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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 -
본래 모든 믿는 이는 다 바울과 같이 믿고 침례를 받을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수 있다(행9:17-18). 그러나 많은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해 이루신 죽고 부활하신 사실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없고, 동시에 성령께서 불러서 순종하라고 하신 부활의 원칙을 성실히 준행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면으로 말할 때 믿는 이는 이미 죽고 부활한 자이고, 제자된 그의 본분으로 말할 때 그는 응당 자신에 대하여는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살아야 하는 데, 그러나 여전히 그는 육체에 통제 당하여 죽지도 않고 부활하지도 않은 사람과 같다. 그러나 이러한 믿는 이는 비정상적인 믿는 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비정상적인 믿는 이들은 오늘날에만 아니라 일찍이 사도 시대 때부터 있었다. 고린도인들이 이에 대한 하나의 예이다. 고린도인에대한 바울의 말에서 우리는 이것을 볼 수 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고전3:1-3)
여기서 사도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영에 속한 자와 육신에 속한 자 두 부류로 나누었다. 실로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은 놀라운 사람이 아니라 극히 정상적인 사람이다.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이야 말로 놀라운 그리스도인인데, 이는 그들이 정말 비정상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린도의 그리스도인은 이미 그리스도인이었지만 그들은 영에 속하지 않고 육신에 속한 자였다. 성경의 이 장에서 사도는 세 번씩이나 그들을 육신에 속한자라고 말했다. 성령께서 주신 지혜를 통하여 사도는 먼저 그들 자신이 어떤 부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한 후에야 어떤 교리든지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성경에 의하면 거듭남은 일종의 출생이다. 사람이 거듭났다는 것은 그의 가장 깊은 곳에 감춰진 영이 새롭게 되고 하나님의 영이 그의 안에 내주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생명의 능력은 한동안의 기간이 경과되어야만 밖으로 - 중심에서 둘레로 - 도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의 갓난아이가 ‘청년’ 의 힘이나 ‘아비’의 체험을 갖기를 바랄 수 없다. 갓 거듭난 믿는 이가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에 대해 열정적이며 충성스럽게 전진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자신의 죄와 자아의 가증함을 더욱 알고 하나님의 뜻과 영적인 노정을 깨달을 수 있도록 그에게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 많은 경우 그들 중에는 주님을 열렬히 사랑하고 진리를 좇아 행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 이러한 것들은 아직 불을 통과하지 않은, 오래 견딜 수 없는 감정과 생각의 자극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는 성령의 충만을 받아도 그가 여전히 육체를 모르기 때문이다. 어떤 일들이 육에서 나온 것임을 모르는 사람은 육체의 일을 제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실지적인 상태에 의하면 갓 태어난 믿는 이들은 다 육에 속한 자들이다.
이렇게 주님을 갓 믿은 그리스도 인에 대하여 성경은 그가 즉각적으로 영에 속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그가 몇 년 혹은 몇십 년이 지났는데도 성장하지 않고 갓난아이의 위치에 머물러 있다면 이것은 부당하고 가장 불쌍한 것이다. 여기서 사도는 그리스도 안의 갓난아이가 육에 속한 자라는 것을 언급한 후에 오랫동안 갓난아이로 있는 자도 육에 속한 자라고 말한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도 여전히 육에 속한 자이다. 시기적으로 보면 그들은 이제 마땅히 온전한 사람으로 성장해야 했는데, 반면에 그들은 메말라 있었고 궁극적으로는 갓난아이였기 때문에 그들은 여전히 육에 속한 믿는 이들이었다.
