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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율어면'의 유래
★ 내고향 율어면"에 대해 고서및 인터넷등 수많은 곳을 뒤적여가며 찾아 보았으나,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정리된 내용은 없고 제각기 중구난방"이었다,
하여, 제가 유년시절'부터 50년간 들어왔던 구전'들과 검색정보를 취합한 것'으로써
본 내용은 타 문헌과 약간의 차이가 있을있 수 있습니다,
(내고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존재산 주릿재에서,찰칵!까만고무신&정경필)
일찌기 부여족(扶餘族)이 남하하여 노령산맥 최 남단에 터를 잡고 원주민이 되었던 곳
그곳에 전남 보성군 율어면"이 있다,
좌표상 동경127도11분, 북위 34도52분"에 위치한 율어면"은
동쪽엔 존재산"(해발703M) 서남쪽엔 초암산"(576M) 북쪽엔 동소산"(464M)이 있으며
존재산"에서 발원하여 동쪽에서→서쪽으로 흘러 보성강과 합류 후 섬진강'으로 흐르는 율어천'이 있다,
(존재산 주릿재"에서 바라본, 운무에 휩싸인 율어의 전경)
율어천을 중심으로 양편에 분포 된 농경지 약9.92㎢(田2.42,畓7.5㎢), 대지0.6㎢, 기타3.7㎢, 임야35.19㎢등
총면적 49.08㎢,에 생활 기반을 두고 법정 9리,
(고죽(古竹),금천(金川),문양(文陽),선암(文陽),유신(柳新),율어(栗於),이동(梨洞),장동(長洞),칠음(七音)리,)
행정적 15리'이나, 39개의 파생적 자연마을'에 736가구 1508명(남713,여795명,2008년조사결과)의 주민이
농업을 주업으로 살고있는 곳'으로써,
동쪽으로는 보성군 벌교읍과 남쪽으론 조성면 및 겸백면, 서쪽으론 복내면, 북쪽으론 문덕면"
그리고 승주군 외서면과 경계를 이룬다,
(소설"태백산맥의 무대임을 알리는 존재산 주릿재에 선 문학비)
보성군 동북부에 해당되는 율어는 직경 2KM의 거리에 남해바다'를 접하고 있어서
대채로 온화한 해양성 기후이며, 년간 강우량은 1,200mm 내외이다,
문헌상 기록은 없으나 구전"에 의하면
옛부터 밤나무가 많고 그 지형이 알밤'의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일명 밤어면"
한자음(漢字音) 밤율(栗)"자와 어조사어(於)"자를 써서,"율어(栗於)'라고 불리워졌으며,
백제'시대에는 복홀군(伏忽郡)에, 신라'시대엔 보성군(寶城郡), 조선시대 땐 순천군(順天郡)에 편입됐다가
1896년에는 나주부(羅州俯)에 속하였고,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에
보성군 율어면(寶城郡 栗於面)'이라고 개칭하여, 면'소재지를 율어리(栗於里)에 두었으나
6/25동란 이후 문양리(文陽里)로 옮겨져 오늘날에 이른다,
♣ 문화유적,
<보물 제944호 마애여래좌상>
♣ 규모(단위츠): 암벽고 480, 폭510,
(좌상전고 355, 상고210, 두고 66, 무릎폭 185, 무릎고 50, 대좌고 145, 폭265, 공양상 전고 182, 폭 55)
유신리 산 125-1번지에 보물 제944호' 마애여래좌상"(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됨)이 있는 일월사"란 사찰은
통일신라및 고려시대엔 존제사(尊帝寺)로 알려져 있으나 19세기에 폐사되어 사찰의 명맥이 끊겼다가
1978년 대웅전 등을 복원 미륵사로 개명하여, 현재 대웅전과 요사채, 선방, 삼층석탑이 있는 사찰이다.
대웅전 내에는 아미타불을 주불로 관세음과 대세지 보살이 협시를 이루고 있다.
