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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써클, 관념론 또는 종교와 유물론의 사투
오리엔테이션의 신상 발언이 있고 난 후에, 선배들은 아마도 나를 점찍어 두었던 모양이다. 모월 모일 모시에 어디로 나오라는 것이다. 단박에 운동권 서클 건이라는 것을 직감했고, 두려운 나머지 나는 거기엘 가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과 선배가 다른 학교의 한 여자 선배를 소개해 주었고, 그 선배의 출중한 미모에 빠져서 모월 모일 모시에 인천 어느 중국집으로 오라는 제의를 받아들였다. 결국 미인계의 힘으로 시작된 학생 운동은 그 후 인생의 커다란 방향을 틀 지어 주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관념론과 종교의 문제를 잡고 씨름하게 만들었다.
선배들은 내가 성당에 나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한때나마 사제가 되고자 했던 마음을 가차없는 논리로 어리석음 또는 사상의 불철저함으로 몰아붙이곤 했다. 포이에르바흐의 논리대로 신이란 인간 욕구의 반영일 뿐 실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가 역사의 변혁기에 얼마나 반동적이었던가를 역설했다. 이른바 지역 언더써클에 감한 셈인데, 우리들은 당시 어느 신부님(나중에 알고보니, 그분이 호인수 신부였다)의 도움으로 (인천 고잔동) 성당 회합실을 빌려서 세미나를 하면서도 ‘변증법적 유물론’의 진리성을 배워야 했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내 문화적 모태인 가톨릭 신앙과 유물론을 꿰어 맞추기 위해 골치깨나 아팠던 시절이었다.
나는 예수를 너무 모른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는 휴학과 동시에 군에 입대하였다. 수도권에 있는 우리 부대에선 연일 충정훈련(데모 진압 훈련)을 하였고, 건대 사건이 터지면서 나와 함께 공부하던 동료들의 이름을 신문지상에서 읽으며 가슴 졸여야 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예수’에 대하여 너무 모른다는 생각을 했는데, 유신론과 유물론 등 철학적 고민보다는, 신앙의 구체적 대상인 ‘예수’에 대해 알고 싶었다. 그래서 외출·외박·휴가 때마다 ‘예수’에 관한 책이라면 뭐든지 사들고 와서 읽기 시작했다.
르낭의 <예수전>도 그때 읽었다. 수도원을 모범으로 하는 공동체의 이상이 예수의 뜻이라고 르낭은 주장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마르크스와 엥겔스 역시 초대 그리스도교 이상에서 공산 사회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그 원천, 역사적 예수를 통하여 읽는다면, 신앙은 혁명이 맞닿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이 생겼다. 이른바 ‘혁명가 예수’에 대한 이미지가 내 영혼을 달구었다.
사진출처=pixabay.com |
혁명가 예수, 그리고 가톨릭교회
제대하고 복학한 첫해, 1987년에 <미션>이라는 영화를 보고, 내게도 하느님이 주신 소명이 있겠지, 생각했다. 내 마음이 간절하게 부르고 열망하는 불꽃이 무엇인지 뚜렷해졌다. 파렴치한 권력에 대항하여 칼을 들든지 십자가를 들든지 그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얼마나 큰 사랑 안에서 ‘행동하는가’ 하는 게 중요했다. 한 마디로 나는 머리속에서나마 ‘그리스도교 해방 전사’가 되어야 했다. 성서를 혁명의 지침으로 삼고, 민중 해방을 위해 투신하는 것만이 이 시대가 요청하는 나의 사명이라고 여겼던 시절이다.
구티에레즈의 <해방신학> 책 한 권으로도 이 모든 열망을 이론적 차원에서 채우기에 충분했다. 해방 신학이 내 삶의 교과서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리고 내가 사춘기 시절, 성인(聖人)이 되려면 수도원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단순함으로, 혁명 전사가 되기 위하여 사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런 발상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생각이었는지 깨닫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사제가 된다는 것은 제도권에 편입되는 것이고, 제도는 한 인간의 결단보다 막강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제도, 정확히 말해서 제도 교회는 혁명과 상관이 없었고, 사실상 예전에 선배들이 나를 자극했던 것처럼 권력의 편이거나 또는 우유부단한 부르주아의 모습이었다. 교회 안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교회는 혁명의 걸림돌이거나 거추장스런 외투처럼 여겨졌다. 물론 독재의 칼날이 날을 세운 겨울공화국에선 몸을 보호해 주는 은신처 역할을 해주기도 하였지만 말이다.