믿는 이가 육에 속한 상태에서 영적인 상태로 옮겨지는데 쇼요되는 시간은 오늘날의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그리 길지 않다. 완전히 죄악된 이방인이었던 고린도의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 인이 된지 몇 년이 채 되지 않았는데도 사도는 그들이 갓난아이로 있은지가 너무 오래 되었고 육에 속한 지도 너무 오래 되었다고 말한다. 그들은 벌써부터 영에 속해야 했댜. 그리스도의 구속의 목적은 사람이 영에 속하고 온 존재가 완전히 성령의 다스림을 받을 수 있도록 모든 장애를 제거하는 데 있다. 이러한 구속은 실패함이 없는 것이다. 성령의 능력도 특별한 것이 아니다. 육에 속한 죄인이 거듭난 믿는 이가 될 수 있는 것처럼, 거듭났으나 아직 육에 속한 믿는 이도 영에 속한 자가 될 수 있다. 가장 불쌍한 것은 십 여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원래 모습으로 아무런 진보도 없는 자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몇 년 내에 영에 속한 생명 안에 들어가는 것을 이상한 것으로 여기고 놀라며 이것이 일반적이며 가장 일반적인 단계의 성장임을 모른다. 독자들이여, 당신은 주님을 믿은 지 몇 년이나 되었는가? 당신은 이미 영에 속한 자가 되었는가? 우리는 결코 성령을 근심케하고 자기에게 손실을 가져다주는 늙은 갓난아이가 되지 말아야 한다. 이미 거듭난 믿는 이는 가장 짧은시간 내에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것들 안으로 인도되기 위하여 온전히 영에 속한 생명을 사모하고 범사에 성령으로 주관하시게 해야 한다. 계속 자라지 않고 헛되이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자라지 않고 갓난아이로 남아 있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다. 첫째는 그의 영혼을 돌보는 자가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 이의 위치만을 주의하고 영적 생명에 대한 체험이나 성령 안에 있는 생명을 모르므로 더 풍성한 생명 안으로 그를 인도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는 믿는 이 자신이 영적인 것들에 대하여 별로 흥미가 없고 구원 받는 것으로 만족하며 영적인 것들에 대한 온전한 갈급함이 없거나 혹은 그 조건을 알지만 대가가 너무 커서 꺼려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늙은 아이들이 적지 않은 것이다.
육에 속한 그리스인에게는 대체 어떤 특징들이 있는가? 오랫동안 갓난아기로 남아있는 것(히5:11-14)이 특징이다. 갓난아이의 기간은 몇 년을 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사람이 거듭난 것은 그를 위해 십자가에서 죄를 속량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믿음과 동시에 그는 마땅히 그가 이미 구주와 함께 못 박혔다는 것을 믿어야 하고, 성령께서 육체 권세에서 그를 해방하시도록 허락해 드려야 한다. 이것을 모를 때에는 육에 속한 상태 오랫동안 남아있게 된다. 여기에 속한 사람의 두 번째 특징은 영적인 가르침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고전3:2). 고린도인은 자신의 지식과 지혜의 뛰어남을 자랑했다. 우리가 알듯이 당시 여러 교회들 가운데 가장 지식이 있는 교회는 아마도 고린도 교회였을 것이다. 바울은 그들이 모든 지식의 부족함이 없다(1:5)는 이유로 하나님께 감사했다. 이는 바울이 영적인 말씀을 그들에게 들려줄 때 그들이 모든 말씀을 이해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생각 안에 있는 것일 뿐이다. 비록 그들의 모든 것을 알았지만 그들은 능력을 알지 못했고 생명 안에서 그들이 아는 것을 표현할 수 없었다. 오늘날 그들이 이해하는 교리가 적지 않고 심지어 영적인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들려줄 수 있으나 그들 자신은 아직 영적이지 않은 믿는 이들이 많다. 참된 영적인 지식은 놀랍고 오묘한 사상이 아니라 믿는 이의 생명이 진리와 연합하고 영적 생명에 있어서 참된 체험을 갖는 것이다. 총명은 아무 소용이 없고 진리를 알려는 열렬한 욕망만으로도 충분치 않고, 오직 성령을 온전히 순종하는 생명만이 성령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 그렇지 않은 것은 머릿속에서의 상호적인 받아들임에 대해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지식은 육에 속한 사람을 신령하게 만들지 못한다. 그 반대로 육에 속한 생명은 모든 지식을 육에 속한 것으로 만든다. 이러한 사람에게 부족한 것은 더 많은 영적 가르침(이는 사도가 이것을 말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임)이 아니라 생명을 성령에게 의탁하고 성령의 명령을 들으며 십자가의 길을 걷기 원하는 순종의 마음이다. 이러한 부류의 사람에게 영적인 지식은 그의 육에 속함을 견고케 할 뿐이며 그로 자신을 속이도록 돕고 자신을 신령하다고 생각하게 할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영적인 것을 이렇게 많이 알 수 있겠는가?" "그러나 당신이 알고 있는 것 중에 생활 속에서 배운 것은 몇 가지나 되는가? 혹 생각에서 나온 것에 불가한 것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를!
