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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마음을 비우면(2295.2025.2.23)
빌3:3-9
할렐루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여기 임재하셔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고 말씀으로 만나주시고 있습니다. 오늘도 주의 전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혹시라도 삶의 현장에서 상처와 상한 마음을 가지고 오셨으면 말씀 듣다가 위로와 치유함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질병과 싸우는 중이라면 치료의 하나님을 만나서 치료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삶이 힘들고 지쳐서 오셨다면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새힘을 얻는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인가 계획하고 기도중에 있는 것이 있다면 응답받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삶이 해결되고 성령이 충만하여 기쁨과 감사와 웃음이 넘치나는 유쾌한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이 삶을 살다가 보니 때로는 힘든 순간이 찾아오기도 하고, 자신감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방향을 찾지 못해서 방할 할때도 있었을 것이고, 주저앉고 싶을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럴때에 말 한마디로 힘든 시기를 이겨내기도 하고 성공의 길로 들어서기도 하고 행복을 찾았다라고도 할 것입니다. 마음을 울리는 여러 가지 말씀들이 있습니다. 명언이라고도 합니다. 넬슨 만델라는 인생은 누구나 실패하고 좌절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때마다 일어서서 앞으로 나아가는 의지라고 했습니다. 일어설 수 있다면 계속 성장해 갈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존맥스엘은 변화는 고통스럽지만 그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무르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명언들은 변화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오늘은 우리들의 마음의 변화를 가져왔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사람들이 어떤 것을 할 때에 1등을 하고나면 마음을 비우고 했다라고 말을 합니다. 마음을 비웠더니 잘 되었다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마음을 비우면 얻어지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겸손은 사람을 머물게 하고, 칭찬은 사람을 가깝게 하고, 넓음은 사람을 다르게 하고, 깊음은 사람을 감동케 합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은 마음을 비워서 여러분의 마음이 아름다운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마음의 변화입니다. 즉 기뻐하는 것입니다. 기뻐할 일이 있어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기뻐함으로써 기쁜 일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기 위해서는 악한 사람을 사귀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자기 몸을 해롭게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몸에 해로운 술 담배를 금해야 하고 나쁜 생각과 행동도 피해야 합니다. 봉사하려면 자기 힘으로 하지 말고 성령의 능력으로 해야 합니다. 자기가 했다고 생각하면 자랑하게 되고 생색을 내게 됩니다. 주께서 주셔서 했다고 생각하면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예수님만 자랑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날 때와 죽을 때를 보면 묘한 교훈을 줍니다. 아이가 태어날 때 주먹을 쥐고 태어납니다. 의욕과 야심의 표시로 주먹을 쥡니다. 세상을 사는 동안 열심히 일하고 힘써 돈을 벌고 지식을 얻고 권세를 누리기 위해 발버둥 칩니다. 그런데 세상을 떠날 때는 그토록 부여잡았던 손을 쭉 폅니다. 세상 것에 대한 모든 것의 포기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무리 붙잡아도 내놓을 날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두고 떠나야 할 나그네일 뿐입니다. 인간은 이런 본능적 욕구 때문에 살아 있는 동안 무엇인가 소유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욕구에서 자신을 비울 수 있는 사람은 보통사람이 아닙니다.
오늘의 성경에서 보통사람이 아닌 특별한 사람, 사도 바울에게서 마음을 비우는 삶의 비결을 배우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 정과 욕심을 못 막은 후에 스스로 비우고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결국, 그의 생애는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많은 위대한 영광의 삶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토저박사는 ‘사도 바울은 세상에서 가장 성공한 그리스도인이며, 세계 역사상 그 이력을 놀라운 사람이요, 그의 업적은 교회사에서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백하기를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했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하였습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자기가 배운 지식으로 최고의 인격에 도달하고 행복을 얻은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알고 보니 자의 배운 모든 지식이 무가치한 것을 알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마음을 비우고 나니 자신에게 큰 변화가 있음을 몇 가지로 증거 하고자 합니다.
