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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향토유형유산
[제1호] 오산선돌
오산선돌은 진도군 고군면 오산리에 있는 선사시대의 거석기념물이다.
고군면소재지에서 지방도 801호선을 따라가다 보면 오상리에 이르게 된다. 입석은 마을에서 북쪽으로 400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일명 ‘선바위’라 불리고 있으며, 주변에 오상리 지석묘가 있다.
1968년 서울대학교 동아문화연구소에서 실시한 남해 도서지역 고고학 조사시 발견되어 처음으로 학계에 보고되었다. 그 후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1987년 재조사하였다.
오산 선돌은 넓은 면이 서남을 향하고 있으며, 인공의 흔적이 없는 자연석이다. 크기는 높이는 3.6m, 너비 1.2m이다. 마산방조제가 건설되기 이전에는 오산 선돌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마을에서 이 선돌에 대해 특별한 행사를 하지는 않지만, 주민들은 막연히 ‘선바위’가 오산리 마을을 보호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향토유형유산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오산 선돌은 지석묘와 함께 있는 묘 표석의 기능을 하고 있으며, 마을을 보호한다는 벽사적 기능을 지니고 있어 입석의 민간신앙적 의미를 밝힐 수 있는 자료이다.
[제2호] 옥대고인돌군
옥대고인돌군은 진도군 의신면 옥대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돌무덤이다.
돈지리에서 옥대리로 가다 보면 옥대리 마을 좌측 구릉상에 21기의 지석묘가 타원형을 이루며 모여 있다. 주변에 많은 석재가 널려 있어 지석묘의 아래쪽이 파괴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 고인돌군은 1987년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지표조사를 실시했을 때 조사되었다.
지석묘의 아래쪽이 매몰되고 파괴되어 확실한 형식을 알 수 없다. 규모는 일정치 않으며 중·소형 지석묘들이 뒤섞여 있다. 가장 규모가 큰 것은 길이 330㎝, 폭 220㎝, 두께 70㎝이며, 전체적으로는 길이 110~330㎝, 폭 70~280㎝, 두께 30~140㎝의 크기이다.
지석묘 주변에서 마제석촉 1점이 수습되었다.
주변에 많은 석재가 널려 있으며, 주변에서 수습된 마제석검은 진도군 향토관에 소장되어 있다. 향토유형유산 제2호로 지정되어 있다.
[제3호] 지력산 동백사지
지력산은 진도군 지산면 와우리에 있고 이 산에 동백사지가 있다. 동백사지에 대한 창건 및 폐사와 관련한 유래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전해오는 것에 따르면, 고려 초에 창건되었던 지산면 내에서는 가장 큰 절이었으나 한 스님이 산의 지맥을 절단하여 폐사되었다고 한다. 당시 천마가 있는 힘을 다해 비상하려고 박차고 뛰어오르던 바위가 지금의 말발굽바위라 전한다. 그 바위에는 한 개의 깊은 말발굽이 남아 있다. 이는 말발굽바위의 지형이 천마기풍(天馬祈風)이라는 명당인데 천마의 목에 해당하는 곳을 자르게 되어 나타난 일이라고 한다.(말굽바위전설 참조)
[제4호] 삼별초 궁녀둠벙
삼별초가 추대했던 왕족 출신 承化侯 王溫은 지금의 의신면 침계리에 있는 ‘왕무덤재’에서 붙잡혀 ‘논수골’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전투 중에 피난 중이던 여기급창 등 궁녀들은 창포리에서 만길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만길재’를 넘다 몽고군에게 붙잡혀 몸을 더럽히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고자 언덕을 따라 내려가 지금의 둠벙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이는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망할 당시 3천 궁녀가 부여 낙화암에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는 내용과도 매우 흡사한 사건이기도 하다.
그 뒤 비가 오는 날이면 이곳 둠벙에서 여인네의 울음소리가 슬피 들려오고 지금으로부터 20여 년전 까지만 해도 밤에는 이곳을 지나는 이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이런 사연을 간직한 이곳 둠벙을 가리켜, 이후 진도사람들은 ‘여기급창둠벙’이라 부르게 되었다. 당시 이곳 둠벙의 수심은 매우 깊어서 절굿대를 넣으면 우수영 또는 금갑 앞바다로 나온다는 전설도 간직하고 있다.
[제5호] 이충무공 벽파진 전첩비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에 있는(1956년 11월 29일 건립) 이 전첩비는 정유재란 당시 이충무공에 의해 가장 통쾌한 승리를 불가사의하게 거둔 명량해전 승첩을 기념하면서 진도출신 참전 순절자들을 기록하였다. 전첩비의 구조를 살펴보면 비신 높이 3.8m, 폭 1.2m, 두께 58cm이다. 비문은 시인 이은상이 짓고 글씨는 진도 출신 서예가 소전 손재형이 썼다.
이 비는 벽파리 앞동산 산마루에서 동쪽을 향해 서있다. 당초 바위산을 이용하여 천연 거북좌대를 조상(彫像)함으로써 전첩비의 위용과 예술성을 격상시키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비수(碑首)는 고군면 내산리 구렁골에서 청석원석을 채석하여 작업하였고, 비신은 전북 고창군 성송면 학천리 추월산에서 채석하여 벽파로 옮겨 채석탁마공사를 하였다.
이 비문은 전체 888자가 새겨져 있으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벽파진 푸른 바다여, 너는 영광스런 역사를 가졌도다. 민족의 성웅 충무공이 가장 외롭고 어려운 고비에 빛나고 우뚝한 공을 세우신 곳이 여기더니라. (중략) 병든 몸을 이끌고 남은 배 12척을 겨우 거두어 일찍 군수로 임명되었던 진도땅 벽파진에 이르니 때는 공(公)이 53세 되던 정유년 8월 29일 이때 조정에서는 공에게 육전을 명했으나 공은 이에 대답하되 신에게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 있사옵고 또 신이 죽지 않았으며 적이 우리를 업수이 여기지 못하리이다. 하고 그대로 여기 이 바다를 지키셨나니 (중략) 15일에 진(津)을 옮기자 바로 그 다음날 큰 싸움이 터져 12척 작은 배로서 330척의 배를 모조리 무찌르니 어허 통쾌할사 만고에 깊이 빛날 명량대첩이여…”
[제6호] 고진도성
진도군 고군면 고성리에 있는 고군성지는 백제의 성곽이다. 고군면 고성리 고군성지 주변의 지형을 보면, 남쪽은 첨찰산, 죽찰산 등 진도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둘러 쌓여 있고 북쪽으로는 용장산성이 있다. 동쪽과 서쪽에는 좁다른 농경지가 형성되어 있다.
