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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장미 한 송이
“으~악! 도둑이야! 내 핸드백!”
민재가 K로드에서 오클랜드 병원 방향으로 가는 그라프톤 브리지를 막 들어선 순간이었다. 브리지 앞에서 웬 아가씨가 비명을 질렀다.
금요일 밤 11시 쯤 이었다.
“아니? 저런 날 강도 같은 녀석 봤나?”
시꺼먼 옷 차람의 도둑놈이 여성 핸드백을 빼앗아 들고 앞으로 달아나는 중이었다. 민재가 택시 악셀 페달을 밟았다.
도둑놈 한 참 앞에 급정거 했다. 바로 시동을 끄고 비상등을 켠 채 내렸다. 해병대의 민첩성을 살려 도둑놈을 향해 뛰어들어 덮치려는 순간이었다.
“뭐야? 이 자식은! 재수 없게!”
도둑이 욕설을 지껄이며 품속에서 번쩍이는 칼을 꺼냈다. 내 달려오는 민재 배를 향해 칼 든 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덜프덕!”
민재가 가볍게 몸을 날려 칼을 피하며 낙법으로 굴렀다. 다음 순간, 당황하는 도둑을 향해 돌려차기로 칼 든 손끝을 그대로 강타했다.
“쨍그랑!”
칼이 다리위로 떨어졌다. 도둑이 오른 손을 흔들며 그대로 고꾸라졌다. 잽싸게 민재가 도둑의 등 뒤에서 목을 팔로 움켜잡았다.
이어서 목과 귀 사이의 오목한 부위를 꾹 눌렀다. 민재의 주특기, 급소 누르기에 걸리면 어느 누구라도 무너지고 말았다.
“아~야!”
도둑이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다리위로 그대로 나가 주저앉았다. 오가는 차들이 경적을 울리며 천천히 지나갔다.
뒤따라 달려온 아가씨가 도둑 목에 걸린 자신의 핸드백을 가리키며 몸을 떨었다. 다급한 목소리도 떨렸다.
“내 핸드백, 내 돈.”
민재가 도둑의 목에서 핸드백을 벗겨 아가씨한테 건넸다.
“아니? 당신은 존아냐?”
“어? 이게 누구야? 린이잖아.”
낯익은 목소리였다. 서로 당황하면서도 바로 상황수습에 나섰다.
그때, 경광등을 번쩍거리며 사이렌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경찰차가 들이 닥쳤다. 아주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경찰 두 명이 급히 내려 도둑을 체포했다.
바닥에 떨어진 칼을 증거물로 주워들고, 민재와 린의 인적사항을 기록했다. 경찰은 교통 체증을 피하기 위해 경찰차에 현행범을 연행해 떠나갔다.
도둑 강도 사건이 일단락되는 것을 보며, 민재가 린을 택시에 태워 그 자리를 벗어났다.
민재 옆자리에 앉은 린은 아직도 불안한 듯 몸을 움츠렸다. 옆에 낀 핸드백을 다시금 꼭 붙잡았다.
“린. 사건은 이제 다 잘 처리 될 거야. 경찰한테 넘어갔으니까. 진정해.”
“존. 정말 고마워. 도둑놈이 존에게 칼을 휘두를 때, 너무 놀랐어. 저러다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나하고.
칼을 든 손 끝에 무림 고수처럼 날렵하게 발차기로 날릴 때 엄청 통쾌했어. 어디서 그런 민첩하고 용감한 행동이 나왔는지 다시 보게 됐어.”
린의 행선지는 멀지 않았다. 그라프톤 브리지 건너에서 왼쪽으로 꺾어 자리한 원룸 아파트였다. 린이 아파트 현관 앞을 가리켰다.
“존. 여기 아파트야. 얼마 전에 이 곳으로 이사했어. 벌써 자정인데, 어디 가서 따뜻한 차 한 잔이라도 마셨으면 좋겠는데.
근처에 마땅한 곳이 없네. 괜찮다면 내 아파트에 들러 차 한 잔하고 가지. 일이 바쁜가? 지금.”
“응. 그러지. 지금 바쁜 시간은 다 지났어. 곧 퇴근할 생각이었어.”
선뜻 린이 제안한 요청에 따라 생각지도 않게 린의 원룸에 들어갔다. 12층, 오클랜드 시내 야경이 그림처럼 보였다.
가까이에 모터웨이 불빛 차량 흐름과 멀리 스카이 타워 불빛이 반짝거렸다. 린이 서둘러 차를 끓여 내왔다.
레몬차와 쿠키를 들면서 사건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사실, 그 핸드백에는 큰돈이 들어있었어. 쉐라톤 호텔에서 그라프톤 다리만 건너면 숙소라서 그동안 걸어 다녔는데. 오늘 그만 변을 당하고 말았어.”
