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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시편 9편 1-10절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준비하셨도다
시편 9편은 표제로서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뭇랍벤에 맞춘 노래”라고 되어 있는데, ‘뭇랍벤’이라는 말은 여기서만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 몇몇 해석들이 있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시편의 표제들을 보면 가락이나 혹은 그 시의 배경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뭇랍벤’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히브리어 ‘tWm’(무트)라는 단어가 ‘죽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시의 배경으로서 누군가의 죽음으로 보기도 합니다만, 칼빈은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의미에서 ‘애매한 문제’라고 하며, 오히려 “본 시편의 가락에 맞추어 부른 당시 잘 알려진 노래의 처음 부분으로 보는 것이 더 가능한 것 같다”고 말합니다.
전체적인 내용은 우리가 앞서 살폈던 시편 7편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데, 한마디로 원수들 앞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해 주십사 탄원하는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다윗은 자기가 획득한 과거의 승리를 열거하면서 그들이 문제 삼았던 모든 일의 행복한 결과로서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높은 어조로 감사 찬송합니다. 그런 뒤 다시금 새로운 원수들과 위험이 발생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 과거에 베풀어주신 구원으로 자신을 보호해 주실 것을 탄원하면서 자기 원수들의 교만을 전복시켜 주실 것을 간청하고 있는 내용입니다(칼빈).
우선 1절을 보시면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 여기 보면 다윗이 하나님께 대하여 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고 되어 있습니다. 무엇에 대한 감사인가? 1절 후반부에 보면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다윗의 감사, 찬송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들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정확한 배경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어떤 시점에서 앞서 있었던 일들에 대하여 쓰고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 다윗이 과거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과 일하심에 대하여 떠 올리고 있다는 것과 그것에 대한 감사와 찬송을 올려드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다윗은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이라고 말함으로 뭔가 특별한 일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럼 기이한 일만이 하나님의 일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매 순간 자기 백성들을 향하여 역사하시며 간섭하시기 때문에, 아니 하나님은 중단 없이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시기 때문에 기이한 일만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있습니다. 다만 그런 모든 일하심 가운데 죄는 내놓지 않는 분으로 계십니다. 때문에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여 어디까지 말씀하시느냐?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까지 하십니다(살전5:18).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선하신 일이요,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는 감사와 찬송 외에 돌려드릴 것이 없다는 의미로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신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만을 말하고 있는 것은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원수들이 있기 때문에 그런 원수들의 위협으로부터 특별한 간섭과 보호를 요청하기 위해서라 할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지금 다윗은 결코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한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떤 법칙을 만들어 놓고 그 법칙대로 돌아가게 하시되, 그런 법칙을 깨는 듯 보이는 일만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어떤 법칙 자체도 없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 대하여 하나님의 섭리로서 역사하시기 때문에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선한 역사로 있지만, 특별히 자기 백성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된 그 일이 지금도 여전히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 다윗이 감사한다고 할 때 ‘전심으로’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간단히 말하면 마음 없이 입으로만 감사하는 그런 외식적인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최근에 마태복음 6장의 내용도 살폈지만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는 표현처럼, ‘전심으로’라는 말은 두 마음이 아니란 것입니다. 신명기 6장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신6:5)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이렇게 전심이라고 표현한 것은 다윗의 열심 이전에 다윗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가 그만큼 크다는 것을 반증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다윗이 전심으로 감사한다는 것 때문에 전심인 다윗을 주목하게 되는 경우들이 있지만, 그것보다 앞서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 그렇게 전심으로 감사할 수 있도록 만드신 하나님의 그 기이한 모든 일들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실제로 칼빈은 이 부분을 주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와 같이 그는 마음에 없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번지르르하게 늘어놓는 흉측한 위선자들과 자신을 구별할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자신이 한 일 가운데 칭찬받을 만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적으로 하나님의 순수한 은혜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점을 시인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유한한 인간이 하나님께로 돌아갈 영광의 극히 적은 일부분이라도 감히 그것을 사취하려 든다면 그것은 온 마음을 다 바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못된다.”