특히 동쪽에는 해남 쪽으로 돌출한 원포리를 중심으로 내만된 해안이 형성되어 있는데, 현재 원포리와 내산리 사이에는 방조제가 축조되어 논으로 경작되고 있다. 이곳은 여몽연합군이 삼별초를 토평(討平)할 당시 홍다구(洪茶丘)가 이끄는 좌군의 상륙지점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고군면 고성리 고군성지는 백제의 성으로서는 드문 정방형의 평지성이다. 현재 북벽의 일부는 고성초등학교와 민가의 담장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높이 3m, 폭 1m, 길이 65m이다. 동․서․남벽은 직사각형의 대형 석재로 축석한 1m 내외의 기단부만 남아있다.
성벽은 협축법(狹築法)에 따라 쌓았는데, 기단부는 1m 내외의 대형 석재를 이용하였고, 상부로 올라갈 수록 30~40cm의 작은 석재를 수직으로 쌓아 올렸다. 이성의 규모는 500×400m정도로 추정된다.
[제7호] 철마산성
철마산은 진도읍의 진산으로 북산(망적산)과는 전혀 다른 봉우리이다. 이 산에서 고을 수령이 매년 정한 날짜에 철마신상을 모시고 제사지내던 마조단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철마산성의 건립연대를 알 수 있는 기록으로는 《옥주지》 산천조에 나오는 ‘진도의 주산으로서 진도의 북쪽 20리(2리의 오기로 보임) 지점에 있는데 옛날 뇌산현(군)때 산성을 쌓아서 관방처로 삼았다’고 한 것이 전부이다. 이로 미루어 통일신라 때 군사적 목적으로 건립한 산성인 것으로 추정된다.
철마산성에 대한 기존의 조사는 목포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1983년과 1986년 그리고 1992년 등 세 차례에 걸친 지표조사, 2006년 문화유적분포지도 작성을 위한 정밀지표조사, 진도군 향토유적 지정을 위한 조사 등 5차례에 걸친 조사가 있었다. 이 중 1992년 조사에서 수습된 다량의 기와편을 통해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시설물이 존재하였음이 확인 되었다.
진도 철마산성은 진도읍의 동북쪽에 위치한 철마산(303.5m)의 정상 부분을 둘러싸고 축조한 테뫼식 산성이다. 철마산의 정상부는 대체로 분지형의 평탄한 대지를 이루고 있고, 산외면은 암벽으로 된 급경사 지형인 관계로 성축 또한 대부분 암벽 사이에 보축하거나 암벽 상단에 2~3단만 축조하였다.
철마산성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잔존성벽은 남쪽과 남동쪽, 동쪽에 일부만 남아 있고, 북동쪽에서 북서쪽에 이르는 구간은 덤불이 우거져 확인하기 어렵다. 암벽위에 2~3단 축조하였다고 하는 곳은 많은 부분이 무너진 상태로 남서쪽에 1단, 동쪽에 일부구간 2단정도가 확인된다.
[제8호] 벽파정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에 있는 벽파정은 고려 희종(熙宗) 3년(1207)에 주로 중국을 왕래하는 국제적 사절을 위로하기 위하여 창건한 정자이다. 이후 조선 세종 11년(1465) 朴厚生 군수가 중건하였다. 현재 벽파정은 없어지고 옛 터 인근에는 ‘목포해양경찰서 벽파선박출입항대행신고서’건물이 있다.
벽파정은 고려 조선조에 걸쳐 문학누정으로 알려지며 많은 시인묵객들이 거쳐 갔다. 또한 국제사절 뿐만 아니라 발령으로 진도로 들어오고 떠나는 관료들, 유배자들의 작품도 많이 남아 있다. 고려조의 평장사 고조기, 예부상서 채보문, 우관의대부 김신윤, 한림원 학사 김극기와 조선조에 대사헌 김진상, 예조참판 이의철, 병조좌랑 홍 적, 공조판서 임응준, 이조참판 이경의, 신 규. 신백주 등의 작품이 전한다. 또 정언 이주, 대사헌 김정, 전라도관찰사 송인수, 유배에서 풀려나 영의정에 오른 노수신, 우의정 조태채, 정언 조희직 등의 유배인들의 시도 전해지고 있다.
[제9호] 강헌각
강헌각은 진도군 진도읍 동외리에 있는 효열비각이다. 강헌각은 효자와 열녀의 정신을 기리고 사회 기강을 바로 세우고자 진도읍 동외리에 세운 효열비각이다.
1922년 군민과 사회의 기강을 진작하고자 세웠으며, 비각 설립에 관여한 인물은 조경신, 박원배, 감역(監役) 이경욱, 이병수이다. 강헌각을 조성하기 위해 강헌계가 조직되었다. 진도읍 동외리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강헌각 내부에는 2기의 비가 있는데, 1기는 열녀비이고 다른 하나는 충신 효자비이다.
비 정면에는 효부, 뒷면에는 비서(碑序), 왼쪽 면에 연주가 기재되어 있다. 또 별비(別碑)에는 앞면에 효자, 왼쪽 면에 애우, 뒷면에는 비서, 오른쪽 면에는 효자부 연장(延長)으로 되어 있는데, 각각 열명식(列名式)으로 되어 있다.
강헌각은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효열비 중의 하나로 비각을 세우기 위해 조직된 강헌계에 관한 자료가 남아 있어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강헌각 내의 2기의 비는 지역 내 열녀와 효자들의 이름을 기록한 것으로 군민과 사회의 기강 진흥을 위해 세운 것이다.
[제10호] 삼강비
삼강비는 진도군 진도읍 교동리에 있는 충·효·열을 실천한 사람을 기리는 비이다.
삼강비 또는 충효열비는 충·효·열을 실천한 사람, 즉 국가에 충성을 하거나 부모에게 효도를 한 사람, 부부간에 지켜야 할 도리를 지킨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을 말한다.
1945년 이전에 세워진 충효열 비석 중에서 현재 확인이 가능한 비석은 12기인데, 이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비는 삼강비(三綱碑)이다. 이 삼강비는 1931년에 설립되었고, 전라남도 진도읍 교동리에 소재한 진도향교의 경외에 있는 여러 비들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입석과 좌대가 있다. 비의 전면에 효자 21명, 후면에 열녀 23명과 충신 7명이 실려 있다. 비문은 박진원이 지었고 글씨는 박봉우가 썼다.
그 외의 비석들은 비의 내력이 자세하게 전해지지 않으며,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집중적으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1976년에 발간된『진도군지』에는 1945년 이전에 만들어진 충효열비는 총 22기로 보고되어 있고, 그 중에선 현존하는 충효열비는 12기이다.
1945년 이후 세워진 충효열비를 포함하여 2006년 현존하는 충효열비는 진도읍 2기, 군내면 1기, 고군면 3기, 의신면 4기, 임회면 3기, 지산면 7기, 조도면 1기로 모두 21기이다.
