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자카 코이치(石坂浩一)
도쿄대학 졸업
릿쿄대학교 사학과 대학원 박사과정중퇴
1990년부터 릿교대학교, 훼리스여학원대학교등에서 강의. 현재 릿교대학교 조교수
전공은 한국사회론,일-한,일-조 관계사,한국영화.
주요저서<근대일본의 사회주의와 조선><한국을 만날 책--한국에 관한 일본어 북가이드><일조(日朝)조약에 대한 시민 제언(공저)>등 다수.
<참고자료>
북한문제를 보는 일본의 시각
릿교대학교 이시자카 고이치
1)<피해자>라는 강자(强者)가 된 일본사람들
2002년 9월17일 일본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상회담이후 일본국민들의 북한에 대한 인식은 너무 비참한 수준에 떨어졌다.한 공립고등학교에서 사회과를 가르치는 친구는 이런 교육현장의 에피소드를 전해주었다. 한반도와 일본의 역사적인 관계를 다루는 수업 때 문화적인 친근감을 가지게 하려고 그 여성교사는 한복을 입고서 교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학생들은 그 교사가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북의 공작원이다> <기쁨조가 왔다>는 등 어처구니없는 소리들을 했다고 한다.학생들의 이런 반응은 9.17이전에는 없었던 것이다.
<한겨레21>2003년8월21일호가 보도했듯이 9.17 이후 조선학교에 대한 협박,괴롭힘이 일본전국에서 발생하며서 일본학교에 다니는 재일교포 학생들도 여러가지 차별 체험을 껶을 수 밖에 없었다. 소장변호사들의 모임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초/중/고급조선학교 학생들 중 9.17이후 협박등의 차별체험을 껶은 학생비율은 19.3%가 되었다고 한다(재일코리언 어린이들에 대한 괴롭힘을 용납하지 않는 소장변호사모임,2003.6).일본사회에서의 재일코리언에 대한 차별은 예전부터 있었다.그러나 이렇게까지 노골적인 차별하는 등의 심한 상태는 9.17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을 만들어낸 최대의 요인은 언론보도라고 할 수 있다.이미 2002년3월 한 일본인 여성이 평양에 있는 적군파(赤軍派)그룹의 일원으로서 일본인 납치에 가담했다고 고백한 것으로 일본에서는 북한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그리고 김정일국방위원장이 9.17정상회담에서 납치를 북한 기관원의 소행이라고 인정,사과한 후에는 완전히 제동이 걸리지 않는 북한 때리기가 시작되었다.주로 TV,주간지,신문을 통해 날마다 북한에 관한 정보가 사실과 허구를 가리지 않고 일본인들에게 대량 주입되었다.
일본 미디어가 사회에 흘린 정보의 엣센스는 다음 세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첫째는 북한은 일본사람을 많이 납치했으며 미사일로 일본을 위협하고 핵무기까지 보유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무서운 나라라는 점.둘째는 북한은 독재자가 지배하고 대중은 굶주림으로 시달리는 비정상적이고 보잘것도 없는 나라라는 점.셋째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일본이 북한으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다는 점.원래 보잘것도 없는 나라라면 무서워할 필요는 없는데 북한은 이제 일본사람들에게 세계에서 가장 무서운 나라가 되었다.
이 세가지를 한마디로 말하면 <모멸과 공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마음속으로는 경멸하고 있으면서도 언제 역습을 당할지 모르는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라는 말이다.그런데 역사를 돌이켜보면 이 심층심리는 바로 식민지시대에 한국인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민족독랍운동을 무서워했던 일본인들의 심리와 다를 것이 없다.관동대지진 때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을 학살한 사실은 그러한 심리를 상징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일본사람은 역사적인 <피해자> 입장에 선 강자가 되었다고 오츠카에이지는 이 상황을 적절하게 포현했다(오츠카,2003).원래 일본 우익세력은 일본이 구미열강에 대항하다보니 어쩔 수 없이 2차대전(대동아전쟁)을 싸운 것이므로 일본은 피해자라고 주장해 왔다.2차대전 후에도 그 주장은 기본적으로 유지되었고 1980년대이후는 일본이 중국,한국등 아세아 여러나라로부터 침략,식민지화를 부당하게 비난받고 있다는 이중의 피해자의식이 더해졌다.일본우익세력에게는 2차대전 이후 일본이 계속해서 중국,한국으로부터 압력을 받아 아세아의 맹주로서의 위치를 부정당하고 피해자가 되었다는 사실무근한 피해자의식이 생겼다.그러나 많은 국민들에게 있어서 이 논리는 별로 설득력이 없었다.
그런데 북한 공작기관에 의한 납치를 김정일위원장이 인정한 것이 우익세력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납치의 피해자가 일본인 개개인이라고는 할 수 있어도 일본민족 전체라고는 도저히 보기 어렵다.그래도 우익세력으로 구성된 납치피해자 구원단체는 사건의 충격을 이용하면서 마치 일본민족 전체가 피해자가 된 것 처럼 문제를 바꿔치고 언론 및 정치인,관료들이 이 도식을 받아들이게끔 켐페인을 벌렸다.그리고 9.17이후 일본에서는 거의 이견이 허용되지 않는 상태가 되어 있다.
유감스럽게도 일본 언론,정치인들은 납치문제를 포함한 북일관계에 대한 대안을 못 내고 있다.왜 이런 지경까지 와 버렸는가?그것을 더욱 깊이 검토해보기 위해 좀 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서 생각하기로 한다.
2.일본사회와 일본인의 북한인식
필자는 일본인의 한국인식을 검토한 글에서 냉전시대 이데오로기 대립이나 일본내 사회/사상적인 요인을 포함해 상호인식을 깊이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 바가 있다(이시자카,2002).
일본은 1965년에 대한민국과 국교를 정상화했지만 일본국민들은 한국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1973년 김대중씨가 도쿄에서 납치당한 사건이 터지면서부터 겨우 언론이나 시민들의 주체적인 관심과 행동이 생겼다고 볼 수 있다.수교이전에는 나이가 많은 세대들은 식민지시대의 연장선상에 있는 부정적,적대적인 감정을 유지했고 아랫 세대들은 한국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정부차원 북한인식이나 정책에 대해서는 야마모토츠요시,다카사키소지등의 연구가 있다.1959년 일조간 적십자회담을 통해 이른바 <귀국사업>이 이루어졌고 약 10만명에 달하는 재일조선인들이 북한에 갔다.그러나 정부차원에서는 1970년대까지 북한을 완전히 무시하는 정책이 계속되었고 미국과 중국이 화해한 70년대 이후도 한정된 접촉은 있었지만 국가로서의 인정,정상화는 생각조차 못하는 수준이었다.1990년 자민당과 사회당이 공동으로 북한으로 방문단을 파견,조선노동당과 이른바 3당공동선언에 합의해서 비로소 국교정상화교섭이 시작되었다.동구사회주의권 붕괴에 따라 냉전이 종식되면서 상황 변화가 등을 밀어주는 시대가 되어서야 일본정부는 국교정상화를 과제로 올리게 된 것이다.
민간에서는 주로 일본공산당,일본사회당이 사회주의연대라는 입장에서 북한과 우호교류운동을 하고 있었다.지식인,언론인들 중에서도 북한을 방문한 일본인들은 적지 않았다.그러나 일본공산당은 1970년대부터 관계가 악화,1980년대 테러사건이후 공식적으로 대립상태가 되었다. 북한 체제의 비민주성이 전해지면서 노동단체도 80년대이후 교류를 경원하는 경향이 생기게 되었다.결국 일본혁신정당,노조의 우호운동은 오늘 거의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일본인의 북한에 대한 이미지는 식민지시대부터 유지되어온 민족차별,편견, 냉전시대 와중에서 만들어진 사회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합쳐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이 사실은 물론 미국의 세계전략 우산 속에 있는 일본의 현실과 더불어 한국과 먼저 수교했다는 조건에 필연적으로 따른 것이다.아울러 80년대에는 83년 버마 아웅산사건,87년 대한항공기폭파사건,김일성-김정일부자 계승문제등이 북한에 대한 이미지를 더욱 악화시켰다.
일본과 아시아의 관계를 볼때 1980년대에는 전진도 있었다.1982년 교과서문제를 계기로 식민지지배,침략에 대한 역사적인 책임문제가 일본사회에서 제기되었다는 것이다.일본언론이 식민지지배에 대한 반성을 공식적으로 표명하게 된 것은 80년대 이후의 일이다.일본국내에서 사회문제가 된 외국인등록법 지문날인제도 거부운동도 일본사회 의식변화의 뒷받침이 되었다.이와 같은 80년대의 전진은 일한관계에 있어서는 90년대에 좋은 결과를 낳게 되지만 북한에 대해서는 사정이 복잡했다.
사회주의권 붕괴라는 현실에 직면하여 일본정부도 일단 국교정상화를 생각하게 되었다.1991년 1월 1차 일조(日朝)국교정상화교섭이 시작되었다.그러나 1992년 11월 제8차회담으로 교섭은 중단되고 1993-94년 핵문제,97년 이후의 여중생을 바롯한 일본인납치문제, 98년미사일발사문제등 안 좋은 문제가 잇따랐다.일본인들의 북한에 대한 이미지도 악화되었지만 그것을 상징하는 일이 다름아닌 조선학교 학생들에 대한 괴롭힘 빈발이다. 여학생들이 치마저고리를 찢기는 사건에 대표된 괴롭힘은 89년 이른바 <파친코 스캔들>때 징후를 보이면서 93년 핵문제 때 크게 주목을 받게 되고,98년 미사일문제,2002년 납치문제로 되풀이되었다.9.17 이후는 치마를 찟기는 사건은 별로 전해지지 않지만 학생들이 차별을 당하는 기회는 훨씬 많아졌고 던져진 말들의 내용은 이전보다 노골적인 것이었다.
주목해야 될 것은 90년대 이후의 괴롭힘은 여학생이나 초등학생등 약한 대상에 피해가 집중되고 있다는 점이다. 9.17 이후도 그 특징은 마찬가지였다.1950년대부터 1970년대에 거쳐 일본에서는 조선학교와 일본학교 학생끼리(주로 고등학생) 싸우는 사건들이 많이 있었다.그때 당시는 좋든 안 좋든 남자와 남자의 힘의 대결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유혈사태는 없어졌으나 음성적인 경향은 더해지는 것 같다.그리고 9.17 이후 차별하는 일본인들의 나이가 낮아지는 경향이 있다.초등,중등학생들까지 가해자쪽에 서기 시작했다는 사례가 보고되고 있다.
장기적인 불황으로 사회적인 불만이 축적되고 희생양이 요구되고 있는 분위기가 있는 것을 우리는 인정할 수 밖에 없다.아울러 냉전시대에는 적어도 명목적으로 억제된 민족차별 심정이 이제 속박을 풀린 위험한 단계에 들어서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3.화해와 평화를 향하여 ;우리의 과제
릿교대학교 이종원교수는 일본에서 북일수교를 추진하는 주체가 없다고 날카로운 지적을 했다.일중(日中)수교의 경우는 재계에도 정계에도 추진세력이 있었으며 경제적인 이익면에서나 평화 관점에서도 수교를 지지하는 사람이 많았다.그런데 북한의 경우에는 재일조선인 이외는 거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주체가 없다.오히려 김정일정권 타도를 지향하는 우익세력이 사회에서 여론을 주도하는 위치에 있다.
