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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위대한 개츠비와 코리아타운 노인>의 줄거리:
개츠비는 소설과 영화 속의 인물이지만 아메리칸 드림의 화신으로 상징화된 인물입니다. 자유와 기회의 땅 미국에서 부유한 상류층으로의 진출을 근간으로 하는 아메리칸 드림! 그와는 정반대로 미국에 왔지만 코리아 타운에서 일평생을 마치는 한국 노인의 삶! 신앙은 과연 어떤 모습에 더 가까울까요?
위대한 개츠비와 코리아타운 노인
(마8:1~17)
1.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2.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위대한 개츠비와 코리아타운 노인>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함께 은혜 나눕니다.
‘위대한 개츠비와 코리아타운 노인’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자면, 신앙은 위대한 개츠비 같으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신앙은 코리아타운의 노인 같아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F. 스콧 피츠제럴드가 1925년에 발표한 소설의 제목이 ‘위대한 개츠비’입니다.
그리고 1970년대에 그 유명한 코브라 감독이 영화로도 만든 소설이기도 합니다.
그 소설의 내용은 대충 이렇지요.
중서부 출신의 가난한 집에 태어난 개츠비가 동부로 와서 애인을 하나 사귀게 됩니다.
데이지라고 하는 애인을 젊은 나이에 사귀게 되는데, 그 데이지와 집안의 반대로 결혼을 못하고 또 데이지 스스로가 아주 돈이 많은 미국 상류층의 한 시카고 부호 집으로 시집을 갑니다.
그 시카고 부호의 아들이면서 예일 대학 출신인 톰 뷰캐넌이라고 하는 자에게 시집을 가게 됩니다.
이게 개츠비의 마음에 한이 맺혀 가지고, 내가 돈 벌어서 미국의 상류층으로 진입해서, 내 애인 이제는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여자이지마는 그 옛날 애인이었던 데이지를 반드시 자기의 사람으로 되돌릴 것이라고 하는 꿈을 갖고 열심히 동분서주하면서 노력을 하는데, 물불을 가리지 않고 돈을 모으게 됩니다.
돈을 모으는 주된 방법이 밀주, 이 술 몰래 만들어 파는 거 금주령에 반해서 이 밀주로 돈을 엄청나게 벌고 뉴욕에 롱 아일랜드에 호화저택을 짓게 됩니다.
그래서 날마다 수백 명의 인사들을 초청해서 방탕한 파티, 사치스럽고 방탕한 파티를 벌리면서 데이지에게 접근하고 그 톰 뷰캐넌의 아내가 된 데이지를 자기의 사람으로 돌이키기 위하여 갖은 애를 쓰는 중에, 결국은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톰 뷰캐넌의 거짓말에 속은, 그 동네 정비공 윌슨이라는 사람에게 개츠비가 오해를 받게 되요.
윌슨의 아내와 개츠비가 부적절한 관계에 빠져있다고 이 데이지의 남편 톰 뷰캐넌이 거짓말을 합니다.
실제로는 이 톰 뷰캐넌 자신이 정비공 윌슨의 아내와 부적절한 관계에 빠져있는데 개츠비가 그랬다고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윌슨이 분노해서 저택의 풀장에서 개츠비를 쏴 죽이고 개츠비가 그 파란색 물에 빠져죽게 되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이 납니다.
F. 스콧 피츠제럴드가 쓰려고 했던 이 이야기의 주제를 요약하면, 아메리칸 드림의 종말입니다, 아메리칸 드림의 종말, 아메리칸 드림의 비극적 허구성을 드러내는 겁니다.
미국사회에서 미국으로 이주했거나 하여간 미국사회 안에서 미국의 상류층으로 진입할 수 있는 기회가 모두에게 주어져 있다, 그럴 수 있는 자유와 그럴 수 있는 기회가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어져 있다고 생각하고 출발하는 이 아메리칸 드림의 비극적인 허구성, 참담함을 드러내 주는 거라는 겁니다.
그래서 개츠비가 아메리칸 드림의 어떤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이 아메리칸 드림은 생각대로 그렇게 이루어지지 않아요.
아메리칸 드림 때문에 오히려 미국사회에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불행해 하고 있습니다.
차라리 그 드림이 없다 그러면 '나도 상류층으로 진입해야 겠다'라는 마음이 없다 그러면 괴로움도 덜할 텐데…
반면에 코리아타운의 노인 70년대부터 미국 이민을 많이 가시지 않았습니까?