충·효·열은 유교이념의 실천윤리이다. 각 문중에서는 삼강비의 존재 유무를 통해 가문의 정체성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특히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에 수많은 삼강비가 제작된 것으로 미루어볼 때 그 이유를 규명할 필요가 있다.
[제11호] 박대형효자정려
박대형효자정려는 진도군 군내면 월가리에 있다. 박대형의 효행은 하늘이 감동한 것이라고 군민의 칭송이 자자하였는데, 때마침 전라감사 조상우(趙相佑)가 지방 순시 중 진도에 와서 그 소문을 듣고 중앙정부에 보고하였다. 중앙정부에서는 그 효성을 높이 사서 1571년(선조 4)진도군 진도읍 동외리 자리에 정려를 세워 공을 높이었고, 가선대부라는 벼슬품계를 주었다. 정려는 ‘박대형효자정려(朴大泂孝子旌閭)’라 적혀 있고, 정려 내부에는 정려기, 정려중수기, 정려고적 등의 편액이 있다.
박대형의 본관은 경주, 아버지는 박총룡(朴叢龍, 1949~1532)이고, 어머니는 장흥임씨 임처경(任處京)의 딸이다. 1532년 진도읍 북상리에서 태어났으며, 자(字)는 달수, 호(號)는 윤곡이라 하였다. 나라로부터 가선대부(嘉善大夫)라는 벼슬 품계를 하사 받았고, 진도군 향리를 지낸 것이 1883년 진도읍내 정거름재에 세워진 비에 적혀있다. 박대형의 12세손으로 박천재(朴薦在)가 있다.
박대형은 5살 나던 해에 어머니로부터 자기가 유복자임을 알았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침착한 달수는 아침저녁으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요절한 아버지 묘소를 찾아 호곡하는가 하면 홀로된 어머니에게도 극진한 효성을 다하였다.
그러던 중 세월은 흘러 달수는 약관이 되었고 어머니는 노년에 이르러 병으로 앓아 눕게 되었다. 달수는 좋다는 약은 모두 구하여 봉양하였으나 날이 갈수록 어머니의 병세는 회복되지 않고 더욱 악화되어만 갔다.
하루는 병석에 누워 있던 어머니가 숭어 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였다. 달수는 어리둥절 하였다. 생전에 어머니가 자기에서 무엇을 요구하지도 않았지만 이 엄동설한에 어떻게 숭어 고기를 구한단 말인가.
그러나 달수는 어머니를 위한 일이면 무슨 일인들 못할 것인가 생각하고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을 헤치고 강가로 달려갔다. 그러나 강물은 꽁꽁 얼어 붙었고 그 위에는 흰눈이 덮여 있었다.
달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빙판 위에서 한참 서서 생각하다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 이 딱한 사정을 기도하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온 몸이 꽁꽁 얼어 붙은 듯 꼼짝할 수 없는데 더운 기운이 하늘로부터 달수의 몸을 감싸는 듯 하여 정신을 차려보니 이상하게도 얼어붙은 냇가 얼음을 깨고 싶은 충동에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부근에서 돌을 주워 얼어붙은 강 얼음 치기를 수십 번 하였다.
마침내 깨어져 나간 얼음 사이로 숭어 한 마리가 튀쳐 나오자 이를 본 달수는 너무나 반가워 숭어를 움켜 쥔 채로 하늘을 보고 감사한 후 한걸음에 집으로 돌아와 그종안에 캐놓은 약이 될만한 산나물을 숭어와 함께 정성껏 다려서 어머니께 드렸더니 눈물을 흘ㄹ리시며 숭어 고기를 잡수신 달수 어머니의 병환은 몇 일 뒤에 씻은 듯 나았다고 전해온다.
[제12호] 향현사
향현사는 진도군 진도읍 성내리에 있으며 진도의 창군(創郡), 설읍(設邑)에 공이 있는 인물을 배향한 사우이다.
일반적으로 향현사는 고을에 공이 있는 사람들을 모시는 사당을 말한다. 진도의 향현사는 창군 설읍 유공자인 팔위(八位, 즉 박연, 박근손, 조복명, 김석곤, 박인복, 박정, 김중연, 조맹문)와 박근무, 하극창, 박의경, 최민명, 조복리, 임은, 김백균 등을 제향하고 있다.
진도군의 향현사는 1868년 대원군의 사원 철폐령에 따라 봉암서원과 함께 철거되어, 그 연원에 대한 기록이 별로 없다. 그러나 봉암서원 아래에 있고 1778년에 양사재를 지었던 것으로 미루어 이 무렵에 초설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향현사는 창군설읍 유공자인 8현(八賢, 박연·박근손·조복명·김석곤·박인복·박정·김중연·조맹문)을 제향하여 오다가, 1869년 박영·양진회를 추가해 모시고, 소현사라 했으나 철폐되었다고 한다.
1931년 향현사 복원 기성회가 발족되어, 1933년 5월에 군강공원 남쪽에 사우를 재건하였다. 복원 후에는 박영과 양진회를 제외하고, 8현과 함께 박근무·하극창·임은·박의경·최민명·조복리·김백균 등 7명을 추배했다. 1931년 정만조가 찬한 8현 공적비가 진도향교 뜰에 남아 있다.
향현사는 진도의 창군(創郡)·설읍(設邑)에 공이 있는 인물들을 배향하고 있는 사우로서 역사적 가치가 크다고 하겠다.
[제13호] 굴포연대
굴포연대는 진도군 임회면 백동리 신동마을 연대산에 있는 조선시대의 연대지이다.
진도군 임회면 굴포연대는 신동마을 북동쪽 100m 지점 연대산 정상부에 위치한다. 동쪽은 상굴포와 짝별 사이에 내만 된 해안이 형성되어 있고 북동쪽으로는 상망거리(相望距離) 내에 여귀산봉수대가 위치한다. 이 여귀산 정상에서는 주로 북쪽 해안이 잘 조망된다.
연대는 정상에 자연석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는데 현재는 도괴된 석재만이 산재해 있다. 현존하는 석축의 흔적으로 보아 본래는 원형의 연대였을 것으로 판단되며 현 직경 6.8~7m 정도이다.
[제14호] 오봉산연대
오봉산연대는 진도군 임회면 상만리 오봉산에 있는 조선시대의 연대이다.
여귀산 남쪽에 위치한 해발 204m 높이의 오봉산 정상에 있으며 각종 옛 문헌자료에 기록된 ‘上堂串烟臺(상당곶연대)’와 동일한 유적이다. 오봉산은 여귀산의 한 갈래로 남쪽 해안을 향해 돌출해 있는데, 특히 봉수 연대가 위치한 정상부분은 급격한 단애로 이루어진 바위산이다. 오봉산을 중심으로 동쪽은 바로 해안에 여결되는데 멀리로는 금갑진성과 금갑(사구미)봉수가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만(灣)이 형성된 서쪽으로는 귀성과 월평마을이 자리잡고 있으며 또한 멀리 굴포봉수 연대와 이어 남도진성이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이곳 오봉산에서는 여귀산 봉수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봉수대와는 서로 잘 관찰되지 않는다.
