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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루나야 미영이 도착했대. 터미널에 데리러 갔다 와.”
“택시타고 오라 그래.”
“에이! 얼른!”
엄마는 호들갑스럽게 손님 맞을 준비를 하며 나를 등 떠밀다 시피 차가 세워져있는 곳까지 밀어 보냈다. 가방까지 손에 들려주면서 조심히 잘 다녀오란 말과 함께 눈을 휘어 웃어 보이셨다. 루성이도 은근히 기다려지는 표정으로 차문을 여는 날 가만히 바라보고 서서 미소 짓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루성이는 취직을 해보려고 열심히 구인광고 사이트, 신문을 다 뒤적이며 지원을 했었지만 마땅히 연락 오는 곳이 없었다. 아무래도 군대 미필이란 사항이 회사들로부터 루성이를 채용하기에 꺼려하는 부분이 아닐까 싶었다.
뒤를 돌아보던 엄마는 루성이를 부르며 오랜만에 좋은 감정도 아니었던 지지배들 둘이 만나면 분명히 어색해할 거니까 같이 가서 데리고 오라며 조수석에 루성이를 들여 넣었다.
시동을 걸고, 후진으로 조금씩 움직여 나가고 있는 우리를 향해 입구에서 손을 흔들며 조심히 다녀오란 말을 던지고 집안으로 쏙 들어가서 또 분주해 보이시는 엄마가 룸미러로 슬쩍 보이고, 손님이 온다는 것 자체에 잔뜩 들떠 있는 루성이 말한다.
“미영이 누나 터미널에 있대?”
“어.”
“누나랑은 화해 한 거야?”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대해주라잖냐. 김여사가...”
“아... 싸우지 마.”
“내가 왜 싸우냐?! 아 . 무 . 일 . 없 . 던 . 것 . 처 . 럼 . 한다니까?!”
얄궂게 웃어보이고는 운전에 집중했다. 10분정도 달려서 도착한 버스터미널 인근에 차를 주차해두고, 루성이와 함께 차에서 내려 터미널 안으로 들어갔다. 급하게 등 떠밀려 나오느라 연락처를 전달 받지 못했던 우리 둘은 무작정 터미널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누나! 누나! 저기! 저기!”
“어? 어디?”
“저기 서 있는 사람 미영이 누나 아니야?”
“어, 맞는 거 같네.”
걸음을 빠르게 재촉해서 미영으로 추측되는 인상착의의 여자 앞에 다가 섰다. 흠칫 놀란 듯 한 발짝 물러서서 나와 루성을 한번 보더니 미간을 구기며 어색하게 웃어 보이는 미영.
“오랜만이지...? 잘 지냈어?”
“보다 시피 지내고 있었어. 따라와.”
루성은 내 눈치를 살피느라 쫄래쫄래 내 뒤를 따르면서 미영에게 손짓했다. 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주차되어 있던 곳까지 걸어왔다. 눈치 없는 이루성은 그저 오랜만에 만난 미영이 반가워 죽겠는지 무슨 말을 그렇게 조잘거리는지 모르겠다.
조수석에 루성이 타고, 뒷좌석에 미영이 몸을 들여 넣어 자리를 잡고 앉는다. 집으로 향하는 내내 루성은 고개를 뒤로 젖혀 보면서 수다스럽게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운전하다 자꾸만 몸을 반은 꺾어 돌아 앉아있는 루성 때문에 거슬린다는 듯 냉랭하게 한마디 하자 순식간에 차안엔 정막이 흘렀다.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차를 세워두고, 시동을 끄자 집안에서 문을 열어젖히면서 눈을 한껏 휘어 미소를 짓고, 미영을 반겨주는 엄마. 그래도 우리 집에 온다고 엄마가 좋아하는 주전부리들을 몇 가지 사들고 왔던 미영이 엄마에게 건넨다.
“아이구, 우리 루나 보다 낫네. 고마워 미영아.”
멋쩍은 듯 어색하게 눈을 휘어 웃어 보이는 미영. 엄마를 위해 무언 갈 생각하고 챙겨 왔다는 것에 내심 엄마가 그렇게 말하는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점심시간에 맞춰서 도착한 미영을 위해 자그마한 상다리가 부러질 법 하게 음식을 차린 엄마.
“배고프지? 어서 먹어.”
