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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내 속마음을 알아주랴(2183.2023.3.12)
요2:23-25
할렐루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임재하셔서 우리 예배를 받으십니다. 오늘도 주의 전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혹시라도 삶의 현장에서 상처와 상한 마음을 가지고 오셨으면 말씀 듣다가 위로와 치유함을 받으시고, 질병과 싸우는 중이라면 여호와 라파 치료의 하나님을 만나서 치료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삶이 힘들고 지쳐서 오셨다면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새 힘을 얻으시기를 축복합니다. 무엇인가 계획하고 기도중에 있는 것이 있다면 응답받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삶이 해결되고 성령이 충만하여 기쁨과 감사와 웃음이 넘쳐나는 유쾌한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주 옛날에는 사람이 뼈를 다치게 되면 뼈가 부러진 것인지 금이 간 것인지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몸 안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를 해부하지 않고서도 사람의 뼈를 사진으로 볼 수 있게 되었으며 폐의 모습까지도 사진으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독일의 물리학자였던 ‘뢴트겐’이라는 학자가 X선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서 부터였습니다. X선하면 알아듣기 어렵지만 엑스레이 하면 다들 아실 것입니다. 이 엑스레이를 발견한 것으로 뢴트겐은 1901년 제1회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습니다. 엑스레이라는 것으로 사람의 뼈를 사진으로 볼 수 있게 되었으며 사람의 폐와 같은 우리 속의 장기를 사진으로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초음파라든지 MRA 또는 MRI 같은 것으로 사람의 뇌라든지 우리 속의 장기들을 면밀하게 보게되었습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진단하게 되었고 치료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의료기계는 없습니다. 앞으로도 이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은 사람의 속을 다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속을 잘 아십니다. 이런 점을 먼저 염두에 두고 본문을 통하여 누가 내 속마음을 알아주랴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상주감리교회에서 예배드리시는 여러분은 속 마음을 잘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은 사람의 마음을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서로가 내 마음을 알아 달라고 합니다. 또 서로의 마음을 알려고 합니다. 또 어떤 오해가 있을 때는 내 마음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강조를 합니다. 우리 모두가 마음이 문제입니다. 연애할 때는 내 마음을 알아주기를 원합니다. 내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는지 내 마음을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왜 내 마음을 이리도 몰라주느냐는 것이지요? 내 마음을 확 열어서라도 보여주고 싶은데 믿지를 않습니다. 아이구 답답해 하며 가슴을 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나면 자기의 속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내색을 안 하는 것입니다. 사이가 좋을 때야 마음을 알아도 별문제가 없겠지만 사이가 나쁠 때는 어떤 마음이 드는지 우리가 말 안 해도 다 알고 있지요? 겉으로는 말로는 안 그러는 것처럼 하여도 속은 다른 마음을 가지는 것이 사람입니다. 어때요 상주감리교회에서 예배드리시는 여러분 지금 속 마음을 뒤집어 까보일 수도 없고 답답한 일을 만났다면 그 심정 누가 압니까?
이런말이 있습니다.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도 합니다. 짐승은 한번에 두 가지를 생각 못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훈련된 개가 ‘앉아’하면 앉고 ‘서’하면 서는데 ‘앉았다가 일어서’ 하면 못 알아듣는다는 것입니다. 이러니 두 마음을 품을 수가 없지요. 미우면 으르렁거리고, 좋으면 꼬리를 흔드는 것이지, 미운데도 좋은 척, 좋은데도 싫은 척 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렘17:9절‘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부패한 마음은 겉으로 나타나는 것과 속의 생각이 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속에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마23:25-26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우리가 오늘 이렇게 예배한다고 옷을 깨끗하게 입고 화장하고 나와 있으니 모두가 깨끗해 보이지요. 그러나 속까지 깨끗하십니까? 지난 한 주간의 삶 속에서 가장 드러내기 싫은 부분을 비디오를 보듯이 나타난다면 우리가 여기에 나올 수 있을까요? 서로 서로 모르기에 함께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 앞에서까지 숨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 앞에 우리의 더럽고 추한 우리의 마음을 고백하고 주님의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내 중심으로 살았는지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얼마나 화를 내었는지 도대체 주를 믿는다면서도 누가 주인지 구분도 없이 살아온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 서로 위장하지 말고 주님 앞에 있는 그대로를 내어 놓으시기 바랍니다. 저의 속모습도 여기에 비추어 본다면 어찌 여기 설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저의 더럽고 추하고 두 마음을 품은 것이 화면에 비추어 지더라도 설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주님의 보혈의 능력이 그 더럽고 추한 우리의 마음보다 훨씬 더 크신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이 우리의 속마음을 다 아시고 계심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이제부터 사람의 눈치 보지 말기로 합시다. 우리의 신앙이 우리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하시면 됩니다. 예배도 헌금도 봉사도 어떤 직분도 하나님 앞에서 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어떻게 볼까 생각하고서 행하는 모든 일은 주님과는 이미 상관없는 일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서도 사람에게 나타나는 일로 평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사람의 마음을 아시기에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을 의탁하지 아니하신 것입니다.