이런 점에서 지금 다윗이 ‘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할 때 은혜를 생각하지 않는 감사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그저 전심으로 감사하는 것 자체로서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것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배제하고는 결코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것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리스도를 배제하고는 전심이라는 말도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전심으로 감사하고, 전심으로 찬송하는 것은 결코 공로가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다른 모든 행위도 마찬가지입니다. 간혹 보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를 공로로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굉장히 주의해야 될 부분입니다. 감사란 그분의 일하심 때문에 나타나는 당연한 결과입니다. 2주 전에도 말씀드린 바가 있지만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구조가 인간의 죄와 비참함, 그리고 그런 죄와 비참함에서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마지막으로 구원 받은 자의 감사라고 할 때 감사의 내용으로서 십계명, 주기도에 대한 해설을 말한다면 율법에 대한 순종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든 간구는 주의 은혜에 대한 당연한 결과로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그것 자체가 공로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에 대한 순종을 소위 선행과도 연결시키게 되는데, 선행 자체도 공로가 될 수 있는가?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17장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처럼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17:9-10) 이것이 우리의 자세로 있어야 합니다.
다윗의 감사, 찬송이란 바로 이런 측면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기이한 일들에 근거한 감사와 찬송이며, 전심으로 감사와 찬송을 드린다고 할 때 그리스도 없이 그렇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도행전 2장 30절과 3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여기서 ‘그’란 다윗을 가리킵니다. 사도 베드로가 시편 16편을 인용하면서 말하고 있는 내용인데, 다윗은 선지자로서 오실 그리스도를 미리 본 자로서 부활을 말했다는 것입니다. 시편 16편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내다보면서 기록했다면, 다른 시편 역시 마찬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이 언급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의 모든 것의 근거는 무엇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2절과 3절을 보시면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존하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주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 1절에 대하여 좀 더 확장해서 말씀하고 있는 내용이라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의 기이한 일이란 무엇인가 할 때 여기서는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주 앞에서 넘어져 망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체적인 어떤 사건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지만, 원수들이 다윗을 치려고 왔다가 하나님의 선하신 역사로 말미암아 한순간 물러가게 된 일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한다고 고백하고 있는 겁니다. 심지어 바로 그런 일들 때문에 주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는 고백까지 하고 있는 겁니다.
사실 다윗 하면 전쟁의 역사를 떠 올리기가 쉽습니다. 많은 원수들이 있었고, 또 그런 원수들과의 전쟁을 통해 비번하게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승리 뒤에 훌륭한 지휘관, 혹은 군사력, 또는 전술 등과 같은 것으로 원인을 돌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삼국지에서 유비하면 제갈공명을 떠 올리는 것처럼 사람들이 주목하는 것은 이런 것들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다윗은 그런 것이 원인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원인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말하느냐?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주 앞에서 넘어져 망한다고 고백합니다. 원수는 다윗의 원수로 표현하고 있지만 물러갈 때 누구 앞에서 넘어지느냐? 하나님 앞에서 넘어진다고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신 일이라는 것이요, 다윗보다 앞서 싸우시는 분이 누구냐 하면 하나님이시란 겁니다.
우리의 모든 인생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앞서 일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앞서 일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홀로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신다고 할 때 돕는다는 의미는 우리도 일하고 하나님도 일하는 그런 신인협력이 아니라, 하나님 홀로 일하심의 또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우리의 원수인 사탄이 끊임없이 다가와 시험하는 일이 있지만, 성경이 말하고 있는 원리는 우리보다 앞서 그리고 하나님 홀로 원수인 사탄과 싸워 이기시는 분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원수들 앞에서 완전히 넘어지는 일이 있느냐? 결코 없습니다. 아니 현상적으로는 넘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자주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일하심에 근거해서 다시금 일어나 싸우는 자로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다윗이 하나님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묵상하며 그 일들에 대하여 감사 찬송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해야 하고,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행하고 계신 일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감사 찬송이란 바로 하나님께서 일하신 결과이기 때문에 그분이 행하신 일, 그리고 그것을 통해 드러내시고 있는 은혜, 그것도 전적인 은혜의 역사를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더불어 2절에서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한다고 할 때 이것을 단지 세상적인 관점에서 우리에게 적용하는 것에 대하여 주의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세상적인 면에서 어떤 것을 해 주셔야만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도록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 없이 구원의 하나님이라는 것 자체만으로도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한다는 명령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하박국 선지자의 말이 그것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7-18)
이런 측면에서 지금 다윗이 원수라고 할 때 단순히 보이는 대상으로서 이웃 나라를 의미한다기보다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의미, 즉 택자와 유기자에 대한 이해 혹은 주님의 교회와 그렇지 않은 자의 이해가 시편을 통해서 분명히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 사실은 이스라엘과 주변국에 대한 싸움입니다. 그러나 그런 구약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속한 자와 사탄의 권세 아래 속한 자와의 싸움을 알리시기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날 성도들의 기쁨과 즐거움은 혈과 육에 대한 싸움에서 구원함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옆집보다 내가 더 잘 되고, 옆집 아이보다 내 아이가 더 공부를 잘하는 등이 성도의 기쁨과 즐거움이 아니란 것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려주신 것, 하박국 선지자가 말한 것처럼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다 할지라도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총만으로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것, 이것이 성도의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인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밭에 먹을 것이 많고 우리에 양도 있고 또 외양간에 소가 많은 것이 기쁨과 즐거움이 되기도 하지만, 그것이 없다고 해서 근본적인 우리의 기쁨과 즐거움을 빼앗아 갈 수 있는가? 없다는 것이 성도의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싸워야 할 싸움이 바로 이 싸움입니다. 구원의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가?