“그래, 먹어.”
지금껏 말 한번 걸지 않고 집까지 데리고 왔던 내가 미영에게 한 말이었다. 미영은 그렇게 뱉은 내 말에 여러 가지 의미를 다 헤아린 듯 표정을 편안하게 풀며 고개를 끄덕이고, 숟가락으로 밥을 한술 떠서 입으로 가져간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우린 예전처럼 왁자지껄 수다스럽게 그간 일들을 풀어 놓으며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와... 진짜 이해가 안 간다...”
“이해가 가는 사람이었으면 우리가 이렇게 나오지도 않았지.”
“잘 나왔어. 그 집에 있는 거 보다 훨씬 잘한 선택이야. 앞으로 잘 이겨 나가면 되지 뭐.”
“그러는 넌,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었어? 엄마랑은 계속 연락 했었다며.”
“어... 서울에서 지내고 있어.”
“서울? 힘들진 않고?”
열악하기 그지없는 집이다 보니 딱히 얘기를 나눌 공간이라고는 밥을 먹으면서 얘기하는 주방겸 욕실이 아니면 잠을 자는 방 한곳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먹은 것을 치우고 있던 엄마가 내 물음에 불쑥 한마디를 하신다.
“힘들지. 그 험한 세상에서 오롯이 버텨낸다는 게 쉽지 않지.”
“맞아. 그냥 음성집이 싫어서 나온 곳일 뿐. 힘들어...”
“그럼 쉬는 날 음성가기 싫음 여주로 와. 집처럼 왔다 갔다 해.”
“응, 엄마. 자주 시간 내서 올게.”
친구라는 것이 그런 것인가 싶다. 당장 그 순간에는 미치도록 화가 나고 꼴도 보기 싫다가도 막상 마주하고 있으면 금세 무슨 일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풀어질 수 있는 관계가 아닌가 싶다. 다만 이런 감정도 쉽게 풀 수 있는 사소한 일일 때만 가능한 것이겠지만 말이다.
* * * *
[미행]
운전에 서툴렀던 루나를 약점 삼아 호석은 루성의 학교 등하교 때문에 루나가 하루에 적어도 한번 이상은 루성의 학교를 찾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시간만 나면 학교 앞에서 주차를 해두고 루나와 루성을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루나가 루성을 내려주고 여주로 향하던 중 룸미러로 비추이는 모습에 섬뜩함을 느낀다.
‘뭐야? 지금 나 미행하는 거야? 이대로 가다간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 들키는 건 시간문제겠는데... 어떡하지? 어떡하지?’
운전을 하고 있는 루나의 모든 신경은 룸미러로 향해 있었다. 그리고 가던 길에서 경로를 바꿔 무작정 어딘지도 모르는 길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네비게이션도 없었던 루나는 오로지 이정표만을 믿고, 자신의 길눈을 믿고 달려보는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달렸고, 어느덧 충주 법원 사거리까지 가게 되었던 루나. 교차로 신호로 인해서 차를 멈추고 설 수밖에 없던 상황.
차가 서자마자 운전석에서 내려 다짜고짜 루나의 차로 달려와 차문을 열려는 행동을 보이는 호석에게 간담이 서늘해지기까지 하는 루나는 눈치껏 잽싸게 차에서 내리는 호석을 보고 전 좌석 차문을 잠가 버렸다. 미친 듯이 뛰어대는 심장박동을 몸 밖으로까지 느껴질 정도로 극도의 공포심이 루나를 에워싸고 있는 순간이었다.
창문 밖에서 연신 뭐라고 떠들던 호석은 신호가 바뀌어 출발하는 루나와 다른 차들을 보며 자신의 차로 달려갔고, 그 틈을 노리고 루나는 잽싸게 다른 통로로 방향을 틀어버렸다. 한참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차안에서 가슴을 쓸어내리며 심호흡을 하던 루나가 조심스럽게 다시 차를 움직이기 시작한다.
쉽사리 진정되지 않는 쿵쿵거리며 뛰어대는 가슴을 안고, 이정표를 차근차근 살피면서 어렵사리 여주까지 오게 된다. 오늘 있었던 일과 조심해서 버스를 타고, 장호원 버스터미널까지만 오라는 내용을 적어 루성에게 문자를 보내는 루나.