누가 내 속마음을 알 수 있습니까?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 속마음을 알아주십니다. 사람 속 깊은 마음까지도 알고 계십니다. 사람은 겉으로 보면 그럴듯한데 실상 가까이 해보면 허물과 죄가 가득합니다. 그래서 사람과 그림은 멀리서 봐야 아름답다라고 합니다. 사람은 믿을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영웅이 되었다가 하루아침에 역적이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단 예외가 있습니다. 총에 맞아 죽으면 영웅이 됩니다. 존F 케네디도 총에 맞아 죽었고, 아브라함 링컨도 총에 맞아 죽었고, 흑인 인권운동가 루터 킹 목사도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러면 영웅이 됩니다. 그러나 살아있다면 여지없이 비판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신분이십니다.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이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존재하심이나 말씀들을 보증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더욱이나 예수님은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고 계십니다. 사람 속에 선한 것이 없음을 아십니다. 사람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다 중환자입니다. 숨도 제대로 못쉬고 있는 중환자가 누구를 도와준다 말입니까? 사람은 하나님만 믿고, 주시는 구원을 받아야 할 존재일뿐입니다.
대하6:30절‘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사유하시며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 모든 행위대로 행하사 갚으시옵소서 주만 홀로 인생의 마음을 다 아심이니이다’하였습니다. 하나님만이 홀로 인생의 마음을 다 아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다 아시는 예수님께 우리는 우리 자신을 치료받도록 내드립시다. 우리 속을 열어보여 드립시다. 우리 속을 열지 않아도 우리 속을 다 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믿고 들어오시라고 나를 포기하고 내 모든 주권을 내어 드려야 들어오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인격자로 대우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들이 문을 열어주셔야 들어오십니다. 예수님은 점령군처럼 탱크로 밀고 우리 안에 들어왔어 우리 마음을 점령하시지 않으십니다. 열어줄때까지 기다리십니다. 계3:20절‘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하였습니다. 나의 속을 주님은 이미 다 아십니다. 감출 것도 없고 숨길 것도 없습니다. 주님께 마음을 열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여러분 심령 안에 들어오시어 만찬을 즐기듯 여러분에게 풍성한 하늘 양식으로 먹여주실 것입니다. 꿀과 송이꿀 보다 더 단 말씀으로 여러분의 삶을 풍성하게 하실 것입니다.
000에 부흥회차 갔다가 들은 이야기입니다. 000 사람들은 자신들을 ‘게’에 비유한다고 합니다. 왜 그러냐 했더니 ‘게’들은 잡아서 그릇에 담아 둘 때 뚜껑을 안 덮어도 절대로 도망치지 못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게 한 마리가 밖으로 나가려 하면 다른 게가 못나가게 잡아끌어 내린다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남이 잘되는 것을 두고 보지 않고 헐뜯고 비판하여 끌어 내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엄청난 잠재력을 갖고도 발전하지 못하는 나라가 000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000에서는 큰 인물이 나오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듣고 속으로 말 했습니다. ‘그건 우리나라도 비슷한데’ 우리나라도 누구든지 영웅적인 인물이 하나 나왔다하면 그냥 두는 일이 없습니다. 어떻게든 흠을 찾아내어 깎아 내리고 비판하고 정죄하려 하는 것이 타락한 인간의 속성입니다.