1.사람이 마음을 비우면 비울수록 겸손해집니다.
마음을 비우면 겸손하게 됩니다. 바울은 이제 자신의 배경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는데, 육체의 자랑으로 치면 자신은 누구에게도 빠지지 않을 사람이었다고 소개합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로서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하고 내세울 것이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면 한가지씩은 다 있을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너무 잘한다고 하는 것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바울의 말을 빌려서 말한다면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이런 사람이었어’ 나는 율법을 따라난지 정확히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중에 초대 왕을 배출하고 성전이 있는 땅을 기업으로 얻은 베냐민 지파에 속해 있고, 전혀 이방인의 피가 섞이지 않은데다 히브리어를 말하는 정통 히브리인이고, 게다가 율법으로는 가장 엄격한 바리새파 출신이고, 열심을 다해 유대교가 나사렛 이단으로 규정한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 따지자면 흠이 없다, 즉 율법 준수에서 한 가지도 태만한 것이 없다. 육체를 자랑하자면, 나 바울은 이 정도로 내세울 것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 중에서도 더할 나위 없이 자랑할 것 많은 유대인,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 바로 나 바울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런 육체의 자랑을 따지는 곳인 유대 사회에서는 이 모든 배경이 바울에게 큰 유익을 주었고 바울은 거칠 것 없이 잘 나갔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자(빌 3:5)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자기 의에 대한 교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를 만난 후로는 자신의 모든 의(義)가 낡은 누더기와 같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부족함과 죄인 됨을 알고 다음과 같은 고백을 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도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고 이런 고백을 했으면 합니다. 고전15:9절‘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엡3:8절‘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 보다 더 작은 나’, 딤전1:15절‘죄인 중에 괴수니라’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겸손해져야 하겠습니까? 우리 중에 의로움과 착한 행동을 앞세우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비판하면서 살아온이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을 비우면 비울수록 겸손해집니다. 예수님도 자신을 비우고 온전히 겸손하여 낮아지셨습니다(빌 2:6~8).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겸손을 배웁시다. 예수님은 좋은 가문과 지위와 교만을 버리시고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마 13:55). 예수님은 모든 부를 버리시고 머리 둘 곳이 없는 가난한 자로 사셨습니다(눅 9:58).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살지 않으시고 나사렛에서 사셨습니다. 지방적으로 출신 지역이 멸시받는 곳에서 낳고 자랐습니다. 상주감리교회 김영윤목사가 태어난 곳이 충청도 음성 맹동 두성이라고 하면 다들 웃었습니다. 이름도 촌스러운 맹동에서라고, 그런 촌 동네에서 그래요 맞습니다. 그런 촌 동네에서도 예수그리스도를 전하는 목사가 태어났습니다. 지금은 음성이 혁신도시가 되어서 얼마나 좋아졌는지 모릅니다. 아직 가보지는 않았습니다. ㅎㅎㅎ
예수님은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창녀 같은 죄인의 친구였습니다. 또 학교에서 배운 일도 없습니다. 구경 밖으로 여행한 일도 없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자신을 비우고 인간으로서 가장 낮은 자리에서 겸손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비운 마음, 겸손 앞에서는 자기의 모든 것 중에 하나도 자랑할 것이 없었습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까?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들도 항상 겸손하시기를 축복합니다.
2.사람이 마음을 비우고서야 고상한 것을 알게 됩니다.
상주감리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는 저와 여러분에게 가장 고상한 것, 가장 귀하고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무엇을 가장 고상하게, 가장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는지를 점검하려면, 우리의 관심과 생각, 열정과 시간을 어디에 가장 많이 쓰는지를 보면 됩니다. 달리 표현하면, 우리가 가장 많이 묵상하는 대상이 우리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대상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인생은 자동적으로 소중하고 귀한 것에 마음을 두고 계속해서 생각하는 활동, 즉 묵상이라는 활동을 하게 마련이거든요. 우리 마음은 어디에 가장 많이 머물고, 우리는 무엇을 가장 많이, 무엇을 주야로 묵상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 마음이 머물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얻도록 주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기를 축복합니다.
