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청사진 도면
“한 대리님. 회의 잘 마치고 오셨어요?”
“응. 간신히 뒤엉킨 실타래 조금 풀고 왔어. 이현주 디자인 실장 고집, 보통이 아니야. 아직 클리어하게 다 끝난 게 아니지만. 강 기사. 번역 좀 했냐?”
“네. 지금 진행 중인데요. 여기 된 것 좀 먼저 보실래요?”
씩씩거리며 긴급 대책 회의에 참석했다 온 한 대리. 일그러졌던 얼굴이 다소 펴진 채 돌아왔다. 한 대리는 윤재가 내민 일부 번역 서류를 받아들었다.
“네가 번역한 걸 문오경이 이렇게 도와준거야? 컴퓨터 작업에 프린팅까지.”
“바로 제가 번역하면서 컴퓨터 자판을 직접 두드렸어요. 제가 군대에서 컴퓨터 좀 다뤘거든요. 시간이 급한 것 같아 동시에 번역하고 타자 쳤어요.”
흠칫 놀란 표정으로 한 대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직접 했다고? 이 녀석. 수수께끼네 정말. 그것도 번역 타자를 동시에?’
한 대리가 서류를 내려놓고, 사무실 코너로 갔다. 도면을 그리는 작업 다이, 드랩터 앞에 앉았다. 반투명의 얇은 종이, 트레이싱 도면이 붙어있었다.
개발 자동차의 평면도와 정면도가 그려진 큰 트레이싱 도면이 눈에 들어왔다. 신기하고 묘했다. 최대 사이즈 A0(1189 x 841)가 드랩터에 꽉 차 있었다.
“강 기사. 이리 와봐. 이 트레이싱 원도 떼서 청사진 좀 구워와.”
“네? 청사진요?”
“그래. 4층 오른쪽 복도 끝에 청사진 출력하는 복사실 있으니까 갔다 와. 그 담당자, 꽤 성격 괴팍하니까 조심하고.”
윤재가 드랩터에 부착된 트레이싱 원도 주변에 붙은 비닐 테이프를 다 뗐다. 도면 사이즈가 커서 접기보다 둘둘 말아서 가지고 4층으로 올라갔다.
윤재는 새록새록 떠오르는 까마득한 옛날 시절 냄새와 단어들을 곱씹었다. 입사 후 배치받은 연구개발실. 드랩터 앞에 앉아 설계했던 일.
자동차도면, 청사진 잉크 냄새, 드랩터, 트레이싱지, 사도, 대외비 도장... .
“안녕하세요. 도면 구우러 왔습니다.”
“자네 누구야? 못 보던 얼굴인데.”
청사진 도면 냄새가 훅 끼치는 복사실에 들어서며 인사한 윤재에게 묻는 반말 투. 한 대리가 말한 복사실 담당자가 가재눈으로 째려봤다.
왼쪽 얼굴에 45도 각도로 칼자국이 그어진 흉터. 40대 중반의 남자. 다리를 절룩거렸다. 윤재가 그만 움찔했다. 열혈사제 드라마에 나온 악당 역, 딱 그 캐릭터였다.
“네. 신입사원 강윤재입니다. 연구개발실 개발 총괄팀. 한춘범 대리님과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어. 그래? 그 독종 한 대리가 사수라고? 고생길 훤하구먼. 독종 한 대리 등살에 회사 그만둔 조 기사가 불쌍했는데. 너도 얼마나 견딜지 모르겠다. 한 대리, UDT 출신이라 참 별나지.”
“... ???”
윤재가 끓어오르는 실망과 분노에 욱하니 감정이 요동쳤다.
“첫 대면에 저런 악담이라니. 저 주동아릴 확 꿰매버려?!‘
칼자국이 난 담당자가 윤재한테서 트레이싱 도면을 받아서 죽 폈다. 청사진 복사 기계 앞면에 딱 대고는 기계 작동 전원을 꼭 눌렀다.
청사진 굽는 롤러가 돌아갔다. 도면 끝을 잡고 천천히 밀어 넣었다. 대형 복사기처럼 돌아가며 청사진 용지가 국숫발처럼 흘러나왔다.
물씬 풍겨오는 청사진 잉크 냄새에 윤재 가슴이 어린애처럼 설레었다.
‘아~ 청사진! 이번 생, 내 꿈과 계획 청사진도 잘 뽑아놓고 수행해야겠네.’
“강 기사! 우두커니 서서 뭐 하나? 도면 복사 대장에 기록해. A0 사이즈 청사진 2부. 부서. 이름. 개발 도면이니까 대외비.”
“네.”
