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명으로 풀어본 한국사
성북구 종암동의 유래
一 북처럼 생긴 바위가 있던 마을 一
종암동鍾岩洞의 동명 유래는 현 고려대학교 뒷산에 북처럼 생긴 커다란 바위가 있어 북바위로 불렸으며, 한자로 종암鍾岩 또는 고암鼓岩이라고 부른데서 연유되었다.
종암동은 야산의 능선을 끼고 있기 때문에 동 전체가 산비탈에 주택가를 형성하는 반월형을 이루고 있고, 종암1동은 면적의 3분의 1 이상이 임야 지역으로 다른 어느 동네보다 공기가 맑고 신선하다. 1945년 이전만 하더라도 종암동 일대의 야산은 산림이 울창하여 인근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휴식처로 이용하기도 하고 산에서 나오는 낙엽이나 나무의 잔가지들은 땔감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광복과 함께 자유를 찾아 남하해 온 많은 사람들이 이곳 산비탈에 정착하면서부터 마구 남벌하였고, 한국전쟁 때 미아리와 종암동을 잇는 국군의 서울 방어 저지선이 바로 이 능선이었으므로 포격전에 의해 많은 나무가 불타서 한때는 민둥산이 되었다. 그 후 1960년대 말부터 조림 및 식수 사업으로 지금은 수령이 오래된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종암로鍾岩路(고산로)를 사이에 둔 종암1동은 안말이라고도 하는데 옛날에는 경주慶州 김金씨와 경주 정鄭씨가 집단적으로 모여 살았던 촌락이었다. 그렇지만 사이가 원만치 않게 되자 한 동리에 살면서도 서로 외면하고 생활하여 통혼조차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의 종암1동은 집촌적인 성격이 없어져 여러 성을 가진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다. 안말은 다시 지금의 숭례초등학교를 중심으로 학교의 앞쪽은 큰 해창海昌, 뒤쪽을 중심으로는 작은 해창이라고 불렀다. 이 지역은 일반 주택단지로서 큰 공장 등은 없고 현재는 재개발 지역으로 약 2천 세대의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해창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조선조 제18대왕 현종의 셋째 딸인 명안明安 공주와 남편인 해창위海昌尉 오태주吳泰周의 묘가 있다 하여 불리게 된 것이다. 명안 공주의 이름은 이온희李溫姬로 조선왕조 역대 공주 가운데 유일하게 본명이 남아 있다.
모랫말 또는 모랫골로 블린 종암2동은 이곳의 정릉천 상류에서 내려온 모래가 쌓여 불리게 된 이름이다. 정릉천은 물이 맑아 빨래터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종암동 전경
명안공주와 오태주의 묘는 원래 고려대학교 본관에 있았다. 이후 안산으로 이장되었고 현재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