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원 입구 문위의 프레스코 화.
입구 천정의 그림.
기하학적인 무늬같으면서 꽃과 새의 그림이 있는 특이한 그림이다.
이슬람의 영향을 받은 후 이지역의 특성에 맞게 변형 된듯하다.
릴라 수도원의 全景.
"불가리아"에 가서 딱 한 곳 만을 봐야 한다면 어디를 택할까? 하는 질문에
불가리아 사람이던, 다른 나라 사람이던 같은 대답을 한단다. "릴라 수도원!" 이라고,,,,
"릴라 수도원"을 처음 세운 사람은 10世紀경 東方正敎會(Orthodox Church)의 聖者이며
隱遁者로 알려진 "이반 릴스키"(Ivan Rilski : 릴라의 聖요한 : 876~946 AD)라는 "불가리아"의 聖人이다.
"이반 릴스키"는 당시 도시사람들의 정신적 퇴폐에 환멸을 느끼고,
슬라브족에게 福音을 전도하면서 이곳 "릴라" 산속 깊은 곳으로 들어온다.
릴라 산 속의 동굴에서 숨어 지내는 修道 생활을 하였는데 修道 생활과 함께 治癒의 能力도 있었다고 한다.
시간이 가면서 그의 치유능력과 존경심이 사람들 사이에 알려지면서 여러 지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의 추종자가 많이 모여서 동굴과 가까운 곳에 수도자 공동체의 본거지를 건설했다고 한다.
불가리아 銅錢에 그려진 聖人 "이반 릴스키"의 초상.
또한 그의 치유능력이 알려지면서 그를 필요로 하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게 되었다.
그 결과 지금의 수도원에서 몇 km 떨어진 수도원 입구 아래에 두 개의 마을을 자연스럽게 형성 되었다.
946년 "이반 릴스키"가 죽자 聖人으로 추대받은 그의 유골은 발칸 제국 곳곳에 나뉘어 모셔졌다.
"릴라 수도원"에 다시 모셔진 것은 1469년 이라고 한다.
그러던 중 동굴 주위의 수도원 중심부는 13세기 末의 火災와 14세기 초의 地震으로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그 후 15세기경 이 지방의 貴族인 "프레리요 드라고보라"(Hreylu Dragovola)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최초의 유적지로부터 아래쪽으로 몇 ㎞ 떨어진 현재의 자리에 外敵의 공격이나
自然災害에 견딜 수 있도록 견고한 要塞 형식으로 修道院을 재건하게 되었다.
"프레리요 드라고보라"는 영어로 쓰면 "스테판 드라고볼라"(Stefan Dragovol)다.
그러나 17~18세기에 걸쳐 "오스만투르크" 帝國의 침입으로, 수도원은 여러 차례 습격과 약탈을 당하다가
1833년에 발생한 큰 火災로 修道院은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고 한다.
당시의 건물 가운데 남아있는 것은 1335년 세운 높이 25m의 "프레리요 塔"(Hrelja's Tower) 뿐이란다.
입구에서 본 좌측의 모습.
수도원 뒤로 "프레리요 塔"이 보인다.
그러나 릴라 수도원은 불가리아사람들의 정신적인 기둥이였기에 바로 1년 뒤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와서,
건축 자재를 운반하여 새로운 수도원이 건설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탄생시켰다고 한다.
이윽고 32,000㎡의 넓은 땅위에 지금의 웅장한 모습으로 새롭게 그 모습을 드러나게 되었다 .
건설된 건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꼽히는 "성모 승천 주교좌 정교회"(Cathedral of Our Lady of the Assumption)는
1842년 테살로니카(Thessalonica)의 "아타나시오스 탈라두로"(Athanasios Taladuro)에 의해 설계되었다고 한다.
"성모 승천 주교좌 정교회"는 그리스 십자가 모양의 바닥에 둥근 지붕 24개를 올려놓은 모양이라고 한다.
그리고 屋外 回廊이나 屋內의 벽이 선명한 색깔의 프레스코畵로 장식되어 있는데, 약 1,200개의 그림이 있다고 한다.
이 프레스코화들은 대부분 19세기에 "반스코派"와 "사모코프派" 畵家들이 그렸다고 한다.
作品에 자신의 이름이나 그린 날짜를 적어넣게 된 것도 이 무렵이라고 한다.
그 전의 聖畵에는 자신의 이름을 써 넣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이곳 릴라수도원에는 재미있는 숨은 그림이 있다.
수도원 좌측의 건물.
修道院은 3층 내지 4층 건물로 각 방에서 안뜰이 내려다 볼수 있고 통풍이 잘되도록 되어있고,
흰색, 빨간색, 그리고 검정색의 회반죽 띠로 된 벽돌 石柱가 세워진 아치로 장식되어 있다.
