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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12:1-28) 발묘조장(拔苗助長)
1. 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좋아하거니와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
2. 선인은 여호와께 은총을 받으려니와 악을 꾀하는 자는 정죄하심을 받으리라
3. 사람이 악으로서 굳게 서지 못하거니와 의인의 뿌리는 움직이지 아니하느니라
4. 어진 여인은 그 지아비의 면류관이나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지아비의 뼈가 썩음 같게 하느니라
5. 의인의 생각은 정직하여도 악인의 도모는 속임이니라
6. 악인의 말은 사람을 엿보아 피를 흘리자 하는 것이거니와 정직한 자의 입은 사람을 구원하느니라
7. 악인은 엎드러져서 소멸되려니와 의인의 집은 서 있으리라
8. 사람은 그 지혜대로 칭찬을 받으려니와 마음이 굽은 자는 멸시를 받으리라
9. 비천히 여김을 받을지라도 종을 부리는 자는 스스로 높은 체하고도 음식이 핍절한 자보다 나으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중심으로 <발묘조장>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발묘조장’이라고 하는 한자는 여러분 다 아시겠습니다.
발묘조장 拔苗助長(뺄 발, 모 묘, 도울 조, 길 장), 이 말은 글자를 그대로 해석을 해보면 '벼의 싹을 잡아 빼서 길이를 늘인다'는 뜻입니다. 논에 모를 심어놓고 그 모를 잡아 빼서 그 모 이삭의 높이를 높인다는 것인데, 이 이야기는 맹자의 공손추 상편에 나오는 에피소드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송나라에 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모내기를 한 뒤 얼마 뒤에 논에 와 보니 옆집 논의 벼는 쑥쑥 자라고 있는 것 같은데, 자기 논의 벼는 그 옆집 논의 벼만큼 자란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농부는 궁리 끝에 자기 논에 있는 모의 싹들을 전부 잡아 빼 올려 봤습니다. 옆집 논의 모의 높이와 거의 비슷한 길이가 되는 것 같은 것을 느끼면서, 하루 종일 자기 논의 모든 모들을 다 잡아 빼서 길이를 늘여 놨습니다. 그리고 집에 와서 피곤한 몸으로 털썩 주저앉으면서 가족과 자녀들에게 자랑을 합니다. 옆집 모를 보니까 우리 모보다 더 많이 자란 것 같더라. 그래서 그것들을 다 뽑아서 조금씩 조금씩 위로 올려놓았더니 키가 똑같아졌더라. 깜짝 놀란 가족들이 그 다음날 부랴부랴 논에 와보니까 아닌 게 아니라 논의 모들이 다 말라 죽어 있었다는 얘기인데 이걸 바로 우리가 발묘조장이라고 하는 사자성어를 사용합니다. 또 간단하게 여론을 조장한다고도 합니다.
주로 부정적인 뉘앙스를 품고 있는 단어가 조장이에요. 의도적으로 길이를 늘인다. 여론을 조장한다. 있지도 않은 여론을 억지로 만들어 내는 것을 조장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바로 발묘조장의 상태가 우리 인간의 삶의 모양을 그대로 드러내 주는, 아주 적절한 단어라고 생각을 하면서 오늘 제목을 그렇게 잡아 봅니다.
본문에 보면 여러분 특히 3절에 “사람이 악으로서 굳게 서지 못하거니와 의인의 뿌리는 움직이지 아니하느니라”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악인과 의인의 얘기가 지금 계속 반복해서 나옵니다. 이 모든 연속성이 없어 보이는 짧은 경구들을 통일성 있게 담아 두고 있는 하나의 그릇이, 악인과 의인이라고 하는 두 그릇에 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악인이 뭡니까? 악이 뭐지요?
주기도문의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할 때 시험에 드는 게 뭐예요?
하나님이 과연 살아 계시면서 내 삶에 대한 당신의 생각이 있으시고 의견이 있으실까? 하나님이 정말 지금 나를 이끌고 계시며 나를 사랑하고 계시는 걸까? 안 믿어지는 겁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실까? 내 삶에 무슨 관계가 있을까? 이게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그런 시험이 들면 그 다음에 악이 따라 옵니다. 그때 악이 하나님께 묻지 않고 ‘내 스스로’라는 말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스스로 모든 삶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판단을 하며 계획을 하며 행동하며 사는 것이 바로 악이에요.