보물 944호 "마애여래좌상"은 우리나라에 있는 불상중에 유일하게
"양어깨에 다른 한겹의 어깨걸이개'를 걸친 통견(通肩) 으로 된 법의"를 입고있어
학계및 불교계의 소중한 자료로 제평가 받고있는 석불상이다,
♣문형식 가옥
<중요민속자료 제 156호>
- 보성군 율어면 율어리 진천마을에 있다,(서울대 건축사연구실"에 자료보관)
율어면 진천리(참샘마을) 44번지에 소재한 전통가옥 문형식"씨집은 18세기 말에 지지은 집으로써
남도대륙지역의 오래된 건축기법이 잘 살아있으며, 조선시대 후기당시의 민가 생활상을 엿볼수 있도록
민속자료들이 잘 살아있는 특이한 겹집(부엌과 안방, 대청이 끊김없이 일렬로 배치되는 방식)의 평면구성이다,
1984년 1월 10일 중요민속 자료 제156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송호정<사진이없어서 풍경이 비슷한 예천 금당실의 초간정"사진을 대체함>,
율어면 상율부락 율어 초등학교앞에 자리한 송호정"은
맑은 율어천과 오래된 큰 소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어 송호정이라 하였다,
광주이씨 이병근과 유명한 유림들이 이 곳에 모여 공부하며 시를지어 읊고
술잔을 나누어 우정을 나누는 경치가 수려한 곳이다.
★율어중헉교전경
※ 마을 이름의 유래와 내력,(가,나,다..순)
1,[고죽리] *고음(古音)
고음(古音) 마을은 문헌에는 1470년 인동장씨(仁東張氏)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나,
고흥,벌교에서 광주로(남북) 가는 지름길목"이자, 순천 낙안에서 나주로(동서) 가는 길목이라서
그보다 훨씬 전부터 마을이 형성됬다는 설도 있다,
마을 입구 서쪽 산이 곰이 엎드린 형국이라 하여 곰웅(熊)자와 업드릴복(伏)자를 따서 웅복 또는 곰복"으로 불렀으며
1914년 일제시대에 행정구역 통폐합때, 옛날부터 널리 알려진 마을이라 하여 고음((古音)"이라 불렀다,
이곳에 웅복현(熊伏縣;지금의 군청)이 있었으며, 이 마을앞 백장터"는 4방 100리 안에 보성,화순,구래,곡성,승주,고흥군의
중심부였기에 비단및 백포,자기"등을 거래했던 커다란 장터'였으며, 옛날에 사기를 구웠다는 점골"에서는
지금도 청자'파편과 기와쪼각이 발견되고 있고, 200여년 전부터 하동정씨들의 집성촌이됬다.
*죽포(竹苞)
1800녀대에 최씨(崔氏)가 처음 터를 잡았으나 모두 떠나고
1900년대 칠원제씨(漆原諸氏), 장흥임씨(長興任氏)등이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이름은 마을이 배의 형상인데 배에서 삿대가 필수이므로 마을주변에 삿대용 죽(竹)이 많았으며 그 모습이 마치
꾸러미처럼 보인다 하여 죽포(竹苞)라는 설과 전설에 의해 죽포 안산에 제(諸)씨 선산이 파리형국이라 대승촌이라 했고
그후 부락뒷산 미등이 동과산이 유하므로 봉조미계에 죽순을 먹고 산다하여 죽포라 했다는 설이 있다.
2,[금천리] * 상빙(上氷)
그후 마을앞에 흐르는 냇물이 매우차서 웃빙내라고 하였는데 한자음 포기로 상빙(上氷)이라 불러지고 있다.
*하빙(下氷)
하빙마을의 형성시기는 상고할 수 없으나 조선조 중엽부터 부락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마을의 이름은 이 마을위치가 배산도천(背山渡川)하여 있고 동구에 죽림이 무성하며
초암산 지문 기슭에서 발원된 유수가 거울같이 맑고 차갑다해서 속칭 빙내(氷川)라 했다고 전해내려 오고 있다.
*광천(光川)
광천 마을은 지금부터 200여년전 상빙에서 거주하던 김만호의 사위인 오중관이
풍수지리에 뛰어난 국풍을 초빙해 집터를 잡고 거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의 이름은 뒷산의 매봉을 등지고 초암산을 바라보는 정남향 부락으로 존제산에서 발원된 물이 풍부하여
종일 햇빛에 반짝이며 부락을 비추어 준다고 하여 광천(光川)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석천(石川)
석천마을은 250여년전에 조씨(曺氏)가 터를 잡고 살아 오다 현재는
남평문씨(南平文氏) 김해김씨(金海金氏)가 마을을 이루고 있다.