칼자국이 헛기침하며 윤재한테 지시했다. 연구소 내에서 도면 복사나 자료
복사는 대외비 기밀 사항이라 관리가 엄격했다. 그래서 칼자국을 심어놨나.
“찌르륵~드륵~ 드륵!
웬 기계 소음인가? 청사진 뜨는 기계가 불규칙하게 덜커덩거렸다.
“어, 이게 뭐야? 젠장 청사진 도면이 씹혔네. 한쪽으로 쏠렸구먼.”
칼자국이 청사진 기계 작동을 중지시켰다. 꼭 낀 청사진 용지를 끌어당겼다. 쭉쭉 찢어졌다. 한참을 기계 안에서 자투리 종이까지 다 빼냈다.
그걸 북북 찢어 종이 분쇄기에 집어넣고 모두 갈아버렸다. 외부 유출 방지 차원이었다. 칼자국이 다시 전원을 켜고 트레이싱지를 밀어 넣었다.
한 장이 나오고 두 번째 장이 나오는 중이었다. 이제 좀 제대로 된 건가. 싶은 순간, 누군가 들어오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도면 청사진 뜨러 왔는데요.”
“누구야? 당신도 신입이구먼.”
“네. 디자인실 서혜림입니다.”
윤재가 토끼처럼 깜짝 놀랐다.
‘아니, 이 시간에 네가 웬일이야?’
혜림이도 놀라긴 윤재나 마찬가지였다.
‘윤재, 너야말로 어떻게 여길 왔어?’
윤재와 혜림이가 보자마자 놀라며 서로 의아해하는 사이, 칼자국이 헤림이에게 듣기 거북한 말을 던졌다.
“디자인실이라고? 그쪽 이 팀장도 악명이 높지. 노처녀 히스테리. 여자가 너무 뻣세지. 그 밑에서 버텨내려면 고생 좀 하겠다. 개발 총괄팀 한 대리도 독종인데. 둘 다 사수 복은 지지리도 없네그려. 안 됐다. 쯧쯧.”
칼자국은 말투가 저런가. 꼭 반말에 빈정대고 언제 봤다고 꼭 저런다. 정말.
칼자국이 윤재에게 다 끝났다고 트레이싱 원도와 청사진 2부를 건넸다. 윤재가 도면을 각각 돌돌 말았다. 두루마리 세 개. 복사기 옆에 있는 작은 고무줄 세 개를 가져다가 도면에 하나씩 끼웠다.
칼자국이 혜림이 맡긴 도면을 펼쳤다. 역시 A0 사이즈였다. 윤재 거랑 같은 차종 레이아웃 도면이었다. 윤재네랑 똑같이 2부씩 청사진을 떠서 주었다.
윤재가 혜림이 한테 도면 복사 대장에 기록하는 것을 알려줘서 작성했다. 윤재가 혜림이 두루마리 도면도 고무줄로 끼워주었다.
일단 도면 청사진 일이 다 끝나자 도면을 옆에 세워 놓고, 윤재가 작정한 듯 칼자국한테 한 마디 쏘아댔다.
“수고하셨는데요.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무슨 막말과 악담을 그렇게 대놓고 합니까? 초면인 신입사원한테요.
어떤 양아치나 또라이도 그렇게는 안 할 겁니다. 여성 신입사원한테는 너무 가혹하지 않나요?”
“뭐라고? 너 지금 나보고 양아치 또라이라고 했냐? 이런 싸가지 없는 놈 봤나?”
칼자국이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살기가 등등한 얼굴에 핏발이 섰다. 그대로 옆에 서 있는 윤재에게 절룩거리며 달려들었다. 인정사정없이 윤재 얼굴에 일격을 날렸다.
“안돼!”
옆에서 그 광경을 바라본 혜림이 앙칼지게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혜림은 윤재가 위급상황에 처하면 어째 꼭 저 말이 나오는가 몰라.
“탁!”
“아~!”
짧고 둔탁한 소리? 그리고 계속 이어지는 비명. 혜림이 눈을 떠보니 상황이 완전 역전된 상태였다. 칼자국이 무릎을 꿇고 윤재가 그의 팔을 꺾은 채로 누르고 있었다.
혜림이 못 본 걸, 슬로비디오로 다시 보여줘야 하나. 칼자루가 윤재 면상에 오른팔을 휘저었다. 윤재가 날렵하게 머리를 숙였다.
대신 윤재가 왼팔로 칼자루 오른팔을 “탁!” 잡았다. 잡은 팔을 아래로 꺾어 눌렀다. 동시에 오른손으로 칼자루 어깨 급소를 눌렀다. 한번, 두 번!
