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토론]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깨달음과 수행] <11> 김태완
“깨달음은 대자유이며 온전한 만족이다”
본지가 지난 4월부터 계속해온 지상토론 ‘깨달음과 수행’은 한두가지를 제외하면 주로 ‘교학적 관점’의 논의가 많았다. 이 논의의 대략적 공통점은 ‘삼법인을 제대로 인식하고 삼독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비해 ‘선학적 관점’의 글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선수행 자체가 개념화된 언어를 뛰어넘고자 하는 특성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진리는 결국 언어나 문자로 표현된다고 할때 선수행자나 선학연구자들의 생각이 어떤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 이런 요구에 부응해 이번호에는 무심선원 원장이자 선학연구자인 김태완 박사의 기고를 싣는다.
궁극의 진리 깨닫고자하는 발심 있어야 문 열려
진리에 대한 믿음과 끝까지 가겠다는 근성 절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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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불교에서 깨달음은 삶의 태도에 관한 획기적인 전환이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되는지에 대한 논의는 부족하다. 이 토론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진행하는 것이다. 사진은 결제를 앞두고 수행자가 선원으로 들어가는 모습. |
깨달음은 다만 깨달음이고, 달리 입을 열거나 생각을 움직일 것이 없다. 깨달음은 바로 지금 의심할 수 없이 분명하다. 깨달음은 언제나 다른 것이 없다. 생각하고 말하면 분열이 일어나므로, 깨달음은 생각과 말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아상(我相)도 없고 인상(人相)도 없고 법상(法相)도 없고 비법상(非法相)도 없다.
보는 곳에 깨달음이 있지만 깨달음은 보이지 않고, 듣는 곳에 깨달음이 있지만 깨달음은 들리지 않고, 생각하는 곳에 깨달음이 있지만 깨달음은 생각되지 않고, 알거나 모르는 곳에 깨달음이 있지만 깨달음은 알거나 모르는 대상이 아니고, 손을 움직이는 곳에 깨달음이 있지만 깨달음을 손으로 잡을 수는 없다. 결코 깨달음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언제 어디에 어떻게 깨달음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깨달음은 말로써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직접 확인될 수 있을 뿐이다. 허공이 스스로를 확인하지 못하면, 허공 속에 떠 있는 사물을 인연하여 자신을 유추하는 전도된 꼴이 되어 버린다. 사물이 허공에 의지하여 있건만, 허공 스스로가 도리어 사물에 의존하여 자신을 찾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직접 깨달음을 확인하지 않고, 말 속에서 찾거나 감각적 심리적 경계를 통하여 찾아 보아야 소용 없는 일이다. 말의 허망한 모습으로는 진실한 깨달음을 바로 나타낼 수가 없다. 그러나 말이 깨달음을 벗어나 따로 있는 것은 아니므로, 말로써 깨달음을 바로 드러내는 것이 화두(話頭)이고, 화두를 통하여 깨달음을 바로 맛볼 수 있다.
깨달음은 어떤 육체적 상태가 아니다. 깨달음은 어떤 감각적 경험이 아니다. 깨달음은 어떤 견해가 아니다. 깨달음은 어떤 심리 상태가 아니다. 깨달음은 어떤 물건이 아니다. 이런 모든 경계들이 깨달음을 벗어나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깨달음이 이러한 경계에 속하지는 않는다.
깨달음이 경계에 속하지 않는다고 하여 깨달음이 공허한 관념이거나 신비스런 비밀은 아니다. 깨달음은 의심할 수 없고 거부할 수 없고 부정할 수 없이 확연하고 자명하여, 어떤 관념적 해석이나 견해나 이유가 붙을 수 없다. 깨달음을 공허한 관념이나 신비한 비밀이라고 주장한다면, 스스로가 오온(五蘊).육식(六識)의 경계를 공허하지도 않고 신비하지도 않은 실재라고 주장하는 셈이다. 스스로 경계에 머물러 있는 전도중생이 어찌 경계를 해탈한 깨달음을 알겠는가?
깨달음은 자유이다. 경계의 장애와 구속을 받지 않는다. 육체 속에서 자유로우며, 느낌 속에서 자유로우며, 감정 속에서 자유로우며, 생각 속에서 자유로우며, 분별 속에서 자유롭다. 깨달음에 있지 못하면 경계에 의존해야 한다. 깨달음에 있지 못하면, 육체에 의존하거나, 지식에 의존하거나, 생각에 의존하거나, 느낌에 의존하거나, 감정에 의존하거나, 돈.명예.사람.물질에 머물러 의존하여야 비로소 안심이 된다. 그러나 머물러 의존하므로 구속되어 벗어나지 못한다.
깨달음은 완전한 만족이다. 깨달음에 있지 못하면 누구나 생각의 굴레, 감정의 굴레, 욕망의 굴레에 묶여서 생각.감정.욕망을 따라가기에 급급하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굴레에서 벗어나기를 늘 갈망한다. 범부는 이처럼 경계에 중독되어 있기 때문에, 중독자들이 가지는 이중의 모순된 욕구를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더욱더 경계에 중독되기를 추구하면서, 한편으로는 경계에서 해방되었으면 하는 본능적인 갈증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이중의 모순된 상황이 바로 번뇌이다. 깨닫게 되면 이런 이중의 모순된 상황이 사라지고, 언제나 둘이 아니어서 갈등이 없는 한결같음이 있고, 불만족이 없다.