이는 "오스만 투르크"의 침입으로 이슬람 건축 양식이 받아들여 진것으로 보고 있다고 한다.
입구 왼쪽의 司祭館 建物은 반스코 출신의 "네모피트 릴스키"라는 사람이 감독하여 복구 한 건물이라고 한다.
그 역시 자신의 이름을 영구히 남기고 싶었지만 당시의 法으로는 그럴 수가 없었단다.
여러가지 방법을 생각한 끝에 영구히 남는 표상을 건물에 만들어 넣었다.
그건 자신의 얼굴을 건물에 그려 넣는 것이였다. 그것도 여러 사람이 모두 볼 수 있는 자리에,,,,
건물 지붕위로 올라간 굴뚝을 자세히 보면 붉은 벽돌 아래쪽에 뭔가 그림이 보인다.
많은 사람들은 이 모습을 잘 보지 못한다.
망원렌스가 달린 카메라로 찍어야 볼 수가 있다.
터키의 전통모자인 따르부쉬(Tarbush)를 쓴 것 같은 이 사람.
이 사람이 이 건물을 지은 "네모피트 릴스키"란다. 믿거나 말거나,,,,,,,,
그것이 사실이건 아니건 건물 꼭대기에 이런 사람 얼굴이 있다는게 이상하다.
프레리요 탑과 그 앞에 설치된 종탑.
鐘塔의 鐘은 왼쪽의 時計와 연결되어 있어 정해진 시간이 되면 자동적으로 종이 울리게 만들어 진듯하다.
오른쪽의 종의 모습.
왼쪽의 시계의 구조.
"성모승천정교회" 옆에 있는 "프레리요 탑". 뒤로 구름에 쌓인 릴라산이 보인다.
뒤쪽의 밖으로 나가는 문에서 본 안쪽모습.
후문으로 나오면 넓은 마당과 큰물이 흐르는 내가 있다.
屋外 回廊에 그려진 1,200여 개의 프레스코畵를 전부 다 살펴 볼 수는 없다.
그래도 건물 왼쪽 부터 살펴 본다.
회랑 천정에 그려진 프레스코畵.
이 프레스코畵들은 19세기에 "반스코派"와 "사모코프派"의 畵家들이 그렸다고 한다.
좌측에는 가운데에는 조물주인 하느님과, 주변에는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를 그린듯하다.
이곳에는 하느님과 예수의 생애를 그린듯하다.
여기에는 예수님과 열두제가가 있다.
보통 聖畵라고 하면 성경에 나오는 聖人들이나 당시의 장면들이 전부이다.
그러나 여기의 그림들에는 보통 사람들이 이곳 수도원을 짓는 모습도 그려져 있다.
천정은 빈틈이 조금도 없이 그림으로 가득찼다.
正敎會의 내부 모습.
正敎會는 앞의 제대쪽에 여러 성인의 그림들이 그려져 있는듯하다.
"프레리요 드라고보라"의 묘.
원래 내부 촬영은 하지말라고 한다.
그러나 새로운 광경에 카메라를 가슴에 붙인채 대충 촬영을 해 봤다.
오른 쪽 어두운 곳에 특이한 곳이 있어 가이드에게 물어보았다.
이곳이 바로 이곳에 처음 수도원을 지은 "프레리요 드라고보라"의 무덤이란다.
祭臺 위에 있는 燈.
祭臺 위쪽의 모습.
수도원 우측으로 돌아가보면 正敎會 우측 벽에 墓가 하나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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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 벽에 있는 어느 수도사의 墓.
마당에 있는 噴水와 손 닦는 곳.
"릴라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이용하여 만들은 것이라고 한다.
이곳에 있는 박물관도 들어가 보고 싶고, 저 "프레리요" 탑도 올라가 보고 싶은데 시간이 없다.
나 혼자 되는 것도 아니니 그냥 돌아선다. 또 내가 제일 마지막으로 차에 오른다.
내려가는 길에 보이는 마을.
돌아가는 길에 참았던 비가 세차게 내린다.
이길에서 큰길로 나가는 입구에 聖人의 커다란 銅像이 있는데 사진을 찍지 못했다.
이제 소피아로 돌아가 호텔로 가서 쉬어야 한다.
점점 더 크게 내리는 빗속에 스르르 잠이 든다.
호텔에 도착한 것은 늦은 7시가 다 되어서였다.
저녁을 먹으면서 피곤함을 달래려고 이곳의 맥주와 포도주를 마셔본다.
맥주는 비교적 쓴맛이 강했다.
포도주도 내 입에는 맞지 않았다.
내일은 소피아 시내를 돌아보고 점심을 먹은 뒤 베오그라드로 가야 한단다.
무척 긴 시간을 차를 타야 될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