또 한 가지 육에 속한 자의 가장 큰 증거가 있다. "너희가 육에 속한 자"인 이유는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시기와 분쟁의 죄는 그가 육에 속했다는 증거이다. 고린도 교회 안에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고 생각하여 서로 분쟁하는 것이 있었다(고전1:12). 그중 어떤 이는 그리스도를 위해 다투면서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고 생각했는데 이것도 역시 육체에 속한 행위이다. 육체 정신은 시기와 분쟁이다. 이러한 정신으로 튜닝을 높이는 것도 역시 육에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종파적인 자랑에 속한 가장 좋은 말도 어린아이의 재잘거림에 지나지 않는다. 교회의 분열은 다른 일이 아닌 하나님께서 여기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사랑의 결여와 육체를 좇아 행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말씀을 옹호한다는 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육에 속한 사람은 세상에서 죄인으로서, 거듭나기 전에 그들의 혼과 몸이 그들의 주인이므로 그들은 육에 속한 자들이다. 만일 믿는 이들도 육에 속한다면 세상 사람을 따라 행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이 육에 속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갓 거듭난 사람이 육에 속하는 것은 용서할 수 있을지 모르나, 주님을 믿은 연한으로 보아 고린도인은 응당 벌써부터 영에 속해야 하는 반면에 그들은 세상 사람을 따라 행했다. 보편적으로 세상 사람을 따라 실패하고 범죄하는 것은 그 사람이 육에 속한 자라는 것을 나타낸다. 만일 믿는 이가 아직도 그의 괴팍함과 성질과 이기주의를 이기지 못하고,아직도 사람과 의견을 가지고 따지며 이기려는 마음이 남아 있고, 남을 용서하지 않고 온전한 사랑으로 말하지 않는다면, 그가 아는 영적인 말씀이 얼마나 많은지, 스스로 꾸며낸 영적 체험이 아무리 많고, 일에 열심이 있고, 그 일이 효과적이라 할지라도 그는 여전히 절대적으로 육에 속한 자이다.
육에 속한다는 것은 다름이 아닌 ‘세상 사람을 따라 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조금도 세상 사람을 따라 행하지 않고 있는지를 자문해 보아야 한다. 만일 당신의 생명에 아직 세상 사람의 모양이 남아 있다면 당신은 여전히 육에 속한 자인 것이다. 우리는 결코 어떤 용어를 가지고 다투면서 누가 영에 속하고 누가 육에 속한다고 말하지 않기를 바란다. 만일 우리가 성령의 통제하에 있지 않다면 어떤 영적인 용어를 쓴들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이것은 생명의 문제이지 어떤 용어의 문제가 아니다.
- 육체의 죄 -
로마서 7장에서 사도의 싸움은 육신 안에 있는 죄와의 싸움이었다. 그는 말하기를,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 오직 죄가 …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11,13,14,17,20). 믿는 이가 육에 속할 때에는 거의가 여기서 말하는 죄에 의해 패배당한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많은 싸움이 있게 되고 죄들을 범하게 된다. 우리 몸의 요구는 일반적으로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보양함이고, 다른 하나는 생육함이며, 마지막으로는 보호함이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 이 세가지는 모두 정당하고 그 안에 죄가 섞여 있지 않았었다. 그러나 인간의 범죄로 인해 속에 죄의 성품을 가진 후로 이 세 가지는 범죄의 매개체가 되어 버렸다. 사람에게 보양이 필요하기 때문에 세상은 음식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인류가 최초로 받은 시험은 바로 음식에 관해서였다. 당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이 하와를 유혹한 것처럼 오늘날 음식을 즐기는 것도 육체의 죄가 되어 버렸다. 우리는 결코 음식을 경시하지 말아야한다. 이는 많은 믿는 이가 이 점에서 실패했기 때문이다. 육에 속한 고린도의 믿는 이들은 바로 음식 때문에 많은 형제들을 실족시켰다(고전 8). 그러므로 당시 교회 안의 집사와 장로들은 반드시 음식을 이길 수 있어야 했다(딤전 3:3,8). 영에 속한 사람은 음식에 집착하는 것이 얼마나 무익한지를 알기 때문에,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다.