그러므로 하나님을 제외하고 내 스스로 하는 게 있어서는 안 되는 겁니다. 그러지 말게 해 달라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자들도 악을 행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서도 악을 행합니다.
일단 상황이 딱 주어지면, 그 상황이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를 판단하는 일에서부터, 하나님께 물어야 되는데, 판단은 내가 해 버리고 그 다음에 이 상황은 잘 된 상황이니까, 더 장려하고 더욱 더 권장해 가고 더욱 더 조장해 가자고 결심을 하고 기도를 한다면 이게 악입니다. 스스로 그 상황이 좋다. 나쁘다. 를 먼저 판단하고 난 뒤에 이건 잘못됐다. 그러니까 개선이 돼야 되겠다. 결정한 뒤에 하나님께 개선의 방법과 뜻을 묻는 것이 다 악이라는 겁니다. 이게 악인이라는 거예요. 총칼 들고 강도짓 해서 악인이 아니라 살인해서 악인이 아니라 이게 악인이라는 겁니다.
영적으로 보자면 사람을 죽인 자나 자기 스스로 생각해서 훌륭하게 번듯하게 세금 꼬박꼬박 내면서 자기 사업을 잘 하는 사람이나 영적으로 보자면 똑같은 악인입니다. 하나도 더 깨끗하지 않다는 겁니다. 스스로 사업을 잘 해요. 계획을 세우고 방향을 정하고 스스로 한다는 것은 뭔지 아십니까?
사람을 죽인 자보다 더 악한 이유는, 내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지워버리고 말살시켜 버리고 하나님을 내 삶의 영역에서 죽여 버리는 겁니다. 하나님이 죽임을 당하실 수 없어요. 그러나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가 쫓겨난 것을 거꾸로 얘기하면, 아담과 하와의 삶의 영역에는 이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쫓겨난 것이지만 아담과 하와가 중심이 돼서 보는 관점을 가지고 생각을 하면 아담과 하와가 중심이 되면 어떻게 보이느냐?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의 삶에서 또 없어져 버리는 것이에요. 하나님을 죽이는 거예요. 스스로 한다는 것은 내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죽이는 거예요.
여러분! ‘사람이 악으로서 굳게 서지 못하거니와 의인의 뿌리는 움직이지 아니하느니라’라는 말이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 같고 이 말을 할 필요가 없는 것 같아요.
악한 일을 해서 굳게 선다는 게 말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왜 이 말을 하는가? 악이라는 게 우리가 보는 것처럼 그렇게 흉악한 마피아들의 행동과 삶을 살아야만 악이 아니라는 겁니다.
굳게 서지 못하는 이유가 다 악을 행하기 때문인데 악이 뭡니까? 스스로 다 하는 겁니다. 이 발묘조장에서 얘기한 것처럼, 모의 키를 높이기 위해서 땅에서 뽑아 버린 겁니다. 키를 맞추기 위하려는 농부의 마음이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고 계획하고 판단하는 모든 것들이 다 그 농부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모가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될 땅은 무엇입니까?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내 인생의 진로와 내 인생의 경로를 금을 그어놓으신 것이 바로 땅이에요. 모가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될 논바닥은, 우리 인생에게 있어서는 '나'라는 인생이 모요, 벼라면 우리가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될 논바닥은 하나님나라의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경로를 위하여 줄을 그어놓은 선상이 바로 우리가 뿌리를 내려야 할 논바닥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논바닥에 뿌리를 내리는 방법이 하나님께 묻는 것이요. 하나님께 정답을 구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왕이 되었을 때에 부귀영화를 원하지도 않았고, 외교정책에 있어서 우위를 점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시기를 바라지도 않았고 부국강병을 원하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자기에게 주어지는 상황마다 그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정답을 듣게 해달라고 구했는데 그게 바로 지혜를 구한 겁니다. 지혜는 듣는 마음입니다.