코리아타운이 형성 됩니다.
코리아타운에 사시는 노인네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한국교회에 나가서 예배드리고, 한국 노인들과 친구삼고, 한국 가게에서 옷 사고 음식 사면서 한국 사람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미국 시민권만 갖고 있지 미국 안에 있는 한국에서 살아갑니다, 평생을 그렇게 살다가 생이 마쳐집니다.
이민자들의 2세들의 꿈이 바로 뭐냐 하면, 이 코리아타운 한국 연관성을 벗어나서 온전하고 순수한 미국사회에 진출해서 자리를 잡는 거예요.
발버둥을 칩니다, 이 코리아타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한국 사람과의 관계의 사회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근데 한국 노인들 그런 꿈을 가질 수 없지요, 그냥 코리아타운에 머물러서 미국 땅 안에 있는 한국에서 살게 됩니다.
여러분!
신앙은, 육신의 목숨이 붙어서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이 세상 이 땅 위에서 펼치고 싶은 아메리칸 드림을 접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미국에 가서 미국의 상류사회에 진출하겠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돈을 많이 벌어서…
이런 아메리칸 드림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땅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근데 신앙은 그 아메리칸 드림, 이 땅 위에서 펼치고 싶고 성취하고 싶은 아메리칸 드림을 접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땅 안에서 살고 있지만 미국에서 살고 있지만 코리아타운에서 평생을 살다 마치는 것처럼, 이 땅 위에서 살고 이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천국타운에서 살다가 생을 마치는 것으로 마음을 결정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 땅 위에서 이 땅에서 결정되어진 상류층으로 진입하기 위하여 이 땅 위에 펼칠 아메리칸 드림을 마음에 품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주님께 나오는 것은 그건 이단이에요.
그건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은 접는 거예요, 이 땅 위에서의 꿈을 접는 겁니다.
이 땅 위에서의 비전을 얘기하고 꿈을 얘기하는 모든 설교가 다, 죄송하지만 이단성이 들어있는 것이라고 봐도 됩니다.
이 땅에서 잘살 것이다, 이 땅에서 높아질 것이다, 이 땅에서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게 복이다, 이런 모든 말들이 다 이단적인 겁니다.
더더군다나 주님께서 오신 뒤로는 더욱 더 그 이단성이 부각될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히 아십시다!
아메리칸 드림을 접는 겁니다, 이 땅 위에서.
그리고 천국타운에 머물러 살기로 결심하는 코리아타운의 노인네와 같은 그런 심정이 되는 것이 바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바른 신앙입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 이 얘기를 왜 하는 것입니까?
산상수훈이 끝났습니다.
산상수훈이 끝나자마자 마태는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치유하신 이야기를 갖다 댑니다.
나병환자 이야기가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다른 복음서에서 배치하는 것과 다르게 배치를 합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해서 성령의 감동을 받은 마태는, 마태 나름대로의 방향아래서 예수님의 사역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에요.
나병환자를 고쳤습니다마는 그 당시로서는 도저히 불치병으로 고쳐질 수 없는 병이고, 하늘의 벌을 받았다고 생각되는 천형으로서의 이 나병을 주님께서 고치셨다는 기적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겁니다.
산상수훈의 주제가 여러분 뭐였습니까?
천국을 소유한 자의 천국 티내기가 주제입니다.
그래 마지막 결론도 ‘천국 먹고 배불러서 이 세상에서 웨이터처럼 살아가자’라고 하는 것을 결론으로 맺었다고 우리가 어저께 함께 얘기했습니다.
자! 그러한 천국, 예수님께서 갖고 오신 천국 앞에 서있는 인간의 실제모습은 어떤 모습이냐?
마태는 이 나병환자를 치유하신 사건 속에서 바로 이 천국과 주님이 갖고 오신 천국과, 그 천국을 앞에 맞대고 있는 인간의 실상을 나병환자를 치유하신 사건 속에서 보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나병환자가 그 당시에 겪게 되는 삶의 변화 중에 가장 두드러진 것이 뭔지 아십니까?
나병이라고 판정이 내려집니다, 그러면 삶에 급격한 변화가 주어집니다.
