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제 신발
이 복 희
살 때보다 버릴 때 마음이 커버린 걸 어떡해요
재래시장 한적한 모퉁이 살아남은 신발들
주인의 행적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함구령이라도 내려진 듯
햇살 품고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네요
한 생의 기울기를 막아 주려고 왼쪽 뒷굽만 낮아진
맨 뒷줄 비스듬한 검정 구두 한 켤레
한쪽으로 끌려다닐 인연을 또 만난다면 어쩌죠
기우뚱한 신발의 자세를 나도 모르게 비뚜름하게 읽고 있네요
발이 맞지 않은 주인만 따라가다가
뒤꿈치가 까지고, 새끼발가락에 피멍이 들고
생활마저 헐렁해 자꾸 벗겨지고
빛바랜 뒷굽으로 바닥을 질질 끌고 다녔어요
신발장이 비좁도록 모셔둔 몸의 기억들 앞에서
함께 살다가 떠나버린 수많은 인연들
나의 바닥이 닿았던 신발도 구제될 수 있을까요
언제라도 펄펄 날아갈 참새떼처럼
초겨울 햇살에 나앉은 구제 신발들
어긋난 발등 자리 서로 토닥여 주고 있네요
-계간지《시하늘》 2023년 봄호 발표
첫댓글 재래시장 한적한 모퉁이 살아남은 신발들
주인의 행적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함구령이라도 내려진 듯
햇살 품고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네요
시가 한폭의 그림 같습니다.
이복희 시인님 시가 참 좋아 읽고 또 읽고 있습니다
허접한 시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잘 읽었습니다.
구제 신발, 구제 원피스, 구제 청바지... 여기에 붙은 구제(舊製)의 이름을 구제(救濟)의 뜻으로 만들 수 있는 기발함에 읽으면서 감탄을 보냈습니다.
금년에 바쁜 일이 많아서 올려주시는 일들을 스크린 지나가듯이 훑어보고 지나갔었는데, 오늘 아침 이복희 시인님의 시를 읽으면서
잘 정제된 시어와 시장 한구석 빈티지 신발이 아닌 구제신발 파는 곳에 놓여진 신발들을 보면서 시인님의 섬세한 터치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저도 햇살을 받으면서 뒷꿈치가 삐딱한 신발 옆에 앉아 오수(午睡)를 즐기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빗새님^^
감사합니다
졸작시에 과찬의 말씀을 해주시니 부끄럽습니다.
초심으로 늘 뚜벅뚜벅 나아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