마을 이름은 조씨(曺氏)가 큰 바위사이에 터를 잡고 살았다하여 돌틈이라 칭하였으며
마을앞에 큰 시냇물이 흘러 석천이라 하였다고 한다.
3,[문양리]*상율(上栗)
율어면을 밤어면이라고 칭하는데 밤어면을 아랫밤어 웃밤어라고 하며
율어1구 울변에 일제때 면사무소가 위치하고 있어 아랫밤어라 하였고,
해방후 면사무소 소재지가 문양리 상율 부락으로 옮겨지면서
웃밤어라 하여 상율이라 하였다. 또한 산의 형세가 밤의 윗부분에 위치한다해서 상율이라 했다고 한다.
*대치(大峙)
대치 마을은 고려말 1300년경 탐진최씨(耽津崔氏)가 먼저 터를 잡은 후 김해 김씨(金海金氏)가 들어와 마을이 형성되었다한다.
1960년대까지는 10대 성씨에 33호로 번창하였으나 지금은 20여호가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마을의 이름은 마을 뒷산에 문덕면 한치 부락으로 넘어가는 큰 재가 있는데 큰 재밑에 마을이 있다하여
한치부락이라 이름하였으며 한치부락의 이름은 大宇의 넓다 크다의 뜻을 지녔기에 한치를 대치(大峙)라 하였다 한다.
*라문(羅文)
나문마을은 1800년경에 광주이씨(光州李氏)와 여산송씨(廬山宋氏)가 터를 잡아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의 이름은 마을 앞에 갈마봉이 있고 요천수가 구비쳐 아름다운 비단과 같은 형태로 흐르고 있어
나문(羅文)이라 했다 한다.
*가척(可尺)
문양리는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대치리, 나문리, 양지리, 마산리, 가척리,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나문과 양지의 마을을 따라 문양리라 하였으며 가척마을은 조선 효종때 고령신씨(高靈申氏)가
마을 앞의 넓은 들을 보고 터를 잡았다고 하며 그후 신씨의 외손인 전주이씨(全州李氏)가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마을 이름은 마을 뒤산 옥녀가 길쌈을 하면서 비단을 자로 재는 형국처럼 생겼다하여 가척(可尺)이라 한다고 한다.
*양지(陽地)
양지마을은 달성서씨(達成徐氏)가 1710년경에 터를 잡아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하나
지석묘 군집으로 보아 마을이 선사 시대로부터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현재는 장흥임씨(長興任氏)와 광주이씨(光州李氏)가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마을 이름은 옛날에 마을 앞으로 시냇물이 흘러 갈때는 12개 마을이 형성되었다하나
그후 천재지변으로 하천이 새로 생겨
시냇물이 흘러간후 11개 마을은 이주하고 양지촌만 남았다한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마을 뒷산이 버드나무가지 형으로 산세가 내려와서 양지(陽地)마을이라 하였으며
또한 마을이 무척 따뜻하다하여 양지(陽地)라 불러지고 있다.
*마산(馬山)
마산마을은 조선중엽에 인근에 살던 전주이씨(全州李氏)가 지세가 좋고 앞에 노정봉(露楨峰)이 있어
집을 짓고 살면 좋을 것 같아 터를 잡아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마을 이름은 앞산 모양이 말과 같고 마을은 말을 메어두는 말뚝과 같다고 하여
말뫼라 하다가 한자음인 마산(馬山)이라고 불렀다 한다.
4,[선암리] *모암(帽岩)
선암리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상선리, 하선리, 모암리를 병합하여 상선과 모람리의 이름을 따서 선암리라 한다.
모암마을은 약500년전에 인동장씨가 터를 잡아 6대째 살아오다 흩어지고
그후 하동정씨가 6대, 청풍김씨가 4대째 살고 있는 곳으로 율어면에서는 제일 높은 곳에 촌락을 형성하고 있다.
이 마을의 이름은 앞산에는 신부바위가 있고 뒷산에는 신랑바위가 있고 서로 마주보고 있다하여 모암이라 하였다.
*상선(上船)
상선마을은 조선중기에 하동정씨(河東鄭氏)가 의식(衣食)이 풍성할 것이라 하여 이곳에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마을의 이름은 산의 형세가 앞산은 뱃머리와 같고 뒷산은 배들과 같은 형국이라 해서 선창이라 불러 오다가
행정구역 개편시 상선이라 개칭하였다.