나 스스로는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출입을 알 수 없는 어린아이입니다. 내가 직장에 나가서 할 일을 직장 상사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고 하지만, 내게는 그럴 능력도 없고 그럴 지혜도 없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아이를 낳았습니다. 아이를 키울만한 지혜가 전혀 없고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만 되는지 아이디어나 생각이 아예 없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이 태도가 바로 정답을 구하는 태도이고 그것이 의인이 든든하게 선다는 내용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금을 그어놓으셨어요. 내가 가야될 길을 다 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나 운명적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에요. 내가 인격적으로 그 하나님의 답을 구해야 돼요. 나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도 배웠기 때문에 판단이 섭니다. 내 인생에 대해서 내가 얼마든지 계획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부인합니다. 왜냐하면 내 속에 죄를 보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은 잘 나가는 것 같아도 언젠가는 내 속의 죄의 뿌리들이 나를 지배해 버릴 것을 알고 두려운 마음으로 내 속의 생각과 판단대로 움직이지 않고 나를 부인합니다. 그러기 위해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죽어 버립니다. 나는 죽은 자임을 인정합니다. 그러고 나면 하나님의 정답이 떨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모가, 벼가 논바닥에 든든히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도록 잘 자라고 있는 상태요. 그러지 않고 내가 의욕을 갖고 내가 의지를 곧추 세우고 내가 계획하고 내가 판단하고 생각하며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악인이요. 벼를 논바닥에서 끌어 올려서 키를 맞추려고 하는 이 송나라 농부의 의도적인 어리석은 행위가 바로 우리의 스스로 인생을 꾸려 가려는 태도입니다.
여러분! 그런 예를 6절 같은 경우 보면 “악인의 말은 사람을 엿보아 피를 흘리자 하는 것이거니와 정직한 자의 입은 사람을 구원하느니라”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이렇다는 것이에요. 왜 ‘악인의 말은 사람을 엿보아 피를 흘리자.’라고 할까요? 악인이 마피아 같은, 아니면 뒷골목 깡패 같은 이런 사람들이 아니라고 했어요. 스스로 하려는 자들, 생각부터 판단부터 스스로 하려는 자들이 악인입니다. 내가 뛰면 된다고 믿는 자들이 악인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악인들의 스스로 한 계획과 행동과 소원들을 이루어 주시고 놔두십니다. 왜냐하면 선택하라고. 스스로 해서 아무것도 안 되는 세상이라면 누가 스스로 하려고 하겠어요. 그리고 누가 하나님을 자원해서 선택하겠어요. 그건 뭐 필연적이지요. 스스로 하면 무조건 안 된다고 하면 신앙이 필연적인 거예요. 신앙이 필연이라면 신앙이 아니지요.
그러면 왜 악인들의 말은 사람을 엿보아 피를 흘리는 것으로 나타날까요? 하나님의 뜻을 따르면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정답을 받아서 그때 그때 필요한 답을 받아서 하늘에서 그어진 선대로 따라서 가게 되면 그냥 나는 나의 길을 가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입사동기가 100명이에요. 그런데 새해가 되어서 나만 진급을 했어요.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들과의 경쟁에서 이겼다고 하는 의미가 있는 게 아니고, 그냥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나만의 길을 가고 있는 겁니다. 경쟁에서 이긴 것도 아니고 다투어서 승리한 것도 아니에요. 하나밖에 없는 승진자리를 내가 탈취한 것도 아니에요. 그냥 나만의 길을 가고 있는 겁니다.
또 20명 동기가 다 승진했는데 나만 승진을 못했다면 내가 경쟁에서 진 게 아닙니다. 그냥 나는 나의 길을 가고 있는 거예요. 세상에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길은 누구와 경쟁해서 이겨야만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길을 걸어가는데 내가 옆에 친구를 짓누르고 밟고 이겨야만 그대로 갈 수 있는 길은 세상에 없어요. 하나님께서는 그런 길을 정해 놓으시지 않았어요. 그러므로 내가 내 인생을 걸어가는데 경쟁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선의의 경쟁은 발전에 좋고 우리를 개발시킨다는 이런 것 없습니다. 선의의 경쟁이 어디 있어요? 그냥 나의 길을 가는 거예요.