우리는 일단 9.17 이후의 참담한 일본의 상황을 그 이전 상태까지 되돌리는 것이 과제가 될 것이다.일본정부도 부시행정부가 존재하는 한 강경책을 유지할 수 있겠지만 북한이 쉽게 타협하지 않는 것을 보고 수면하에서는 여러 시도가 있는 모양이다.여야당이 모두 강경책 일변도로 기울리는 가운데서는 과제를 하나하나 해결해나가자는 지극히 평범한 생각조차 <북한을 이롭게 한다>고 매도당하는 상황이지만 평화운동 및 과거사 청산의 보상운동 그룹이 정치인들에게 대안을 제시하고 납치문제도 포함해서 강경책이 아닌 방안이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한 노력 과정에서 인도적 지원,역사에 대한 반성,반핵평화등 실천을 통해 북일간 신뢰관계를 높여가야 할 것이다.일본 국내적으로도 평화우호 주체를 조금씩 형성해야 하겠다.요즘 일본 우익세력은 일본과 한국,중국 간 대립을 조장해서 아세아에서의 화해와 평화를 막으려는 것 같다.사실 영토문제,2005년에 예상될 일본교과서 개정(改訂)문제등 불씨는 적지 않다.그런 의미에서도 앞으로 한일간 시민운동,지식인들이 서로 잘 논의하는 노력을 다하기를 바란다.
참고문헌
다카사키 소지 “일조교섭의 경과” 스미야 미키오&와다 하루키 편저 <일조국교교섭과 긴장완화>1999 이와나미서점
재일코리언 어린이들에 대한 괴롭힘을 용납하지 않는 소장변호사모임 <재일코리언 어린이들에 대한 괴롭힘 실태조사보고서>2003
야마모토 츠요시 “일조 비정상(非正常)관계사”<세카이> 임시증간호-일조관계 그 역사와현재 1992 이와나미서점
오츠카 에이지“피해자라는 강자가 된 일본인”<론자(論座)>2003년12월호 아사히신문사
와다 하루키&이시자카 고이치 편저<이와나미 소사전-현대한국 조선> 2002
이시자카 고이치 “일조관계연표 및 해설”<일조교섭-과제와 전망>2003 이와나미서점
“한국인의 일본관”<일한 이문화(異文化)교류 워칭>2002 사회평론사
“일본인의 한국인식”<역사비평>제49호,1999 역사비평사(서울)
권혁태
과거의 점검-이념형 연대의 틀 속에서
일반적으로 근대 국가 성립 이후, 국가간 관계는 정보, 상품, 사람(노동력), 돈(자본) 이동을 정부가 ‘일방적’으로 독점하고 이를 선택적/자의적으로 배분/조절함으로써 국가발전전략의 하위 요소로 활용한 측면이 강했다. 상품 및 자본 이동 등에서는 보호무역이나 외환규제를 통해, 정보 이동 등에서는 서적, 신문, 대중문화 등을 정부나 일부 기관이 검열, 여과하는 형태로, 노동력 이동 등에서는 해외여행 규제, 신원검사, 소양 교육 등을 통해 국가발전전략의 하위 요소로 활용되어 왔다. 이와 같은 사정은 자유로운 정치 활동이 보장되어 있는 선진국에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기본적으로는 동일하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면 한국의 일본관은 단편적으로 접하는 정보가 국가의 발전전략에 적합한 형태로 가공되거나 혹은 가공된 정보를 개인의 기억과 체험에 의해 다시 재가공되는 과정을 통해 형성되어왔다고 볼 수 있다. 일본 사회에서도 한국 사회에 대한 정보는 일부 지식인이나 재일조선인들에 의해 극히 제한된 형태로 일본 사회에 유입되었고 이에 따라 일본 사회의 한반도 인식은 일본 사회의 현실과 방향성에 알맞게 가공/첨삭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따라서 이런 조건 하에서는 양 사회에 국가와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시민사회가 성립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시민사회의 상대방 인식은 국가 독점/가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다시 말하면 일국에서의 시민사회의 성립이 반드시 국가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국제 시민사회 네트워크의 형성으로 직결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 독점 하의 시민사회 간의 네트워크는 당연히 보편적 이념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예를 들면 김옥균 등의 갑신정변으로 대표되는 ‘급진 개화파’ 이래의 한일 연대나, 식민지 시기, 특히 1930년대 이후 공산주의 운동에 나타나는 조일 연대는 각각 ‘문명화’나, ‘국제 프롤레타리아 운동’이라는 보편적 이념에 기초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이념형 연대는 각 사회에 놓여 있는 현실을 ‘근대화’, 혹은 ‘사회주의’라는 보편적 이념으로 재해석하고 이런 재해석을 통해 ‘국제연대’를 보편이념이라는 규범적 가치를 실현시키는 일종의 ‘통로’로 상정하였다. 따라서 ‘문명화’나 ‘사회주의’라는 보편원리가 근대국가 성립 이후 국가나 민족이라는 틀이라는 현실 속에서 왜곡될 때는 당연히 이념형 연대도 국가나 민족이라는 틀에 용해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는 ‘문명화’나 ‘사회주의’라는 보편원리가 그 교과서적인 원리와는 달리 본디 근대 국가나 근대 민족을 기본전제로 하고 출범했다는 한계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따라서 전후 세계에서 ‘연대의 사상’이 국가와 민족이라는 틀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전후 일본 세계에서 ‘문명화’라는 이념은 한일 국가간 교류의 흐름으로, ‘국제 프롤레타리아’라는 이념은 조일연대의 흐름으로 일부 흡수되었지만 그 흡수과정에서 배제되거나 혹은 기존의 보편 이념으로는 포괄할 수 없는 새로운 문제와 문제의식에 대한 각성이 1960년대 이후 등장하기에 이른다. 특히 일본에서는 1960년대 이후 일본과 제3세계 국가와의 관련에 대한 반성과 자각이 <베트남 전쟁>을 계기로 등장하면서 이는 점차 <김대중 납치 사건>, <정치범 구원운동>을 통해 한일연대운동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와 같은 흐름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에 대한 자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나는 일본의 <전후 민주주의>의 번영이 아시아, 특히 한국 등의 아시아 국가의 희생 위에서 이루어 진 것이고 따라서 한국의 정치상황에 대한 문제제기는 곧 일본 사회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한국의 정치상황은 일본의 과거사/현재사와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고 따라서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 대한 지원운동은 곧 일본 사회에 대한 비판적 운동이다. 둘째는 한국 등의 아시아 국가의 정치상황과 일본의 과거사/전후사와는 둘째는 문명화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라는 기존의 보편 이념으로는 이와 같은 구조를 설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를 타개할 수도 없다. 따라서 이와 같은 새로운 흐름이 국가와 민족을 뛰어넘으려는 탈국가적/탈민족적 지향성을 갖게 되는 것은 그 추상성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
이에 대해 해방 후 한국사회에서의 ‘한일 연대’의 흐름은 어찌 보면 ‘문명화’의 흐름을 국가가 독점하고 이를 발전전략의 하위요소로 자리매김하는 과정이었다. 당연히 해방 전의 다양한 ‘국제연대’의 사상은 분단과 극심한 반공체제의 등장으로 설 곳을 잃어버렸다. 이에 대한 ‘대항’ 조차도 ‘문명화’의 국가 독점에 대한 ‘이의제기’(자유민주주의의 완성)를 통해 ‘문명화’의 완성을 지향하거나, 혹은 ‘잃어버린 또 하나의 세계’인 사회주의에 대한 ‘지향성’이라는 형태로 나타날 수 밖에 없었고 따라서 ‘연대’의 사상도 결국 ‘근대 민족 국가의 완성’을 위한 일종의 ‘외부 지원’의 한 형태로 인식되었다. 특히 사회주의를 둘러싼 국제 사회의 내적 분열과 ‘자기성찰’(특히 스탈린주의와 이에 대한 내적 분열의 ‘아픔’)로부터 한발 벗어나 있었던 한국의 사회운동은 ‘국제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사회주의적 ‘패권주의’의 연장선 상에서 체험할 있는 내적 계기를 가지지 못하였다. 다시 말하면 일본의 사회운동이 1960년대 이후 탈국가적/탈민족적 지향성이라는 새로운 사상 흐름 속에서 ‘국제 연대’를 자리매김해나간데 반해 한국의 사회운동이 국가의 완성, 민족의 완성이라는 차원에서 ‘국제 연대’를 자리매김하게 된다.
새로운 조건과 ‘연대’의 새로운 구축을 위해
1980년대 이후 양 사회의 시민사회 교류와 연대를 둘러싼 환경에 몇 가지 변화가 보인다.
첫째로는 ‘개방화 시대’가 도래하고 정보화가 급속하게 진전함에 따라 한일 교류에 소요되는 인위적 장벽의 높이가 낮아지고 교류 코스트가 급속히 낮아지면서 무차별적인 교류가 게릴라식으로 각 분야에서 확대됨에 따라 기존의 ‘규제’ 중심의 정부 독점 시대가 현실적인 한계를 지니게 되었다. 예를 들면 여행객 수를 보면 한국의 일본 방문은 1975년 54,986명에서 2002년 1,266,116명으로, 일본의 한국방문객수는 16,873명(1966년)에서 2,377,321(2001년)으로 각각 급증하였고, 양국간의 유학생 수 급증, 지방자치단체 간 교류, 수학 여행 등을 통한 청소년 교류, 학회간 교류, 공동 연구 등 다양한 영역에서 다양한 형태로 교류가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또 한국 내 일본어 학습 인구도 약 100만명에 달하고 대학내 일본관련학과 약 100개에 달하는 등 한일관계의 주역이 ‘식민지경험’ 과 ‘이념형세대’에서 ‘신세대’로 옮겨가는 현상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변화는 정보 독점과 양 사회간의 ‘정보 비대칭성’에 기초한 기존의 이념형 교류나 연대가 더 이상 양 사회 연대의 기초원리로 기능할 수 없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다원화된 한일관계를 일단 생활형, 혹은 개인형이라고 할 때, 개개인이 접하는 정보가 기존의 이념형 교류 속에서 축적되어 온 정보를 수정/보완하거나 심지어는 대립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고 따라서 이념형 연대의 규범적 가치가 ‘구체적 접촉’을 통한 경험의 축적과 충돌하는 일이 일상화되게 된다.
또 하나의 변화는 한국의 시민사회기구가 민주화 이후 급속히 성장함에 따라 국가 및 자본을 견제할 수 있는 독자적인 세력으로 자리잡은 반면, 일본의 경우는 양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고립분산성 때문에 국가 및 자본에 대한 독립성은 클지언정 영향력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는 점이다. 물론 시민사회기구의 영향력의 크기가 곧 시민사회 그 자체의 영향력의 크기는 아니지만 양 사회간의 시민사회 기구의 영향력의 차이는 <교류>나 <연대>의 성격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한편에서는 한국 시민사회가 전통적으로 ‘외부지원’의 한 형태로서 인식해오던 ‘국제연대’의 틀로부터 벗어나야 할 시점에 와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 번째는 냉전 체제 해체 이후,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양 사회의 포지션이 양 사회에서 다른 형태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한국의 전후사에서 사회주의 문제는 지극히 ‘현실’의 문제였다. 이는 사회주의 국가인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이라는 ‘실체’가 한국 전후사와 뗄 수 없는 구체적인 현실로 개개인의 생활을 규정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며, 이는 한편에서는 극심한 반공으로 다른 한편에서는 반공체제를 타도할 수 있는 ‘대항 이데올르기’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에 반해 ‘자유로운 정치 공간’이 존재했던 일본에서는 사회주의는 정치공간에서의 ‘선택의 문제’였으며 따라서 ‘현실의 선택’과 사회주의라는 ‘이념’이 현실의 정치공간에서 대립 충돌하거나 그 간극이 벌어지게 되면 정치세력으로서의 사회주의는 현실로 가까워지고(‘우선회’) 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는 현실에서 벗어나서 이념에 가까워지는(‘좌선회’), 이른바 사회주의의 내적 분열을 경험하게 된다. 이와 같은 조건은 냉전 해체 후의 현실 사회주의권의 붕괴를 바라보는 양 사회의 태도에도 극명하게 나타나게 된다.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이라는 실체가 현실에 존재하는 이상, 사회주의 문제는 현실태로서 현재진행형의 문제이다. 이에 대해 일본은 현실 사회주의 붕괴는 이념형으로서의 붕괴 만이 아니라 정치공간에서의 선택여지가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이런 조건 차이는 반체제 운동이 ‘자연스럽게’ 시민사회운동으로 연속되는 과정을 거친 한국과, 반체제 운동과 시민사회운동과 단절되는 일본의 차이를 낳게 된다.