장관으로 나오면 청문회를 하는데 가족까지 다 털려서 낙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불타는트롯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두주전 결승 1차전 1등인 황영웅이라는 사람은 지금 엄청난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별의별 사건에 다 걸려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은 완전한 사람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다 죄인입니다.‘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사람은 완전하지 못하기에 믿을 대상이 아니고 사랑하고 용서하고 도와주어야 할 대상입니다. 믿습니까? 우리 주님도 그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사랑하셨으나 사람을 의지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왜냐면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아셨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사람을 대할 때 어떤 시각으로 대하십니까? 신앙생활을 할 때 인간관계를 끊고는 신앙생활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너무 의지하지는 마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목사지만 목사도 너무 지나치게 의지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왜냐면 목사도 부족한 것이 많은 인간입니다. 목사도 허물이 많은 미완성의 인간입니다. 그러기에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목회자의 부족한 모습이 수없이 많이 보이게 됩니다. 그렇다고 부족함과 미완성에 너무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비록 미완성된 존재이나 완성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고 있는 존재입니다. 이 세상 그 어떤 목사도 완전한 목사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를 들어 일하시고 계십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 같은 위대한 인물도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 했고 그럼에도 하나님이 그를 들어 쓰시기에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죄송합니다. 제가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고 최선을 다해 주님을 기쁘게 하려고 달려가는데 그럼에도 너무 부족한 것이 너무 많아 여러분에게 송구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제가 허물이 많고 부족하다보니 실망을 하고 떠나는 교인들이 있을 수있는데 그럴 때마다 죄송하고 미안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때마다 제가 저를 돌아보고 회개하고 자책해봅니다.
어떤 분은 자기는 거짓말을 못한다고 하면서 떠나는 이유가 제가 싫어 떠난답니다. 그리고 제 설교가 은혜가 안 되어 떠난다고 말하고 갑니다. 그런 분을 보면 때로 무섭습니다. 가슴이 아파 밤잠을 못자고 끙끙 앓습니다. 하지만 저도 인간인지라 눈물이 나고 가슴이 아픕니다. 그런데 방법이 없습니다. 설득해도 안 되고 찾아가도 안 되고, 그래서 그냥 두고 말씀 앞에 엎드리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위로해 주시고 힘을 주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위로의 말씀을 상주감리교회에서 예배드리시는 여러분도 들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을 보면 우리 주님이 사람을 대하실 때 어떤 자세로 대하시는지를 보여줍니다.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에게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런데 그때 주님은 그들을 가까이 하지 않고 적당히 거리를 두십니다. 분명 그들은 주님이 행하신 기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에게 몸을 의탁하지 않으셨습니다. 왜일까요? 왜 주님은 그들을 의지하지 않고 적당히 거리를 두신 것일까요? 24절‘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라’했습니다. 그들이 누군지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25절‘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한마디로 그들의 속을 아시기에 거리를 두신 것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나왔는데 주님이 우리를 적당한 가리를 두고 계신다면 이것은 비극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 주님은 그들과 거리를 두시고 그들을 의지하지 않으신 것일까요?
1.주님은 진실한 믿음의 사람이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주님은 그래서 체험중심의 믿음을 경계 하십니다. 예수님이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계실 때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이 행하는 표적을 보고 예수님의 이름을 믿었습니다. 23절‘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이 진실한 믿음이 아닌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에게 몸을 위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왜 문제가 되었을까요? 그들의 믿음은 ‘체험중심의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적들이 행하셨습니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 되게 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계십니다. 갈릴리에서 살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오셨습니다. 그 사이에 많은 기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4복음서를 보면 엄청난 기적들이 있었습니다. 문등병자도 고치고, 중풍병자도 고치고, 귀신들린 사람도 고쳤습니다. 그 소문이 얼마나 빨리 퍼졌겠습니까? 그 소문이 어찌 예루살렘에 퍼지지 않았겠습니까?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오신다는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의 믿음을 경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이 기적 체험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고 기적이 끝나면 언제 그랬냐 싶게 떠난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신앙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이루어지면 한계가 있습니다. 체험과 기적을 통해 세워진 신앙은 조심해야 한단 말입니다. 사람의 시청각은 믿을 수 없는 연약함이 있습니다. 보는 것, 듣는 것, 느끼는 것, 이것이 얼마나 연약한 것인지 여러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사람 눈에는 세균이 안 보입니다. 그 세균이 사람에게 치명적인 존재인데도 안 보입니다. 사람의 청각도 후각도 동물들에 비하면 형편없이 연약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뭔가를 보았기에 믿는다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적을 따라 믿은 사람은 기적이 사라지면 그들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주님도 그것을 아셨기에 기적을 보고 믿는다는 사람들을 경계하시는 것입니다.
