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아리, 그 추억의 발원지
권주열(시인)
시인의 시 ‘드므가 사는 집’ ‘검은 독’ ‘그해 고욤’ ‘어떤 외출’ ‘휭 투옌’ 등을 읽었다. 다문화 이주여성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시편, 베트남에서 한국에 시집온 ‘휭 투옌’의 이야기를 제외한 나머지 시편들은 모두 화자의 아련한 고향의 풍경과 고향의 손때 묻은 사물들을 시의 화폭에 담고 있다. 그것들을 눈여겨보면 특이하게도 시 속에 드므. 독, 항아리가 자주 등장한다. (이것들을 뭉뚱그려 편리상 여기서 ‘항아리’로 부르기로 하자) 화자에게 이 항아리는 무슨 의미며, 항아리를 통해 시인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오월 꽃그늘이 포록포록 달포된 강아지를 재운다.
처마 밑 펑퍼짐하게 눌러앉은 독
옹이진 가슴 불길 잡으려
여태 맑은 물 고집하고 있다
돌계단을 오르자
사랑채 모퉁이 느티나무
옹이, 오도카니 이파리에 쌓여 익숙하다
태풍에 부러진 가지들
고물고물 육 남매 바람 잘 날 없던 곳
할머니 관절염 앓기 전부터
초록은 그늘을 안는다
혼기 지난 시누의 신열같은 골똘함과
내 안의 개울물 소리 일 때
촉수 세운 새싹들
할아버지 손길 느리게 수평을 일군
앉은뱅이 나무의자
둥근 독 속에 비친 그의 파랑들을 기억한다
느티 아래 무순을 뽑아
새댁 입덧 맞추느라 분주한 오후
구름 한 자락 줄장미 담장을 걷다
드므를 다녀간다
오래된 물거울이 훤하다
드므엔 노부부가 산다
-드므가 사는 집- 전문
이 시 제목이기도 한 ‘드므’는 넓적하게 생긴 항아리(독)을 뜻한다. 화자는 어린 날 살았던 집에서 유년의 기억을 더듬다가 처마 밑에 놓여 있는 독을 본다. 하지만 이 독은 화자에게 단순히 정지된 사물이 아니다. 그곳은 유년의 창고이면서 동시에 구름이 지나가고, 여전히 노부부가 살고 있는 진행형이다. 다시 말해 화자는 6남매가 부대끼며 성장해했던 집안의 내력을 돌계단, 느티나무, 할머니의 관절염, 시누이의 신열, 앉은뱅이나무 의자, 등을 통해 하나 하나 반추하지만 그것들은 이제 열꽃이 다 삭아버린 과거로 정지되어있다. 그 반면 화자의 항아리는 아직도 식지 않은 채 ‘ 옹이진 가슴 불길 잡으려/여전히 맑은 물 고집하고 있다’라고 표현한다. 사실 화자가 껴안고 있는 마당은 그리 낯설지 않다.
이 시를 읽는 중년 독자쯤이면 한세월 지나왔음직한 마당이고 그 한 귀퉁이에 흔히 크고 작은 장독대가 놓여 있고 누구나 그 투박하고 정겨운 기억을 안고 있다. 그럼에도 화자가 유독 항아리에 포커스를 맞추는 것은, 항아리가 고향 마당에 단순히 놓여있음이 아니라 항아리 속에 마당과 고향의 모든 추억이 담겨 있음을, 즉 빛바래진 도구로서의 항아리가 아니라 항아리를 통해, 항아리의 원형적 이미지인 흙의 가능태를 열어 보이려는 것이다. 시인의 또 다른 시를 보자.
그 해 초가을 비, 지루했다
시골 마당 작은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신 새벽 아버지의 비질
비 오기 전 콩깍지 탁탁 튀는 불을 지폈다
짙은 연기는 그의 마른버짐에 독을 감 듯
온몸에 독을 지었다
검게 탄 구들짝에 발 모으고 어둠 속
물레를 돌리듯 검은 이불로
둥글게 항아리를 빚었다
쪽진 어머니 문지방 넘는 발걸음, 불꽃이다
흠뻑 땀 흘린 후 애처로운 그녀의 손길
이마에 스치자
쌀쌀한 바람에 감 항아리
툭 갈라지는 소리 들렸다
아궁이 속 열기는 잠시 머뭇거리다 사그라들고
검은 독 향기 돋아나
눈가에 마알간 물기 흘렀다
-검은 독- 전문
이 시 속에 나타나는 검은 독(항아리)는 단순히 장독대에 얌전히 놓인 항아리가 아니다. ‘온몸의 독’ ‘이불로 둥글게 빚은 항아리’ ‘감 항아리’ ‘검은 독’ 등 다소 추상적으로 변주되고 있다. 거칠게 유추하자면 화자는 어릴 적 매우 아팠던 기억을 들춰내고 있고, 두툼한 이불에 감싸여 고열과 한기에 시달리며 방구석에 쪼그려 앉은 자신이 항아리로 은유되고 있다. 아픈 자식을 위해 아궁이의 불을 지피는 아버지가 매캐한 연기에 휩싸인 모습도 항아리로 표현되는가 하면, 한기에 들뜬 이마를 짚는 어머니의 애틋함도 '불꽃' 으로 나타나고 있다. 다행히 이런 기억이 안타까움으로만 끝나지 않고. ‘아궁이 속 열기는 잠시 머뭇거리다 사그라들고’ 라는 구절에서 보듯 회복과 완쾌를 가져온다. 하지만 이 시가 결국 나타내고자 하는 뜻은 화자의 유년항아리가 아버지 어머니라는 불가마를 통해 단련되는 과정이다.