이와 같은 몇 가지 조건 변화가 국가 및 자본을 견제하는, 혹은 대항하는 ‘국제 시민사회의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논점을 중심으로 생각해보기로 하자.
1. 최근 양 사회에 불고 있는 변화, 한국에서의 ‘민주주의적 경향’의 강화(한국 사회의 좌 선회)와 일본 사회에서의 ‘일본주의적 경향’의 강화(일본사회의 우선회)가 시민사회의 존재형태와 양 사회의 교류 및 연대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줄 것으로 판단되는데, 특히 이와 같은 경향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둘러싼 포지션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일본 전후민주주의가 쟁취한 가치체계가 ‘주어진 가치체계’였다는 점, 이에 대해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경우에는 ‘쟁취한, 쟁취하여야 하는 가치체계’였다는 점, 이 차이가 아주 중요하다. 일본의 경우, ‘주어진 가치체계’가 냉전이라는 국제적 조건 하에서 발전한 것이었고 따라서 지극히 허약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체화’된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지. 일본 사회의 우경화 문제를 전후 민주주의의 허약성이라는 문제와 함께 북한 문제에 대한 일본 사회의 ‘과민 반응’이라는 차원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일본 사회의 ‘북한 때리기’는 마치 1970년대 한국 사회의 ‘북한 때리기’와 흡사하다). 이와 같은 ‘북한 때리기’를 전통적인 일본 사회의 한반도 멸시관의 연장선 상 혹은 ‘부활’에서 파악해야 할지, 아니면 선진국 주민의 후진국 주민에 대한 일반적인 차별관에서 찾아야 할지, 혹은 아니면 일본 사회의 변화 속에서 나타난 새로운 현상으로 바라보아야 할지 이에 대한 인식이 중요하다. 이와 관련해서 일본의 이와 같은 반응에 비해 한국 사회의 ‘납치’문제에 대한 반응은 지극히 미온적이다. 이와 같이 대조적인 반응이 왜 생겨났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2. 현재 한일간에 이루어지고 있는 다양한 영역과 다양한 스텍트럼에 기초한 무차별적인 교류를 역사적으로 어떻게 자리매김하여야 하는가, 혹은 자리매김할 수 있겠는가? 일본을 실용적인 발전모델로 인식해오던 전통적인 ‘문명화’ 혹은 ‘근대화’ 라는 흐름이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점도 있지만 다른 또 하나의 사회주의적 연대의 흐름도 역시 마찬가지인 측면이 있다. 예를 들면 노동자간의 교류를 국제 프롤레타리아 운동(‘세계의 노동자는 하나’)의 연장선상에 자리매김하여야 하는가? 글로벌라이제이션이 자본의 운동법칙의 세계적 확산이고 이를 ‘자본을 통한 세계 일원화’라고 상정하게 되면, 이는 한편에서는 국제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기반이 성숙되었다고도 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국제 프롤레타리아 연대’의 기본 목표인 사회주의가 양 사회에서 지향하여야 할 가치체계로서 힘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이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노동자 연대라는 것은 다른 다양한 교류 양식과 마찬가지로 단순한 정보 교환이나 혹은 협조 행동의 차원을 넘지 못하게 된다. 다양한 영역의 다양한 교류나 연대를 반드시 하나의 ‘사상’이나 ‘가치체계’로 설명하여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보편 이념’을 잃어버린 교류나 연대는 결국 ‘국가’나 ‘민족’이라는 틀에서 벗어나기 힘들고 결국은 ‘국익론’이나 ‘내정간섭’이라는 레토릭에 무력해질 수 밖에 없다는 점도 중요하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3. 일본의 사회운동과 한국 사회운동의 차이, 전망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 공통의 목표를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지, 또 무엇에 기반하여야 하는지? 또 각 사회운동의 지양점과 지향점은 무엇인지?
권혁태(이하 권): (발제문)
이시자카 고이찌(이하 이시자카): 먼저 일본에서의 한국이나 조선에 관한 연대 운동의 흐름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2차 대전 이후 일본 역사 속에서의 연대 운동 - 이렇게 부르는 것이 안 맞는 경우도 있지만 - 으로는, 2차대전 직후 일본 공산당 재건에 많은 한국인들이 참여한 것을 들 수 있습니다. 1945~1955년 까지 일본 공산당에 한국인 당원들이 많이 있었고, 일본 당원이니까 당연히 일본 혁명을 위해 열심히 하겠다는 구조였지요. 그 때 당시는 일본이 미국의 점령 하에 있었고 독립이 된 후에도 격렬한 반미투쟁을 일본 공산당이 주도했는데, 공산당의 과제는 일본을 미국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해방 시키겠다는 것이었고, 재일 한국인들도 일본 공산당의 지도 아래서 일본 혁명, 식민지 해방을 위해 같이 노력해야겠다는 것이었는데 당연히 무리가 있었습니다. 1950~53년에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많은 재일 한국인들이 조국에서의 전쟁과 희생에 관심을 두고 열심히 투쟁했는데, 그래도 중심은 조국의 전쟁 반대 보다는 일본의 식민지 해방이었습니다. 일본 혁명이 성공되면 한반도에서 전쟁을 저지할 수 있다, 저지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아질 것이다 생각했죠.
이 다음에 둘째 시기가 오는데요, 1953~54년부터 일본 공산당 밑에서는 민족적 과제를 운동화 시킬 수 없다는 움직임이 재일 한국인 안에서 생겼습니다. 그것은 물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앞으로는 북한이라고 부르겠습니다 - 지도부의 지도도 있었고, 재일 한국인들 내부에서의 희망, 요구도 있었습니다. 1955년에, 지금까지 존재하는 조선총련(조총련)이 생겼는데, 조총련은 일본 혁명을 위해 우리가 투쟁한 게 잘못이었다고 반성했습니다. 앞으로는 일본 정치에 대해서는 내정불간섭 방침을 세우고, 일본과 조선의 우호 교류 운동을 하자, 국교를 정상화시키고 평화를 만들자는 방향으로 방침을 전환했습니다. 여기서 재일조선인들은 해외 공민으로 규정되었습니다. 일본 정당에 속해서 일본 혁명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해외에 있는 조선 민족으로서 조선 민족의 과제를 달성시키기 위해 일하는 것이 제일의 목적이다. 자기들도 그리고 조국에서도 완전히 규정이 달라진 것이지요. 1955년 이후 - 이것은 지금까지도 그렇습니다만 - 조총련의 목표는 일본의 공산당, 사회당, 노동조합, 이른바 혁신 세력과 협력해서 사회주의 연대를 달성시키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위상을 높이고 국교를 정상화시키고, 한편으로는 한국에 대해 보다 높은 위치를 얻기 위한 정치활동이 된 것이지요. 그런 가운데서 일본의 사회당, 공산당 등 사회운동 세력들도 ‘그렇다면 앞으로는 조총련이나 북한과 우호 운동을 하면 된다, 이런 식으로 달라진 것이지요. 그때까지 한국인들은 동지로서 일본 혁명을 위해 같이 싸웠는데, 이젠 아니다, 같이하지는 않지만, 서로 사회주의 연대로서 우호 관계를 맺으면서 같이 나가는 세력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지요.
이 시기에 좌익과 신좌익이라는 말이 나왔는데, 사회당;공산당은 원래부터 있었던 진보세력이어서 구(옛날) 좌익이라 부르고, 60년대 말부터 사회당;공산당에 비판적으로 나오게 된 세력을 신좌익이라고 불렀습니다. 권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60년대 말부터 다른 움직임, 다른 생각, 즉 일본의 전후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 생겼는데, 2차 대전 이후 일본의 전후 민주주의라는 것은, 자기 내부에 다른 민족이나 소수자가 있다는 것을 전혀 생각을 안 하고 그냥 형식적으로 민주주의라 부르면서 억압당하는 사람들 생각을 안 했다, ‘민주주의도 허구의 민주주의’라는 날카로운 비판이 생겼습니다. 그 때부터 장애인의 인권, 여성의 인권, 소수 민족의 인권을 생각하게 되었는데요, 예컨대 소수 민족 문제는 원래 일본에 있었던 홋까이도에 사는 소수 민족의 문제도 있고, 한편으로는 한국인이나 중국인 같은 근대 이후 일본에 살게 된 민족의 문제도 있었습니다. 일본 사회가 60년대 말까지 의식을 안 하고 있었던 것을 과연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 문제 제기가 있었다는 지적을 하셨는데요, 그 때 일본에서 많이 나온 논의는, ‘우리는 억압하는 가해자로서의 자각에서 출발해야한다’였습니다. 그 때까지는, 우리는 가해자가 아니고, 우리는 사회주의자이니까 북한에 있는 사람들하고 쉽게 연대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자기가 어떤 책임을 가지고 일본의 근대사를 대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별로 안했어요. 그러니까 재일조선인 문제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할 기회가 없어서 그에 대한 과제가 남아있었던 것이지요.
탈국가적 탈민족적 지향성을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지금의 한국 사상의 틀에서 나온 발상일 것이고, 그 때 당시 일본에서는 이런 생각을 안 했었어요. 오히려 90년대 이후에 나왔죠. 그 때는 거꾸로, 우리는 억압하는 민족, 가해자이고, 재일조선인이나 재일한국인, 재일중국인들은 어디까지나 피해자이고 억압당한 민족이다, 그런데 아직까지 서로의 위치를 확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자기의 위치를 철저하게 생각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그것이 전후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길이다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예컨대 60년대 말에 나온 <고발! 입관 체제>라는 책이 있습니다. ‘입관’은 출입국 관리의 줄임말입니다. 한국에서도 외국인 노동자 문제가 사회적 문제가 되는데, 그 당시에 출입국관리 체제를 고발하고 분쇄하기 위해 만들어진 도쿄대학교의 법학부의 ‘공동 회의’라는 것이 있었고, 당시 많은 대학원생들과 젊은 연구자들이 참석했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말 중에 ‘보편적인 인권’이라는 것이 쉽게 말해 부르주아적인 민주주의라면 그것은 허구다, 전후민주주의를 넘어서 인권이라는 개념을 다시 구축하자, 다시 철저히 민주주의를 검증하고 새로운 인권으로서 외국인이나 소수자를 포함한 인권개념을 만들어야만 민주주의를 세울 수 있다는 생각이 나온 시대였어요. 그러니까 ‘민족을 넘을 수 있다’라든가, ‘연대할 수 있다’는 말은 그렇게 쉽게 해서는 안된다는 문제의식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약간 다른 곳에서 한일 연대운동이라는 것이 나왔어요. 60년대부터 일본에 베트남반전운동(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이라는 단체 - 이른바 ‘베헤렌’ - 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국제 연대와 비교적 가깝습니다. 이 베트남 전쟁이 끝난 후에 일본에서 의식하게 된 것이 바로 한국이었습니다. 73년 김대중 납치사건, 74년 민청학련 사건 때 한국의 여러 민주화의 소리가 일본에 알려진 것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또 다치카와나 하야카와라는 두 일본 사람이 한국에서 체포된 것을 계기로 관심이 많이 높아졌습니다. 그들은 한국에서 지금 국회의원이 된 그런 사람들과 감옥에 같이 갔습니다. 지금 하야카와씨는 페리스 학원 대학의 교수가 되어 있고요. 일본에서 훌륭한 일을 하셨습니다.