당장에 판정되자마자 짐 싸 가지고 정든 가족을 다 등 뒤로 하고 아무리 사랑하는 애인이 있었더라도 헤어질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정상적으로 삶을 영위해가는 삶의 현장으로부터 완전히 격리 되어서 나병환자들만 모여 있는 곳으로 그 나병환자들이 모여 있는 그 골짜기에 예루살렘 같은 곳에서는 모든 도시에 나오는 쓰레기를 다 그 쪽에 버렸다고 합니다.
그 쓰레기장으로 가서 살아야만 되는 인간쓰레기가 되어 버린다는 거예요.
그 당시 그 당시 풍습상, 그 당시 율법으로 정한 원칙에 따라서 이러한 제도가 만들어져 있었다는 겁니다.
목숨은 붙어 있지마는 삶이 죽어버린 거예요, 삶이.
그런데 주님께서 굳이 4절에 보시면 나병환자를 고치신 다음에 뭐라고 말씀하시느냐 하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정한 예물을 드림으로서 네가 나병으로부터 나았다는 것을 확증 받아라!’
왜 이 말씀을 하십니까?
삶의 현장에서부터 제외 되었습니다, 목숨은 붙어있지만 삶이 죽은 자입니다.
누구와 관계를 맺을 수도 없고, 직업 활동을 할 수도 없고, 취미활동을 할 수도 없고, 정상적으로 교제를 할 수도 없고, 삶이 죽은 자인데, 이렇게 제사장에게 보이고 모세가 정한 예물을 드림을 통하여 다시 그 삶의 현장으로 복귀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 삶을 주신다는 거예요,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셔서 삶이 죽은 자에게 새로운 삶을 주신다는 겁니다.
산상수훈을 통하여 천국 티내기를 얘기하고 천국이 우리 앞에 다가온 사실을 얘기한 마태가, 천국을 마주 대하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나병으로 보고 있는 이유는, 이제 예수님을 받아들여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새로운 삶을 부여 받는 것인데 그 새로운 삶이라는 것은 뭐냐? 이 땅 위에서, 미국 건너간 노인 분들이 코리아타운에 제한되어서 사는 것처럼 이 땅 위에서 천국타운에 제한되어서 삶을 다시 허락 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전의 삶이라는 것은, 그 쓰레기 매각장에 버려져서 나병환자들끼리만 모여서 살고 있던 사회와 같은 것이 바로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 천국이 우리에게 오기 이전에 이 세상의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대한 개츠비의 아메리칸 드림이 총에 맞아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죄 때문에 천국으로부터 격리 되어져서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의 삶, 이건 나병환자의 삶이요, 위대한 개츠비의 마지막 비참한 최후처럼 그렇게 끝날 수밖에 없던 삶이었다.
나병 때문에 삶으로부터 격리되지 않습니까?
죄 때문에 천국으로부터 격리되었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살고 있는, 돌아가신 스티브 잡스, 그분이 예수님께서 갖고 오신 천국, 예수님께서 이 땅에 만들어 놓으신 천국타운에 들어가서 그 안에 머물러 살고 계시지 않았다면 그냥 그분은 천국의 삶에서 제외된 나병환자로서 살다가 삶이 끝났다는 겁니다.
나병환자 촌에서 무엇을 이루었든 지간에 IT 업계의 황제라고 불리는 자리로 등극을 했거나 말거나, 하나님이 보시고 주님이 보실 때 그리고 하나님이 보시고 주님이 보시는 그 관점을 성령의 감동을 통하여 마태가 느끼며 바라볼 때에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주님께서 가져오시고 건설하시는 이 땅의 천국타운으로 들어가 살지 않는 한, 나병환자로서 사는 것이고 위대한 개츠비의 비참한 최후로 끝날 것임을 마태는 보고 바로 나병환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의 행동을 통하여 말씀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행동적 말씀으로 받아들이시라는 거예요.
여러분, 아직도 이 세상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갖고 계시지요?
아니에요, 그래선 믿음이 아니에요.
미국에 이주한 한국노인 분들이 코리아타운에서 살 수밖에 없도록 운명 지어지는 것처럼, 영어는 단 한마디 ‘good morning’ 이라는 인사말도 한마디 안 해도 평생 70~80까지 사시다가 돌아가시게 되는 것처럼, 천국타운에 이 세상 천국타운에 머물 것으로 결정하지 않으면 믿음의 삶은 시작되지도 않습니다.