바울 사도는 마음을 비우고 나니 8절‘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했습니다. 마음을 비우면 가치 판단을 바로 하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 욕심으로 가득 차면 저속한 것과 고귀한 것을 분별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막8:36절‘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육체의 자랑을 가진 사람이 이제 뭐라고 말합니까? 7-8절 머리 부분에서 바울은 무엇이든지 이전에 자신에게 유익하던 것을 다 해로 여긴다, 심지어 모든 것을 해로 여긴다고 말씀하죠. 하지만 그것으로도 모자라는지, 8절 후반부에서 내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긴다고 재차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왜 자신에게 유익하던 것을 다 해로, 심지어 모든 것을 해로 여긴다고 선언하는가요? 게다가 내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긴다고까지 강조해서 말하는 건가요? 바울은 그 이유가 ‘그리스도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이전에 내게 유익했던 모든 자랑들, 이제는 그 모든 것을 다 해로 여기고 다 잃어도 좋다, 아니, 아예 내가 더럽게 여겨 버릴 배설물로 여긴다! 그만큼 내게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보다 앞설 수 있거나 그것을 능가할 어떤 귀한 것도 내게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과거 누구보다 열렬히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바울의 눈에 비친 교회는 나사렛 이단의 괴수를 추종하는 사악한 집단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회를 없애야 한다는 열심에 휩싸여 대제사장에게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체포할 공문을 받아 다메섹으로 원정을 갔던 사람이 바울이었습니다. 그러했던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영광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십자가에, 나무에 달려 죽은 예수는 율법을 따라 볼 때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저주 받은 게 전부인 줄 알았던 예수가 부활한 모습으로 자신에게 나타났습니다.
바울은 바리새인으로서 부활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따라서 예수가 부활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고 죄가 없는 의로운 분이라고 공증해 주셨다는 것이죠. 이것은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고 뒤집어지는 지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자기는 하나님을 위해 열심을 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하나님이 의롭다 공증하신 분의 몸인 교회와 그분을 대적하고,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 예수를 만나 예수를 얻고 예수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보니, 성령께서 눈을 여셔서 모든 것을 예수라는 빛 가운데서 새롭게 보게 되니 이제는 세상과 자신을 보는 모든 관점이 참되게 바뀌어 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우리는 분명한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 것을 얻으려고 영생을 잃으면 한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잃고 얻는 것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어떤 이는 돈 버는데는 성공했으나 진실을 잃었습니다. 어떤 이는 출세하는데 성공했으나 양심을 잃었습니다. 어떤 이는 명예도 지위도 얻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잃고 타락했습니다. 어떤 이는 사업에 성공했으나 가정을 잃었습니다. 무엇을 얻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잃고 있는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모든 것 다 얻었어도 믿음을 잃었다면 비참한 것입니다. 모든 것 다 잃었어도 믿음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마음을 비우고서야 예수를 나는 지식이 고상함을 알게 되며 비로소 고상하게 사는 인격자가 될 수가 있습니다.
