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산책] 팔천송반야경 ⑪
중생 향한 무한한 애정이 내 완성의 길
불도수행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자아의 완성 내지는 행복한 자아의 실현이다. 다만 이를 현실에서 이룰지 혹은 미래세에서 이룰지가 문제일 뿐, 소·대승을 가릴 것 없이 불교를 믿는 이라면 공통으로 지니는 목적이리라.
이 완성의 길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의 힘과 능력을 통해 이루는 길이며, 또 하나는 남을 통해 이루어 내는 길이다. 대승불교가 일어나기 이전의 초기불교나 아비달마는 자신의 수행능력에 의존해 깨달은 자가 되고자 했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행복한 존재가 되고자 천명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대승이 되면 이제 깨달은 이가 되기 이전에 스스로 보살이 되고자 한다.
보살이란 기본적으로는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유정이다. 여기에 덧붙여 대승의 보살은 자기완성의 열쇠가 자신이 아닌 남, 곧 자신을 둘러싼 중생들에게 달려 있음을 눈치 챈 자이기도 하다. 그는 또한 일체중생이 처한 상황이 바로 자신이 처한 상황과 하등 다를바 없음을 눈치채고는 그들의 불우한 상황을 해결해 주기로 마음먹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벗어나는 일이 곧 내가 벗어나는 일이 됨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곧, 내가 해탈할 계기를 저들의 해탈에서 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초기불교 계승하되 수행주의 탈피
이러한 태도는 저들이 행복해 질 때 진정 내가 행복해지고, 저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행복에 도달할 때 비로소 내가 완전한 열반을 이루리라는 서원으로까지 발전한다.
남을 완성시키고 다시 그로인해 내가 완성되고자 하는, 실로 대단한 짐을 짊어지고자 결의를 품은 보살에게 이제 더 이상 ‘나’라는 존재, 곧 오온은 번민거리가 되지 못한다.
수부띠여, 다함이 없음을 성취해 이 반야바라밀을 깨닫는 보살마하살이 연기를 관찰할 때, 수부띠여, 이때 보살마하살은 색·수·상·행·식을 보는 일이 없느니라.(팔천송반야, 제28장, 아바끼르나꾸수마여래)
이렇듯 가없는 존재에 대한 무한한 열정이야 말로 오온으로 인해 발생하던 고(苦)를 완전하게 해소시키는 길이기도 하다. 고의 원인이라 여겨지던 대상 자체를 여의고자 하던 소승적 노력과는 정반대로 그것들을 정면으로 상대하기로, 나아가 짊어져야 함을 깨닫게 된 이상 번뇌를 일으키는 원인에 집착할 틈은 없게 된다. 그저 가없고 벅찬 삶을 응시하며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이것이 바로 대승보살의 불퇴전의 모습이다.
마찬가지로 무명·행·식·명색·육처·촉·수·애·유·생·노·사 및 근심·걱정·번민을 보는 일이 없으며, 붓다의 나라를 보는 일도 없느니라.(팔천송반야, 제28장, 아바끼르나꾸수마여래)
이처럼 고의 해결을 뭇 유정들에게서 구하고, 다시 뭇 유정들의 행복을 실현한다고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이 세상에서의 불국토의 실현을 의미한다. 이는 사후의 안락을 기대하는 믿음을 넘어서서 이 현실 속에서 행복하고 맑은 땅(淨土)을 이룩하려는 보살마하살의 위대한 노력이기도 하다.
이 세상에서 불국토 실현 추구
이처럼 팔천송반야와 같은 초기반야사상이 지향하는 바는 철저히 현실에 대한 안목과 노력과 회향이다. 그러면서도 과거 초기불교 내지는 아비달마의 수행자들이 고착하던 수행관이나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를 하나도 버리지 않는다.
다만 수행주의에 갇혀 진정한 목적을 망각해버림을 경계함과 동시에 그 수행조차도 이제 자기를 둘러싼 세계를 상대해야 하는 것임을 깨우쳐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세계를 상대해서 얻어내는 행복감을 또한 삼매라 표현하니, 이 또한 팔천송반야의 뚜렷한 가르침이기도 하다.
김형준 박사
경전연구소 상임연구원
[출처 :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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