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문: 훈수 정만양, 비문 글씨: 노우 정충필
나의 고향마을 외가 선조 효자 동래진병마사 귀암 양배 선생 정려비 귀암공은 공민왕의 왕비 노국대장을 모시고
1351년 원나라에서 고려로 온 충헌공 양기의 증손이다
양기는 원에 대한 세공을 감면하게 한 공로로 상당(청주)백으로 공신 책봉되어 청주 양씨의 시조이다
귀암공은 포은 정몽주 선생이 나고 자란 영천 우항리에서태어나 포은의 영향을 입었다
귀암공의 매부가 황희 정승이고 회재 이언적 선생의 증조모가 따님이다
세종의 후궁인 혜빈양씨가 양배의 종질녀인데 세종의 유훈으로 간직한 옥새를 세조에게 내놓지 않다가 세 모녀가 화를 입었고 여기에 연루되어 양배는 포항 연일로 유배왔다가 관직을 단념하고 영천으로 돌아오고 호를 귀암이라 했다.
세종 때 인물인 귀암공은어머니가 운명하려할 때손가락을 베어 피를 먹여드려 소생하게 하여 2년 동안 더 사시게 하고 3년상 여묘살이로 효자 정려비가 내려졌다.
동국여지승람 영천군 편에효자로 올랐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양배 거려도와 설명
임진왜란 뒤 광해군 때 해이해진 조선사회에 유교윤리 확립과 민족 자존감 고양을 위해 발굴한 1000여명의 한국의 효자 충신 열녀를 실은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도 귀암공이 실려있다
그림에 한글 한문 설명을 붙여 유교사회윤리를 보급했다
영천 우항리 포은 효자비
삼강행실도 포은 운명도
영천 우항리에 현전하는 포은 효자비 삼강행실도 포은 살해 장면 포은이 위화도회군 뒤에 창왕을 옹립한 이성계 일파에 가담하여 대제학 찬성사에 임명되어 실권을 장악한 1389년 3월 중순 영천군수 정유가 세운 것이다
태종 때 문충이란 시호가 내리고 복권되기 전까지 포은의 사당이나 효자비가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허물어지고 파괴된듯하다이 비석도 논밭에 파묻힌 것을 성종 때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한 손순효가 현몽한 포은의 부탁을 받고 마을 노인에게 물어 되찾아내어비각을 세워 보호하였다
비각에는 손순효의 시와 포은의 후손 정거의 기문 현판이 걸려 있다
포은은 생전에 사대부들이 주자가례를 따르도록 해야한다는 건의를 하였다 고려 충신 포은의 살해장면을 그린 삼강행실도 세종 때 편찬된 이 책과 용비어천가에서 포은 순절처가 포은의 저택이 있는 태묘동 입구임을 잘 보여준다
포은은 주지하듯이 선죽교에서 순절하지 않았다 포은 개성 집터는 숭양서원이 되었고 그곳에 포은 충신비가 있다
포은은 19세에 부친상 29세에 모친상을 입고 불교식 상제례가 아니라 원에서 들어온 주자학의 가정예법서 주자가례를 준수하여 여묘살이를 하였고 국가로부터 효자정려문 표창을 받았다
세종 때 사람인 효자 양배도 포은이 태어나고 포은 정려문이 있는 우항리에서 태어나 자랐기에 포은 효자비를 보며 포은의 효행의 풍화를 입었던 것이다
포항 죽장 입암 입암정사
여헌 장현광 진영
효자비 글씨를 쓴정충필이 전염병인 두창(마마 죽거나 낫더라도 곰보가 되는 천연두)을 피해 산중의 입암으로 피신하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청송으로 피난간여헌 장현광이 권극립 손우남 정사상 정사진 영천의 4 선비의 초청으로 입암에 왔고 입암을 중심으로 28경을 명명했다
노계 박인로가 여헌에게 성리학을 배우며 종유할 때 입암가 28경 시조 29수를지었다
입암서원에 봉안된 여헌 장현광 진영제자 학사 김응조가 선산부사시절 화공을 보내 그리게 함