현대인들의 비극은 마음이 너무 세상 욕심으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살기좋은 대한민국에서 마음대로 살고 있습니다만 행복하지를 못하고 우울증과 살인과 마약과 등등 여러 가지로 인하여 행복하지 못하다고 합니다. 오늘 이 시간만이라도 비우고 주님의 마음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현대인들은 삭개오처럼 살고 있습니다. 그는 부자였으나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높은 지위에 있었으나 존경을 받지 못했고 오히려 멸시를 받았습니다. 국가의 요직에 있었으나 매국노의 일을 하였습니다. 그는 육체적으로 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양심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정신적으로는 넝마 인생이었습니다. 세상적인 것은 다 가졌으나 비참한 존재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이유는 그가 인생의 위기를 느끼고 있었고 무너져 가는 인생의 허무와 공허가 그의 가슴을 휘몰아쳤기 때문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도 알다시피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러 달려갔고 뽕나무로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 자기 마음이 쓸데없는 것으로 채워진 것을 알고 그 마음을 다 비우기로 결심하고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옛날에 좋아하던 것, 소중히 여기던 것 다 분토와 배설물로 여겼노라 하였는데 지금 나는 배설물을 보배같이 간직하고 살아온 자신의 깨어짐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서 안일과 허영과 교만과 허탄한 세속의 명예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얻기고 결심하고 그리스도를 믿고 생활의 행복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3.사람이 마음을 비우면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든지 자신이 잘났다고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우리의 생각과 행동은 하나님 앞에서 모두 죄입니다. 의인은 하나님께서 주실 행복한 삶을 살 준비가 된 사람이지만 죄인은 육신의 욕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항상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죄의 무거운 짐을 단번에 해결해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욕심의 죄에서 끊어내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열매가 맺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하나님께서 확실하게 만들어 가십니다.
바울은 왜 이토록 그리스도를 위하려고 하는지, 왜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고 이보다 귀한 것은 없다고 하는지, 9절‘내가’부터 보면서 확인해 보도록 하시죠.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고 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바울의 말은 ‘성도에게 주어진 의는 우리가 율법을 행한 결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성도가 믿음에 대해 주의해야 할 것은 자기 믿음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는 것입니다. 즉 자기 믿음에 대한 의심 없는 확신을 주의해야 합니다. 성도가 자기 믿음을 확신하는 대개의 경우 자기감정에 기초한 주관적 판단일 수 있습니다. 즉 믿음에 대해 말씀하는 성경의 객관적 진리와는 무관하게 자신의 종교적 감정에 의한 자기 주관적 사고입니다.
우리가 자기 믿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을 때 더 이상 자신의 믿음에 대해 생각하거나 점검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것을 우려해서입니다. 믿음은 신뢰를 의미합니다. 이 신뢰는 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볼 수 있는 것에 대한 신뢰와 볼 수 없는 것에 대한 신뢰입니다. 볼 수 있는 것에 대한 신뢰는 예를 들어서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다리가 있어서 그 다리를 건널 때 ‘이 다리가 무너지지 않는다’는 신뢰로서 다리를 건너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보이는 것을 근거로 한 어떤 것을 믿고 그 믿음을 따라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볼 수 없는 것에 대한 신뢰는 비록 보이지 않지만 그것이 사실로 되어지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사실로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천국이 볼 수 없는 것이지만 천국에 가게 되기를 바라는 심리적 상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주관적인 것도, 자기감정을 기초로 한 것도 아닙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신뢰할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인, 반면에 우리는 너무나 불안전한 존재입니다. 물론 인간이 불안전하고 부족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자신의 불안전함이 곧 영원히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말하는 것이고, 분리 자체가 인간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이 불안전하든 부족하든 그것이 우리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이라면 아무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그냥 부족한 대로 살아가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불안전함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게 된다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느냐의 여부가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 나아가는 것에 크게 영향을 줄 것입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와 관계 속에서 따라가는 삶입니다. 상주감리교회 교회 성도가 믿고 신뢰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일하심으로 인해서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던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 된 관계로 회복이 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우리의 모든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성도로 하여금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일을 신뢰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거룩을 요구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게 하고, 완전을 요구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완전치 못한 자신을 보게 합니다.