그 후 일본 사회에서 한국에 대한 관심은 운동적으로는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재일 한국인 양심수들로, 70년대 초부터, 마지막에 석방된 사람이 90년대 초까지, 20년 가까이 감옥에 있었지요. 한국의 장기수보다는 약간 짧은 시간이지만 그래도 오랜 시간을 감옥에 있었습니다. 이들을 주변에 있는 친구들이나 사회단체가 지원하는 운동이 생겼고, 한일 연대에서 재일 교포 양심수 운동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또 하나는 약간 늦게 시작되었는데 한일 노동자 연대 운동이었습니다. 70년대의 동일방직, 원풍모방, YH무역 등 그 당시 격렬하게 싸웠던 여자 노동자들의 운동에 연대하자, 모금을 하거나 지원하는 운동을 하자, 그리고 한국에 진출해서 노동자를 저임금으로 혹사시키는 일본 기업을 감시하자는 운동이 70년대 말부터 시작되면서, 한일 연대 운동이 형성 되었던 것이지요.
권: 문제제기를 좀 하자면, 첫째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두고, 혹자는 한국사회가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유일한 세계문화유산은 민주화 운동 경험이라고 할 정도로 한국의 NGO운동이나 사회운동에 대한 평가가 세계적으로 높은 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국 민주화 운동의 방식과 역사를 다른 사회에 ‘수출’하자는 식의 민주화 운동의 성격과 걸맞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 분도 계십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한국사회 내부의 힘만으로 이루어져왔다고 생각하는 민주화운동이 사실은 1950년대 이후 세계 각국의 많은 시민사회의 지원 속에서 가능했다는 점입니다. 이 점은 사실은 한국 민주화 운동사에 잘 등장하지 않습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한국 민주화 운동에 대한 지원이 가장 활발했던 지역이 일본과 독일이죠. 일본은 민청학련 문제뿐만 아니라 재일한국인 정치범 문제 그리고 김대중 납치 사건, 그리고 김대중 사형 판결 사건 등에 대해 일본 사회운동이 펼쳤던 아주 적극적인 연대활동은 사실 한국사회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아주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것이 경우에 따라서 일본 정부를 동원한 압력의 형태를 밟을 때는 한국 사회에서 일종의 ‘내정간섭’이다 이런 식의 논리를 폈지만 한국 전후 민주화 운동에서 국제적 지원 운동이 차지했던 비중이 적지 않게 크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일본 사회 운동 속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 이시자까 선생님이 하셨던 말씀에 좀 부연 설명을 드리면, 사실 일본 공산당 속에서 조선인 공산주의자가 일본 공산당 당원으로서 활동했던 것은 이미 1930년대부터였습니다. 1930년대 코민테른의 일국 일당 원칙에 따라서 일본에 있는 재일조선인 운동가들이 대거 일본 공산당의 당원으로서 등록을 하고, ‘일본에 있어서의 사회주의 혁명 성공이 곧 조선독립이다’ 에 따라서 움직여진 측면이 있습니다. ‘The Song of Arirang’이라는 책에서 김산이라는 사람이 중국 혁명의 성공이 곧 조선 혁명이라고 생각해서 중국 혁명을 위해 매진했던 것과 마찬가지였죠.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재일조선인들이 피해를 입고 상처를 입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1945년 이후에 김천해라는 유명한 포항 출신의 스님이 있었는데 이분은 전후 일본공산당이 재건될 때 최고 중앙위원 중의 한 사람이었고 일본 공산당 당원으로서 오랫동안 활동을 하다가 1950년대에 이북으로 귀국을 했고 그 이후의 소식은 확인되지 않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모두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보편이념이라는 원칙이 국가나 민족이나 정당이라는 구체적인 정치상황에 의해서 어떻게 왜곡 되는가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아까 말씀하신 ‘베헤렌’이라는 단체에 대한 것인데, 이 단체는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현재의 시민운동과 직결되는 측면이 강합니다. 특히 기존의 전통적인 좌익들의 조직원리였던 조직의 연합체가 아니라 개인 가입이었다든가 굉장히 많은 명망가들뿐만 아니라 정치사상적으로 아주 다양한 사람들이 오직 베트남 반전이라는 목표 하에 모였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운동 방식에 대해서도, 예를 들어 이 운동에 참가했던 소설가 오다 마꼬또(小田実)라는 사람의 회고록에 따르면, 반전 데모를 하는데 맨 앞줄에 세계에서 가장 고급자동차인 링컨 콘티넨탈(?)을 타고 데모를 한다든지 하는, 그런 고급차를 타고서도 데모에 가담할 수 있는 묘한 분위기가 있었다는 겁니다. 전통적인 좌익이 가지고 있었던 내셔날리즘적인 정서하고는 전혀 관계없이 개인이 움직이는, 국가나 민족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식의 운동이 이 때부터 시작되었지요. 왜 이런 생각이 등장하게 됐냐하면, 일본이 오랜 기간 동안 천황제적인 절대국가였는데, 1945년 전쟁이 끝나고 나서 어찌 되었든 제도적 민주주의가 이루어졌고 그 제도적 민주주의 하에서 경제발전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사실상 그 제도적 민주주의라는 것이 어떻게 생각하면 미국의 미일안보조약에 따라서 미군이 일본에 주둔하고 그것에 의해 지탱된 부분이 많은데, 전통 좌익 조직에서는 미일안보조약 아래에서만 기능하는 일본 전후민주주의에 대한 반성 같은 것들이 내부적으로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60년대 일본 사회에서 구가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라는 것이 어떻게 생각하면 미일안보조약에 의해 지탱되었는데 그 미일안보조약이라는 것이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가? 오키나와를 중심으로 해서, 베트남 인민 학살에 일본 사회가 간접적으로 가담하고 있다는 것들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되었던, 즉 일본 사회에서는 처음으로 운동권 내부에서 가해자로서의 자각과 과거사뿐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도 일본의 가해는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미국의 베트남 침략에 일본 사회가 가담하고 있다 것에 대한 자각이 등장했고, 이것이 기존 좌익에 대한 반성과 함께 새로운 형태의 한일 연대 운동으로 이어져나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연대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일본 사회 최근의 움직임을 보면, 제가 1970년대 한국의 ‘북한 때리기’와 굉장히 흡사하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이것이 그 전에도 조건이 갖추어져 있기는 했지만, 아시다시피 일본 고이즈미 수상이 평양을 방문해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회담을 가졌는데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입에서 예상치 않았던 말이 튀어나왔던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동안 일본에서 행방불명되었던 다수의 일본인들을 북한이 납치해 왔다는 의혹이 있었는데 그것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인정했고, 그 중 다섯 명은 다시 평양으로 돌아오는 것을 전제로 해서 일시적으로 귀국을 하였지요. 그 사건 이후로 일본 사회에서 북한의 납치에 대한 비판여론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반북’으로 마구 퍼져나가면서, 신문 지상에서 보셨겠지만 재일조선인 학생들에 대한 린치와 테러가 빈발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따라, 동북아 평화에서 조일수교의 의미가 큰데 그것이 좌절되어 버린 것이지요. 이와 같은 사태가 전통적인 조일연대, 한일연대라는 일본 사회운동의 연대 그룹에 적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했다는 것입니다. 이 조직들은 이북에 대한 태도에 따라 여러 분화가 이루어졌고, 특히 최근에 와서 한일연대나 한국 문제에 애정을 쏟았던 많은 일본사람들 중에 이북에 대한 비판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된 분들도 많이 생기는 등 일본 사회 운동에 대한 충격이 컸습니다. 그리고 일본이 우경화, 국가주의화 되고 있었는데, 헌법 개정 등을 포함해서 일본사회를 우경화하는데, 국가주의로 개조하는데 필요한 핑계를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북이 핵을 개발해서 일본을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식의 여론몰이가 최근에 아주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이 좋은 예이지요. 그런데 이것과는 좀 질적으로 다른 차원에서, 70년대 한국에서 김일성 주석을 빗대어 등장하는 여러 가지 언설들, 핑크빛 언설부터 시작해서 동물에 비유하는 그런 것들이 최근 일본 주간지의 머리기사로 자연스럽게 등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흐름을 단순히 이북 납치 사건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다른 내적 계기가 있기는 하지만 납치 사건을 통해서 굉장히 증폭된 측면이 강합니다. 이시자카 교수님께서는 이에 대해 글도 쓰시고 많이 관여를 해 오셨는데 그 부분에 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이시자카: 일본 사회가 자기 민주주의를 체화된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고, 그게 아니었다는 지적은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일본의 민주주의가 약했던 이유는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하는데, 운동의 측면에서 보면, 하나는 운동이 대중한테 영향을 줄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수우익 세력이 선동을 하면 이것이 대중에게 배외주의적인 정서로 쉽게 이어진 것이지요. 또 하나는 일본의 사회운동 자체가 국가를 확실히 인식할 수 없었고, 한국에 대해서도 확실한 인식이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인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아주 약했다는 것을 그 요인으로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운동의 대중성이라는 문제와 주체성의 문제 두 가지입니다. 먼저 주체성의 문제를 말씀드리면, 사회당이나 노동운동 세력이 재일한국인들의 인권문제에 무관심했던 1960년대 말부터 재일한국인 인권문제에 대해 열심히 활동했던 사토 가쯔미(佐藤勝巳)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좀 더 일본사회를 변혁시키는 방향에서 체제를 완전히 바꾸어야 재일외국인의 인권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문제제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사또 가쯔미라는 사람이 지금 뭘 하고 있는가 하면 바로 납치 피해자 지원 운동의 중심적인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북한의 어느 부분이 가장 약하고 어느 부분이 문제가 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북한을 공격하는 입장이 된 것이지요. 입장이 완전히 정반대가 되었는데, 옛날에 공산당 활동을 했던 사람들, 아주 래디칼(?)하게 재일외국인, 한국인의 인권문제를 위해 활동했던 세력 중에서 어느 정도는 우익적 입장으로 자리를 옮겼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되었을까. 그것이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이죠.
약간 다른 방향에서 문제 제기를 해 보면, 북한이나 한국을 인식하는데 당연히 한국어 능력이 중요합니다. 한국말을 몰라서는 한국이나 북한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60년대 조일연대, 70년대 한일연대 운동가들이 거의 다 한국어를 못 했어요. 70년대 동아일보 언론자유화 투쟁 때도, 우리도 동아일보를 읽어서 연대하자는 아주 획기적인 움직임이 있었지만 그것도 오래는 안 갔어요. 많은 대중들이 한국에 관심을 가지고 한국의 민주화 투쟁을 높이 평가 했지만, 한국어를 모르니까 그렇다면 누군가 한국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는, 한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정보를 제공하고 운동을 지도할 수 있는 창구가 되어야할 것인데, 그런 경로가 된 것이 북한에 대해서는 ‘조총련’이고 남한에 대해서는 김대중 씨가 참여해서 만든 ‘한민통’이라는 단체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일본 대중들이 연대 운동에 관심을 가졌는데, 어떤 과제를 해야 하는지를 한민통이나 조총련 활동가들한테 가서 물어 봤어요. 그러면 ‘다음에는 이렇게 양심수가 늘어나고 있으니까 양심수 문제를 합시다. 다음에는 동일 방직이 어려운 상황에 있으니까 여성노동자들을 도와주는 운동을 합시다’ 그런 식이었지요. 거기에 일본 운동의 문제점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거의 80년대까지는 일본 사람들이 자기가 한국의 정보를 수집하고 인식하고 방향성도 제시하면서 재일한국인, 조선인들과 논의하는 자리도 없고 그런 상황도 없었어요. 그것이 바로 일본 연대 운동의 약점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재일 민족 단체가 문제 제기를 하지 않으면 일본 연대 운동의 방향이 없는 것이지요. 자기가 스스로 생각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습관이 없었거든요. 그랬으니 그것을 대중으로 확산시키는 힘도 약해지고. 큰 문제가 안 생기면, 다음에 한국에서 어떤 상황이 생기고 우리가 일본사람으로서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 설명할 수가 없었어요. 80, 90년대 문화적 교류나 인적 교류가 많아졌지만, 70, 80년대 운동 가운데서는 교류를 못 했던 요인이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언어 소통 문제였다고 봅니다.