천국에서 제외되어서 살고 있던 죄의 나병환자들을 주님께서 천국타운을 건설해 놓으시고 그곳으로 다시금 들어가서 천국에서 사는 것으로 삶을 새롭게 주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이 땅 위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펼치고 성취하라고 오신 것이 아니고 아메리칸 드림에 필요한 능력과 자원을 대주시겠다고 오신 게 아니라는 거예요, 오해하지 마세요!
이걸 알고 예수를 믿으려면 믿고 믿지 않으려면 안 믿고 결정을 다시 해야 됩니다.
그러면 그 뒤에 이어 나오는 백부장의 이야기는 아주 유명한 이야기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너무 좋아하세요, 왜 좋아하셨느냐?
백부장 하인이 중풍병이 걸렸다고 해서 주님께 나와서 이 이방, 로마사람 백부장이 간구를 합니다.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며 간구를 합니다.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백부장에게는 목을 내놓는 이야기에요.
황제의 지배력이 지중해 연안을 다 지배하고 있을 때입니다.
땅 한 뼘도 황제의 지배력에서 벗어나는 곳이 없을 때에요, 로마황제의 지배력에서.
그런데 그 황제의 지배력 하에서 직속명령체계 안에 들어있는 사람이 예수님을 향하여 주라고 부른다는 것은, 반란이고, 반역이고, 배반입니다.
근데 이 사람이 자기의 중풍병 걸린 하인을 고쳐달라고 주님께 나와서 간구하고 주님께서 집으로 가서 고쳐주시려고 할 때 ‘집에 오시지 마세요,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단지 말씀만으로 명령하시면 우리 집에 있는 하인이 중풍병에서 나을 수 있습니다’라는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가 앞에 있는 천국타운에 들어가서 살아야 한다는 신앙적 운명에 처하여있는 신앙인들에게 무엇을 의미할까요?
명령체계, 황제가 지배하는 빼곡~이 지배하고 있는 이 명령지배력 안에서 나사렛 예수, 목수에 불과한 그 초라한 모습의 예수님을 통하여 진짜 지배력을 봅니다.
지배력의 근원을 보는 것이에요.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에 대하여 참 지배력의 출처는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 초라해 보이는 예수님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이게 바로 천국타운에 들어가 살게 되는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조항이라는 겁니다.
뭐라고요 그게?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원초적인 지배력은 예수님께 있고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천국타운에 들어가 살기 위해서 가져야 될 우선적이고 필수적인 요건이라는 거예요, 마음자세라는 겁니다.
그거 뭐 갖기 쉽지, 아니에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지배력이 주님께 있고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 아내가 미워요? 아내 때문에 화가 납니까? 남편 때문에 화가 납니까?
그러면 벌써 천국타운 바깥에 있는 것이에요.
내게 못마땅하게 느껴지는 부부의 배우자의 모습, 그 배우자로부터 배우자 자신으로부터 배우자 자신을 지배하고 바꾸어갈 수 있는 능력이 나오는 게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배우자에게 화내는 거 아닙니까?
당신이 이렇게 할 수 있는데 왜 안 그렇게 하느냐? 아니에요.
우리 아이들이 나쁜 친구를 만나서 나쁘게 변했다면 나쁜 친구로부터 아이에 대한 지배력이 발동한 겁니까?
아니라는 거예요. 그렇게 봐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왜 원수가 생깁니까?
원수가 내 삶에 손해를 끼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는 겁니다.
내 삶의 부분 중에 원수가 어느 정도 지배력을 갖고 있다고 믿는 겁니다.
그래서 원수가 원수 되는 것이고 원수가 미운 것이지요.
원수도 내 자식의 삶도 내 아내의 모습도 남편의 모습도 그리고 사장님이 내게 이래라 저래라 성깔 있고 곤조 있게 괴롭히는 핫 타임을 주는 것도 결국은 하나님의 지배아래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 때 천국타운의 삶은 시작이 된다는 거예요.
백부장 하인이 기적에서 낫다는 걸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백부장 이야기 끝에 비약하십니다.
이야기가 비약해요, 어떻게까지 비약하느냐 하면요?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만한 믿음을 이스라엘에서도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붙인 것이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천국으로 들어가느냐 못 들어가느냐의 문제로 백부장의 이 믿음,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은 다 황제가 지배하고 있는 세상인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라 하나님과 이 초라해 보이는 예수님께서 지배하고 있구나!’라는 걸 믿는 믿음이 없으면 천국의 삶에 참여할 수가 없게 된다는 얘깁니다.