계속해서 4절을 보시면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원수를 물리치신 것은 무엇과 같은가? 다윗은 다윗 자신의 의를 변호하신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심판의 보좌에 앉아 의롭게 심판하신 결과라는 것입니다. “가재는 게 편이라”는 속담처럼 유유상종(類類相從) 혹은 초록동색(草綠同色)이 아니라,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으로서 심판해야 할 자를 심판하신 결과라는 것입니다.
물론 다윗의 의라는 것은 다윗 스스로의 의는 분명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그 누구도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앞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그리스도의 의가 다윗의 의로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변호하셨다는 것은 이런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본래 의롭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다윗을 변호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었기 때문에 의롭다 여겨주시고, 그 의를 변호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라 말할 때 주의해야 될 것이 있는데,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공의를 버리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자기 백성을 분명 사랑하시는 것은 맞지만, 사랑하시기 때문에 죄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도 않는 그런 사랑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사랑과 공의가 함께 있습니다. 공의가 빠진 사랑이 아니라 공의와 함께한 사랑입니다. 택자들을 사랑하시지만 택자들의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하여 완전한 공의를 행하시면서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과 공의가 어떻게 드러나는가? 자기 아들조차 아끼지 않으시고 내어놓으신 그 사실에서 사랑과 공의가 드러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다윗 편을 들어주시고 반대로 다윗의 원수들을 물리치신 것은 한편으로는 다윗을 사랑하시고 다윗의 원수들에 대해서는 미워하신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거기에 공의가 빠진 것으로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다윗이 의로우신 심판주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이유, 그래서 원수들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그리스도의 의 때문입니다. 죄가 없어서 의인이 아니라, 죄인으로 있지만 그 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다 해결해 주셨기 때문에 의인이라 칭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시편을 통해 다윗이 자신의 의를 말할 때는 항상 이런 방식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그리스도 없이 자기 의를 말한다면 그것은 심판대 앞에서 결코 의롭다고 판단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윗의 의를 변호해주시기 때문에, 죄 문제가 있는데 죄 없다고 하는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문제를 다 해결하셨기 때문에 의롭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다윗은 그리스도의 의를 입은 자로서 하나님의 법을 떠나지 않고자 했다는 것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시편의 기록을 보면 말씀에 대한 강조가 많이 나옵니다. 대표적인 예로 시편 1편을 보면 다윗이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1:2) 왜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기 위해서입니다(시1:1). 하나님께서 다윗의 의를 변호하고 계시다고 할 때 그리스도의 의를 받은 자로서 그의 삶은 바로 이런 방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죄에서 완전히 떠나 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다윗이 자신의 의를 말한다고 해서 죄와는 아예 상관없는 그런 사람으로서 말하고 있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때로는 넘어지는 일이 있을 수 있고, 또 그의 인생을 통해 볼 때 그 넘어짐이 심각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의를 받았다고 할 때 그의 삶은 언제나 말씀 앞에서의 삶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다윗은 간음죄를 저질렀을 뿐만 아니라, 거짓된 술수로서 살인죄도 저질렀습니다. 마음으로만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외적으로 드러난 죄를 범했습니다. 그러나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는 회개하는 심령을 가졌습니다. 다시 말해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은혜를 받았던 것입니다. 아니 그의 인생을 통해 보자면 그는 죄를 멀리하기 위해서 더욱 말씀 앞에서만 살고자 했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왜 이것이 중요하냐? 말씀과 상관없이 계속해서 살면서 그리스도의 의를 말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의에 대한 합당한 자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의와 더불어 또 다른 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의의 합당한 자세, 즉 그 삶은 무엇인가를 살펴보시란 겁니다. 다윗은 그리스도의 의를 자신의 의로서 내세웁니다. 그러나 그렇게 내세우는 의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살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의에 합당하게 살고자 했고, 그것을 위해 말씀을 사모하는 자로 있었습니다. 시편 119편을 보십시오. 시편의 기록 가운데 가장 긴 내용으로 있는데 그 모든 내용이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말씀 중심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쟁을 나갈 때도 “전쟁에 나갈까요? 아니면 나가지 말까요?” 물었던 것도 바로 이런 맥락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자신의 의를 주께서 변호하셨다고 할 때 그리스도의 의 때문에 자신은 그리스도의 말씀과 상관없이 살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말씀대로 산 것이 그리스도의 의와 상관없는 나의 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았다면 그 의에 합당하게 살고자 했던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달리 말하면 원수들과 같은 삶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죄의 길에 서게 될 것입니다. 연약하기 때문에 수시로 넘어가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의인 이상 의로우신 재판장께서는 우리에게 의를 선언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유로 죄에 머물 수 있는가? 