요20:29절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도마에게 하신 말을 아시지요?‘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롬10:17절‘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그러기에 우리 신앙의 기초는 ‘기적’이 아닙니다. 우리 신앙의 기초는 ‘말씀’이고 그 말씀을 통해 믿음이 새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이 말씀보다 기적을 더 선호하면 우리 신앙은 뿌리가 견고치 못한 연약한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기적에 근거한 믿음보다 말씀에 근거한 믿음을 더욱 기뻐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가까이 하시고 그런 사람을 들어 쓰시는 분이심을 믿고 상주감리교회에서 예배드리시는 저와 여러분도 그렇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주님은 믿음이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 아닌 것을 아셨습니다.
숫자 중심적인 믿음을 경계하십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행할 때 많은 사람들이 그 이름을 믿었습니다. 23절‘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많은 사람들이 그가 보통 분이 아니라는 것과 하나님의 보내신 분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이 그들에게 몸을 의탁하지 않았습니다. 그 몰려든 사람들의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그들의 믿음이 온전한 믿음이 아니고 그 숫자가 허수인 것을 주님은 아셨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도 숫자에 대한 믿음을 버릴 것을 요구하십니다.
현대인들은 힘이 정의이고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다수가 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수당이 되어야 힘이 있다고 생각하고 승리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몇 백표 차이로 떨어진 것을 보세요. 단 몇 표라도 다수를 얻어야 승리한 것이 세상의 원리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다수를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소수를 가지고 일하셨습니다. 주님의 제자는 12명입니다. 그것도 한사람은 실패자입니다. 그러나 그 소수가 성령의 능력을 입어 나가면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 예수님이 다수의 사람을 불신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다수라고 해서 다 옳다고 여기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의요 힘이라고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상합니다. 사람들은 많이 모이면 이상한 심리가 발동됩니다. 군중심리입니다. 그래서 옳고 그름을 분별못하고 이상한 짓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일부 잘못된 교인들은 잘못된 착각에 빠져 있습니다.
큰 교회는 성공한 교회이고, 작은 교회는 실패한 교회라 생각합니다. 큰 교회는 은혜가 넘치는 교회이고 작은 교회는 은혜가 없는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큰 교회는 대단한 목사님이 있는 교회이고 작은 교회는 별 볼일 없는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라고 착각합니다. 만약 그런 잣대로 댄다면 우리 예수님은 실패한 분입니다. 그분은 갈릴리 촌에서 12명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은 십자가에 죽는 비참함이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실패한 것인가요?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자신의 목적을 다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성공하셨습니다. 그러기에 다수라고 성공했다고 여기면 큰 실수하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미디안과 싸우려고 군사를 일으킬 때 처음에 32,000명이 모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너무 사람이 많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자는 다 떠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자 22,000명이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남은 10,000명도 너무 많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물가로 데려가 손으로 물을 떠먹은 300명만 남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31,700명이 돌아가더라도 그들을 통해 일하고 싶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는가’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바른 사람이 있는가’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끝까지 남은 300명을 통해 수십만의 미디안 군사를 물리치게 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을 잘 보세요. 수많은 군중을 조직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신뢰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그들을 피하시고 떠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의탁하고 사람은 의지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숫자를 바라보지 마세요. 수가 많다고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소수라도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고 나가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3.주님은 기적을 보고 몰려든 이기적인 사람을 아셨습니다.
왜 주님은 기적을 보고 몰려든 사람들을 의지하지 않았을까요? 그들의 믿음이 이기적이고 오로지 자기중심적인 믿음의 사람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24절‘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라’, 25절‘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뭘 아셨나요? 그들 속에 ‘이기적 믿음’을 아신 것입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자기중심적인 믿음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보다 자기 상황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늘 자기 환경을 중요시합니다. 내게 이익이 될 때는 따르는데 내게 이득이 안 된다 싶으면 돌을 던지는 것이 이기적 믿음입니다. 결국 이들 중은 예수님이 빌라도 법정에 세워졌을 때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아시기에 그들에게 자신을 맡기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상주감리교회에서 예배드리시는 우리들은 어떤가요? 저는 여러분에게 감사합니다. 현대인들은 교회를 선택할 때도 지하실 교회당은 습해서 싫다고 하고, 2층 전세교회는 건축헌금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싫다고 하고 피합니다. 그래서 대부분 대교회를 선택합니다. 왜죠? 부담을 안주어서 좋다고 합니다. 교회에서 봉사를 할 때도 내게 이익이 되는 일만 행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것은 피합니다. 그래서 교회에도 3D 직종이 있다 하잖습니까?