권: 정보 독점을 만들어 낸 조건들 중에서 국가에 의한 검열 같은 것들도 있었지만, 말씀하신 것처럼 상대방 언어에 대한 이해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저도 한중일 연대 그룹 회의 같은 데 참석하면, 특히 아시아에 있어서 공통 언어의 문제는 단순히 A라는 언어를 B라는 언어로 바꾸는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옮겨오는 과정 자체가 연대의 사상을 담보하는 것이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아시아 각국 사람들이 만났을 때 공통의 언어를 영어로 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언어로 할 것인가가 사상에 있어서도 중요하지만 현실 세계에서도 중요합니다. 한일 연대, 조일 연대를 생각하면 일본 측에서 한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절대적으로 없었다는 것이 사실이고 따라서 많은 재일조선인들 혹은 식민지 1세대들이 양쪽 언어에 능통하기 때문에 중간에서 일종의 통역이나 정보연락을 할 수 밖에 없었고, 그렇게 되면 당연히 기존 운동 조직들의 논리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었던 측면이 있습니다. 일본 사회 내부에서도 외국, 특히 한반도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어학 문제에 대한 고려가 없었고, 이것이 일본 사회가 한반도 문제를 주체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일정한 한계로 작용했죠. 그럼 어학 문제가 해결 되면 다 해결되는가. 물론 그렇지 않고, 특히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현상들을 보면 더욱 그렇지만, 70, 80년대 양 사회 연대의 한계나 문제점을 지적할 때 어학 문제는 중요합니다. 개인적인 질문을 하나 하자면, 이시자카 교수님 본인은 왜 한일 연대, 한국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한국말을 공부하고자 하셨습니까?
이시자카: 경우에 따라서 다른 설명을 해왔는데(웃음), 오늘날 한국사회도 많이 달라졌으니까 가장 구체적으로 말하면, 저는 원래 재일교포 양심수 지원 운동을 해 온 사람입니다. 1974년에 저와 같은 고등학교에 다니던 진영호라는 재일교포 학생이 있었는데, 그 학생의 아버지가 간첩단 사건으로 잡혔습니다. 그 분은 1974년 9월 30일 국군의 날 행사에 참석하러 오신 도쿄 민단의 부단장으로, 높은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잡혀서 사형 판결을 받고 석방될 때까지 17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제가 당시에는 그 고등학교의 학생회장이어서 학생회장으로서 운동을 시작해서 90년까지 왔습니다. 잠깐 부언하면, 여기 성공회대학교에 계시는 신영복 교수님이 제가 구원 운동을 했던 분하고 전주교도소에 같이 계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영복 교수님 얘기를 많이 들었죠. 감옥 안에 아주 대단한 사람이 있다, 그러니까 안에서 협력해야 되겠다 이런 말을 들었어요. 그렇게 시작해서 도망가지 못하고 여기까지 온 겁니다(웃음). 그 과정에서 다른 노동자 연대나 여러 가지 운동을 같이 하다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운동을 시작하기 전에도 한국에 대해, 아시아에 대해 뭔가 해보고 싶다는 마음은 있었어요. 김지하 시인의 시가 번역돼서 일본에 소개됐는데, 그것을 읽고 아주 감명 받았다는 것도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권: 일본에서 한국 운동과 연대를 하자는 사람들의 생각이나 판단 이런 것들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그리고 그 사람들이 한국과 같이 주로 학생운동 출신이라든가 노동현장 출신이라든가 여러 가지였을 텐데 그에 대한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그 전에 제가 부연 설명을 좀 드리자면, 제가 1985년에 일본에 가서 국제간의 연대, 한일연대라는 것에 대해 좀 다른 측면에서, 일종의 지적인 자각을 얻었는데요. 1970년대 중반에 일본에서 ‘동아시아 반일전선연맹사건’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일본 운동사에서 보면 굉장히 과격한 그룹으로, 미쯔비시 중공업 이런 데에 폭탄을 장치해서 건물을 폭파하려는 일종의 테러 운동 조직인데요. 그 친구들이 남긴 기록 중 제 인상에 남는 글들이 몇 개 있었고, 그들이 했던 운동의 방식과는 별도로 그 문제의식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60, 70년대 이후에 일본 기업들이 해외 진출을 하게 되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가 일본사회 내부의 변화, 즉 임금이 올라가고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요구 투쟁 등 노동조합 운동의 강고함 이런 것이 있었고 또 선진사회로 가기 위해서 여러 가지 환경 규제가 강화되고 시민들의 감시 장치가 발달했지요. 이에 따라 일본 자본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일본 국내에서 그런 규제를 받아들이면서 공해방지시설을 만들고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전환하는 방식을 택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한국에 쓰레기 수출을 한다거나 하는 식의 방식을 취했습니다. 한국에서도 80년대 이후에 나타난 현상인데요. 이 ‘동아시아 반일전선’에 가담했던 그룹들의 판단은 일본 국내 노동운동의 발전이 결과적으로는 일본 기업을 해외로 나가게 만들고 그 해외로 나간 기업은 제3세계 민중을 착취하게 되는, 즉 일국의 운동이 가지고 있는 한계에 대한 문제의식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친구들이 폭탄테러를 한 곳은 제3세계에 다국적 기업으로 진출해 있는 일본 기업들이었습니다. 그 방식 자체에 대해서는 왈가왈부할 건 없지만, 어쨌든 계급운동 혹은 학생운동, 환경운동이 가지고 있는 국제적 맥락을 다시 바라볼 때 전혀 다른 문제가 발생할 수 있구나, 국제적 네트워크나 국제 시민사회 연대 운동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굉장히 크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기억하기로는 이시자카 교수님께서는 한국 기업이 동남아시아 진출해서 일으킨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조사해서 일일이 회보로 내는 작업에도 가담을 하셨습니다. 한국도 제3세계 국가와 일본 사회가 70년대에 맺었던 관계를 걷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서는 70년대 일본 사회에서 나타났던 자각이나 반성이 상대적으로 약하게 나타나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이에 대해 교수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시자카: 큰 차이는 없으리라고 생각되는데요. 그 때 당시 한국이나 아시아에 대한 자각을 했던 주체라고 할까, 어떤 사람들이 자각을 했는지를 생각하면 정말 여러 부류였어요.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가 74년이었는데 그 때부터 시민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때는 공해수출이라는 문제가 생겨서 공해수출 반대 운동이 있었어요. 특히 한국의 울산 중화학공업단지에 일본 공해 기업이 진출해서 공해를 내기도 했는데, 이를 저지하자는 가두시위가 제가 처음으로 참여한 데모였는데, 그런 것을 보면, 반공해 운동을 하는 사람 중에는 예컨대 중소기업의 노동자도 있고, 제가 아는 형은 생선 가게 아들 이었는데 아주 열심히 운동을 했고, 고등학생들도 있었고, 아주 다양했습니다. 노동자들이 노동운동도 하지만 시민운동도 하고, 노동운동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노동운동이 못하는 부분이 있다는 자각이 나오기 시작한 시기였으니까 노동자가 시민운동에 와서 시민운동을 같이 하는 구조가 되어있었죠.
일본에서는 그 당시 베트남 민중이 미국과의 전쟁에서 결국 미국에 지지 않았다는 것이 아주 큰 영향을 미친 것 같습니다. 아시아 사람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한 거죠. 일본 사람들은 민주주의도 못하고 사회적으로 여러 가지 문제도 안고 있는데 베트남 사람들은 전쟁 속에서 용감하게 싸우면서 이제까지 해왔다, 우리가 배워야 할 부분이 많다는 생각을 사람들이 했었다는 것이죠. 그런 분위기가 요즘은 없으니까 문제입니다. 한국에 대한 인식도 마찬가지입니다.
권: 또 하나 질문을 드리면 당시 일본의 베트남 반전운동이나 김대중 납치 사건에 대한 문제제기에 가담했던 일본의 사회운동가들과 사회주의 사상, 맑시즘과의 관련 같은 것은 어떻습니까? 사회주의에 대한 자각이 국제적 연대 운동의 필요성에 대한 자각으로 연결된 측면이 없었습니까?
이시자카: 그 부분은 사람에 따라 의견이 다를 수가 있겠는데, 제가 시민운동 안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사회주의나 이념과는 깊은 관련이 없었다는 느낌이 들어요. 이념에 대해서도 오히려 사회당이나 공산당도 싫어하는 경향이 있었고, 그래도 사회당은 애매모호한 존재니까 자기들이 영향력을 행사하면 변화할 수 있다, 그러니까 사회당하고 같이하자 그런 식으로 했어요.
권: 제가 왜 이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한국과 일본의 사회운동의 현상적 배후에 있는 것 중 가장 큰 차이는 한국사회 같은 경우는 사회주의라는 것이 합법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단순하게 사상의 자유 측면이 아니라 정치세력으로서도 존재하지 않은데 반해, 일본의 경우는 사회주의가 공산당과 사회당이라는 형태로 합법적 공간에 존재했고, 의석수를 3분의 1이상 차지하는 경우가 항상 존재했었기 때문에 사회주의 사상이 가지고 있는 시민사회운동에 대한 규정성은 크고 작고를 떠나서 한국 사회와는 전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우스개 소리를 하나 하자면, 제가 1985년에 일본에 도착했는데 당시 한국 유학생들이 헌책방 가서 제일 먼저 사는 책이 자본론이었고, 중국인 유학생들이 제일 먼저 사는 책은 계량경제학이었습니다. 한국에는 넘쳐흐르는 책을 중국인 유학생이 샀고 한국에서 볼 수 없는 책을 한국이 유학생이 사서 두 종류의 책이 같은 연구실에 공존했고, 분석 방법에 있어서도 한국인 유학생은 정치경제학적인 방법을 많이 원용했고, 중국인 유학생은 근대 주류 경제학 방법을 원용했던 기억이 납니다. 서로 간에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물었더니, 중간에 있던 일본 학생이 적절한 비유를 했습니다. ‘누구나 교과서는 다 싫어한다’고. 교과서 이외의 것을 공부하고 싶은 욕구가 그런 식으로 나타난 것이겠지요. 그 갈증이 반대로 나타났는데, 일본 사회에서는 두 가지 모두가 다 넘쳐났죠. 특히 경제학 분야에 있어서는 정치경제학이 거의 주류에 가까웠습니다. 지금은 사태가 많이 변했습니다만.