결코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히려 더욱 더 주의 말씀 안에만 머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께서 다윗의 의와 송사를 변호해 주심으로, 달리 말하면 다윗 편에 서 계심으로 원수들에 대하여는 의롭게 심판하시는 일이 있다고 할 때 5절과 6절은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합니다. “이방 나라들을 책망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며 그들의 이름을 영원히 지우셨나이다 원수가 끊어져 영원히 멸망하였사오니 주께서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나이다” 여기 보면 이방 나라들을 책망하시고 악인을 멸하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다윗에 대하여는 변호하시는 일이 있지만 다윗의 원수, 즉 이방 나라들, 악인에 대하여는 책망하시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책망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멸하시기 위한 것으로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향해서도 책망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행하시는 책망은 결코 멸하시기 위한 것으로 있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2장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처럼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요 아들이 아니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아들이기 때문에 징계와 책망이 있는 겁니다(히12:8). 그러나 악인에 대해서는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악인을 향하여 책망하시는 것은 멸망에 앞서 멸망이 분명하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책망일 뿐입니다.
악인들이 하나님의 책망으로 인하여 멸망하게 될 때 본문 5절에서는 그들의 이름을 영원히 지우셨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들의 멸망은 더 이상 어떤 소망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6절에서 원수가 끊어져 영원히 멸망하였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 역사를 통해 보자면 한 나라가 강성해지고 그 강성해진 나라에 의해 다른 나라들이 멸망하는 일이 있지만, 그 모든 일의 주관자는 누구신가? 바로 하나님으로 알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주께서 무너뜨린 성읍들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그들이 멸망한 이상 기억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히 멸망했다고 말씀합니다.
실제로 다니엘서를 보면 느부갓네살 왕이 꿈을 꾸게 되는데, 한 큰 신상에 대한 꿈을 꿉니다. 머리는 순금이요, 가슴과 두 팔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 그리고 종아리는 쇠, 발은 쇠와 진흙으로 되어 있는 꿈입니다. 그런데 이 꿈에 대한 구체적이고 보편적인 해석이 무엇이냐 하면, 금은 바벨론이요, 은은 메대와 바사, 놋은 헬라, 그리고 놋과 진흙으로 된 것은 로마로 해석합니다. 매튜 헨리의 경우 이 부분을 주석하면서 네 나라가 한 큰 신상으로 있다는 것은 하나의 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교회를 대적하는 것이라고 해석을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시편 2편을 통해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는 것처럼, 세상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하나님과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는 것처럼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큰 신상을 깨뜨리는 것이 무엇인가? 다니엘 2장 34절에 보면 ‘손대지 아니한 돌’입니다. “또 왕이 보신즉 손대지 아니한 돌이 나와서 신상의 쇠와 진흙의 발을 쳐서 부서뜨리매 그 때에 쇠와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서져 여름 타작 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나이다”(단2:34-35)
여러분, 다니엘서를 통해서는 네 왕에 대한 내용만을 기록하고 있지만 매튜 헨리의 말처럼 그들은 모두 동일한 정신 아래 있는 나라들입니다. 달리 말하면 네 나라만이 아니라 세상 정신을 가진 모든 나라가 그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 정신을 가진 모든 나라를 멸망시키는 분이 누군가? ‘손대지 아니한 돌’입니다. 이 돌은 누군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즉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란 것입니다. 세계 역사를 통해 보자면 나라가 나라에 의해 멸망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사람의 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의해 그들을 다 멸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나라는 잠시 잠깐 그 영광을 드러내 보이는 것처럼 있지만, 그 모든 것은 무너질 수밖에 없으며, 오히려 하나님 나라만이 영원토록 세워질 것을 드러내시고 계신 겁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이 땅에서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만 이루어질 뿐이라는 것도 아셔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이 땅에서는 한때나마 악인들이 큰 소리 칠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멸하시기 전, 그리고 하나님께서 책망하시기 전 그들은 그들의 힘과 지혜로 얼마든지 큰 소리 칠 수 있는 때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편 2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열방이 분노할 수도 있습니다.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기 위해서 그들의 머리를 맞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비웃으실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분노가, 그리고 그들의 꾀가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도망할 수 있느냐 하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 삶 속에서 악인의 번성함을 부러워하지 마셔야 합니다. 불의를 행하면서도 그런 자들이 더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대하여 마음을 쏟지 마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도 한때만이기 때문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질문이 바로 그것 아닙니까? 