*하선(下船)
하선 마을은 조선중기에 밀양 박씨(朴氏)가 처음 터를 잡아 마을을 형성하였다.
마을의 이름은 산의 형세가 앞산은 뱃머리와 같고 뒷산은 배들과 같은 형국이라 해서 선창이라고 불러오다가
행정구역 개편시 윗마을은 상선 아랫마을은 하선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팽목(彭木)
팽목 마을은 조선 중엽 밀양손씨가 터를 잡아 살아왔으며, 마을의 이름은 마을 편산에 황새가 무리를 지어 살면서
나무를 쪼았다고 하여 탁목이라 하였다가 복내와 조성을 왕래하던 상인들이 마을 입구의 큰 팽나무 그늘에서
쉬었다 가곤 하여 마을 이름이 상인들이 휴식처 제공으로 팽목이라 개칭되어 불러지고 있다.
*신기(新基)
신기마을은 약 150년 전에 하동정씨가 터를잡아 마을을 형성되었으며,
마을의 이름은 상선마을의 터밖이라 하여 오다가 행정구역 개편시 새로운 마을이라하여 신기라 하였다 한다.
5,[유신리]*신산(新山)
신산마을은 고려초에 하동정씨(河東鄭氏)가 터를 잡았다 하나
현재는 창녕조씨(曺)씨와 밀양박(朴)씨가 부락을 형성하고 있다.
마을의 이름은 마을 뒷산 모양이 새 형태와 같다하여 금산(禽山)이라 하였는데
그 후 봄이면 산에 진달래 꽃이 만개하여 마치 비단 폭 같이 아름다워 금산(錦山)이라 하였다 하며,
또 화산(花山)이라 부르다가 현재는 신산(新山)으로 부르고 있다 한다.
*용암(龍岩)
용암마을은 고려중엽에 벌교 낙안에서 진주강씨(晋州姜氏)가 처음 터를 잡아 살다 떠나가고
보성선씨(宣)와 천안전씨(全)가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마을 이름은 마을 뒷산에 큰 바위가 있는데 그 형태가 마치 갓(冠)처럼 생겼다하여 갓바위라 하였다 하며
그후 일제시대에 편의상 용암이라하여 현재까지 일컬어지고 있는데
그전에는 입암(笠岩)이라하였기 때문에 옛날 지도에는 입암으로 나오고 있다 한다.
*시목(木)
시목 마을은 고려중엽에 장수황씨가(長水黃氏) 처음 정착 터를 잡고 살다가 조선말엽에 떠나고
그후에 보성선씨(寶成宣氏)와 죽산안씨(竹山安氏)가 부락을 형성하고 있다.
마을 이름은 마을부근의 광천개미란 곳이 다른곳에 비해 유난히도 감나무가 무성하게 잘 자라고 고목들도 많아서
감나무골이라 부르다가 일제시대에 시목 이라 불렀다 한다,
6,[율어리]*율변(栗邊)
율변마을은 고려말에 우정(牛汀)에서 거주하던 진주강씨(晋州姜氏)가 새로 터를 잡아 이주홰와서 마을이 형성되었으나
현재는 여산송씨(礪山宋氏)와 함양박씨(咸陽朴氏)가 주로 거주하고 있다.
율호(栗湖)리라 부르다가 조선말에 율변(栗邊)리라 부르라고 개칭 하였는데
이는 율어면의 지형이 밤처럼 생겼으며 이 마을은 밤의 갓에 해당된다 하여 율변이라 이름지었다 한다.
*우정(牛汀)
우정마을은 고려초에 지주강씨(晋州姜氏)가 터를 잡아 마을을 형성 하였으며
지금은 여산송씨(礪山宋氏)와 남평문씨(南平文氏)가 주로 살고 있다.
마을의 이름은 옛 도승이 터를 잡을 때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산의 뻗어 내림이
소가 물가에 들어 누워 있는 와우형국(臥牛形局)이라하여 지금의 우정(牛汀)이라고 불러지고 있다.