“다행이네. 큰돈을 뺏겼다가 다시 찾았으니까. 요즘 세상은 항상 조심할 수밖에 없어. 택시도 마찬가지야. 눈을 몇 개씩 달고 다녀야 해.”
민재가 긴장했던 터라 레몬차와 쿠키를 들면서 다소 몸이 이완되었다. 민재 잔이 다 비워지자 린이 빈 잔에 뜨거운 물을 더 따라 주었다.
“존. 사실 오늘부로 호텔 VIP 서비스 접었어. 일을 마치며 받은 현찰이 꽤 컸어. 그 핸드백을 찾아줘서 존한테 어떻게 은혜를 갚아야 할지 모르겠네.
이제 부턴 내 하고 싶은 디자인 일에 매진하려고. 직장도 미리 다 잡아놨거든. 여기서 걸어 10 분 거리에 파넬 디자인 하우스가 있어.“
민재가 레몬차를 들며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린의 얼굴을 바라보며 응원의 말을 조심스레 꺼냈다.
“린의 새로운 일상이 기대되네. 하고 싶은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여건이 고맙지. 내 도움이 필요하면 적극적으로 힘을 합칠게.
나도 택시 회사에서 이번에 보드 멤버로 당선됐어. 2년 임기인데, 회사 경영에 임원 역을 하면서 택시 운전도 병행해.
이번에 좋은 경험을 쌓고, 나도 원하는 택시 회사 하나 세우려고. 나중엔 버스 회사도 인수하고. 뉴질랜드 운수업에 관심이 많거든.
자금력과 경영 능력을 갖춰가면서 차근차근 이뤄 가려고. 린은 좋은 인맥을 가지고 있는 로비스트 같던데.
필요시 내게도 도움을 줘. 요즘 세상은 혼자 잘해서 큰일은 못 하잖아. 연합해야지. 비즈니스 관련 파트너십이 그래서 필요한 거잖아.“
린이 다소곳이 듣다가 호기심 어린 눈망울로 민재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존은 일반 택시운전사하고는 많이 다르네. 자기 철학과 주관이 뚜렷하고. 능력자 같아. 꿈도 건실하고. 꼭 세상을 다 살아본 관록이 느껴진달 말이야.
40대 중반이후에나 나올 법한 마인드야. 도대체 실제 나이는 몇이나 되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린이 알고 싶어 하는 물음에 민재가 장난조로 질문을 던졌다.
“린이 보기에 난 몇 살이나 되는 것 같아?”
“존은. 글쎄~ 관록으로 보면 40대 후반 쯤 이고. 실제 나이는 그보다 20살은 에누리한 20대 후반 쯤 될 것 같은데~”
“???”
“왜 그래? 맞혔어? 그럼 내 나이는 어찌 보이는데?”
“내 말이. 린도. 글쎄~ 관록으로 보면 40대 후반 쯤 이고. 실제 나이는 그보다 20살은 에누리한 20대 후반 쯤 될 것 같은데~”
“Bingo! 호호호”
“빙고! 하하하”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린과 민재가 손바닥을 내밀며 하아파이브를 했다.
“찌찌뽕!”
“찡스(Jinx), 찡스 어겐!(Jinx again)"
겨울 왕국 영화에 한스와 안나가 그들 공통점을 발견하며 같은 대답을 하자, 동시에 외치는 장면이 재현되었다. 민재가 독백식 나레이션을 늘어놓았다.
“사람은 저마다의 독립국가지.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관이나 목표가 다르니까.
그야말로 각양각색에 천차만별이지.
이걸 어떤 기준이나 틀로 재단해서는 안 되는 세상이고. 요즘엔, 당연한 것은 이제 없을 정도야. 편견 색안경을 버려야 제대로 본다는 것이지.“
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민재의 나레이션에 응송을 했다.
“맞아. 나도 존 말에 공감해.”
“그렇지. 자긍심이 있고 자유로운 영혼은 타인의 시선에 개의치 않잖아. 그 시간에 자기 할 바에 몰두하니까. 세상과 조화를 이루면서 자유롭게 살고.”
민재와 린이 자신들의 여건도 서로 깊이 공감했다. 자유로운 영혼을. 택시운전과 VIP 서비스.
민재가 린에게 나직이 또박또박 다시 나레이션을 이어갔다.
“린. 금수저가 계속 금수저로 살기 어려운 세상이잖아. 끊임없는 레벨 업과 업데이트를 선행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린이 또 추임새를 넣었다.
“그렇고말고. 계속해봐. 재미있네. 존은 의외의 이야기로 사람을 놀래 켜.”
“흙수저도 나름의 인생 로드맵을 가지고 꾸준히 나아가면, 세상 운이라는 선물을 만나면서 일취월장할 수 있는 세상도 오는 법이지.
린이나 나나 서로 여건이 흙수저 환경 이지만, 그걸 타개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가 다 되어 있는 게 큰 자산 이지.”