그해 말랑한
고욤나무 일기를 펼친다
흑백 필름, 숨 가쁘게 돌아간다
태풍 지나간 새벽
밤새 흔들려 그 고욤 파리하다
감꽃이 내릴 무렵
그녀의 젖꼭지 같은 고욤꽃
뽀얀 속살 드러내고
가지가 휘도록 부둥켜안는 작은 낯빛
칠월 초닷새 땡볕이 떨어질 줄 모른다
몇 번의 태풍이 더 스치고
새털구름 고욤꽃 위를 나르면
찰 찐 고것들 말랑말랑
고놈 엉덩이 실하다고
큰 오빠가 가지를 내리칠 때
천 리 밖으로 뿌려지는 향
검은 항아리에 볏짚 올려놓고
가을아, 떠나 보낸다
아릿한 향내
놋숟가락 휘도록 퍼올리다
그해 겨울은 바닥이 났다
-그해 고욤- 전문
고욤나무가지에 어린열매들이 포도송이같이 매달린 고욤을 따는 모습과 고욤을 질리도록 먹는 풍경이 손에 잡힐 듯하다. 그런데 여기서도 ‘검은 항아리’가 예외 없이 등장하고 있다. 이 항아리는 시의 행에서 보듯 그 위에 볏짚을 올려놓고 있다. 여기서 볏짚을 올리는 이유는 고욤을 따서 항아리에 넣고 통풍효과와 발효 등을 위한 목적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놋숟가락 휘도록 퍼올리다’의 행을 보면 항아리 속의 고욤을 겨울 내내 시도 때도 없이 야금야금 먹어치우는 광경이 눈에 선하다. 마침내 고욤을 다 먹어 치운 상태를 화자는‘그해 겨울은 바닥이 났다’라고 했다. 그런데 묘하게도 겨울의 바닥은 보이지 않고 항아리의 빈 바닥을 떠오르게 하는 시적 재미의 가속을 내고 있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형태의 항아리를 만나보자.
대문 밖 허리 잘린 느릅나무 바람 휑하다
지난해 홀로 잠자던 어미, 댓돌 위 신발 하나 남긴 채
링거 따라 길 떠났다
대추나무 마른 가지 움트듯 기다림 홀로 무성하다
오래된 개미집 부풀어 마당이 분주하다
구석구석 우주가 분주하다
뒤란, 무서리에 등뼈 곧추세운 소국
한 계절 또 눈이 쌓이겠다
바람이 문고리만 흔들다 모퉁이 돌아 나온다
-어떤 외출- 전문
위의 시는 고향에 홀로 계시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텅 빈집에 느릅나무, 대추나무, 신발, 개미집, 소국, 문고리만 집을 지키는 장면이 무성영화 필름처럼 돌아간다. 하지만 이 시에서는 화자가 고향마당 중심에 놓았던 항아리는 흔적도 없다. 앞의 시 ‘드므가 사는 집’에서와 달리 항아리 속에서 유추되는 어머니도 사라지고, 썰렁한 마당에는 바람만이 지나가고 있다. 하지만 몇 개의 행을 다시 찬찬히 읽다보면 , 즉 ‘기다림 홀로 무성하다, 와 ‘오래된 개미집이 부풀어 마당이 분주하다’ 혹은 ‘구석구석 우주가 분주하다’ 속에서 어쩐지 살아 숨 쉬는 흙, 그 흙으로 빚은 항아리를 떠올리게 한다. 다시 말해 항아리가 치워졌거나 사라짐이 오히려, 고향의 마당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항아리로 클로즈업 되어 살아 숨 쉬게 하고 있는 셈이다. 일반적인 항아리의 기능은 저장 공간이다. 하지만 시인은 앞으로도 고향의 풍경을 그리는 시 속에서 계속 자신만의 독특한 항아리를 열어 보일 것 같다. 왜냐하면 열거된 위의 시편들에서 보았듯, 화자에게 항아리는 단순히 저장의 기능을 넘어 추억의 원형질 운동을 가능케 하는 발원지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