오봉산연대는 오봉산 정상부의 경사가 심한 자연암반 위에 있다. 약 30×60cm 크기의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막돌 허튼쌓기’ 방식에 의해 만들어진 이곳 봉수 연대는 현재 한 개의 연대만이 원형을 위지하고 있다. 이연대의 규모는 높이 3.5m, 직경 약9m이며, 모습은 둥근 원형으로 되어 있다.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현재 남아 있는 연대 이외에도 몇 개의 연대가 더 있었다고 하는데,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현재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연대 바로 남쪽에 도괴된 석축들이 산재해 있다.
[제15호] 첨찰산봉수
첨찰산 봉수는 진도군 의신면 첨찰산 정상에 위치하며, 사천리 쌍계사에서 등산로를 통해 올라갈 수 있으며, 진도군 기상대로 가는 도로를 따라서 봉수지 앞 까지 갈 수 있다. 첨찰산은 현 봉대가 위치한 산정을 중심으로 동남쪽의 해발 460m 고지와 남쪽 420m 고지로 연결되어 있다. 첨찰산 정상과 기상대가 자리한 동남봉 사이에는 헬기장이 축조되어 있는 관계로 땅이 다듬어져 있으나, 봉대가 위치한 곳은 암산이다.
현재 봉수대는 자연 암반 위에 원형의 연대가 비교적 양호하게 보존되어 있다. 30×20cm의 자연석으로 난층 쌓기 방식에 의해 구축한 연대는 남북 직경 9m, 동서직경 8.5m, 둘레 30.3m 규모이다. 가장 양호한 서벽의 경우 현 높이 2m 정도이나 그 밖의 다른 부분은 도괴되어 있다. 또한 최근에 쌓은 것으로 보이는 석탑이 연대 내에 자리하고 있어 봉수지에 대한 관리 보호가 시급하다.
[제16호] 여귀산봉수
여귀산은 진도군 임회면 죽림리에 위치하며, 진도남단에서 제일 높은 산으로 여러 개의 봉우리로 연결된 암산이다. 특히 봉수가 있는 여귀산 정상은 자연암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봉수는 약 450㎝ 높이의 잘라진 틈에만 특별히 보완 석축하고 석벽의 가장자리에 몇 단의 석축을 원형으로 쌓았다. 50×30㎝정도의 막돌을 이용하여 ‘막돌허튼쌓기’에 의해 구축한 연대의 직경은 대략 6m 정도이다. 현재는 완전 도괴되어 주위에는 석재편들이 흩어져 있다. 이 봉수에서는 진도남단의 거의 전 지역이 조망되어 남편의 상당곶연대와 남동편의 백동리 연대산연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또한 동편으로는 금갑진성과 금갑리 연대가, 동남편에는 남도석성이 위치하고 있다.
[제17호] 금갑연대봉연대
금갑연대봉연대는 진도군 의신면 금갑리 연대산에 있는 연대지(烟台址)이다.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송정리에서 죽림리로 가는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접도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이 길을 따라 300m 정도 가다보면 도로 우측에 금갑리 연대지 안내판이 보인다. 기존 조사에서는 사구미 연대지로 보고되었다가 행정명에 따라 금갑리 연대지로 정정되었다. 횃불이나 연기를 피워 중앙으로 소식을 전달했던 연대는 높이 1m 내외, 직경 10m 정도의 원형 연대이다.
연대산은 금갑리 서쪽으로 돌출해 있으면서 전방에 접도, 목섬, 황범도 등이 외호하고 있어 자연적인 내해를 형성하고 있다. 따라서 이곳의 자연암반에 구축된 연대는 외부로부터 은폐·엄폐되어 있으면서도 잘 조망되므로 천연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이미 『대동지지(大東地志)』에 훼철기사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오래 전에 훼철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유구상태는 엉성하기 그지없다. 북편에 몇 단의 석축이 보일 뿐 대부분 도괴되어 원형을 파악하기조차 어렵다. 연대산의 동쪽에는 금갑진성이 소재한다.
[제18호] 하조도 돈대봉돈대
하조도 돈대봉돈대는 진도군 조도면 창유리에 있는 돈대지이다.
조도면 창유리와 신육리 경계에 있는 해발 231m 높이의 돈대봉 제2 봉우리에 있다. 돈대봉은 암벽으로 된 험한 산으로 봉화 불을 피우던 봉대 역시 암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돈대 유적이 있는 돈대봉은 대체로 바위로 이루어진 산인데 특히 연대가 위치한 산 정상부분은 암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돈대봉을 중심으로 동서쪽에는 상조도 동구리성지와 북쪽에 대봉산 봉수가 위치하며 북동쪽으로는 신금산 봉대가 서로 바라보이는 거리 내에 있다.
돈대봉 돈대는 대체로 자연암벽을 이용하였으나 이 가운데 정 동쪽에서 정 남쪽까지 약 12.5m는 상하 2단의 석축으로 보완하여 돌을 쌓았고 전체적으로는 둥근 모양으로 축조되어 있다. 그 규모는 상단부의 지름 약 7m, 높이 2.8m이며 하단부의 경우는 지름이 5m, 높이 3.2m 정도이다.
[제19호] 압구정터
압구정터는 진도군 군내면 정자리에 있고 압구정은 조희직의 정자이다. 진도 창녕조씨들은 1989년 정자리 언덕에 『麗朝正言 曺公希直 狎鷗亭遺蹟碑』를 세워 기념하고 있다. 이 비는 정자리 108-5번지에 있으며 소유는 조씨문중이다.
조희직은 고려 말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창녕이고 시조 조계룡의 28세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조정통(曺精通), 할아버지는 조한용(曺漢龍), 아버지는 조경숙(曺景淑)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와는 사촌 동서간이다. 부인은 강윤충(康允忠)의 딸이며, 아들 조근(曺謹)과 조심(曺諶)을 두었다.
조희직은 1356년(공민왕 15) 정언(正言, 종6품) 재임 중 정추(鄭樞)․이존오(李存吾)와 함께 신돈(申旽)의 비행을 탄핵하다 진도로 쫓겨나, 가흥현(嘉興縣, 진도 읍내 북쪽 4k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있었던 고려시대의 현)의 호장(戶長)을 역임하였다.
조선 건국 뒤 중앙정부에서 여러 번 벼슬길에 나오기를 요청하였으나, “어찌 불사이군(不事二君)을 할 걸이며, 고려 왕조에서 고관을 배출한 집안으로 국은에 보답하지도 못했는데 무슨 면목으로 새 조정에 나갈 것인가?”하며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진도군 군내면 정자리 해안에 압구정(狎鷗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낚시를 하며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 그리하여 조희직의 후손들이 대대로 진도에 살게 되었다고 한다.