양배의 효자 정려비가 오랜 세월에 파손되어 17세기 숙종 때 영천의 형제 학자 훈수 정만양이 제자 이소를 통해 효자마을 노인들의 요청을 받고 여헌 장현광의 문인으로 영천 선비 수암 정사진의 기록 청주양씨족보 동국여지승람 등을 바탕으로 비문을 지었다
안강 하곡리 성산서당
하곡리 수재정
정자명은 맹자 이루장이출전
수재정 편액 하계정사
수재정 앞 정충필 글씨
바위 각자 광영대
영남 퇴계학파 유학자들이
애송했던 주자의 시
관서유감이 출전 관서유감
독서를 하며
반무방당일감개
반묘의 연못이 거울처럼 맑아
천광운영공배회
하늘의 구름이 떠돈다
문거나득청여허
묻나니 어찌하여 그렇게맑단 말인가
위유원두활수래
위에서 활수가 흘러 들어오기때문이네
수재정 계곡은 상하에 두 폭포가 물소리 내며 흐른다
수재정은 독락당 계정과
계곡 암반은 옥산서원 앞
용추폭포와 닮았다
정충필 글씨(위)
제산 김성탁이 조현명에 답한간찰 학파 정관검의 간기(아래)
-조철제, 또 다른 경주를 만나다
양배의 효자비 글씨는18세기 경주의 명필 노우 정충필이 썼다
임진왜란 때 포항 흥해에서
안강 하곡리로 들어가 학동을 가르치고 수재정을 짓고 공부한 쌍봉 정극후는 한강 정구 여헌 장현광의 문인이다 학덕이 높아 유림의 추천으로 봉림대군(효종)의 사부가 되었다 그의 후손들은 모두 학문과 글씨가 뛰어났다 정연 정욱 정충필 정관검 정석범 전 서울법대교수 행자부장관 국회의원 정종섭 의원이 쌍봉의 후손 양배 효자비도 정충필이 썼다
양동 정충각 비문 편액 쌍봉 묘비 수재정 바위각자 광풍대가 모두 효자 양배의 외손인 명필 정충필이 썼다
정충필의 부인은 관직에서 물러나 영천에 호연정을 짓고 살았던 대학자 병와 이형상의 증손녀이다
탐라순력도는 병와가 제주목사 시절 그린 것이다
태극문변 중간본 회연서원 간 주돈이의 태극도설에서
무극이태극이란 사상이 유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도교의 노자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단종의 충신 조상치의 손자 망기당 조한보 망재 손숙돈이 회재 이언적과 논쟁한 왕복서간을 이언적의 손자 이준이 퇴계 이황에게 보여 태극에 대한 학설의 진수를 보여준다는 극찬을 들었다
이언적은 조한보의 학설을 불교의 선에 가깝다고 논변하였다
한강 정구의 명으로 태극문변이 안동부에서 초간되었다 육구연 육구소 형제가 주희와 논쟁하는 왕복 서간을 한강 정구가 덧붙였다
옥산서원에서 중간본을 낼 때 이 책은 정구의 교정을 거치지 않은 것으로 오류를 지적한 여헌 장현광의 발문을 덧붙여 간행해야 한다고 노우 정충필이 주장했고 경상도 유림도 정충필을 지지하였다
성주 회연서원에서 중간본을 내며 미세한 부분까지 정충필의 조언을 따랐다
이 책의 출간으로 무극이태극 학설은
주돈이-주희-이언적이 옳고
노자-육구연 육구소-조한보 손숙돈이 그르다고 인식되었다
팔괘와 무극이란 글자가 보이는 화산의 광장
태극기에도 태극무늬가 나오고 이황의 성학10도의 제1도로 성리학 우주관 세계관을 보여주는 태극도설이다
태극 문화의 창안은 당말 송초의 도사 희이선생 진단이 한 것이다.
희이선생 진단의 흔적을 재작년 중국 화북지방 여행하면서 룽먼석굴과 화산에서 만난 일이 있다.
서악 화산은 중국 5악에 들며 도교문화의 명산이다
북봉에는 김용의 무협지 무대가 되고 지금도 태극권문파의 계승의식이 치러지는 장소에
세워져 있다
중국의 예술, 무술, 의학, 처세관 등 중국 문화의 저변에는 도교 사상이 광범위하게 깔려있다.
도교 희이선생 진단이 창안한 태극문화는 신유학으로 들어가 주렴계의 태극도가 나오고
퇴계의 성학10도 제1도가 태극도설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유교 문화인 태극, 8괘가 조선시대에는 불교에도 나타난다.
은해사 운부암 수미단에도 태극무늬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