이하여 “잔디 풀(艸) 아래에 끈(絲)으로 백골(白)이 양쪽으로 염(殮)되어 나무 관(木)에 누웠으니 무덤에 묻힌 죽은 사람의 형상이라” 하여 죽음과 연관 지었다. 고대희랍에도 약에는 독의 요소가 함께 들어있다는 신화가 있다. 신인(神人) 페르세우스(Perseus)가 괴물 메두사(Medusa)를 쳐 죽이고 두 방울의 피를 가져온다. 의술(醫術)의 신 아스클레피오스(Asclepios)는 이 피를 환자의 치료에 이용하였다. 메두사의 피에는 산 자를 죽게 하는 힘을 가진 피와 죽은 자를 소생시키는 힘을 가진 피, 두 종류가 있었다. 메두사의 이 두 방울의 피를 붙여놓은 것이 “Pharmakon”이라는 글자이고 여기서 탄생한 것이 [Pharmakon = poison(독) +medicine(약)]의 공식이다. (약국의 조제실을 표시하는 “Pharmacy”의 어원이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서도 로렌스 신부가 텃밭의 약초에서 추출한 물약을 마신 줄리엣이 가사(假死)상태에 빠졌다가 살아난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모든 약은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고 한다. 의사는 약을 처방할 때 효능과 부작용을 일러준다. 약사는 약의 부작용을 줄이기 위하여 약봉지에 복용의 용량과 시간을 명기하여 환자에게 잘 지키라고 당부한다. 잘못 복용하면 이 독의 요소가 발호(跋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프면 주사나 약에 의존하는 우리와 달리 서구의 의사들은 주사나 약 처방을 삼간다. 우리 몸의 면역력과 자연치유력에 맡긴다는 뜻이다. 파르마콘(pharmakon)의 독의 요소를 의식한 때문인 듯.
늙은이가 되면 그렇잖아도 말이 많다고 핀잔 듣기 일쑤인데 거기다 몸이 아프면 더욱 수다스러워진다. 그 수다를 듣노라면 늙은이가 달고 사는 약봉지는 단순히 하나의 ‘약봉지’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기쁜 이야기 서글픈 이야기들이 숱하게 함축된 ‘사연 보따리’이기도 하다. 그 사연들은 현재진행형일 수도 있지만 과거형일 때가 많다. 인간의 마음은 수많은 감정의 아이템들--사랑, 미움, 기쁨, 즐거움, 서러움, 연민, 자만, 회오(悔悟) 등--로 점철되어 있다. 노년과 병이 이것들을 마비시키거나 하나씩 빠져나가게 한다. 빠져나가면 마음이 가벼워져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더욱 무거워진다.
병은 그러나 삶에 꼭 불행한 쪽으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무병장수(無病長壽)라는 축복받은 인생이 있는가 하면, 일병장수(一病長壽)란 말도 있지 않은가. 몸에 한 가지 병이 있으면 그 때문에 매사에 조심, 무리하지 않고 선한 생각과 평온한 마음을 잃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장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P군은 같이 식사할 때도 식후 조그마한 휴대용 약상자를 꺼내 약을 입에 털어넣곤 한다. 당뇨병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반평생을 달고 살아오지만, 당뇨병에 관한 한 늘 연구하여 달인이랄까 박사랄까,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아는 만큼 수칙을 철저히 지키고 실천한다. 마음은 언제나 낙천적이다. 그래서 보통사람 못지않게 건강하다. 그러면서도 또래들보다 훨씬 훌륭한 일들을 많이 이루어냈고 주위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칭송을 받으며 구김살 없는 삶을 힘차게 영위해가고 있다. 그는 전형적인 일병장수인형(一病長壽人型)이다. 동반자가 된 병이 남들과 다른 일상을 있게 했다. 남들보다 많이 생각하고 일감에 정신없이 매진한다. 그런 그의 일상의 행보는 우리들에게 건강에 관한 한 나태할 여유가 없다는 것, 삶에 낭비할 시간이 없다는 것을 냉정하게 일깨워준다.
달고 사는 약봉지는 죽음이 그리 멀리 있지 않음을 느끼게 하는 빌미가 되기도 한다. 내 몸 어느 부분으로 언제 침입하여 가차 없이 나를 낫질해 거둬갈지 모르는 불청객! 죽음은 우리로 하여금 영화(榮華)나 사랑 등, 삶에 대한 가없는 집착을 절멸(絶滅)케 하지만 고달픈 삶을 마감해주는 달콤한 영원의 안식을 제공해주는 사자(使者)라는 양면적 면모를 지니고 있는 것. 그러니까 죽음은 오히려 나의 고마운 동반자가 아닐까. 어느 시인은 “내 생일은 내가 태어난 날이기도 하지만, 내 죽음도 함께 태어난 날이다. 내가 지금 75살이라면 내 죽음도 75살이다. 내 삶과 내 죽음 사이에는 시차(時差)가 없다. 내가 죽어야 죽음도 같이 죽는다”라며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은 존재로 보고 있다. 약과 독이 한동아리이듯, 이 몸과 죽음은 한 동아리, 다만 동반(同伴)의 의식을 못할 뿐이 아니겠는가.
100세 시대라는 가당찮은 고령 장수 시대에 무병장수는 어려운 일. 약봉지를 달고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릴 때 초연해질 늙은이는 얼마 안 될 것이다. 미국 문필가 에머슨은 인생은 가시에 묻은 꿀을 빨아먹는 것이라 하였다. 약봉지를 달고 살더라도 삶의 꿀을 빨 때 혀를 찔리는 불상사가 없도록 내 몸은 내가 갈무리하여, 남의 신세 지지 않고 살아갈 밖에. 어제의 바로 그 태양이 오늘도 다시 떠오르지만 살아가는 매순간은 새로운 시간을 마주하는 거다. 새로움에 가슴 열고 무사통과해야 하는 것. 길가다 넘어지는 것은 큰 바위가 아니라 작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 삶도 조그마한 부주의와 나태로 인하여 쪼개진다. 예방에 들이는 노력과 돈은 치료에 들이는 노력과 돈보다 훨씬 적게 든다. 스트레스 받지 않고 닥치는 모든 일은 낙천적이고 평온한 마음으로 마주하는 예방 중심의 관리 말이다. 달고 사는 약봉지는 나태에 빠지지 말고 조신하게 살라는 무언의 파수꾼으로 여길 수 있는 수양(修養) 정도는 쌓을 수 있지 않을까.
(2015. 9.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