둘째로 생육은 인간이 타락한 후 사람의 정욕으로 변해 버렸다. 성경에서 정욕과 육체는 특히 관련이 있다. 에덴동산에서 먹기를 탐하는 죄는 ’즉시‘ 정욕과 수치를 유발시켰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특별히 이 두 가지를 하나로 묶어 버렸다(6:13,15). 또한 그는 술 취함과 더러움을 서로 관련 있는 것으로 여겼다(9-10).
또 하나는 자기 보호이다. 죄가 인간을 다스린 후로 육신의 힘은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 더욱 그 강함을 나타내었다. 우리의 안락과 평안을 해치는 것이면 육체의 힘은 무엇이든지 반대한다. 소위 사람의 성질과 분노와 분쟁의 열매들은 모두 육체로부터 온 것들이고 육체에 속한 죄들이다. 죄가 주관하기 때문에 자기 보호 속에서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얼마나 많은 죄들이 산출되었는지 모른다. 사람이 자신의 이익과 존재와 명예와 의견과 기타 백여 가지 일을 보존하고자 하는 데에서 세상의 어두운 죄들이 산출된다.
만일 우리가 세상의 많은 죄들을 하나씩 분석해 본다면 거의가 이 세 부분과 관련 있다는 것을 볼 것이다.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 세 가지 혹은 셋 중의 하나의 다스림 아래 있는 사람이다. 세상 사람이 다 육신의 죄의 다스림을 받는 것에 대해 놀랄 필요가 없는 이유는 그들이 아직 거듭나지 않았고 여전히 육에 속한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한 때 승리하다가도 실패하고 죄의 권능을 벗지 못하여 오랫동안 육에 속하는 것은 비정상이다. 믿는 이는 하나님의 비춤을 얻어 그의 육신 안에서 무엇이 성령의 법이고, 천연적인 법이 허락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며, 그의 절제와 자치(自治)를 저지하는 것이 무엇인지, 영 안에서 자유로이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도록 그를 압제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도록 그의 마음을 성령께서 감찰하시게 해야 한다. 이 죄를 제하지 않는 한 영적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 육체의 일들 -
육체는 많은 출로를 갖고 있다. 하나님 편에서 우리는 육체가 얼마나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가를 보았다. 그러나 성령의 계시가 없다면 믿는 이와 죄인은, 하나님 앞에서 육체가 얼마나 가치 없고 가증하며 더러운 것인지를 알 수 없다. 오직 하나님 자신이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사람에게 육체의 실체를 알려 주실 때 비로소 사람은 하나님의 안목으로 육체를 대하게 된다.
그러나 사람 편에서 육에 속한 것의 나타남은 누구나 안다. 만일 사람이 자신을 엄격히 대하고 과거에 “육체의 좋아하는 것을 좇아”(엡2:3) 행하던 것을 거절해보면 사람 편에서 육체의 표현이 얼마나 더러운가를 보게 될 것이다. 갈라디아서 5장 19절부터 21절까지는 육체의 죄들에 대한 목록을 작성하여 누구도 이것을 오해하지 못하게 하였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종파-원문 참조)과 분리함과 이단(분열-원문 참조)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갈5:19-21)
이 죄에 대한 목록에 의하면 사도는 ’육체의 일은 현저하다‘고 말했다. 자세히 이해하고 싶은 사람은 분명히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사람이 자신이 육에 속했는가를 보려면 자신이 육체의 일을 행했는가를 물으면 된다. 이 목록에 기록한 모든 행위를 가져야만 육에 속한 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한 가지만으로도 그가 육체에 속한다는 것을 족히 단정지을 수 있다. 왜냐하면 더 이상 육체가 다스리지 않는다면 이 한 가지 일은 어디에서 왔겠는가? 육체에 속한 이 한 하지 일이 존재한다는 것은 곧 육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말한 많은 죄들은 대강 다섯 부류로 나눌 수 있다. (1) 음행과 더러움과 방탕과 같은 몸을 더립히는 죄들 (2) 우상숭배와 술수와 같이 사탄을 왕래하고 죄와 관련된 초자연적인 교통 (3) 원수맺는 것과 싸움과 시기와 분노와 같은 기질의 죄와 괴팍함 (4) 당 짓는 것과 분쟁과 종파와 시기와 같은 종교적인 분쟁 (5) 술취함과 연락과 같은 방종과 애호이다. 이러한 모든 죄들이 쉽게 관찰될 수 있으며, 이러한 것들이 있는 자는 다 육에 속한 자이다.