따라서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사회주의라는 것이 우리하고는 전혀 다른 이미지와 뉘앙스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일본 사회운동에서 중요하다 것을 염두에 두시면서 한국 사회 운동과 일본 사회 운동을 이념적, 형태적으로 비교를 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박원순 변호사도 말씀하듯이, 한국 같은 경우는 시민운동이 뿌리 없이 중앙집권적이고, 한 시민운동단체의 규모가 엄청 크고 힘도 강하지만 밑은 약하다. 그리고 저는 세계에서 전업 활동가가 제일 많은 사회가 일본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그것이 고립 분산적이고 규모가 작고 전문화 되어 있기 때문에 특정한 정치적 상황에 대해서 연대 연합해서 저항을 하거나 힘을 모으거나 하는 경험이 적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앞에서 제가 말씀드렸듯이, 한국의 경우는 기존 운동에서 지금의 시민사회운동으로 넘어오는데 연착륙 같은 걸 했는데 반해 일본의 경우는 아까 사회주의하고도 관련이 있습니다만 극심한 내부 대립을 겪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기도 했습니다. 과거의 운동 경험이 상처로 남으면서 80년 대 이후에 시민사회운동으로 연착륙 되지 못하고 일종의 단절을 경험했던 것이 굉장히 큰 원인 중의 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까지 양쪽의 시민사회운동을 봐 오셨을 텐데, 세대상의 차이도 포함해서 그 차이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이시자카: 대답이 나온 것 같은데요(웃음). 노동운동은 두고요, 시민운동은, 작은 것이 소중하니까 나름대로 귀중히 여겨야 한다, 큰 것이 오히려 사람마다의 소중한 의지나 의사를 무시할 수도 있으니까 작은 것으로 점점 사회에 확산시키면 언젠가는 도달할 수 있다, 그런 발상이에요.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생각해보면, 하나는 사회당이나 공산당, 그리고 옛날에는 ‘총평(소효)’이라는 노동단체가 있었는데, 그런 큰 단체에 대한 비판 의식으로 그랬고, 또 하나는 신좌익 세력이 그런 사회당이나 공산당을 비판해서 나왔는데 결국은 서로 싸우고 죽이고 그래서 사람들의 실망을 샀어요. 많은 일본 대중들이 사회운동이라는 것이 아주 어렵고 무서운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죠. 운동이 커지게 되면 그렇게 서로 싸우게 되고 죽이게 되니까, 그게 아니고 자기가 낼 수 있는 소리를 내면서 서로 협력할 수 있는 사람끼리 협력할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그런 작은 규모 운동의 방향으로 갔던 것이 아주 다른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한편으로는 요즘 이라크 파병 반대 운동 같은 평화운동을 봐도, 지금 소효(총평)은 없지만 그래도 총평의 흐름을 이어가는 평화포럼이라는 단체가 있어요. 작년에 한국에 방문단도 파견하고 제가 기획을 했는데 그런 세력이 아직까지 힘이 있어요. ‘연합(랭고)’이라는 노동단체가 총평(소효) 해체 후에 만들어진 중심적인 노동단체인데, 랭고는 평화포럼을 좋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힘이 있어요. 노동단체에서는 그 쪽으로 네트워크도 가지고 힘도 있는 단체는 별로 없어요. 노동단체에서도 주로 나이 많은 사람들의 힘이 아직까지 살아있고요. 그래서 둘 다 봐야 일본의 사회운동을 봤다고 할 수 있는데, 시민운동이라고 하면 작은 것이라고 생각해도 됩니다.
권: 형태상의 차이, 즉 일본의 경우는 고립 분산적이고 작은 테마로 오랫동안 축적한 경험을 가지고 있어서, 우스개 소리로 한국 시민운동단체와 일본 시민운동단체 사람들이 만나면 대개 공통의 얘기가 나오는 데, 둘을 합쳐서 둘로 나누면 좋겠다는 얘기가 나온답니다. 한국의 경우는 꼼꼼하거나 어떤 한 부분에 전문적이기 보다는 추진력이 강하고 역사가 짧고 세대가 젊은데 반해, 일본의 경우는 오래 되었고 전문적이기는 한데 움직임이 더디고 세대적으로 고령화되고. 부분적으로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일본의 경우는 60, 70년대 일본 사회운동을 경험한 세대들이 그 길로 운동에 뛰어들어서 지금까지 지탱해온 측면이 있고, 한국의 경우는 대부분 70, 80, 90년대 까지 이어 오는 측면이 있습니다. 언제 까지 이렇게 인력 수급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일본의 학생운동은 내부대립과 살상으로 인해 자기 몰락을 했지만, 한국 같은 경우는 대학 대중화라는 다른 이유로 학생 운동이 거의 몰락 직전에 와 있다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하기 때문에 시민사회운동에 계속해서 젊은 피가 공급될 것이라는 것은 사실 기대하기 힘든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질의 및 응답>
청중1: 저는 일본에서 사회당이나 공산당 이런 이념적인 스펙트럼이 넓다는 것은 상식적인 차원에서 뉴스를 통해서 알고 있었는데, 이것이 각종 이념을 현실 정치권에서 표출할 수 있고 현실 정당이 각종 이념 정파들을 정당 정치로 흡수할 수 있다는 조건이 시민사회운동에 까지도 끼치는 영향이 굉장히 크다는 것은 사실 오늘 처음 느낀 것 같습니다. 오늘은 비교론적 이야기가 주종을 이룬 것 같은데, 그런 관점에서 한국이 이번 선거에서 민주노동당 10석을 얻었다는 것이 굉장히 큰 의미라고 사람들이 많이 얘기하고 또 진보정당이라고도 얘기하지만, 그 민주노동당의 강령에 나오는 아주 원론적인 이야기와는 달리 한국 정치의 어떤 협소함이나 그 동안 진보정당을 거의 경험해 보지 못했다는 조건 같은 것을 감안하면, 현실적으로 사회민주주의정당 정도의 프로그램을 추진하는 것조차도 쉽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봤을 때 이 협소한 이념적 스펙트럼 내에서 태동하게 된 한국 시민사회운동의 모습들 - 중앙 집중적이고 단시간에 걸쳐 다이내믹을 가진 협소한 이념 지형에서 출발한 - 과 굉장히 폭넓은 이념 지형에서 출발한 일본 시민사회운동을 조금만 더 명확하게 대조해서 설명해 주시면 공부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일본의 시민운동이 작은 문제를 얘기하는 것들이 일본 정당 구조나 정치제도와 연관해서 볼 수 있다는 설명을 조금 더 자세하게 비교해서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시자카: 일본 경우는 1970년 전후에 이른바 정치의 시기가 있었어요. 그 때는 전투 경찰이 있었고 돌 던지고 최루탄 쏘고 하는 시대가 있었지만, 대부분은 직접적으로 물리적인 권력과의 충돌이 많지는 않았어요. 그런 경험 속에서 형성되었으니까, 한편으로는 아주 급진화돼서 스스로 힘으로 대결 하겠다는 사람이 있었어도 그런 사람들은 사회적 지지를 못 받으니까 많은 경우 일본에서는 비교적 충돌 없이 지지를 높일 수 있는 운동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었어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70, 80년대 상황이 그랬으니까 갈등이나 충돌 없이 할 수 없었잖아요. 기본적으로 운동에 허용된 공간 자체가 달랐다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고 그 다음에는 권력과의 관계의 문제일 것입니다.
또 하나는, 예컨대 환경운동도 원전에 반대하는 운동, 농약을 안 쓰고 농민이 유기농을 하는 운동이 있고 한편으로는 소비자가 유기농 하는 사람들과 같이 생협을 만들고 협력하는 운동이 있는, 그러한 생활에 밀착한 운동을 좋아했다는 것도 사실이지요. 박원순 변호사도 말씀하셨듯이 일본은 생활에 가까운 시민운동이 많았으니까 그것이 오히려 정치권력과의 충돌을 피해가는 경향을 보이는, 그런데 어느 쪽이 원인이고 어느 쪽이 결론인지 어렵습니다.
청중1: 권력과의 충돌을 피했다는 말은 벌써 정치권 안에 급진 정치까지 포함한 다양한 정당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그 문제까지 건드릴 필요가 없어진 면도 있는 거죠.
이시자카: 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권: 제가 부연 설명을 좀 하면,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주어진 민주주의든 쟁취한 민주주의든 일본은 전후에 일반민주주의적 요소가 충분히 보장이 되어 있었고, 특히 미국이나 유럽보다도 체제내로 흡수된 정치적 스펙트럼이 훨씬 넓어서 공산당까지도 아주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일본 사회당이라는 것도 사실은 유럽 사민주의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일본 공산당보다 훨씬 전투적인, 이념적 스펙트럼이 넓은,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면 사회당을 사민주의라고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아주 우파적인 성격과 함께 아주 극좌적인 성격까지 포함하는 굉장히 폭넓은 정당이었습니다. 이런 좌파 정당들이 국회에서 3분의 1의 의석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사실상 정권을 획득하지는 못했지만 일본 사회에서의 영향력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노동조합운동도 서구 사회가 일찍 개량화되었던 데 반해 일본 노조운동은 민간 부분을 제외한 공공 부문에 있어서는 총평이 해체될 때까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소위 정치지향적인 노동운동 세력을 자랑했죠. 제도 정치권과 시민사회운동과의 관계가 굉장히 밀접했고 따라서 사회운동이라는 것이 굳이 통일된 정치적 쟁점을, 운동 세력 내부에서 연합조직을 통해서 해결할 필요가 없었다는 거죠. 정당 구조를 통해서 해소될 수 있는 측면이 있었다는 것이 중요한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과 같은 경우는 그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대립적인 국면이 나올 수밖에 없었고 항상 권력과의 싸움이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는 자민당을 극우 파시즘 정당 비슷하게 분류를 하는데, 일본 정당 구조에서는 자민당조차도 가졌던 이념적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었습니다. 서구 보수당에서는 볼 수 없는, 오히려 서구 사민주의 정당이 취하는 복지 부분에 대한 강조가 일본은 보수정당에서 나타난다는 것이 다른 점이고, 대 공산권 외교 같은 경우도, 기본적으로 자민당이 대 공산권 외교를 독자적으로 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하고 유연한 측면이 있습니다.
또 하나, 일본 사회운동에 있어서의 내부 상처라는 것이 역사적으로 중요하고, 세계 사회운동에서도 하나의 교훈으로 되는 중요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예를 들어 일본 사회운동에서 서로 살상 행위를 통해서 죽은 사람이 확인된 것만 약 200명입니다. 적지 않은 숫자가 죽어 상처를 많이 남겼는데, 그 전 단계였던 1960년대 일본 사회운동이 고양된 시기의 책을 가끔 보다보면 제가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는데, 왜 데모를 했는지 잘 모르겠어요.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 시위에 나와서 데모를 했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한국의 경우는 정치행위나 정부의 정책 행위에 대해서 구체적인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는 구조였고, 예를 들어 비민주적 요소라든지 부패라든지 하는 것들이 굉장히 구체적인 형태로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다가왔죠. 그런데 일본은 60년대 안보 반대 투쟁부터 시작해서 70년대까지 쭉 이루어진 운동을 보면, 아주 쉽게 생각을 해서, 내가 그 시대에 대학을 다녔으면 저거 했겠는가 싶습니다. 그렇게 뭐 일상에서 자기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빈곤의 문제가 심각한 것도 아니었고 부패의 문제가 심각한 것도 아니었고 자신의 정치 행위를 투표로 연결할 수 있는 고리가 차단된 것도 아니었다는 겁니다. 물론 미일안보조약이나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회담 반대라든지 베트남 반전 운동 등, 숭고한 목적을 지향하는 운동이 잇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일반 사회 입장에서 보면 추상적일 수밖에 없고 국가 단위를 매개로 해서 다가올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그것 때문에 그 관념성 때문에 분열이 더 가속화 측면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찌되었던 1960년대 이후 일본 사회운동의 자기 부정적, 계급 초월적, 헌신적인 운동에 대해서는 한편에서는 이해가 안 갈 정도이고 한편에서는 경이를 표할 정도입니다. 이것을 1960년대 세계적으로 불었던 6.8운동을 비롯한 소위 60년대 세계 운동의 일환으로 봐야할지, 아니면 아시아에 있어서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한 하나의 흐름으로 바라보아야 할지는 여전히 의문이 남습니다. 당시의 일본 사회의 역동성을 현재 시민사회운동과 연결지어 생각할 때는 그 관념성, 추상성 때문에 만들어진 내부분열이 그 이후에 굉장히 탈중심주의적이고, 거대 담론을 피해가는, 그리고 지역으로 풀뿌리로 흩어져 들어가는 운동의 배경을 이룬 측면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청중1: 그렇게 봤을 때 역사적 배경은 다르지만, 일본 사회운동이 그렇게 되어 있는 현실을 우리가 조금 추측하고자 한다면, 민주노동당의 약진과 한국 수구보수정당의 야당화 같은 식의 한국 정치 발전 과정이 궁극적으로는 우리 시민사회가 일본형 시민사회로 가게끔 만들 것인가 하는 것이 굉장히 흥미 있는 문제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한번 예상을 해 봐 주신다면, 한국의 이념지형이 넓어진다는 것이 한국 시민사회의 역할을 줄일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어떤 길을 찾아야 될 것인지, 지금 크게 봐서는 두 가지가 나오는 것 같은데, 하나는 시민사회가 민주노동당이라는 진보정당과 적극적으로 협력을 해서 진보적 의제를 더 해야 한다는 측과, 또 하나는 이제는 일본처럼 그야말로 풀뿌리와 지역사회로 하방 해야 한다, 일반민주주의를 밑에서부터 키워야 한다는 두 가지 시각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아직은 앞의 시각이 더 센 것 같은데, 이에 대한 전망이나 조언 부탁드립니다.
