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산책]『천수경』⑨
대다라니는 모든 악업 깨뜨리는 神呪
‘독송용 『천수경』’의 내용 구성을 살펴보면 다라니의 독송이라고 하는 본래적인 목적에 부합하는 부분과 그러한 의례를 수행(遂行)하기 위해서 필요한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컨대, 「신묘장구대다라니」 그 자체는 전자에 해당하며, 그를 독송하기 위해서 그 이전에 행하도록 요청된 발원 부분이나 극락의 삼존을 비롯한 여러 불·보살을 청해서 모시는 소청(召請) 부분은 후자에 해당한다.
한편, 다라니의 독송이라고 하는 본래적인 목적에 부합하는 부분도 아니면서 그 부분을 독송하기 위해서 필요한 보조적인 것으로 보기도 어려운 부분이 있다. 바로 참회 부분이 그것이다. 「참회게」, 「참제업장십이존불」, 「십악참회」, 그리고 「참회진언」 등이다. 이 참회 부분을 독립적으로 이해할 때, 우리는 ‘독송용 『천수경』’에 있어서 참회에 대한 강조의 무거움을 느낄 수 있게 된다. 다라니의 독송만큼이나 참회를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문제는 보다 더 깊은 심층에서 다라니의 독송과 참회의 관계가 해명되어야 한다. 겉으로 보면 두 가지를 말하는 것 같지만, 사실 양자는 하나의 지향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즉 다라니에는 참회의 기능 역시 있다는 점을 재인식해야 한다.
물론, 우리는 앞에서 다라니가 번뇌를 타파하는 도구의 기능을 하는 것이라고 확인한 바 있다. 그것은 옳다. 다만 그러한 도구의 기능이라는 성격은 선(禪)과의 관련성 속에서 행해졌던 것이다. 마치 화두가 그런 것처럼, 다라니 역시 번뇌라는 도적을 무찌르는 하나의 칼일 수 있었다. 그래서 도구의 기능을 말했던 것이다.
서산도 “업장 녹인다” 강조
이러한 성격과 밀접하게 관련되면서, 다라니에 참회의 기능이 또 하나 부가된다. 참회는 업을 소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다라니에 참회의 기능이 있다는 말일까? 업의 의미는 일차적으로는 우리의 행위이다.
그런데 우리가 일상 생활 속에서 다 경험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의 행위는 그것이 종료되었다고 해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반드시 나머지를 남긴다. 나머지를 남기지 않는 분은 오직 부처님일 뿐이다. 하나의 행위가 끝난 뒤에도 남아있는 나머지를 또한 업이라고 한다. 우리의 심리 속에서, 우리의 무의식 속에서 잠재되어 있으면서 그 업은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부단히 간섭하고 있다.
행위의 나머지로서의 업을 소멸하는 것을 우리는 참회라고 한다. 행위의 나머지는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 언어적 개념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그것을 소멸하기 위해서는 언어적 개념으로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언어를 넘어서 있는, 혹은 언어로 이루어져 있지 않은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 그래서 다라니가 참회의 기능을 할 수 있게 된다.
다라니는 아무리 읽어봐도 무슨 뜻인지 모른다. 뜻을 모르게 되어 있다는 것은 곧 언어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말이다. 무의미의 다라니를 독송하면 우리의 무의식 속에 잠자고 있는, 우리가 지은 모든 행위의 나머지들을 지워낼 수 있게 된다.
무의식 속의 업 절로 사라져
어쩌면 현생에 지은 우리의 업은 돌아보면서 “잘못했습니다”라고 참회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전생에 지은 업은 쉽사리 기억해서 떠올릴 수 없다. 이 “전생의 업은 제거하기 어려우니, 반드시 다라니의 힘을 빌어야 한다.”(서산, 『선가귀감』) 그래서 다라니는 신주(神呪)로 불린다.
‘원본 『천수경』’에서 「신묘장구대다라니」에 대한 다른 이름으로서 악업을 깨뜨리는 ‘파악업(破惡業)다라니’라고 부르는 것도 그러한 배경에서이다. 모든 다라니는 악업을 깨뜨리는 다라니이다. 그런 까닭에 다라니의 독송과 「참회게」 이후의 참회 부분은 죄와 업의 참회라고 하는 동일한 기능을 하고 있다. 참회 부분을 다라니의 독송과 함께 ‘독송용 『천수경』’ 속에 집어 넣어둔 이유이다.
김호성
동국대 교수
[출처 :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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