[제20호] 해원사터
해원사터는 진도군 군내면 둔전리 일대에 있는 고려시대의 절터이다.
원래 사찰의 명칭이 해언사(海堰寺)·해안사(海岸寺)·해월사(海月寺) 등으로도 전해내려 오고 있으나 가장 오랜 기록인 이주(李胄)의 『금골산록(金骨山錄)』에 해원사(海院寺)로 기록되고 있다.
해원사지(海院寺址)는 군내면 둔전리 94-1 일대 금골산 아래의 금성초등학교 교정에 위치한다. 1973년 학교주변을 정리하면서 많은 석재와 초석·와편 등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금골산 위에 세 개의 굴이 있는데 맨 밑의 서굴은 창건한 연대를 알 수 없으나 일행(一行)이란 스님이 향나무로 16나한을 조성하여 굴에 안치하고, 굴의 곁에 별도로 고찰 6~7간이 있어 스님들이 거처하고 있다. 또한 동굴의 주사(廚舍)는 모두 비바람에 퇴락되었으나 굴 북쪽 비탈을 깎아서 미륵불을 만들었는데 옛날 군수 유호지(柳好池)[1469~1472]가 만들었다.
이와 같은 해원사에 대한 기록은 『금골산록』에만 있으며 「고기(古記)」로 표기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해원사는 이때까지 명맥을 유지해 오다가 이후 즉 『금골산록』이 기록된 후인 16세기 이후에 폐찰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제21호] 한산사터
한산사터 진도군 군내면 한사리 190번지에 위치한 고려시대의 절터이다.
‘한산사(寒山寺)’ 또는 ‘한사’로 전하고 있지만 문헌기록에는 없다. 이 마을의 정순홍씨 밭에 소재하고 있는데 주민들은 이곳을 ‘절고랑창’ 또는 ‘절골’이라 부르고 있다.
한산사터는 군내면 한사리 190번지, 즉 한사리 마을 뒤 북쪽편의 마령산 아래 저평한 구릉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이 절터에서 삼층석탑으로 보인 일부 석재와 삼각형의 판석에 양각한 불상, 그리고 흩어진 와편 등이 발견되었다. 석탑의 전테규모를 파악할 수 없어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으나 일부 남아있는 탑재들의 양식으로 보아 고려말로 추정되며 불상은 조선시대로 보인다. 1990년대 까지는 불상과 탑재가 있었으나 현재는 도난되어 소재를 알 수 없다.
[제22호] 해창각시당
해창 각시당은 진도군 진도읍 해창리에 있는 당집이다. 당집 옆에는 세 그루의 보호수가 있는데, 두 그루의 팽나무는 250년, 한 그루의 이팝나무는 200년이 된 나무이다. 만약 팽나무를 당집을 지을 때 심었다면 해창리 당제는 250년 전 까지 개시연대가 올라 갈 수 있겠지만, 팽나무가 있는 곳에 당집을 지었다고 본다면 당집을 처음 지은 연대는 대략 200년 안팎이 될 것이다. 현재 지어놓은 각시당은 개보수한 것으로 정확한 연대는 파악되지 않는다.
진도 해창리 당제는 매년 음력 1월 14일 자시에 마을 뒤편 보호수 옆에 소재하고 있는 당집에서 마을의 평안과 풍요를 기원하는 당제를 지낸다. 제신은 여신석상이다. 당집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이다. 내부에는 여신석상이 있으며, 이 여신석상에 옷을 입혔다.
당제를 주제하는 제관은 동내 이장이 나이별로 생기를 봐서 부정이 없는 사람 둘을 선정한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제관을 맡고 한 사람은 보조를 한다. 제관은 제일이 다가오면 금줄을 치고 황토를 깔며 제관 집에서 제물을 준비한다. 이때 제물 준비에 필요한 회비 염출은 호단위로 납부하며, 금액은 그해 상황에 따라 조절한다.
제물의 종류는 돼지(통 채로 삶아서 놓는다), 시루떡, 좁쌀밥, 국, 주․과․포 등이다. 제는 밤11시 경에 시작되는데 진설-분향-재배-현작-독촉-재배-소지-음복 순으로 진행된다. 제가 끝난 후 다음날 굿치고 놀면서 주민들과 함께 음복하면서 제관들의 노고를 치하한다.
같은 날 거리제도 함께 진행되는데 거리제는 마을 입구에 있는 우물에서 거행한다. 거리제의 준비는 우물 앞에 있는 준비 장소에서 제물을 마련한다.
[제23호] 정혜공 사우와 하마비
정혜공 사우는 진도군 임회면 송월리에 있다. 1872년 전주 이씨 정종(定宗)의 아홉 번째 왕자 석보군(石保君) 복생(福生)을 주벽으로 7위를 모셨다. 석보군 이복생(1399 - 1447)은 조선의 왕족으로, 조선 제 2대 정종의 서자이다. 시호는 정혜(靖惠)이다.
조선 제 2대 정종의 서자이자, 9남으로 생모는 숙의 윤씨(淑儀尹氏)인 해평 윤씨(海平尹氏)이다. 정부인으로는 학성군부인 원주 김씨(鶴城郡夫人 原州金氏)이 있다. 자녀로는 정부인 김씨가 낳은 장남 연산부정(燕山副正)와 차남 인양부정 정(仁陽副正 整), 3남 곡성군 금손(鵠城君 金孫) 장녀 이씨와 차녀 이씨, 3녀 이씨, 4녀 이씨, 5녀 이씨가 있다. 본성이 청렴검소하고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며 학문에 통달하여 ‘대문장가’라 일컬었다. 그러나 관직에는 뜻이 없어서 늘 산간에 은거하고 세상 일에 관여치 않았다.
송월리 동네 어구에는 왕자 사당에 참예하는 이들이 말에서 내려 걷도록 하마비(下馬碑)가 있고 사당 앞에는 홍살문도 있다. 이 하마비의 현 상태는 3단의 다듬은 돌로 쌓여 있는데 1단의 돌이 위 두 단의 돌보다 크고 길쭉하며 가장 위의 매끄럽게 다듬어진 돌 한쪽면에 ‘하마(下馬)’라 쓰여 있다.
2. 향토무형유산
[제1호] 진도아리랑
진도아리랑은 진도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전라남도 일원에서 유희요로 즐겨 불려지고 있는 민요이다.
아리랑이 한국의 민요를 대표한다는 점에 대해 누구나 이의가 없을 줄로 안다. 한국인의 정서에 밀착된 아리랑의 예술성은 우리의 삶을 모두 용해시킨 원천적인 자아상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중 「진도 아리랑」은 가히 한국의 민요, 또는 남도 민요의 정수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전국적으로 분포한 아리랑 중의 하나이지만, 그 예술성으로 말미암아 널리 애창되어 왔고, 특히 민속음악의 요람이라고 할 수 있는 진도지방을 그 전승 모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관심을 끌어왔다.