3D가 뭔지 아시나요? 힘들고(Difficult) 위험하고(Dangerous) 더러운(Dirty) 일을 말합니다. 교회에 어떤 것일까요? ‘주방봉사, 교회학교 교사, 청소봉사’라고 합니다. 이런 직분이 왜 3D 업종입니까? 힘이 들고 해도 표가 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습니다. 거기다가 시간이 많이 들어갑니다. 그러니 서로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참 제자라면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행복으로 여깁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쓰임을 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행복합니다.
우리교회도 지난주일 오후에 봄맞이 대청소를 했습니다. 밖에는 다 모였을 때 하고 월요일부터는 교회안쪽을 하자는 것인데 매일매일 나오셔서 깨끗하게 청소를 했습니다. 힘도들었고 시간도 많이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서로 하려고 하려는 것입니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스스로 나오셔서 열심히들 어제까지 일주일동안 애를 쓰셨습니다. 어제는 유리들마다 번적번쩍 빛나게 닦았습니다. 웃으려고 합니다. 김영란1호권사가 직장을 퇴직하고 시간이 되어서 교회일좀 해보겠다고 매일 나오셔서 일하시는데 잘합니다. 계단 천정을 긁어내고 페인트를 칠했는데 잘 칠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교회 모든 페인트 칠하는 선수로 임명할까 합니다. ㅎㅎㅎ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은 누구를 위해 교회를 섬깁니까? 누구를 위해 예배를 드리고 누구를 위해 봉사를 합니까? 자기입니까? 알아달라고 하는 것은 말씀그대로 우리 주님이 경계하는 사람입니다. 주를 위해 주의 몸 된 교회를 섬깁니다. 주를 위해 예배하고 주를 위해 봉사합니다. 그리고 주를 위해 헌금하는 성도가 복된 성도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지난주에 만나자고 해서 그 교회 사무실에서 차를 한잔 하면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자기속에 있는 것을 털어 놓고 상담 했습니다. 그 교회 장로님이 목사님께 ‘설교는 왜 그렇게 하느냐, 저렇게 하라, 가구는 여기다놓으라, 저기다 놓으라, 우리가 목사를 먹여 살리는데 왜 우리 말을 안 듣냐’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장로는 왜 그런 생각을 할까요? 자기가 헌금으로 목사 봉급을 준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닙니다. 상주감리교회에서 예배드리시는 성도여러분 중에 혹시 그런 착각을 할까 분명히 말합니다.
성도는 하나님께 헌금을 하는 것입니다. 목사에게 준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은 주의 일을 하는 목회자를 먹여 살리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제 아무리 신앙생활 오래 했어도 이런 자기중심적인 신앙을 버리지 않는다면 아직도 어린아이 신앙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뜻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순간순간 변화는 환경때문에 이리저리 요동치는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때때로 하나님은 사람을 우리 주변에서 가끔 떠나가게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를 떠나가게 해야 하나님이 계획하신 최선의 것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여러분 곁을 떠날 때 너무 낙심하지 마세요. 상심하지마세요. 다 하나님의 뜻이거니 하셔야 합니다. 목사님도 오는 사람은 누구든지 대 환영을 합니다. 간다는 사람은 절대로 붙잡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서 더 열심히 하라고 합니다.