*진천(眞泉)
진천마을의 형성은 임진왜란 후 경상도 고성에서 살았다는 칠원제씨(漆原諸氏)가 처음 터를 잡고 살면서
남평문씨와 결혼을 하였는데 그후 제씨는 모두 떠나고 남평문씨(南平文氏)와 기타 성씨가 마을을 이루고 있다.
마을 이름은 어사 박문수(朴文秀)가 암행두중 이 마을을 지나다가 목이 말라 마을 가운데 있는 샘물을 먹고
물맛이 너무 좋아 진천(眞泉)이라 하였다하여 그후 마을 이름을 진천이라 하고 있으며 참샘이라 부르기도 한다.
*자모(慈母)
자모마을은 고려중엽 해주오씨(海州吳氏)가 터를 잡고 마을을 형성 하였으나 조선시대에 병자호란으로
오씨가 망한후에 장흥임씨(長興任氏) 국담공(菊潭公)이 입향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자자일촌을 이루고 있다.
1985년 1월 20일 주암 다목적댐공사로 인하여 수몰지역으로 고시되어 현재는 7가구가 이주했으며
17가구가 간접보상을 받게되어 대대로 형성되었던 자자일촌이 아쉬움만 남긴채 옛 이야기가 되고 있다.
마을이름은 옛날 도승이 산세를 보고 터를 잡았는데 풍수리리설에 의하면 산의 형세가 여성의 유방과 같이
아름답게 형성된 쌍유혈(雙乳穴)로 이루러져 있고 현모 양처의 지덕을 겸비한 어린 아이의 어머니가
아들을 품고 젖을 주는 자태라 하여 마을이름은 자모(慈母)라 칭하였다고 한다.
*진목(眞木)
진목마을 조선중엽에 해남윤씨(海南尹氏)가 터를 잡고 살아 오면서 마을이 형성 되었다.
마을의 지명은 마을앞 사의 형세가 참나무를 찍어 먹는 탕목조 형국이어서
새의 먹이를 일컬어 진목(眞木)이라 했다 한다.
7,[이동리]배골(梨洞)
배골마을의 형성연대는 상고할 수 없으나 고려말엽 말양박씨가 처음 마을을 형성하였다 한다.
마을의 이름은 마을 뒷산 형제봉(兄第峰)에서 내려다 보면 마을이 “배”모양으로 생겨 배舟洞이라 했다 하며
지금의 이동(梨洞)이라 부르게 된 것은 고증(考證) 할 수는 없으나 “배 舟”자와 “배 梨”자가 의미는 다르지만
발음이 동일(同一) 한데서 유래(由來) 되었다 한다.
*대동(大洞)
대동마을은 고려시대부터 탐진최씨 나주임씨 등 200여호가 지금의 대동제(大洞堤) 부근에 마을을 형성 거주하였으나
마을이 폐촌이 되면서 잔여 지금의 대동(大洞) 마을로 옮겨 현재는 장흥임씨, 기계유씨, 이천서씨 등
각성 17호가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마을의 이름은 동네가 어찌나 큰지 한골이라 부르다가 1880년경 풍수리설에 마을터가 좋지 않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현재의 대동으로 옮겨 옛 한골을 대동으로 부르고 있다.
*가정(可亭)
가정마을은 조선조중엽부터 나주林씨가 12대를 이어 살고 있으며 그후 연대는 추정할 수 없으나
각성 20여호가 촌락을 형성하고 있다.
마을의 이름은 형국이 가재와 같이 생겼다고 하여 “가재이”라 부르다가 지금의 가쟁이로 구전되어 오고 있다.
*서상(西上)
서상마을은 고려중엽에 철원제씨(澈原諸氏)가 마을을 형성하였다.
마을의 이름을 고려중엽에 사찰이 있어서 불당동이라 했다가 위쪽으로 마을이 새로 형성됨에 따라 중간에 있다고 하여
중촌이라 했으며 현재는 동쪽에도 마을이 형성되어 방향에 근거를 두고 서상이라 했다고 한다.
*서하(西下)
서하마을은 고려중엽에 진주정씨(晋州鄭氏)가 터를 잡아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며
한때는 5개마을로 나누어져 있었으나 서하마을 만이 남아있다.
마을의 이름은 근처에 장군대 좌형의 명당이 있는데 그곳이 장군앞에 세운 깃발과 같아하여 깃발이라 불러오다가
기정(旗亭)이라 하였으며 그 후 서하로 바꾸었다 한다.