한국의 아리랑은 대개 지명과 함께 이름이 불린다. 「정선 아리랑」, 「밀양 아리랑」, 「서울 아리랑」 하는 식이다. 「진도 아리랑」 역시 진도라는 지역에서 불리기 시작했을 것으로 보이며, 왜 「진도 아리랑」이 불리게 되었는지에 대한 배경설화까지 전해오고 있다. 우리나라의 많은 아리랑들이 각각 지역 음악을 토대로 하여 만들어졌듯이, 「진도 아리랑」 역시 전라도가 「육자배기」를 음악선율의 기본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소위 「육자배기」목을 선율로 사용한다.
아리랑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노래인 한편, 가장 대중적으로 불려온 민요이다. 따라서 아리랑은 그것을 즐겨왔던 민중들의 생활과 생각, 그리고 바램 등이 시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소위 민중시라고도 불리는 민요는 그런 점에서 가장 대표적인 민족음악이요 민속음악인 것이다. 특히 아리랑은 민요 중에서도 가장 널리 불려왔다는 점에서 민중들의 문학적 시심이 가장 잘 용해되어 있는 민요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진도 아리랑」 역시 진도 사람들의 삶이 표현되고 있다. 때로는 세련된 시학적 비유와 묘사를 담고 있는가 하면, 어떤 가사들은 매우 직설적이고 외설적인 가사도 많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아리랑의 기원에 대한 논의는 매우 다양하게 이루어져 왔다. 민간어원설, 인명유래설, 지명유래설, 고유어기원설, 여음기원설, 신제작설, 메나리조기원설, 민요기원설 등이다. 지금까지 정설로 확정된 것은 없기 때문에 앞으로도 논의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진도 아리랑」의 기원에 대해서도 몇 가지 근거가 제시되어 왔다. 하나는 민간에서 전해지는 기원설화로서 「진도 아리랑」이 불리게 된 연원을 설화에 기대어 설명하고 있는 예이다.
첫 번째의 설화를 소개하면, 옛날 지산면 관마리의 목장에 설 감목관이 있었는데, 그의 딸 설이향이 원님의 아들 소영과 사랑하는 사이였다. 읍과 관마리는 50여 리 떨어진 거리였지만, 그들은 늘 중간 지점인 임회면 서낭리의 마을 뒷산 굴재에서 만나곤 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약속한 날에 소영 공자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고, 그 후로는 그를 만날 수가 없었다. 해가 바뀌어 이른 봄에 소영 공자가 육지의 다른 처녀와 결혼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설이향이 듣게 되었다.
이에 설낭자는 죽을 결심으로 비수를 품고 신행 길목을 지키고 있었으나, 끝내 신행 행차를 가로막지 못하고 결국은 그 비수로 자기의 머리를 잘라 중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들 두 남녀가 굴재에서 서로 만나는 것을 보고 지나던 초군들이 “아애랑 설이랑 아라리가 났네” 하고 노래하던 것이「진도 아리랑」이 되었다 한다.
두 번째의 기원설화는 진도의 한 당골집에 당골이 되는 것을 비관한 총각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사랑하는 처녀와 혼약만 남긴 채 진도를 떠나 육지 어느 골에서 머슴을 살았다. 주인집에 예쁜 처녀가 머슴에게 반해 서로 사랑을 나누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 부모에게 들켜 둘은 그 길로 문경새재를 넘어 진도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 총각을 기다리던 처녀는 총각이 양가집 규수를 데리고 돌아온 것을 알게 되어 이내 서럽게 울면서 노래했는데 그것이「진도 아리랑」이다.
이 두 설화는 진도에 전해져 온「진도 아리랑」의 기원설화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원설화는 견강부회적인 성격이 강하여 믿기 어렵다. 다음의 진술이「진도 아리랑」의 기원 문제에 뭔가 실마리를 제공한다.『옥주의 얼』에 소개된 내용이다.
“1900년도 초반에 우리나라 대금의 효시요, 절대의 창시자인 임회면 삼막리 출신 박종기 선생이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 신청에서 박진권, 박동준, 채중인, 양홍도 등이 함께 모여 아리랑을 작사, 작곡하였다 한다. 박종기 선생께서「진도 아리랑」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문화재 수석전문위원을 지낸 진도군 출신 박진주, 인간문화재 박병천, 민속연구가였던 구춘홍 등이 증언하고 있다.”
위와 같이「진도 아리랑」이 박종기[1879~1939] 등을 위시한 당시 진도읍에 있던 신청(神廳)을 출입하던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하나의 민요가 어떤 개인 또는 단체에 의해서, 더구나 근래에 만들어져서 널리 전파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정제된 가락의 형태나 시가적 특성은 오랜 시간을 두고 이루어지며, 그 정형을 채택하는 것이다.
「진도 아리랑」은 독자적으로 창작된 민요는 아니다. 그것의 음악적 특성을 살펴보면 전라도 동부 지역에서 일반적으로 논을 매면서 불렀던「산아지 타령」이라는 노래와 맥이 닿는다.
「진도 아리랑」을 음악형식으로 분류하면 메김소리와 받는소리가 각기 8각 두 장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시나위조의 선율에 세마치장단으로 불린다. 문학적으로는 분장체 장가, 4장 8구 16음보, 시상전개의 2단구성이라는 점이 확연하다. 그런데 이러한 음악적, 문학적 형식은 예의「산아지 타령」과 일치한다. 다만 메김소리와 받는소리(후렴) 중 받는소리에서 차이가 난다.
후렴을 살펴보자면,「산아지 타령」은 숨을 쉬는 단위의 끝마디가 각기 라-미(la-mi)의 하행적 음계 구조를 이루고 있음에 반해서「진도 아리랑」은 미-라(mi-la) 식으로 낮은 음에서 높은 음으로 올려붙이는 상향구조로 처리되고 있어, 이 부분이「산아지 타령」과 차이를 보인다.
결국「진도 아리랑」은 전라도 지역 동부의「산아지 타령」이라는 일노래를 흥과 멋을 돋울 수 있는 유희요로 창조적 개곡해 놓은 것으로, 이것은 1900년대 초의 일이었다.
진도아리랑가사
가. 산천초목은 저젊어가는디
우리들청춘은 백발이오네
나. 간다못간다 얼마나울었냐
정거장마당이 한강수가되었네
다. 허리끈졸라매고 논사농께
신작로놓기만 다들어간다
이렇듯「진도 아리랑」은 전통민요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창조적 계승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 그것은 진도 사람들의 예능에 대한 탁월한 감각이 낳은 또 하나의 자랑일 수 있다. 이렇게 시작된「진도 아리랑」은 현재에 이르러서는 진도에서만 불리는 것이 아니라 전국화되었으며, 초등학교 음악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전통성과 예술성이 높게 평가되고 있다.