거룩하지 못하고 완전치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에 의해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자각할 때 나의 심판을 대신 담당하신 그리스도를 신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즉 자신의 죄를 알고 그리스도의 죄 용서함을 알고 믿는 것으로 믿음의 모든 것이 종결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믿음의 전부라면 ‘우리는 나는 죄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의로운 자가 되었습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것으로 믿음의 모든 것이 충족 되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죄를 알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 믿음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시작입니다. 믿음은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따라 살도록 합니다. 그리스도를 신뢰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가신 길까지 신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이 가장 근본적으로, 그리고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은 ‘의’입니다. ‘의’라는 것은, 간단히 설명하면‘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리키는 용어이고,이 ‘의’가 우리 인생에게 참된 행복이고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사실 ‘의’ 즉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는 문자 그대로 율법을 100퍼센트 완벽하게 그 내면적인 의미까지 완벽하게 지켜야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생은 아담 안에서 이미 죄인으로 태어나고 율법을 지키는 것은 고사하고 율법으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아래 있는 것이 본래 우리의 처지였습니다. 따라서 우리 인생의 이런 상태로는 ‘의’는커녕 전혀 소망이 없습니다.
율법은 완전하나 우리 인생이 연약하여 ‘의’를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바울은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율법의 외면만 지키면서도 완벽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만나고 보니 그게 아닙니다. 스스로는 결코, 죽었다 깨어나도 의를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의’를 누가 이루셨는가, 바로 예수님이 성육신으로 우리의 자리에 들어 오셔서 우리 대신 다 이루신 것입니다. 그 절정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치러야 할 죄에 대한 대가 율법이 죄인에게 요구하는 대가를 자신의 피를 흘려 치르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에게 율법을 100퍼센트 다 이루신 것을 이루신 ‘의’를 우리 것으로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생이 의롭게 되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누릴 수 있는 길은 예수님을 믿는 것 외에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 인생의 의로움이 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이 ‘의’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의’를 가지고서만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며, 하나님 아버지와 사귀며 참된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의’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얻는 이 ‘의’보다 큰 축복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 ‘의’를 주시는 유일한 분이시고,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즉 그분을 믿어 그분을 얻고 그분 안에서 발견되는 것보다 중요하고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만이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우리를 건져내고, 우리를 우리 생명이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고 하나님 자녀가 되게 하고 인생의 참 복락인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얻게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로 나아가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장 귀하게 여기십시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믿음의 ‘의’를 어떤 것보다 귀하게 여기십시오. 이 ‘의’만이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가르침이고 견고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자신의 이름을 세속적인 영광과 명성에 남기려고 애를 썼습니다. 심지어 비석에 새겨서 그 이름을 남기려고 합니다. 그러나 인생은 모두 허무한 존재요 하나님이 없는 자는 흙에 기록된 자에 불과할 것입니다(렘17:13). 세상의 욕심에 눈이 어두우면 자기 이름이 어디에 기록되어야 하는가를 알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마음을 비운 후에는 그 마음 가운데 주님을 모시고 예수님이 그의 생의 전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보았습니다.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 되었습니다. 자기 삶의 가치와 의미, 모든 영광을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보는 사람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아쉬움 없이 하늘의 보화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요14:1절‘너희는 마음이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사회적인 신분이 낮아서, 알아주는 분이 없어서 섭섭합니까? 벧전2:9절‘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병든 몸 연약한 육체 때문에 괴로워하십니까? 눈을 들고 저 높은 곳을 봅시다. 계21:4절‘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해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이 다 지나갔음이라’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발견합시다. 그때 우리는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그 기업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가를 새롭게 보게 될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하늘나라에는 세 개의 책이 있습니다. 행위 책, 생명책, 기념 책입니다. 멸망의 사람들은 그 이름이 행위 책에서 발견되게 될 것입니다(계 3:5).
마리아는 예수님을 사랑하여 아낌없이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26:13절‘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저를 말하여 기념하리라’마리아의 그 이름이 기념 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리아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자신을 발견하고 헌신하였기에 그 이름은 영원히 그리스도 안에서 기억되는 여종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겸손하고, 고상한 지식과 자기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오늘 이 시각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죄인 됨과 그 보혈의 능력으로 의인 됨과 그리고 하늘나라에서 상급 받을 영광스러운 나를 찾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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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