적은 교회 밖에만 있지 않았다
그리고 평신도의 한 사람으로 제도 교회의 언저리에서 일하던 십수 년 동안에 나는 투쟁의 대상이 어느 새 바뀌어진 것을 느껴야 했다. 예전에 필요했던 것이 세상에 대적하는 신앙이었다면, 그 후론 교회에 대적하는 신앙이 더욱 중요했다. 한국 교회사는 서글픈 과목이었다. 한국 교회사는 1970년대 이후 일부 사제들에 의해 주도되었던 민주화 운동을 빼고 나면, ‘가난한 이들에게 전해진 복음’과 그다지 상관이 없었다. 그래서 우린 그것을 ‘한국 제도 교회사’라고 불러야 옳았다.
일제 시대의 영악한 교회, 교회의 생존을 위해 신사 참배를 허락하고 안중근에게 ‘살인자’의 오명을 들씌워야 안심하던 교회가 내 어머니 교회였다니. 순교의 정신으로 일제의 황국 신민으로서 보국하라고 다그쳤던 교회, 그래서 순교자들을 욕되게 했던 역사를 우린 가지고 있다. 해방 이후 우리 교회는 반공 구국의 첨병임을 자랑하면서, 미군정과 이승만의 논리에 따라서 분단 시대를 개막시킨 주역 중의 하나였다.
박정희 군사 독재가 시작될 때 숨죽이며 오른손을 들었던 교회가, 정권에 의해 한 주교의 구속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야 비로소 자존심을 걸고 독재 정권에 대항하였다. 물론 이조차도 일부 사제들의 움직임이었지만 말이다. 교회란 참으로 편리한 지침을 갖고 있다. 우익이든 좌익이든 누구나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쓸 수 있도록, 누구나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도록 교회 문헌은 애매모호한 언어로 작성되었고, 그래서 목소리가 크거나 힘센 교회 권력의 행동은 언제나 제 나름대로 진리임을 강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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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태는 가톨릭이지만, 가톨릭을 넘어서야 한다
그 역사 공부를 이젠 집어치울 때가 되었다. 서글픈 역사를 젖혀 버리고 새로운 역사를 살아야 한다. 제도 교회사가 아니라, 제도권과 비제도권을 뛰어넘어 다만 ‘가난한 이들에게 전해진 복음’을 손에 쥐고, 세상과 우주 안에서 호흡하며 살아가는 하느님 백성의 역사에 주목하기로 했다. 이 역사는 앞으로도 다만 ‘삶’으로 엮어질 것이다. 구태여 문서로 기록되지 않아도 좋을, 그런 역사가 태어나야 한다.
예수는 유대교의 토양에서 성장하였지만, 유대교에 얽매이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우린 가톨릭 교회의 토양에서 성장하였지만, 가톨릭이라는 제도 종교의 처분에 사사건건 얽매일 필요는 없다. 사실 새로운 교회가 민중 속에서 탄생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교회는 주교와 사제와 수도자, 평신도들이 계급이 아니라 '형제'로 만나는 공동체가 될 것이라 믿었다. 다만 예수를 오늘에 사는 ‘실천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있을 뿐이고, 그들이 바로 교회"라고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는 말했다. “여러분이 교회”라고 말이다. 교회의 모든 영적 유산은 만인의 공동 재화이다. 어떤 신분이나 권위에 의해 독점되는 것이 아니다. 치졸한 교황의 참회록보다는, 가련한 중생과 죽어가는 지구라는 초록빛 행성을 보면서 가슴 아파할 일이다.
성경과 교회 문헌이 참고서라면, 인간 예수는 교과서다. 그리고 예수처럼 살았던 인류의 스승들이, 그들의 삶이 교과서에 달린 예문(例文)이다. 글귀에 매이지 말고 삶을 배워야 하는 게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과제라면 과제일 것이며 사명이라면 사명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말도 가능할까? 항구한 실천을 위한 신앙적 확신을 얻는 게 신학이라면, 이제 신학을 공부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신학을 사는 것이다. *
#[출처]
<연민>, 삼인, 2000. 이 글은 제가 삽십대 중반 <공동선> 편집장 시절에 쓴 글입니다. 그러니까, 벌써 20년이 되었군요. 세월이 흘러도 마음과 생각의 갈피는 달라지지 않는 모양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