왜 의인이 고난을 받으며 악인이 잘 되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책망하시며 멸망을 예비해 두고 계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멸망을 준비하시되 그들의 이름을 영원히 지우시며, 영원히 멸하실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들이 누리고 있는 것도 잠시 잠깐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으로 성도의 고난도 잠시 잠깐일 뿐이라는 것을 알려준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5절과 6절에서 ‘영원’이라는 말이 반복해서 나오지만, 저들의 멸망이 영원이라면 하나님의 변호를 받는 우리의 기쁨과 즐거움도 영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영원한 기쁨과 즐거움을 위하여 잠시 잠깐 고난을 당할 수는 있지만, 그러나 영원한 기쁨과 즐거움을 빼앗아 갈 수 있느냐? 결코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7절과 8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영원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준비하셨도다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결을 내리시리로다” 4절의 맥락과 같이 하지만 4절의 경우 과거 하나님께서 다윗의 의를 변호하시는 심판주로 계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면, 7절과 8절은 그런 일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있게 될 것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아니 이 땅에서는 부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있고, 때로는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으로 있을 수도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원수가 잘 되고 악인이 더욱 번성하며 평안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여전히 심판을 위하여 보좌에 앉아 계시며, 그 일을 준비하고 계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지금 당장 그분의 공의가 시행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분은 공의롭지 못한 분인가? 공의를 시행하시지 않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모든 세계를 공의로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분의 정직함으로 만민에게 판결을 내리실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기까지 오래 참으실 뿐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악인들의 착각이 어디 있느냐? 죄를 짓는데도 불구하고 죄에 대한 심판이 없다 보니 그런 심판이 영원히 없을 줄로 생각합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참고 또 참으실 뿐입니다. 참으시되 때가 차기까지 참으실 뿐입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언제든지 심판을 행하십니다.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준비하셨기 때문에 그때는 더 이상 기다려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지금 당장 악인에 대한 형벌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때가 차기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참고 인내해야 합니다. 저들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저들의 잘됨을 부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으로 살려고 더욱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오늘 본문 9절과 10절이 그것입니다. “여호와는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이시요 환난 때의 요새이시로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땅에서는 압제를 당할 수 있습니다. 환난도 당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원수들과 악인들로부터 박해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사방이 다 막혀 어디 하나 통로가 없는 답답함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변함없는 사실은 무엇인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는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고후4:8). 왜 그렇습니까? 우리에게 그럴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요새이시기 때문입니다. 박해를 받으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우리 스스로는 박해를 이겨낼 힘이 없습니다. 박해 앞에서는 다 항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요새가 되십니다. 아무리 심한 박해를 가한다 할지라도 요새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요동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 때문에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 요새는 무너지는 일이 있지만 하나님은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이란 성을 함락시킨 자가 있느냐? 없습니다. 이것은 앞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이란 성을 함락시킬 수 있는 자는 결코 없습니다. 때문에 그 성 안에만 있으면 그 성의 백성의 안전은 절대적으로 보장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누구만을 의지하라고 요청할 수 있느냐? 하나님만을 의지하라고 요청할 수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 10절에 보면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한다고 되어 있는데, 믿음이란 이런 측면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역으로 우리가 아직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원수들의 압제와 여러 가지 환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알려주시지만 어쩌면 그 가르침에 머물고자 하지 않는 우리의 마음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믿음이 없다고 할 때 믿음을 주시지 않는 하나님 탓을 돌리는 경향이 있지만 매우 조심해야 할 자세입니다. 물론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믿음이 없음을 책망하시기도 하십니다. 히브리서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말씀을 듣는 자로 있지만 그 말씀이 그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히4:2). 때문에 우리 문제를 하나님 탓으로 돌리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고 있다면 하나님을 정당하게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고, 때문에 하나님을 알기를 더욱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은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때문에 더욱 주를 찾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런 자들에게 요새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아니 본래부터 요새이시지만,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요새로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