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
백동흠
금요일 밤, 아니 토요일 새벽2시!
세찬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받으며 북쪽을 향해 하버 브리지를 날다시피 달린다. 창문 유리가 내려진 상태라서 얼굴에 그대로 쌔 하게 바람결이 와 닿는다. 출발지 스카이 시티에서 목적지 그렌필드로 향하는 중이다.
한 젊은이를 태웠는데 술에 꽤 취한 듯 보인다. 신선한 바람에 취기라도 좀 깨게 할까 해서 유리창을 더 내려준다. 뒷자리에서 ‘웅얼꽤웅얼’ 잠꼬대를 하면서 고개를 떨군 모습이 룸미러로 언뜻언뜻 춤을 추고 있다. 한 주일간 일에 매진하다가 주말을 맞아 마음껏 먹고 마시고 속을 풀어낸 모양이다. 젊음의 향연 장이라 뜨거울 수밖에 없다. 발산하는 젊음의 특권을 눈감아준다.
하버 브리지 정상을 달리고 있을 때다. 갑작스레 토하는 소리가 난다.
“우~웩!”
‘아니, 뭐야? 여기서 지금?’
계속 줄지어 뒤따라 달려오는 차 앞에 설 수도 없다. 등 떠밀려 울며 겨자 먹기로 달릴 뿐이다. 젊은이는 쉬지 않고 하수구처럼 콸콸 토해낸다. 엄청난 구토물의 역한 냄새가 차 안을 마비시키고 만다. 냄새 참기도 어렵지만 치울 생각을 하니 아찔하다. 기도 안 차고 다음 일이 깜깜하다. 젊은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최대한 토해내려고 안간힘을 써대는데도 난 속수무책이다. 모터웨이 출구로 빠져나오기까지 단 몇 분이 왜 그리도 길게 느껴진 지 모르겠다.
길가에 차를 세우고 뒷문을 확 열어젖힌다. 젊은이는 별 요동도 없이 고개 숙인 채 계속 토해대고 있다. 도대체 엄두가 안 난다. 택시 영업으로는 바쁜 주말 밤 운전인데 당장 일을 접어야 할 판이다. 차 안 청소 할 일이 난감하기만 하다. 바쁜 세상살이 하다 보면 이럴 때가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 이렇게 좋지 않은 일이 크게 벌어지면 그만 다음 할 일을 잃어버린다. 순간 바보가 된다. 딱 그 심정이다. 말도 나오지 않는다.
다시 젊은이 등을 두드리며 일으키려는 데도 꿈 쩍을 하지 않는다. 도대체 무슨 배짱인가. 저 움츠러드는 모습은 뭔가. 겨우 양어깨를 붙잡아 일으키려다 말고 소스라치게 놀라고 만다. 정말 ‘Oh, My God!’ 이다. 젊은이가 큰 플라스틱 들통에 머리를 넣은 채 그 통을 꼭 안고 있는 게 아닌가?
가까스로 젊은이를 차 밖으로 내리게 하는데도 플라스틱 들통을 신주 보물단지 품듯 안고 나온다. 세상에, 그렇게 토해 댔는데도 차 안에는 오물 한 점 묻지도 않고 깨끗하다. 젊은이가 밤중에 나를 쓰러질 정도로 놀라게 하고 만다. 아니, 이게 어찌 된 일이야? 극과 극이 바뀌는 순간이다. 뭐지?
스카이 시티에 다른 손님을 내려놓자 마자, 줄 서 기다리던 이들 가운데 두 젊은이가 잽싸게 뒷자리에 올라탄 게 기억난다. 그러다 잠시 뒤 한 친구가 내리더니 창밖에서 손을 뻗어 내 손에 지폐를 몇 장 건네며 외쳤다.
“그렌필드! 이거면 충분하지요? ”
나는 예사로이 OK 하면서 출발하지 않았던가. 예상에 얼마쯤 될 거로 생각하고 받은 것인데 약간 더 얹어 준 거였다. ‘그대신 알아서 수고 좀 해주시고요.’ 이런 묵시적인 주문 속에 일이 이렇게까지 전개될 줄은 몰랐다. 뒷자리 친구 무릎 사이에 플라스틱 통을 잽싸게 놓고서 친구에게 미리 단단히 다짐해둔 모양이었다. 택시 잡기 전에 이렇게… .
“너 분명히 이 상태로는 토한다. 그래도 집에는 가야 하고, 애꿎은 택시에 토해서도 안 되고, 이 길만이 최상이다. 토할라치면 무조건 이 들통에 머리 숙이고 토해라.”
그 들통 속에 꽤 많은 화장지를 넣어 뒷자리 바닥에 놓아둔 것이다. 친구를 아끼는 자상함도 실어
보낸 터였다. 가녀리게 부서져 내리는 가로등 불빛에 젊은이의 휑한 두 눈이 슬픈 짐승 같다. 포기 직전까지 갔던 터라 기대할 것도 없다. 상황은 이미 다 내려놓은 것이다. 끓어오르던 실망도 뜨거운 물에 데쳐진 나물처럼 힘없이 사그라지고 만다.
“어이, 젊은이! 엄청 취했구먼. 그래도 젊은이는 부자인 줄 알아!”
하는 나의 말에 ‘웬 부자?’ 하는 시선으로 나를 멍하니 바라본다. 젊은이의 등을 톡톡 두드리며 다시 한 번 격려의 말을 전했다.
“참 좋은 친구, 지혜로운 친구를 가졌으니 젊은이는 부자지”
젊은이가 통을 들고 자기 집으로 비틀비틀 들어간다. 진입로 좁은 길을 헤드라이트로 한참이나 비추어 준다. 차 문은 모두 열어 놓고 환기를 시킨다. 한참을 그대로 기다린다. 멍하니 쉬는 게 뭐해 뭉쳐진 팔 어깨 무릎 발 근육 스트레칭을 하면서 토끼 뜀도 해본다. 멋쩍은 웃음이 나온다. 젊은이 덕분에 달밤에 체조하고 있다니… .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 는 말이 이 밤도 해당될까. 참 오랜만에 훈훈한 정을 느끼는 밤이다. 진흙 속에서 피어오르는 연꽃이라도 보는 기분이다. 대학 신입생 때,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 매료되었던 함석헌 선생의 말씀이 떠오른다. ‘그 사람을 가졌는가’. 뭘 거창하게까지 말할 것도 없다. 적은 어려움도 나의 일처럼 신경 써주고 한 발치 앞을 헤아려 주는 마음이다. 작은 배려로 준비해 주는 마음, 그 속에 그런 사람이 살아있다.
술 취한 친구를 위해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 태워 보낼 줄 아는 친구는 많다. 거기에 예상 요금보다 조금 보태주며 택시 운전사에게 부탁하는 마음마저 실어 보내는 친구도 있다. 토하면 힘들 택시 운전사까지 배려하는 마음도 있다. 토할 것을 대비해 어디에서 휴지통을 찾아내 화장지까지 듬뿍 담아 택시 운전사 몰래 술 취한 친구 발 사이에 함께 실어 보내는 친구도 있다.
어떤 사람이 있는가? 어떤 사람으로 살고 있는가?
2015년도 중반을 지나 7월 겨울철이다. 하버 브리지 맨 위를 지나 달리듯 후반 막바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시원한 바닷바람을 느끼며 달리는 내리막 길이다. 의례 그러려니 당연스레 생각하다가도 안전하게 가는 것만도 고맙게 느껴진다. 따뜻한 사람의 온기가 더욱 생각나는 계절, 그런 사람이 그립다. *
(200 x 16 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