그런데 이 세상 전체는 다 스스로 하려는 악인들에 의해서 어떤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느냐? 모두가 다 경쟁이 돼 버려요. 이제 오늘 아마 우리 자녀들이 시험 볼 것 같아요. 시험 보는데 전부 생각은 어떠냐? 내가 옆의 아이를 떨어뜨려야 학교에 들어간다고 생각을 합니다. 아니에요. 내가 K대학에 들어가고 B대학에 들어가고 S대학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루어질 것입니다. 누구를 이겨야 되는 게 아니에요. 그냥 my way를 가는 거예요. 그런데 스스로 자기 삶을 경영하다보면, 반드시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도 경쟁의 구도 속에 마음이 말려들어 갑니다. 마음이 말려 들어가요. 내 몸이 내 행동이 내 삶이 다른 사람이 볼 때 경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경쟁이라는 게 없습니다.
빌라도에게 재판받아 죽임을 당하실 때도 주님께서는 빌라도와 권세싸움을 하신 게 아닙니다. 그냥 당신의 길을 가신 거예요. 빌라도는 나와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아버지께서 정해 주신 길을 가고 있는 것 뿐이지.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옆에 사람하고 싸워서 경쟁해서 이기는 것이 아니고, 옆에 회사하고 싸워서 경쟁해서 이기는 게 아닙니다. 제품을 만들어도 하나님과 관계해서 우리가 봐야 할 것은 옆의 회사가 어떤 제품을 만드는가가 아니라 내 속에 죄를 보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 이 제품을 제작하고 만들어서 파는 모든 일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가 스스로 하다보면 반드시 나는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죄악의 길로 접어 들것입니다. 나는 발묘조장의 역사를 반복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길을 제대로 갈 수가 없습니다. 이런 기도를 드리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정답을 주시면 제품에 대한 생각도 하나님의 생각이 반영이 되고 판매에 대한 것도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반영이 됩니다. 그리고 나는 내 길을 가는 겁니다. 옆의 회사하고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목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옆의 교회하고 경쟁하는 게 아닙니다. 어느 교회가 만 명 되었다는데 나는 언제 만 명 되나? 8,000명이니까 교인들을 내 몰아서 2,000명을 전도하라고 해야 되겠다.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지요. 나는 내 길을 가는 거예요. 그런데 스스로 뭔가 계획을 세워서 예를 들어 목회를 만 명까지 끌어 올려야 되겠다면 그것이 하늘에서 그어 놓으신 정답입니까? 여러분이 목회하시는 교회에 만 명 만들라는 게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정답이었어요? 그러면 여러분이 열내지 않아도 돼요. 그러나 여러분이 열내면서 만 명까지 끌어 올리겠다고 마음을 먹는다면 그러면 뭐가 됩니까? 발묘조장이 되는 거예요. 여러분을 위해서 하나님이 하늘에 정해 놓은 인생길로부터 여러분 스스로가 뿌리를 뽑아 버려서 말라 죽는 길로 접어드는 겁니다.
우리가 하려는 모든 의욕들 먼저 십자가를 거쳐야 돼요. 왜냐하면 죄악에서 나온 것이고 죄악과 연루되어 있으니까. 죄악과 연루되어 있지 않은 게 없어요. 그렇게 여러분을 낭만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긍정적으로 믿지 마세요. 하여간 십자가를 놓치는 순간에 우리는 죄와 crank in 돼버려요. 우리는 죄와 연결되어 버리고 기어가 맞물려 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과 소원과 계획과 우리의 심사숙고가 어느 것 하나 죄악이 아닌 것이 없어요. 십자가를 거쳐서 완전히 불살라져야 하고 완전히 죽어 버려야 됩니다. 그래야 하늘의 뜻이 명확하게 전달이 된다는 거예요. 그러지 않고 십자가를 잊어버린 상태에서 날마다 매 순간마다 십자가를 잊어버린 상태에서 내가 계획하고 내가 생각하고 심사숙고해서 하는 모든 행동들 걱정과 근심에 사로잡혀서 그것에 밀려 움직이는 행동들 다 발묘조장이 됩니다. 하늘에서 내 인생을 위해 그어 놓으신 하나님의 인생길로부터 스스로 내 인생의 뿌리를 뽑아 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말라 죽는 길로 접어들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7절에 “악인은 엎드러져서 소멸되려니와 의인의 집은 서 있으리라”라고 합니다.