“존. 오랜만에 소통하는 대화에 빠져드네. 이런 이야기를 나눌 친구가 있다는 게 고맙지. 이 또한 축복 아닌가.”
둘이서 빙고와 Bingo, 찌찌뽕과 찡스를 말끝마다 번갈아 가며 외쳤다. 서로 공감대가 형성되자 린이 자신의 속내를 조심스레 털어놨다.
“존이 조금 전 말한 로비스트, 그게 나와 연관 되리라고는 꿈에도 몰랐어. 홍보 관련 일을 하면서 거래 업체 보스와 어떻게 얽히게 돼버렸어.
말 그대로 몸 바쳐 수주를 따내고 회사에 큰 도움이 되긴 했지. 그 걸 계기로 VIP 서비스에 한번 두 번 연관되다 1년 만에 정리하고 나오게 된 거야.
배신과 음모, 굴욕과 거래가 판치는 밤 세상을 봤어. 요즘 세상은 결과를 이루어내야지, 그렇지 못하면 끌려 다니게 되더라고.
성과와 이익이 따르지 못하고 그게 약해지면 칼로 무 자르듯 거침없이 내쳐 버리더라고. 아주 냉정한 세상이지.
그 딴 나라 세상 경험을 청산하고 원래 내 전문 분야로 돌아왔는데. 기대와 설렘도 있지만, 아직도 염려와 걱정이 앞서.“
린이 자신의 속사정을 진심으로 털어놓으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민재가 얼른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닦아주며 린 손에 쥐여 주었다.
린이 민재가 준 손수건으로 자신의 눈가를 연신 다독였다. 제니가 준 꽃무늬 손수건이었다. 그 걸 본 민재가 아차하며 살짝 움칠했다.
“린. 세상은 기회를 꼭 주는가 싶어. 그 기회를 잘 잡아 살려내는 게 우리 몫 이지. 우리는 할 일이 있잖아. 귀인도 나타날 거고, 하늘도 함께 할 거야.”
“부디 그랬으면 좋겠는 데.”
린이 희망을 주문하듯 이야기했다.
“세상을 보는 안목이라는 게 있잖아. 린도 사람을 구분할 줄 알고. 나는 그런 것이 보이지 않는 큰 자산이라고 봐.”
존. 이렇게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도움을 주니 정말 고마워. 존이 하는 말을 듣다보니 이제 좀 힘이 나는 듯 해.”
린이 점점 기운이 되살아나는지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린.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는 말이 지금 여기서 이루어지고 있어.”
“그렇고말고. Bingo!"
린이 빙고를 다시 외치자, 민재가 레몬차로 다시 목을 축이며 하던 말을 이어갔다.
“그런 게, 다 성급한 일반화라는 거 아니겠어? 대충 눈에 보이는 걸로 다 안다는 듯 떠들어 대는 것 말이야. 세상은 말이 많은 법이라고.”
“응. 그래. 그런 말에 위축되곤 했지. 세상은 말이 많지.(People will talk)”
린의 맞장구에 민재가 고개를 끄덕이며 탄력 받은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사람을 성급하게 판단하고 소문을 내는 거지. 세상은 그렇게 단세포 적인 게 아닌데도. 우리는 그런 시선을 초연해야 돼. 나는 택시 운전사야.
나에게도 똑같은 성급한 일반화의 자로 들이미는 자들이 많지. 택시운전사가 무슨? 할거야. 난 그런데 연연하지 않거든.
그럴 시간에 내 인생 로드 맵을 생각하지. 상황에 따라 수정과 보완이 계속 필요하니까. 업데이트하지.“
“존이 말한 성급한 일반화! 다시금 새겨듣네. 맞아. 남들의 단편적인 입방아에 휘둘릴 것 없다는 이야기도 되네. 특히 내 경우에는.
한 때, 몸으로 VIP서비스를 한 것을. 오늘밤은 어떤 다른 주말 금요일 밤보다 내겐 소중한 밤이야. 죽어가던 내 존재감이 확 살아나고 있어.
물질적 수입보다 정신적 자산이 정말 많이 충전됐어. 정말 가슴이 뜨겁게 차오르네. 이게 뭐지?“
“감동 호르몬.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린의 자존감이 되살아 난거야. 린도 그동안 찾아 갈구했던 자유, 자기만의 존재 이유를 찾은 거지.
일이 즐거우면 엔돌핀이 돌잖아. 감동이 큰 일 앞에는 바이돌핀이 솟고. 대자연의 아름다움이나 진리에 눈 뜰 때 피어나는 다이돌핀은 최상 은총이고.”
린의 눈자위가 붉어지며 눈물이 배어나왔다. 민재가 린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새벽이슬이 맺힌 빨간 장미 한 송이가 진한 향을 내뿜기 시작했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는 말이 유효한 새벽이었다.*
13화 끝 (5,536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