「진도 아리랑」은 진도 사람들에 의해서 오랫동안 애창되면서 자신들의 삶에서 빗어지는 갖가지 애환을 민중의 시로 지어놓았다. 현재 400여 종 이상의 전승되어 온 노랫말이 정리되고 있지만, 이 역시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민요의 성격상 새로운 가사가 얼마든지 만들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의 창조성까지를 담보하고 있는 살아 있는 민요라 할 수 있다.
노랫말 속에는 노래를 불러온 사람들의 삶이 투영되어 있다.「진도 아리랑」의 노랫말 역시 그 속에 다층다양한 주제가 농축되어 있다. 주제를 분석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오히려「진도 아리랑」의 생명력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자제를 요구한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몇 가지 대표적인 가사를 중심으로 하여「진도 아리랑」이 지니고 있는 문학적 생명성을 찾아본다.
위 가사중의 가)는 자연과 인생에 대한 대구적 형식을 통해서 인생의 허무를 표현하고 있다. 대자연은 시간적 순환을 통해서 거듭나지만, 인생은 오로지 한번 살 뿐이다. 굳이 어려운 철학적 언술이 아니더라도 일회적인 인생, 그래서 이생도 삼생도 아니고 일생일 뿐인 인간의 삶을 그와는 다른 자연과 대비를 시키고, 또 다시 젊음과 늙음을 대비시키는 가운데 삶의 가치와 허무를 동시에 노래하고 있다.
나)의 가사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은 고통이요, 그래서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 다른 가사들에 보이지만, 떠나는 님의 말고삐를 잡고 눈물짓던 여심이 이제는 자동차나 기차를 타고 떠나는 님을 붙들고 눈물짓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시대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정거장은 근대적 산물이다. 그리고 근대화를 대표하는 정거장이 생기면서 이별의 기회도 늘었을 것이다. 그러나 과장이 심하다. 큰 강을 뜻하는 한강, 눈물을 얼마나 흘렸으면 눈물로 한강수가 되었겠는가?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강조하기 위해 객관적 과장을 취하고 있다.
끝으로 다)는 사회적 비판이 눈에 띄는 가사이다. 분명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가사로 보이며, 이는 국가권력, 특히 일제라고 하는 식민지 상황에 대한 경험적 비판 의식이 내재되어 있는 노랫말이다. 말을 바꾸면 아무리 노력해 보아야 쓸데없다는 자조적 한탄이 섞여 있는 가사이기도 하다.
이외에도「진도 아리랑」의 노랫말 속에는 삶의 애환과 가정적·사회적 문제, 그리고 생활 속에서 얻어진 지혜와 교훈 등을 평범한 언어로 표현하고 있는 것들도 많다. 의신면 사천리에는 진도 아리랑비가 세워져 있다. 현재 진도 아리랑축제가 매년 열리고 있는 것도「진도 아리랑」이 가진 가치를 보여주는 한 예일 것이며, 더 나아가 앞으로「진도 아리랑」의 발전에 기여할 것으로 내다보인다.
「진도 아리랑」은 전라남도의 동부 지역에서 논매기를 하면서 불리던 일노래인「산아지 타령」을 창조적으로 변형시켜 유희요로 발전시킨 대표적인 노래이다. 현재까지 진도는 물론 전라남도 지방과 호남 일원에서 즐겨 불리는 민요의 하나로서 대표적인 육자배기조의 음악적 구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흥겨운 후렴이 흥을 더하기도 하지만, 그간에 널리 애창되어 온 민요인 만큼 매우 다양한 메김소리의 가사가 발달해 있어서 민중의 삶에서 비롯된 애환을 살피기에 좋은 자료가 된다.
[제2호] 의신대동놀이
의신대동놀이는 진도군 의신면 돈지리 및 그 일원에서 집단으로 일손을 꾸려 일을 하면서 노래하는 논일소리와 밭일소리의 총칭이다.
진도에서 대동두레놀이라고 하면 대개 진도군 의신면 돈지리를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는 일노래를 지칭하는 것이다. 진도군 지산면 인지리를 중심으로 구성된 남도들노래(국가지정 무형문화재 제51호)가 논일소리인 것에 반하여, 대동두레놀이는 의신면을 중심으로 한 논일소리와 밭일소리를 총칭하는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의신면을 중심으로 마을사람들이 한때 진도의 주력산업이었던 목화밭을 공동으로 매면서 부르던 밭일소리도 대동두레놀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대동두레놀이를 지산면 들노래와 비교하기 위하여 의신들노래 혹은 진도동부 들노래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노래는 많은 제보자들의 증언을 근거로 돈지리의 허옥인이 1980년 초에 새롭게 구성한 것이다.
한편 논일소리를 중심으로 한 대동두레놀이를 ‘감지평 들노래’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따라서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는 대동두레놀이는 화중밭 매는 소리, 혹은 화종밭 매는 소리라 하고, 의신면 논일소리는 진도 들소리, 의신면 들노래, 진도 동부 들노래 등으로 부르는 것이 용어의 혼란을 방지할 수 있다고 본다.
화종밭을 매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대동차린다’라고 말한다. 또 마을 사람들 일부만 모이는 것을 ‘두레 차린다’라고 말한다. 대동을 차리게 되면 통솔하는 사람을 ‘존위(尊位)’라고 불렀으며 모임의 신호를 나팔로 하였다고 한다. 김매기 작업은 남자가 주도하되, 남녀공동으로 작업했다. 지산면을 중심으로 한 남도들노래가 여성 중심의 작업환경이라는 점과는 비교된다. 공동작업량의 비중은 ‘마냉기’라는 제도를 운영했다. 마냉기란 토지가 많은 집에서 토지가 적은 집으로 작업비를 환산해주는 제도를 말한다.
허옥인에 의해 재현된 대동두레놀이의 연혁은 다음과 같다.
1979년에 진도각시맞이의 의례와 노래를 발굴·재현하였다. 1983년에는 의신면 전통민속제를 개최하였고, 1983년 진도군민의 날에 진도각시맞이를 시연하였다. 1983년 제13회 남도문화제에서 ‘의신대동놀이’로 장려상을 수상하였다. 1984년과 1985년에 각각 제2회 및 3회 의신면 전통민속제를 개최하여 시연하였으며, 1985년에는 국립극장 공연을 하였다.