다시 말해서, 아직도 나병이 온전히 고쳐지지 않은 상태라는 거예요.
이 세상의 황제가 누굽니까?
한 뼘도 그의 지배력을 벗어나지 않는 그런 황제와 같은 자리에 있는 게 무엇입니까?
돈이에요, 돈.
돈의 지배력, 돈의 지배력이 온 천지를 다 깔아뭉개고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아니다 돈이 아니다 돈 때문에 일하는 것도 아니고, 돈 때문에 굽신거려야 되는 것도 아니고, 돈 때문에 내가 걱정해야 되는 것도 아니고 오직 이 세상의 모든 일의 지배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주님으로부터 직접 내려오는 것이라고 인정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내가 천국의 삶이 시작이 된다는 겁니다.
그럴 수 있겠어요 여러분?
어떠한 모습을 봐도, 그런 모습을 연출하는 사람에게서 원망이 나가고 사람에게 탓이 나가는 게 아니고 하나님을 먼저 보는 거예요.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실 때에 황제의 지배력이 총독 빌라도에게 위임되어서 예수님께 지금 실현되고 있습니다.
그 지배력이 실현되고 있어요, 실행되고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네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나를 죽일 수 있고 살릴 수 있다고 믿고 있지만 나의 생사여탈 지배력을 네가 갖고 있다고 믿지만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 아버지께서 너에게 그렇게 허락하지 않으셨다면 내게 네가 생사여탈권을 행사할 수가 없었을 것인 바, 너는 나와 상관없고 나와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지금 나의 생애의 시간들이 째깍째깍째깍 진행되고 있다’
천국 안에서 사신 것입니다.
천국, 하나님 아버지가 다스리시는 세계 안에 들어가 살려면, 바람에 날아온 티끌이 내 눈에 들어간 것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해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 그랬죠?
석가모니가 태어나자마자 동서사방으로 걸어 다니면서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 그랬다는 거예요.
그러나 기독교는 오직 내 앞에 하나님이 존재하실 뿐입니다.
내 원수도 나에게 걱정을 끼치는 자식도, 회사의 상사도 아무도 없습니다.
그들에 의해서 괴로워지는 것은 하나님의 지배력 하에서 일어나는 일이지 그들이 나를 괴롭힐 수 있어서 괴롭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천만인을 만나도, 백 사람, 천 사람, 만 사람을 만나도 내가 만나는 존재는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것을 기억해 내는 것이 바로 천국타운을 살 수 있는 신앙인의 가장 우선적인 필수요건이 된다는 겁니다.
오늘 말씀 듣고 기도하고 나가면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지배력 하에 있다는 것을 있지 마세요.
그리고 그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사랑하시는 분이 원수를 내 앞에 등장시킨다면 원수를 원망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지배력을 볼 것입니다.
이유가 있어서 원수가 등장 한 겁니다.
나에게 선을 베푸시기 위해서, 은혜의 인생을 살게 해 주시기 위하여 악역을 담당하는 자들이 등장할 수 있지요.
가롯 유다라는 악역담당자가 없었다면, 한시도 그것이 없으면 숨을 쉴 수 없는 이 십자가복음 사건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 아닙니까?
자! 천국타운, 코리아타운의 노인과 같이 천국타운에 들어가서 이제는, 이 땅 위에서 펼치고 성취하고 싶은 아메리칸 드림을 완전히 접고, 하나님의 지배력아래에서 오직 하나님의 지배력에 인도하심만을 따라서 수동적으로, 지극~히 수동적으로 하나님의 앞서신 발걸음을 따라 한 걸음 한걸음 따라 갈 뿐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이요, 천국의 삶이요, 이렇게 살아 보시면 왜 이것이 천국의 삶이였는지, 천국의 삶인지를 알게 되실 것이에요.
그때 만나는 사람에게 마다 천국을 간증하세요.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위대한 개츠비가 되려는 우리의 세상을 향한 꿈이 십자가에서 다 죽게 하셔서 이제는 코리아타운의 노인처럼 그냥 하나님의 지배력 하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매인 삶을 살겠노라고 코리아타운의 노인 같은 마음으로 우리의 삶을 대할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리고 그 삶 속에서 가슴 벅차 오르는 평강과 감사와 기쁨을 실제로 경험할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