성경을 보세요. 아브라함에게서 롯이 떠납니다. 삼촌인 아브라함은 낙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큰 걱정을 했을 것입니다. 이제 살만하다고 떠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를 만류하지 않습니다. 가게 합니다. 그리고 선택권까지 양보합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그 이유를 정확히는 밝히지 않고 있기에 알 수 없으나 하나님이 허락한 것으로 아브라함은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롯을 떠나게 했을까요? 그 롯이 아브라함의 신앙에 별 유익을 주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도 너무 낙망하고 좌절하고 속상해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중심을 바르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주님은 친히 우리를 아십니다.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다 했습니다. 그러기에 절대로 속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 진실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뭘까요? 사랑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주님을 사랑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베드로에게 묻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네가 내 교회를 사랑하느냐가 아닙니다. 네가 내 양을 사랑하느냐가 아닙니다. 오직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입니다. 무엇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보일 것입니까? 입의 고백으로가 아닙니다. 주일을 지키려고 엄청난 대가를 치르는 것도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 말씀대로 살려고 발버둥 치는 것도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을 보면 어떻게 하든지 복음을 전해 보려고 안간힘을 다 쓰는 그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을 읽어주면 내 편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서로서로가 마음을 알아주어야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삼상25:27-33절에는 다윗의 부탁을 한마디로 거절한 나발의 미련함 때문에 다윗의 분노가 폭발했습니다. 군사 400명을 거느리고 나발의 집으로 돌진하고 있었습니다. 풍전등화요 위기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노를 그 칼을 막았습니다. 힘으로 창으로 막은게 아닙니다. 아비가일의 지혜로 막았습니다. 다윗을 만난 아비가일은 다윗의 현재를 알아주고 그 현재를 읽어 줬어요. ‘여호와께서 반드시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 이는 내 주께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요 내 주의 일생에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니이다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 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
다윗이 사울왕에서 쫓겨 다니는 것은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시는 일이고 다윗의 생명은 여호와의 생명 싸개 속에 싸였기 때문에 절대로 안전할 것이라는 겁니다. 아니? 다윗이 이 말을 듣고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누구에게도 이런 말을 듣지 못했으니까요. 내가 만나는 사람의 의미와 보람을 알아 준다면 그는 당장 내 편이 될 것입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의 미래도 읽어 주었습니다. 장차 이 나라의 지도자가 되실 것입니다.얼마나 놀라고 감격했을까요? 그렇지 선지자가 내 머리에 기름을 부었지 그렇지, 오늘 이 곤고함은 장차 이 나라의 왕이 될 과정이지. 너무 도망다니는 일에만 급급해서 생각지도 못했던 자신의 미래를 알아 주고 읽어 준 아비가일을 어찌 좋아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말합니다. ‘만약 지금 피를 흘린다면 장차 왕이 되셨을 때 얼마나 큰 흠이 되겠습니까? 얼마나 큰 후회가 되시겠습니까? 그러니 여기서 멈추어 주십시오’
다윗은 감격해서 이렇게 고백하지요. 32-33절‘다윗이 아비가일에게 이르되 오늘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하게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또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또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오늘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복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 아비가일의 지혜는 상대방을 내 편으로 만드는 지혜입니다. 분노를 녹이고 내 친구로 만드는 지혜입니다. 죄인을 친구로 만드시는 주님의 십자가의 지혜가 여기에 새겨져 있음을 깨닫습니다. 누가 내 속을 알아주랴 걱정하지 마세요. 사람도 이렇게 알아주면 친구가 되고 좋은 관계가 되고 기분이 좋아집니다.
좀~느끼하지만 언제나 듣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나는 우리 상주감리교회가 인원이 많지 않아서 가족같은 관계라고 늘 생각을 해왔는데 가족같은 관계라는 것은 이렇게 하면 서로가 좋을 것 같습니다. 서로가 이해하고 마음을 알아주라는 것입니다.
밥은 먹을수록 찌고, 돈은 쓸수록 아깝고, 나이는 먹을수록 슬프지만,
넌 알수록 좋아진다. ㅎㅎㅎ
내가 어제 한강에 10원을 떨어뜨렸어 그거 찾을 때 까지 널 사랑할께.
햇살 가득한날 투명한 유리병에 햇살을 가득 담아두고 싶습니다.
당신 마음이 흐린날 드릴수 있도록.
이세상 행복 다 준다해도 너와 바꿀 수 없는 걸 아니?
세상이 내게준 행복 그게 바로 너야.
999년 364일 23시간 59분 59초동안 내가 너를 사랑할게
너는 1초만 나를 사랑해줘.. 그럼 우리의 천년의 사랑이 이루어 질테니.
세상엔 여러 종류의 우유가 있다 딸기우유, 초쿄우유, 바나나우유..
너에게 내가 줄수 있는 건...아이럽우유
꽃에 핀 사랑은 꽃이 시들면 지고 땅에 새긴 사랑은 바람이 불면 날아가지만
내마음에 새긴 사랑은 영원할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우리들도 이런말을 많이 하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서로가 알아주기만 해도 참 좋은데 여러분의 속 마음을 누가 알아주겠습니까? 마음을 알아주지 않으니 답답하여 울고불고 난리를 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몰라준다고 할찌라도 십자가에서 피흘려 우리를 사신 예수님께서는 우리 속 마음을 다 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복 있는 신앙생활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