1986년 허옥인에 의해 『진도속요와 보존』이라는 책자가 발간되면서 대동두레놀이가 체계적으로 정리되었다. 1986년 제15회 남도문화제에는 ‘진도민요판’이라는 이름으로 출전하여 우수상을 차지하였고, 이때 허옥인이 지도상을 수상하였다. 당시에 받은 수상금으로 돈지리에 놀이마당을 조성하였다. 1988년에는 허옥인(국악협회장)에 의해 제1회 진도국악제를 개최·시연하였다. 이어서 2001년 10월 30일에 향토문화유산 제3호로 지정되었다.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의 대동두레놀이에서 남자들의 의상은 ‘중우바지’에 ‘베등지게’를 입는 것이 보통이다. 신발은 ‘털맹이’라는 짚신을 신고, 혼인하지 않은 사람들은 ‘태맹기’라는 베수건으로 머리를 두른다. 모자는 ‘농립’이라 하여 짚으로 왼새끼를 꼬아 패랭이테를 만들어 쓴다.
대동두레놀이의 순서는 「모찌는 소리」, 「모심는 소리」, 「긴절로소리」, 「중절로소리」, 「자즌절로소리」, 「길꼬랭이」로 이어진다. 밭들노래로는 「길사거리」, 「개타령」, 「중타령」, 「난초타령」, 「흥드레들노래」 등으로 이어진다. 대동두레놀이를 하면서 불렀던 놀이가사를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가사]〈의신대동두레놀이의 경우〉
① 들나감장(길사거리)
거사: 하늘을 취어다 봐라. 구름이 사방에서 뒤둥군다.
사당: 나는 간다~ 나는 간다
거사: 헤~ 시부렁 섭죽하니 새별 나왔는가
-하략-
② 진양조 이음
합창: 아~아~아/ 아리여로~오/ 이리되로 고나~하/ 나헤 어디로 가자/ 너 ~ 흠~/ 자나 나아도 산안이요/ 어~어너~어~
사당: 우리 부모는 날 여울라면/ 피는 꼬체 날 여워주제/ 피였다가 지는 ~꽃에다/ 날 여웠던가
거사: 자나 나아도 산안이요/ 어~어너~어~
-하략-
③ 발림장(중중모리)
사당: 쌍울려 발림하세
거사: 좋다 좋다 노래, 한둠혀 불러서러~허
-하략-
④ 호미시김(「개골이 타령」)
합창: 개골개골 개골개골 개골/ 개골을 찾을라 면양서 먹고 됫돈받고/ 양폴을 긁어 걷고 미나리방죽만 더듬어라/
-하략-
⑤ 마당놀이 「진방아타령」(김매기 작업이 끝나고 밤에 모여서 노는 사당거사놀이)
사당: 이히야 헤~헤 헤이야/ 허리 허허 허로 구나아/ 아무래야 어히허라아/ 니가 네로 구나
거사: 사당 마누라 미소를 떨고/ 마누라 댕기 만 드려부러라/ 허라디야 어리시구나 절이시구나/ 방애로다
-하략-
⑥ 「사랑타령」(자즌모리)
합창: 사랑 사랑 아이고 모두네 사랑아/ 애랑 애랑 애야 애히여러
거사: 어허 설마 좋다~/ 옥천앵두는 붉었는데 요내 낭군 소식은/ 아이고 두절이로구나 애량애랑애야/ 애히여리/
-하략-
오늘날 공연용으로 쓰이는 대동두레놀이는 이 지역에 잔존해온 생활문화와 노동요, 민속 등을 각색한 것으로 간척 때 행하던 「가래 소리」나 「다굼질소리」, 논일할 때의 농요, 밭일할 때의 농요, 농사일을 끝낸 뒤의 뒷놀이라 할 수 있는 길꼬낙과 사거리, 「진도아리랑」 등을 안배해 기존의 전통이 최소한 보존되도록 꾸며져 있다. 그 동안 민속학자나 문화재전문가들의 채록과 채보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 지역 민요는 같은 진도이면서도 목장지대였던 지산면 인지리의 남도들노래와 다른 선율을 유지하고 있다.
[제3호] 야철장
야철장 한영섭은 임회면 봉상리 송정마을 886번지에서 한이룡(韓二龍 ․ 1920~1978)의 3남 3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한이룡은 부친 한성태(韓聖泰 ․ 1889~ ?)로부터 송정에서 대장간 일을 배웠다. 한영섭의 선대는 의신면 옥대에서 살았으나 그의 할아버지 한성태가 송정 대장간 판을 인수해 이사 온 뒤 둘째아들이자 한영섭의 부친인 한이룡을 가르쳐 이웃 연동(蓮洞)으로 분가시켜 대장간 일을 시켰고, 한이룡은 다시 1947년 연동으로부터 십일시 장터 대장간을 사서 이사했다.
한영섭의 큰집 한성학의 가계 또한 옥대에서 대장간을 해 한일룡(韓日龍)→한상인(韓相仁) 등 2대가 계속했다. 그리고 한영섭의 할아버지 한성태의 송장 대장간은 셋째아들 한삼룡(韓三龍 ․ 1937~ )이 운영했다. 이를 가계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韓琪貞(남도)→ 聖學 ----→日龍(옥대 대장간) → 相仁(옥대 상인)
聖培 ----→ 雲龍(읍내)
聖泰(송정)→ 水龍(굴포 대장간) → 春香
二龍(십일시 대장간) → 榮燮
三龍(송정 대장간)
한영섭은 임회면 봉상이 송정에서 태어나 두 살 때 십일시로 아버지를 따라 옮겨 산 뒤 1965년 석교중학교를 졸업, 이해부터 아버지 일을 도왔다. 4년 후 대장간에서 가장 어렵다는 볼다리 달기 일을 혼자 할 수 있을 만큼 일이 숙달되었는데 오늘날까지 44년째 이 일을 계속하고 있다. 그는 주로 삽을 비롯한 춘새못, 문고리(지도리), 대패, 끌, 큰자귀 등 농가에서 고용되는 모든 철물제품, 목수공구, 조각공구 등을 만들고 있다.
진도에는 광복 후 40여 명의 대장쟁이(사투리 ․ 서낭간)가 있었으나 오늘날 진도읍내에서 2명이 일하고 임회 한영섭씨가 대를 이은이로는 유일하다. 읍내 2명중 1명은 해남에서 온 사람과 ○○○씨가 장날만 일하고 있다.
한영섭은 1992년에 대파 골 제초 갈무리를 창안해 공급했다. 그리고 1981년까지 큰 망치질은 1969년에 결혼했던 부인인 양영란(梁榮蘭 ․ 1949~1981)씨가 맡았으나 사망하자 1982년 재취 부인 김순자(金順子 ․ 1959~ )씨를 맞아 큰 망치질을 시키는 등 가족전승에 그치고 있다.
그러나 한영섭은 희망자가 있으면 누구든 기술을 전승시킬 의사가 있다고 한다. 전승방법으로 처음에는 함마질(큰 망치질)을 배운 뒤 집게잽이, 당금질, 작은 망치질 순으로 배워야 하는데, 이 과정은 약 3년 정도의 수련과정이 필요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