8,[장동리] 장수(長水)
장수마을은 고려중엽에 창녕조씨(昌寧曺氏)가 터를 잡아 살다가
현재는 광주이씨(廣州李氏)와 진원박씨(珍原朴氏)가 부락을 형성하고 있다.
마을 이름은 시냇물이 마을 뒷산 기슭에서부터 마을앞까지 길게 흐른다 하여 장수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서동(書洞)
서동 고려말엽에 천안 전씨가(天安全氏) 처음 정착하여 살았으며
지금은 문화유씨(文化柳氏)와 칠원윤씨(七源尹氏), 하동정씨(河東鄭氏)가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마을이름은 옛날 유명한 서당(書堂)이 있어서 서동이라 불렀다고 전해져 오고 있다.
*수내(水內)
수내마을은 1915년경 광주이씨(廣州李氏) 덕수(德水)가 터를 잡아 부락을 형성 하였다한다.
마을 이름은 옛날 하천이 있어 시냇물이 흘렀는데 물길을 바꾸고 거기에다 논을 만들어 수내들이라 불렀으며
도중에 마을이 형성되자 마을 이름을 수내라고 불렀다.
*중촌(中村)
중촌마을은 고려말엽에 창령조씨(昌寧曺氏)가 터를 잡아 마을을 형성하였다.
마을 이름은 장수마을과 들판사이에 있는 마을이어서 중촌이라고 불렀다 한다.
9,[칠음리]칠음(七音)
칠음마을은 고려초기에 보성선씨(寶城宣氏)가 이곳을 지나다 뒷산 산세가 솔개가 알을 낳은 형태라 하여
이곳에 터를 잡으면 자손이 번창하고 인물이 많이 배출 된다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촌락을 형성하여 살다가
그 후세가 약해져 1890년부터 광주이씨(光州李氏)가 대성을 이루고 있으며
1906년에 부락 전호가 대화재(大火災)로 전소(全燒)된 후 다시 재기하여 각성 20여호가 정착하고 있다.
마을의 이름은 마을 뒷산이 솔개모양이라 하여 솔개치(?)子와 수풀림(林) 字음을 따라서 치림(?林)이라 하였고
선조들은 갈음촌(渴音村)이라고도 칭하였는데 일제시대에는 7가지의 유명한 명성이 날 것이라고 하여
현재의 칠음(七音)이라고 부르고 있다고 전해진다.
*대평(大平)
대평마을은 1890년경 진원 박씨(珍原朴氏)가 터를 잡고 마을의 이름은 진원박응장(朴應張) 이 1845년 무과에 등과하여
강진군수로 재직하면서 대판동(大販洞)이라 하였으며
밀양박홍주(密陽朴洪柱)가 홍문관교리(弘文館敎理)를 지내면서 태평동(太平洞)으로 개칭하였고
행방후는 대평(大平)으로 불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상일(上日)
상일마을은 고려중엽 탐진최씨(耽進崔氏) 춘길(春吉)이 함평 손불에서 이곳으로 들어와
진원박씨(珍原朴氏) 딸을 맞이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다.
마을의 이름은 병자호란때 여든살먹은 어머니를 등에 업고 피난을 가는데 숲속에서 이상한 새소리가 나서
가만히 가 보았더니 아낙네가 베를 짤 때 나는 소리였다. 그 소리로 잃어버린 마음을 찾았다하여
마을 이름을 잃어실이라고 부르다가 일제때 상일이라 하였다.
*하일(下日)
하일 마을은 고려말엽 탐진최씨(耽進崔氏) 길만(吉萬)씨가 상일에서 내려와 마을을 형성하였다 한다.
마을의 이름은 상일(上日)과 같이 잃어실이라 부르다가
일제때부터 두 마을을 나누어서 상일(웃잃어실) 하일(아래잃어실)로 부르고 있다,
★미흡한점이나 잘못된 사항이 있으면 꼬릿글로 지적해 주시면 시정하겠씀니다
♡까만고무신&43회,정경필 올림
첫댓글 감사합니다.
제가 태어나고 자란 율어면 한치(대치)에 대한 유래 잘 봤습니다.
선배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출처를 밝히고 제 개인 블로그에 올리고 싶은데 허락해 주실른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