왜 악인이 엎드러져서 소멸됩니까?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하늘에 그어져 있는 인생길로부터 뿌리를 뽑아 버리기 때문입니다. 악인이 누구라고요?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생각하는 거예요. 어떤 상황이 주어져도 이게 좋은지 나쁜지 우리는 몰라요.
왜 우울해 하십니까? 악인이라서 그래요. 여러분의 상황이 주어진 것에 대해서 왜 슬퍼하십니까? 악인이라서 그래요. 악인이라서. 스스로 판단하지 말라는 거예요. 이게 좋은지 나쁜지 어떻게 아느냐는 겁니다.
1절에 “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좋아하거니와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라고 합니다. 훈계와 징계 얘기가 왜 나옵니까? 하나님께서 하늘에 금을 그어 놓으시고 우리가 그 금대로 살지 않고 스스로 살아가면서 죄악의 노예가 되어서 끌려 갈 때에 하나님이 징계하시고 하나님이 훈계하십니다. 그런데 그 징계와 훈계의 총 집합이 주님의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것이에요.
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를 받는 자는, 주님의 십자가를 끌어안는 자에게는 징계와 훈계가 없어요. 왜냐하면 그 징계와 훈계가 내려질 게 모두가 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를 끌어안으면 징계의 아픔과 훈계의 아픔이 없이도 하나님의 정답을 얻고 갈 수가 있는 겁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끌어안은 다음에 이루어지는 모든 부정적으로 보이는 일들은 하나님의 섭리에요. 하나님의 뜻이에요.
초대교회 교인들이, 주님이, 사도들이 너무너무 정직하고 잘 믿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난이 주어지고 박해가 주어지는 것 하나님의 섭리에요. 내 죗값을 치루는 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징계와 훈계의 이야기가 나온 것은 다른 길로 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그어 놓으신 내 인생의 길과는 다른 길로 가니까 훈계와 징계의 얘기가 나옵니다. 왜 다른 길로 가요? 내가 악인이 되어서. 뭐가 악인입니까? 스스로 길을 찾아내는 것이고 스스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좋다. 나쁘다. 아예 판단 하지 마세요. 악인과 의인이 어디에서 갈려요? 그 옛날로 돌아가서 이미 선악과에서 갈린 겁니다. 솔로몬이 지혜를 구한 것이 하나님이 그렇게 이뻤던 이유는 선악과를 토해내고 자기가 판단하지 않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판단을 구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판단이 없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판단하세요. 내가 판단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판단을 구하는 것이지요. 그 판단을 얘기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기 전에 주님의 십자가에서 내 죄악과 연결되어 있는 내 생각, 내 죄악의 뿌리에서부터 나오는 내 계획 내 소원 내 판단능력 이 모든 게 다 깡그리 죽고 나서 하나님의 것들이 내게 들어와야 발묘조장의 우를 범하지 않게 될 것이에요.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 붙잡습니다. 그리고 내 스스로 하고 싶어 하고 하려고 하는 모든 생각부터 계획부터 행동들을 다 죽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 하늘의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바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묘(苗)와 같은 우리의 인생을 우리 스스로 다 뽑아 내리는 겁니다. 다 뽑아 내려서 7절처럼, 3절처럼 말라 죽게 만듭니다. 누가 죽인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스스로 말라 죽는 것입니다. 발묘조장의 어리석음을 범치 아니하고 하늘에 든든히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나가는 복된 하루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내 인생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누가 있습니까? 그러나 사랑해서 스스로 수고하고 애쓰면 애쓸수록 발묘조장의 어리석음이 끊임없이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우리의 죄악을 보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내 죄악을 보고 주님의 십자가 붙잡아 하나님께 의롭다 여김을 받는 자들 되게 하시고 주님의 십자가에서 모든 것이 죽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그어 놓으신 금을 따라 우리의 인생의 발걸음이 옮겨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