우리가 분류한 다섯 부류의 죄들 중에, 어떤 것은 다른 죄보다 고상하고 어떤 것은 다른 것보다 더러운 것 같다. 그러나 사람의 시야가 어떻든지 간에 하나님 보시기에 이 죄들은 동일한 근원인 육체로부터 나온 것이다. 더러운 육체나 고상한 육체나 다 똑같다. 가장 더러운 죄를 자주 범하는 믿는 이는 자신이 육에 속한다는 것을 자연히 안다. 그러나 비교적 더러운 죄를 이길 수 있는 사람들이 자신이 여전히 육에 속했음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다. 그들은 자신들이 대다수 사람이 범하는 더러운 죄들을 범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더 이상 육체를 좇아 행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육체의 겉모양이 어떻게 다듬어져 있어도 ‘육체’는 ‘육체‘ 일 뿐이다.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종파‘가 겉으로 보기에 ’음행과 방탕함과 호색과 더러운 것‘ 보다 좀더 나아보일지 모르나 이것들은 동일한 나무에서 나온 과실들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눈을 여사 우리 자신을 알도록, 이 세 구절 성경 말씀으로 하나님 앞에서 하나하나 기도하기 바란다. 이러한 기도로 우리 자신이 겸손해지고,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의 죄를 애통해하고, 우리 자신이 유명무실한 그리스도인이며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이나, 우리의 생명 안에서 아직도 육에 속한 행실이 많음을 알 수 있을 정도로 기도하기 바란다. 우리의 마음이 불탈 정도로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수 있도록 모든 육에 속한 것을 제거하기 바란다.
성령께서 첫 번째로 일하시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람으로 죄에 대하여 ’스스로 책망하게 하는 것‘이다. 만일 죄인이 성령을 통해 죄를 알지 못한다면 그의 눈은 결코 자신의 죄됨을 볼 수 있고, 이로써 장래의 진노를 피하여 그리스도께 돌아갈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은 두 번째로 죄를 알아야 하는데, 그리스도인은 또한 마땅히 자신의 죄에 대하여 스스로 유죄 판결을 내려야 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육신의 특별한 상태가 얼마나 가증스럽고 사악한가를 깨닫지 못한다면, 그리하여 스스로 유죄 판결을 내릴 수 없다면, 우리는 영영 영에 속한 사람이 될 수 없다. 오! 사람마다 범하는 죄들은 다를 수 있겠지만 우리가 육에 속한 자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무릎을 꿇을 때이고 우리가 다시 성령의 책망을 받을 때이다!
- 죽어야 할 필요성 -
이러한 믿는 이가 성령의 비춤을 얻으면 얻을수록 그는 육에 속한 그의 상태의 가련함을 알게 된다. 그가 육체와 투쟁하면 할 수록 그의 육은 더욱 강해진다. 또한 그의 실패는 더욱 빈번해지고 더욱 드러나게 된다. 그가 실패할 때 성령은 더욱 그의 육체의 죄와 약함을 드러내 보이셔서 이로 인해 그가 자신을 한탄하고 육체 안의 죄와 싸울 결심을 하게 된다. 이러한 연속된 고뇌에 소모되는 시간은 적지 않다. 그러나 결국 십자가의 더 깊은 역사를 깨달을 때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성령께서 이러한 믿는 이를 이런 식으로 인도하여 많은 실패와 탄식을 하게 하는 데에는 성령의 깊은 뜻이 있다. 이는 십자가가 더 깊은 운행하기 전에 사람 편에 어떠한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사람이 아무 장애 없이 십자가의 일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이렇게 믿는 이들을 인도하시는 것은 바로 예비 작업을 위한 것이다.
이러한 믿는 이의 체험에 의하면 비록 하나님은 육체를 구원할 길이 없는 형편없이 부패한 존재로 여기시지만 믿는 이 자신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혹 그가 생각 속에서 하나님의 판단이 이런 것인 줄은 알겠지만, 그에게는 육체가 참으로 더럽고 부패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영적인 안목이 결여되어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참이라고 가상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보시는 자신의 과오는 알지 못한다. 따라서 믿는 이는 육체를 개선하려는 행동을 취한다. 이것을 입으로 밝히 드러내어 말하지는 않지만 사실상은 그런 것이다.