칼자루가 “아~!”하고 무릎을 꿇었다. 윤재는 특전사 특공 무술로 칼자국을 한 방에 제압했다. 외상 하나 없이 칼자국 기선을 완전히 꺾어 놓았다.
“양아치 같은 사람. 앞으로 또 그러면 당신 이름을 양안치로 부를 거요!”
윤재가 따끔하게 한마디 하면서 칼자루 어깨 뒤를 한 번 더 눌러줬다.
“으~윽!”
양안치가 계속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혜림이 눈살을 찌푸렸다. 날카롭게 양안치를 노려봤다. 곧바로 말 펀치를 양안치에게 날렸다.
“아저씨는 처음 만나는 사람한테 무슨 말이 그렇게도 더티해요? 오늘 제대로 임자 만났어요. 특전사 중위의 손맛을 좀 보네요.
특공무술 3단의 내공에 이제야 기가 팍 꺾이는군요.”
그때 복사실 옆을 지나가던 엔진설계부 한영수 부장이 복사실로 들어섰다.
“야! 뭐 하는 거야? 일은 안 하고. 여기가 싸움질하는 곳이냐?””
“저 신입사원 강 기사가 절 이렇게 쥑이네요. 아야~ 살려주세요. 한 부장님!”
한 부장의 제지로 윤재와 양안치가 떨어졌다. 윤재가 자세를 바로잡고 한 부장에게 정중히 인사를 드렸다.
“연구개발실 신입사원 강윤재 입니다. 소란을 피워서 죄송합니다. 저 사람이 신입사원들한테 막말을 심하게 해댔습니다.
그것도 저희 부서 상사를 욕하면서요. 개발총괄 한춘범 대리를 독종이라 하며 그 밑에서 잘 버틸지 모르겠다.
한 대리 등살에 조 기사가 그만둔 거라 면서 빈정댔습니다.
저 여사원은 디자인실인데요. 이 팀장을 노처녀 히스테리로 악명높다며. 둘 다 사수 복은 지지리도 없다 해서. 말씀이 지나치다며 제가 한마디 했습니다.
그러자 저한테 폭력을 휘둘러서 이렇게 지긋이 몇군데 눌러줬습니다. 이어서 혜림이도 한부장 앞에 머리를 숙여 인사하며 거들었다.
“부장님. 전 디자인실 신입사원 서혜림인데요. 저 아저씨한테 모욕을 당했어요. 아주 불쾌합니다.
저희 이 팀장님을 독종에 노처녀 히스테리라고. 여자가 너무 뻣세다며. 혀를 찼어요.
기룡자동차 품격을 팍팍 떨어뜨려 놓고 있어요. 저런 여성 비하 발언이면 성희롱으로 인사 징계감이 안되나요? 신입사원으로 첫날, 무척 실망했습니다.“
이어서 양안치가 고래고래 소리치며 허접한 변명을 지껄였다. 듣다 말고 한 부장이 그대로 손을 들어 양안치에게 톡 쏘는 말을 했다.
“남인태 씨. 당신이 좀 과했구먼. 평소 그냥 하는 말투가 그랬잖아. 연구소 직원들이 불편들 했고. 이제 좀 정신 차릴 때가 됐어.
저 여사원 말처럼 인사 징계감도 되니까. 자 어서들 각자 위치로 가서 일들 해.”
윤재와 혜림이가 청사진 도면을 들고 복사실을 빠져나왔다. 그때야 둘이서 겨우 말을 나눴다.
“윤재야. 너 제대로 힘쓰더라. 카리스마 넘치데. 내 보디가드. 역시 든든해.”
“장난 말고. 헤림아. 넌 몇 층이냐. 난 3층인데. 늦어서 서둘러야겠어.”
“응. 난 2층이야. 서로 가깝네. 윤재 네 얼굴 보게 돼서 좋은데.”
“그럼 넌 엘리베이터 타든지. 난 바로 아래층이니까 걸어갈게.”
“무슨 소리야. 나도 계단으로 갈 거야. 너랑. 같이 가. 싫어?”
윤재가 서둘러 앞서 계단으로 내려갔다. 혜림이 종종걸음으로 윤재를 따라오며 참새처럼 종알거렸다.
“아까 우리 부서 사무실에서 너희 한 대리님과 우리 이 팀장님이 한바탕 싸우데. 개발차 도면 펴놓고 서로 자기주장을 하더라고.
한 대리님 포스 정말 죽이던데. 포효하는 범 같더라고. 거기 질세라 우리 이 팀장님도 승천하는 용처럼 기세가 등등하던데.”
서둘러 혜림이를 아래층으로 보내고, 윤재는 총총걸음으로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로 막 들어서는데, 한 대리의 고함이 윤재 고막을 울렸다.
“강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