청중2: 관련된 질문인데요. 일본 정치권에 있어서 이제는 사민당이 재기 불능한 형태라고 판단한다면, 정치적으로 대변할 수 있는 정당이 일본사회에서 없어졌다고 볼 수 있는데, 일본의 시민사회운동이 지역이라든지 작은 것 중심으로 갔던 부분에서 오히려 한국과 같은 연대, 거꾸로 일본의 시민사회운동에서 한국 같은 연대 운동이 발달되는, 일본이 한국을 닮는 상황이 일어날지.
일본에서는 환경운동을 하던 사람이 반전운동에 끼어든 것을 상당히 경이롭게 보더라고요. 환경운동을 하는 사람은 환경운동만 하고 평화운동을 하는 사람은 평화운동을 하는 식으로 갈라져 있고 연대라는 것이 거의 없는데, 오히려 한국 같은 경우는 자기가 속한 운동보다 연대 운동에 더욱 열심인 경우가 많죠. 한국이 연대 운동이 강한 것은, 대변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 없어서 정치적 이슈를 중심으로 모였기 때문에 강했는데, 지금 일본 시민사회 운동 발전 방향을 봤을 때 과연 시민사회에서 사회당을 대신할 만한 - 정당 구조가 아닌 - 것이 태동할 수 있는지 아니면 다른 어떤 방향이 나올 수 있는지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이시자카: 일본 사회당이었던 지금의 사민당을 보면 안에 있는 사람들이 아주 다양해요. 원래 사회당을 비판하면서 밖에서 운동했던 사람들이 많이 들어왔고, 지방의회나 국회의원에도 원래 신좌익이었던 사람이 있어요. 내부에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있고, 비교적 보수적인 사람은 벌써 민주당에 갔어요. 그러니까 지금 남아있는 힘은 아주 작고, 그래서 선거에서도 이길 수 없다는 현실이 있긴 합니다.
먼저 나중에 하신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드리겠는데요. 사민당이 아닌, 다른 여러 민주적인 세력을 대변할 수 있는 정당을 연대해서 만들자는 움직임이 없지는 않아요. 예컨대 지방의회 의원들이 서로 협력해서 만든 전국 네트워크인 녹색네트워크라는 단체가 있기는 한데 네트 이상의 힘은 없어요. 연대하자는 선언은 했는데 사실 힘은 없어요. 그래서 일본 운동가들한테서 한국은 힘이 있어서 부럽다는 말이 자주 나와요. 그런 의식은 있는데 아직까지 힘을 결집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전체적으로 기성 정치에 대한 불신감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60년대 말부터 사회당, 공산당에 대한 비판이 많이 쏟아진 시기에도 정당에 대한 불신감이 아주 강했어요. 관심이 없고 정치를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투표를 안 하는 사람들이 많고. 한국에서도 그런 경향이 있기는 해도, 일본에는 지방선거의 경우에 투표율이 30%정도밖에 안 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한국이 일본 같은 시민사회로 갈지 안 갈지는 잘 모르겠어요. 다만 지금 같이 정치권력을 규정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한 이상은 일본형으로 안 갈 것이라는 느낌이 들어요. 필요성을 느끼고 있으니까. 그리고 단편적인 이야기지만 사이버 세계를 봐도, 한국에서는 노무현을 지지하고, 민노당을 지지하는 젊은층들이 인터넷에서 힘이 많은데, 일본에서는 우익보수세력의 힘이 많아요. 2차 대전 때 일본의 보상 문제나 전쟁 책임 문제 그런 홈페이지가 있다면 오히려 보수 쪽에서 공격하는 의견이 많아요. 젊은 사람들도 물론 관심이 있기는 한데 그렇게 이용하지는 않는다는 거죠. 정치에 대한 불신감 구조 자체를 바꾸는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권: 지적하신대로 기존 시민사회의 다양한 요구를 체제 내로 수용할 수 있었던 사회당과 공산당이 있었는데, 사회당은 사민당으로 간 다음에 몰락을 했고 공산당의 규정성도 약해지니까 결국 시민사회 요구를 흡수해 줄 수 있는 정당이 없어지니까, 시민사회 내부에서 한국과 같이 시민사회단체 간의 일종의 연합조직이나 권력을 규제할 수 있는 운동조직이 태동할 수 있는 조건이 되는 것이 아니냐는 말씀을 하셨는데, 저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일본의 정당조직이 아직도 유동화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자민당과 민주당 이라는 2대 정당의 흐름이 있고, 그 안에서 오랫동안 일본 전후민주주의를 지탱해 왔던 다당제 - 공명당, 공산당, 사민당 - 가 있는데, 이 2대 정당으로의 전환이라는 것이 과도기적 현상인데 이 구조조차도 전혀 굳어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민주당이 가지고 있는 성격과 자민당이 가지고 있는 성격이 사실상 개개인 국회의원들 생각의 차원에서 보면 구별이 잘 안돼요. 무슨 얘긴가 하면 야당인 민주당 - 미국식 민주당을 표방한다고 하는데 - 안에 속해 있는 국회의원 중에 특히 젊은 사람들은 옛날 자민당 극우파보다 더한 사람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마에 하라 세이지(前原誠司)같은 사람이죠. 이 정치 지평이 예전처럼 두 정당에 의해서 확실히 구분되는 구조가 아니고 지금도 역시 움직이고 유동화 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 정당구조가 구조화되는 시기가 언제인가는 향후에 헌법개정을 둘러싼 몇 가지 우여곡절 겪으면서 사회세력이 어떻게 재편되는가에 따라서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지금 국면에서는 잘 설명하기 힘들다는 것이죠.
그것과 관련해서 저는 한국 시민사회가 절대 일본처럼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조건이 너무 다릅니다. 비록 민주당과 사회당이 몰락하고 민주당과 자민당으로 대별되면서 시민사회 요구를 대변할 수 있는 정당이 왜소화 되거나 없어진다 하더라도, 한국과 같은 연합조직이나 강력한 정치지향적 시민운동 조직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몇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하나는 과거의 경험이 아직도 치유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중요한 것은 그런 것들을 모아낼 수 있는 쟁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경우는 여전히 개인의 생활을 규정하는 일반민주주의적인 쟁점이 많이 존재합니다만 일본의 경우는 다양한 시민사회세력을 정치 지향적 세력으로 결집시킬 만한 일반민주주의적 쟁점이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헌법 개정 문제만 해도, 자위대를 헌법적 조직으로 만들고 외국으로 군대를 보낼 수 있는 조건으로 만든다고 하지만 그것은 일반민주주의 쟁점이 될 수가 없어요. 따라서 단기적으로는 그럴 가능성이 없지만, 향후에 예를 들어 징집제 부활이나 혹은 개인 인권에 대한 보다 우파적인 규제 같은, 일반민주주의적 요소를 훼손시킬 수 있는 흐름이 나타나게 될 때 그럴 가능성이 있을지는 몰라도 현재 제가 생각하기에 그렇게 까지 가기에는 많은 우여곡절과 오랜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두 번째, 저는 이번 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의 승리는 거품이라고 봅니다. 3~4석이면 오히려 더 좋았을 것이라는 시기가 올 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10석은 지금 민노당이 가지고 있는 힘이나 정책지향의 크기로 봤을 때 굉장히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이죠. 무슨 뜻인가 하면, 민주노동당의 승리는 민노당이 가지고 있는 계급적인 정책지향성과는 별도로 득표 기반은 인텔리입니다. 그래서 향후에 계급정당으로서의 성격과 대중정당으로서의 성격 사이에 대립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고 그것들을 잘 해결하지 못할 경우에는 벌어 놓은 재산을 잘못하면 한번에 잃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민노당이 어떤 노선을 취할 것인가가 굉장히 중요한 데, 저는 개인적으로 열린 우리당과의 연립이나 연합이 중요하고 그 속에서 일반민주주의적 지평을 넓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책연합을 통해서 민노당은 계급정당으로서의 성격보다도 일반민주주의 요소를 넓히는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따라서 이 지평이 넓어지지 않는 이상 여전히 시민사회의 역할은 남는다는 겁니다. 한나라당이 없어지고 일부 열린우리당에 흡수되면서 열린우리당이 보수당이 되고 민노당이 일본의 사회당 같은 역할을 하게 되면, 그때는 한국 시민사회가 하방화를 시작해도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형식논리로 보면. 하지만 지금 민노당이 10석 진출한 것을 가지고 시민사회가 하방 해야 한다는 주장은 민노당의 의회 진출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고 한국에 있어서의 민주주적 기반을 지나치게 안전한 것으로 착각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에서 여전히 장외에서의 역할은 굳건하게 남아있다고 봅니다. 특히 분단문제가 존재하는 이상.
이 과정에서 특히 참고 해야 할 일본의 경험이 60~70년대까지 일본사회에서 이루어졌던 사공 연합 - 사회당과 공산당과의 연합, 특히 지방 선거에 있어서의 연합 -입니다. 현실적으로는 실패했습니다만, 지방을 장악하고 중앙을 포위했는데, 그래서 사공연합의 경험이 아주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청중3: 한국에서는 1987년을 기점으로 해서, 이전을 사회운동의 시기라 보고 87년 이후를 시민운동의 시기라고 이야기 합니다. 일본에서는 사회운동과 시민운동의 뚜렷한 분기점이라든지 개념적인 차이 실천상의 차이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시자카: 일본 시민운동의 간단한 역사를 말씀드리는 것이 좋겠는데요. 1960년대에, 일본 시민단체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소리 없는 소리의 모임’이라는 단체가 있었어요. 1960년에 일본에서는 일미안보조약에 반대하는 격렬한 운동이 있었는데, 그 운동은 사회당, 공산당, 노동단체, 학생들의 기존 전국적 단체가 주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아니지만 그래도 하나하나가 자기 의견을 내고 정치에 반영시키자는 뜻에서 ‘소리 없는 소리의 모임’이라는 단체가 생겼어요. 이 뜻을 아마 베트남 반전 시민단체에서 이어받아서, 본격적으로는 60년대 중반 베트남 반전운동에서 일본의 시민운동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농민운동은 2차 대전 이후에는 별로 힘이 없어졌고, 노동운동은 아직까지 역할이 있었고, 70년대까지는 나름대로 자기들의 노동조건 문제를 중심적 이슈로 하면서 힘이 있었고 사회적 존재감이 있었는데 80년대 이후에는 상당히 사회적 관심이 없어졌다고 볼 수 있겠죠. 시민운동은 노동운동을 비판하는데서 출발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조직이 너무 커서 개인 하나하나의 의견을 반영시키지 못하고 현장에는 사람들이 여러 가지 요구를 갖고 있는데 그러한 절실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대기업 중심의 운동 방침을 관철시키는 관료주의적인 노동운동이 문제가 많다는 비판이 60년대서부터 나왔습니다.