대부분 이런 부류의 믿는 이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모르기 때문에 싸우는 방법으로 육체를 이기려고 결심한다. 그들은 승부의 결정이 능력의 크고 작음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들의 육체를 이길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더욱 큰 성령의 능력을 그에게 주시기를 기도한다. 이러한 싸움에 얼마의 시간이 소모될지는 모르나 승리할 때가 적고 패할 때가 많으며 완전히 육체를 정복할 가능성은 없다.
이럴 때 믿는 이는 한 면으로 육체와의 싸움을 진행하고, 또 한면으로는 육체를 개선하거나 순종하도록 육체를 다루려고 한다. 그들은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많은 규정을 세우며, 육체를 정복하고 개선하며 극복하기 위하여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는 등의 많은 규례를 정한다. 또 그들은 (무의식중에) 육체가 악한 것이 규칙과 문화와 교육의 결여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육으로 영에 속한 훈련을 받게 할 때 육체의 피해로부터 해방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규례들이 육체를 제어하는 데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골2:21-23).
믿는 이가 한 면으로는 육체를 제하려는 것 같고 다른 면으로는 그들의 행위로 육체를 개선하려는 것 같기 때문에 성령은 부득불 믿는 이의 실패를 허락하사 씨름과 괴로움과 송사를 허락하신다. 성령은 이러한 상태를 여러 차례 거치게 하신 다음, 육체가 구제불능이고 그들 자신의 방법이 쓸모없으며 다른 방법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한다. 그들은 이로써 전에 생각 속에서 알고 있던 육체의 형편없음을 체험에서 알게 된다.
만일 믿는 이가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히 믿고 하나님의 거룩한 빛 가운데서 육체의 참된 상태를 알 수 있도록 하나님의 성결을 보여 달라고 성령께 간구한다면 성령은 필히 그렇게 일하실 것이다. 이것은 그로 씨름의 고통을 적게 거치게 하실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믿는 이는 정말로 그리 많지 않다! 사람은 더 자기의 방법을 사용하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이렇게 악할 정도로 타락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이 공과는 배우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성령은 인내하시면서 믿는 이로 체험에 있어서 조금씩 자신을 알게 하신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육체에 복종할 수 없고 개선할 수도 없으며, 육체를 교육할 수도 없고 어떤 영적인 방법도 육체의 본질을 변케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 육체로 죽게 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이다. 죽음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우리는 싸우고 개선하고 결심하며 끝없는 방법으로 육체를 이기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육체가 죽어야 하고 죽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말씀하신다. 육체는 승리의 문제가 이나라 죽음의 문제이다.
이것이 가장 유력한 이유이다. 우리가 육체가 된 것은 육체로 났기 때문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니 어디로 들어왔으면 어디로 나가야 한다. 얻는 방법은 잃는 것이다. 우리가 육체로 났고 육체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죽으면 곧 육체에서 나오게 된다. 죽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6:7)기 때문이다. 죽음보다 낮은 것으로는 안 된다. 오직 죽음만이 구원의 방법이다.
육체는 가장 더러운 것(벧후2:10)이기 때문에 하나님도 그것을 고치실 수 없다. 죽음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주 예수님의 보혈조차도 사람의 ‘육체’를 깨끗하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우리는 주 예수님의 피가 우리 죄들과 범죄함과 불법을 씻는다는 것은 볼 수 있어도 결코 육체를 씻는다는 것은 볼 수 없다. 육체는 못 박혀 죽어야 한다(갈5:24). 성령도 육체를 개선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분은 육체에 속한 죄인 안에 거하지 않으신다(창6:3). 설령 성령이라도 육체를 개선할 수 없다. 설령 믿는이 안에 거한다 하더라도 육체의 개조를 돕기 위한 것이 아니라 육체와 씨름하기 위한 것이다(갈5:17). 관유를 보통 사람의 몸에 붓지 말지니(출30:32, 원문 참조). 이로 보건데 우리가 더 좋아지고 진보하고 사랑이 있고 주를 더 섬길 수 있도록 주님께 기도하는 것은 무익한 것이 아닌가? 우리가 지극히 거룩한 위치에 머물고 날마다 주님과 함께 있으며, 범사에 주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모든 소망이 다 헛된 것인가? 우리는 우리의 육체가 하나님의 영과 동역할 수 있도록, 육체를 개조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육체에 대해 정한 운명은 바로 죽음이다. 오직 육체를 죽음에 넘겨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히 육체의 종이 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