깨달음은 완전한 안정이다. 깨달음에 있지 못하면 경계에 의존해 있을 수밖에 없다. 무상(無常)하게 변화하는 허망한 경계에 의존해 있으면, 확고한 자리가 없으므로 늘 흔들리고, 불투명하고, 불명확하고, 불안하다. 깨달음에는 의존하는 사람도 없고, 의존의 대상도 없어서 불안이 없다. 깨달음에 있지 못하면 의존하는 사람도 있고 의존의 대상도 있게 되는데, 이러한 분열과 의존 상태가 바로 불안이다. 그러므로 분열과 의존의 상태에 있는 범부는 더욱 믿을 만한 의존의 대상을 찾아서, 그리고 더욱 견고한 의존의 상태를 유지하려고 애를 쓰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집착이다. 그러나 깨달음에서는 분열이 없으므로 불안도 집착도 없다.
깨달음의 경험은 직지인심(直指人心).견성성불(見性成佛)을 통하여 일어난다. 선지식이 설법이나 행동을 통하여 학인에게 마음을 바로 가리켜 주면, 학인은 견성하여 깨닫는 것이다. 스승이 마음을 바로 가리키고 제자가 견성하는 까닭은, 사람의 마음은 차별 없는 허공처럼 본래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을 일러 본래성불(本來成佛)이라고 한다. 본래성불이지만 까닭 없이 망상을 일으켜 스스로 헛것을 진실하다고 오해하고 있는 것이 전도중생이다. 그러므로 진실을 알고자 발심한 학인은 선지식을 찾아서 묻고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현재의 삶이 본래자리에 있지 못한 것 같고 불안하고 부조리하고 불만족하면 이 부조리와 불만족을 벗어날 길을 찾게 되는데, 이때 발심이 일어난다. 중요한 것은 그 발심이 진실로 무엇에 대한 발심이냐 하는 것이다. 단순한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려는 발심인가? 심리적 위안을 얻으려는 발심인가? 무언가 중요한 일에 가담한다는 허영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발심인가? 육체의 건강을 위한 발심인가? 의심할 수 없는 궁극의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발심인가? 결국 발심한 곳을 향하여 나아가게 마련이므로, 궁극의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발심이 분명해야 한다. 두드리는 문이 열리는 것이고, 구하는 물건이 주어지는 것이다.
발심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내면의 과정을 설명해 본다면, 분별심에 딛고 있던 발을 반야로 옮겨서 딛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분별심에 익숙해 있던 의식이 반야에 친숙하게 되는 변화가 일어나는 과정이다. 이러한 변화는 표면의식 위에서 의도적 노력과 판단에 의하여 쉽사리 일어나는 단순한 일이 아니고 내면 깊숙이에서 일어나는 불가사의한 일이다. 그러므로 단순한 의식적 탐구와 노력에만 의지해서는 이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처음에는 의식적 관심과 탐구로 공부를 시작하지만, 이윽고 의식적으로는 어떠한 출구도 찾을 수 없는 진퇴양난의 난관에 부닥치게 된다.
이 난관에 처하여 물러나지 않고 출구를 찾아서 있는 힘을 다하여 발버둥을 치다 보면, 어느새 어떤 의식적 도구와 방법도 쓸모가 없어져서 자신의 모든 손을 놓고 스승에만 의존하는 거의 무기력한 상태가 되는데, 바로 이때 문득 예기치 않은 변화가 일어난다. 갑자기 캄캄한 곳에 한 줄기 빛이 나타나며 출구가 보이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두려움과 갑갑함이 눈녹듯이 사라져 버리고, 떠나지 않던 의문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나타나지 않는다. 전혀 예기치 않았던 평화와 안정이 있으며, 즐거움과 환희가 나오며, 깊은 안도감이 찾아온다. 이제 반야에 발을 딛은 것이다.
그런 뒤에 조사의 어록을 보거나 경전을 보면 예전과는 전혀 다른 친근감으로 다가오며, 이전에는 여러 가지로 헤아려 보던 문구들이 문득문득 거부감 없이 소화된다. 그렇지만 아직은 반야에 충분히 익숙하지 않은 불만감이 있고, 때때로 경계에 끄달림을 감지할 때마다 정신을 차려야 하는 미숙함이 있다. 그리하여 선지식을 찾아 혹은 도반들과 탁마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보림을 하다 보면, 어느날 갑자기 공부니 진리니 깨달음이니 하는 것이 손아귀에서 사라져 버리고 언제나 다만 다른 물건이 없게 된다. 우주 전체가 한 점으로 줄어들더니 문득 사라져 버렸는데, 그 뒤에는 이전 우주 그대로이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나 할까.
그러므로 공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반드시 궁극적 깨달음까지 가겠다는 발심과 진리와 스승에 대한 의심 없는 신뢰와 손발을 쓸 수 없는 진퇴양난의 캄캄한 절망 속에서 다른 피난처를 찾지 않는 끈기와 끝까지 가고야 마는 근성이다.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깨달음이 과연 가능할까 하는 여우같은 의심과 은산철벽 앞에서 현묘한 이치 속으로 피난해 버리는 나약함과 겨우 하나의 실마리를 잡고서 모든 것을 얻은 양 기고만장하는 아만(我慢)이다.
김태완/ 무심선원장
[출처 : 불교신문 2047호/ 7월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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