노동운동 내부에서도 그런 소수파 노동운동이라는 비판이 생겼고 거의 같은 시기에 시민운동도 상당히 활발하게 되었습니다. 그 시기 시민운동은, 예컨대 공해를 내는 대기업 공장에서 노동자는 공해를 내는 것을 어떻게 책임질 수 있느냐, 노조는 해결하지 못하지 않는가라는 비판을 하면서, 시민운동과 노동운동이 협력하는 경우는 아주 적었고, 없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은 대립은 아니더라도 서로 따로따로 존재하는 그런 경향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권: 시민운동이라는 말이 현재 일본사회에서 받아들여지는 이미지는 60, 70년대 태동할 때의 이미지와는 많이 다릅니다. 기존의 사회당 공산당 계급중심 운동이 차지할 수 없는 쟁점들이 등장을 하게 되고 기존 정당에 대한 일종의 반대로서 시민운동이 시작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시민이라는 계급을 좌파입장에서 새롭게 자리매김 한다거나 이런 것들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들이 있어요.
하나의 예를 들면, 핵발전에 반대하는 시민운동이 있으면, 핵발전을 가동하는 전기회사의 노조는 핵발전소에 찬성합니다. 노조가 반대를 하기가 사실상 굉장히 어렵죠. 또 60년대는 이런 일들이 있었습니다. 주민운동 태동의 배경이 되는데, 어느 공장이 어느 지역에 들어올 때 그 공장이 그 지역에 들어가게 되는 것에 대해서 해당 공장의 노조는 당연히 찬성하고 지역 주민은 반대합니다. 그런데 주민 중에 해당 지역의 주민이면서 노동자가 있을 수가 있어요. 또 가족간의 갈등으로 되는 경우도 있는데, 수기 같은 데에서 나옵니다.
물론 서로 상호 보완관계에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동안 일본의 시민운동이 아주머니 중심으로 되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는데, 왜 아주머니 중심이냐, 일본 노동자들이 노동시간이 지나치게 길기 때문에 일을 끝내고 돌아와서 여가 선용이나 운동을 할 시간들이 주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한 회사 내에서의 시간 단축 투쟁은 결국은 시민운동의 공간을 넓히는 운동으로 이어진다는 발상, 그런 식의 상호보완 관계는 있습니다. 그런데 쟁점을 둘러싸고는 기존 계급운동과 항상 대립이 있을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시민운동과 기존 계급운동이 갈등까지는 아니지만 사실상 묘한 긴장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는 측면은 여전히 계속 된다고 봅니다.
계급운동은 항상 보수화되기 쉽습니다. 특히 대기업 노조 같은 경우는 이미 그렇게 나타나고 있지만 굉장히 보수화되기 쉽죠. 표현이 좀 지나치지만 계급이기주의에서 벗어나기 힘든 측면이 있고, 그에 반해 시민운동은 유연하고 다양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시민운동은 60년대 태동할 때는 계급운동으로부터 개량주의적이고 수정주의적이고 우파라고 맹비난을 받았는데 지금은 우파로부터는 좌파라고 비난을 받는 굉장히 묘한 위치에 있습니다.
이시자카: 한국에서는 ‘정치세력화’라는 말이 자주 나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일본에서는 그런 말이 없습니다. 사회당, 공산당 있으니까 그런 말이 필요 없어요. 그래서 사회운동이라는 말도 별로 안 써요. 시민운동 있고 노동운동 있고 그리고 정당 있고. 따로 사회운동이라는 말을 쓴다면 한국에서는 없는 몇 가지 단체가 있습니다. 예컨대 ‘부락해방동맹’이라고 일본에는 부락민이라고 차별당하는 사람들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옛날에 백정이라는 사람들이 있었죠. 그런 차별이 일본에는 아직까지 남아있습니다. 상당히 심각합니다. 부락해방동맹이라는 단체는 전국에서 몇 만 명의 회원이 있는 아주 중요한 단체입니다. 인권문제나 차별문제 생각할 때 일본 정부도 무시할 수 없는 단체이고 요즘은 사민당과 민주당 둘 다 지지하는 입장입니다. 나머지 생협 운동 같은 경우도 가장 진보적인 생협으로서 ‘생활클럽’이라는 단체가 있는데 그 단체에도 몇 만 명의 회원이 있어요. 그들은 소비자라고 볼 수 있는데, 소비자이면서 생산자와 의미 있는 관계를 맺고 능동적으로 뭔가 하고 싶다는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생활클럽은 시민운동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부락해방동맹은 원래 2차 대전 이전에 ‘수평사’- 신분에 의한 차별을 수평화 시키자-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그 단체가 원래 원조였어요. 그렇게 서로의 역사에 따라서 차이가 있죠.
권: 한국에서는 경상남도 진주를 중심으로 해서 시작된 ‘형평사’ 운동이 말하자면 일본 수평사 운동에 해당되는 것인데 현재의 한국과 비교해서 얘기를 하면 한국사회에서는 신분차별은 없고 직업 차별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도살업에 종사하는 분들에 대한 차별은 있죠. 다만 지금은 도살업에 종사하지 않는데 그 선조가 도살업에 종사했다는 이유로 차별을 받는 경우가 한국 사회에서는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일본 같은 경우는 피차별 부락민이라는 것이 지금 도살업에 종사하는 사람의 비율이 2%도 안 됩니다. 이 사람이 지금 무슨 직업이냐에 관계없이 이 사람이 무슨 신분이었느냐는 이유를 가지고 결혼과 특히 취업에서 차별을 받고 있지요. 이 같은 차별 문제는 기존의 계급 운동으로 환원하기 힘들고 정당운동도 아니고 사회운동에 속할 수 밖에 없는 일본사회의 독특한 운동 중의 하나입니다.
이시자카: 한국에서는 이해가 어렵겠지만 한국에도 호적이 있죠. 호적의 본적이 어디에 있는지에 따라서 부락 사람을 구별합니다. ‘부락 지명 사전’ 같은 것을 판매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아주 악랄한 사람들인데, 그것이 자주 문제화돼요.
권: ‘부락지명총람’ 이라고 피씨 통신상에 그 명단이 한번 돌아서 문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왜 일본사회에서 이런지 많은 논쟁이 있는데 설명하기 힘듭니다. 천황제에서 찾는 사람도 있고 국가 ‘신토(神道)’라는 종교에서 찾는 등 여러 가지 방식이 있는데 일본의 마이너리티 중에서 다른 마이너리티, 오키나와나 아이누 같은 사람들은 문화가 다르고 인종이 다르고, 재일조선인은 국적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피차별 부락민 같은 경우는 같은 국적, 같은 일본 열도, 문화도 같고 외모도 같고, 그런데 왜 그럴까. 문화적 차별 양식 중의 하나로서 일본사회에서 가지는 의미가 큰데 한국사회에는 존재하지 않는 문제이기 때문에 이해하기 더욱 어렵습니다.
청중4: 시민운동이라는 것이 자기의 이익과 관련된 운동이라고 한다면 제가 질문하고 싶은 것은 이번 이라크 인질 문제에서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미디어 보도들이 많았는데 여기에 시민운동의 역할이 없었는지 묻고 싶습니다. 정부와 인질 가족이 대립된 구조였는데 시민운동의 움직임이나 연대가 없었는지 묻고 싶습니다.
이시자카: 세 명이 인질로 잡혔는데 사람마다 배경이 있었어요. 그 중 한 명은 직업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었는데, 시민단체가 많은 노력을 했어요. 노력을 했는데 가족을 앞세우고 정부와 교섭하는 게 낫다는 판단을 했을 겁니다. 제 생각이지만 그 전 납치 문제 때부터 단체보다 가족이 직접 정부와 교섭하는 게 낫다는 느낌이 들어요.그러나 기자회견을 할 때나 뒤에서 시민단체가 지원을 했고, 다만 정부와의 교섭 전술 차원에서 그랬을 겁니다. 그런데 일본 사회에서 자기 책임론이 많이 나왔는데, 그 문제는 일본 사회 10여 년 동안의 사회적 분위기나 경제적 불안으로 그 속에서 북한 때리기 같은 분위기가 형성되었던 연장선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일본의 주간지가 인질 중 한 명인 다까토라는 여성에 대해, 12살 때 담배 피우고 15살 때 불량배가 되었다는 식의 개인 공격을 해요. 그런 정보가 인터넷으로 확산돼서, 이 사람들은 잡히고 만일 죽어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확산시킵니다. 사회에서 불만이 높아지고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 많아지면서, 불만을 북한이나 이라크, 새로운 종교를 표적, 희생양으로 삼는 경향이 있어요.
권: 개인책임이라는 이름 하에 200여만엔 이라는 비용을 청구했지요. 그리고 히로시마 지역구 국회의원은 이들을 ‘반일 분자’라고 했습니다. 가족 문제는 조금 더 봐야할 문제라고 봅니다. 일본에서 이런 일이 나타났을 때 보면 예전 연합 적군 사건 때도 그렇고 그 가족이 나와서 사죄를 하거는 경우가 많은데, 자식이 연합 적군인 부모 중에서 자살한 사람도 있었어요. 부모가 원죄를 갚는 문화가 일본 사회에 있는 것 같습니다.
청중5: 인질들이 석방될 때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 일본의 시민운동이었습니다. 시민운동가들이 계속 가족들을 지원하면서 조언을 했고, 평화운동 단체 중에서 국제적 네트워크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계속 알려내고, 이슬람 성직자 집단에 대해서 계속 정보를 주고 노력해주기를 촉구하고 피스보트 같은 데는 이라크로 직접 가서 알자지라에 생방송으로 출연을 해서
이라크 민중들에게 연대감을 설명하고, 유럽에 연결된 시민단체들이 한 시간 간격으로 메일을 통해서 상황을 알려내고 일본의 언론에 대해서 보도를 촉구하는 등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결정적으로는 일본 정부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고 거의 일본 시민운동의 힘을 통해서 석방되었다고 할 수 있죠. 나중에 이슬람 성직자들이 일본 외무부 장관에 대해서 당신들은 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코멘트를 했는데 그런 것들이 일본 언론에서 전혀 보도가 안 되었죠.
권: 국가, 민족과 시민사회 관련해서 극단적으로 표현을 하자면 국가와 민족에 갇혀 있는 것이 한국의 시민사회운동이라 한다면, 국가와 민족을 지나치게 벗어나서 자기가 활동하고 있는 공간에 힘을 미치지 못하는 것이 일본 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단적인 예로 한국에서 월드컵이나 탄핵정국을 광장 문화라고 하는데 그 표현 방식에 대해 동의하지 않지만, 광장문화와 함께 국민 담론이 재등장하는 과정을 봤습니다만, 이와는 달리 작년에 이라크 전쟁이 터졌을 때 한국 사회에서는 반전 데모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참가했는가. 결국 한국 사회가 보편적 문제에 대해서 얼마나 둔감한가를 확인할 수 있었죠.
일본은 작년 3월에 있었던 이라크 반전 데모에 최근 10년 동안 동원되지 않은 사람들이 제일 많이 개인 자격으로 참가했다고 합니다. 한국 시민사회, 시민운동의 문제점과 강점을 동시에 대조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가 긴급히 무엇을 보완해야 하는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시자카: 일본에서도 반전 운동이 어렵다는 얘기를 했었는데, 작년에 이라크 반전 평화운동이 일본에서 시작되면서, 원래 사회운동과 관련이 없었던 젊은 사람들이 같이 하게 되었어요. 집회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유인물 배포도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평화포럼 단체 사무실에서 같이 하면서 해왔어요. 이번에 인질 사건 때도 자기들 끼리 집회도 하고요. 젊은 사람들이 재미있다고 평가를 하고 있어요.
한국도 앞으로 세대차가 있을 것입니다. 서로 낼 수 있는 지혜와 힘과 돈을 내면서 협력하는 것이, 평범하지만 교훈이라 생각해요. 일본에서도 이라크 전쟁에 반대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정치적 힘으로 조직화 되지 않기 때문에 정치를 바꿀 수 없는데, 그 경로는 어떻게 형성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 과제라 생각합니다. 한국과 교류하면서 개인들이 아, 한국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구나 하면서 다시 일본 사람들이 움직이는, 역시 교류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