“나 도저히 오늘은 다시 루성이 태우러 못 갈 거 같아 엄마.”
“그래, 얼마나 놀랬을까... 루성이 장호원까지 버스타고 온다고 하니까 연락 오면 엄마랑 같이 데리러 가자.”
“응...”
그 후로도 두어차례 미행을 당했다. 처음 미행을 당했을 때는 당혹스럽고, 호석의 존재자체를 두려워하던 루나는 조금씩 요령이 생기고, 여주까지 따라붙은 호석에게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구석구석 좁은 길까지 잘 아는 건 여주에서는 루나가 더 유리했기 때문에 호석을 따돌리기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끝끝내 호석은 루나를 열심히 미행해보려 애썼지만 그들이 살고 있는 집이 어딘지는 알아낼수가 없었다.
* * * *
[협박]
호석의 집에서 지낼 때 보다 훨씬 많이 밝아진 루성은 학급 아이들과도 부쩍 많이 친해졌고, 친화력도 좋아서 아이들이 잘 따르는 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었다.
“이루성! 담임이 상담실로 오래!!”
“상담실?”
“어!!”
“왜?”
“몰라?!”
영문도 모른 채 루성은 친구의 말만 듣고 상담실로 향했다. 상담실 문을 드르륵 하고 열어젖히는 순간 루성은 가슴이 찢어질 듯 숨이 가빠오는 느낌을 받는다. 문을 열고 보이는 상대는 다름 아닌 호석과 호석의 큰 누나였다. 엉겁결에 큰 고모를 보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담임의 손길에 따라 그들을 마주하고 루성이 앉는다.
“루성아, 아무래도 네 얘기를 들어봐야 될 것 같아서 체면불구하고 학교에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
“엄마가 남자랑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갔다는데, 너희들은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니니?”
“뭐요? 누가 누구랑 바람이 나요?”
“루성아...!”
“큰고모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씀하지 마세요. 바람이 난건 아빠고, 엄마는 아빠한테 맞아서 병원에 입원까지 했었고, 그 싸운 걸로 경찰까지 왔을 정도였어요. 그리고 우리가 한두 살 먹은 어린애들도 아니고, 생각을 할 줄 알고 스스로 판단할 줄 아는 나이가 됐는데 부모가 하는 말에 휩쓸려서 판단도 못하고 따라가지는 않죠. 자식과 아내가 남편을 두고 집을 나왔을 땐 어떤 일이 있었을지 한번쯤은 생각을 해 보셨어야죠. 이렇게 동생말만 듣고 무턱대고 제가 다니는 학교를 찾아오실 일이 아니라요.”
호석은 큰누나에게 자신이 피해자인 냥, 루나, 루성이 피도 눈물도 없는 배응망덕한 자식인 냥, 마누라는 외도를 해서 자신을 버린 것처럼 포장해서 말을 했던 것이다. 루성의 말을 듣고 있는 호석의 큰누나는 무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그리고 자신이 들이 닥치면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앉아서 ‘네, 네’ 대답만 할줄 알았던 루성이 따박따박 대꾸를 하자 그 상담실 안에서 호석은 또 무식함을 드러내고 만다.
“니들이랑 살면서 내가 벌어서 투자한 돈 한 사람당 2억씩 갖고 와.”
“아버님, 부모가 자식을 부양하고 키우면서 들어가는 비용은 당연한 도리와 이치가 아닌가요? 어떻게 이렇게 어린 루성이한테 그런 말씀을 하실 수가 있어요. 하물며 이 어린 루성이가 그렇게 큰돈이 어디서 나나요. 루성이가 학교에서 늘 밝게 학우들이랑 잘 어울려 지내서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네요 정말.”
“당신이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다고 그런 돈을 내 놓으라고 하는 거 에요 지금? 공부 같은 거 다 필요 없고, 학교 다 때려치우고 배타서 돈이나 벌어 오라면서요. 그런 사람이 아버지라고 할 자격이 있어요?! 나한테 아버지란 사람은 이제 없다고 생각하고 살 거니까 찾아오지 마세요.”
“이 새끼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루성에게 달려들려는 호석을 큰누나가 막아서며 당당하게 말은 다 뱉어냈지만 내심 겁에 질려있던 루성을 향해 큰누나가 말한다.
“어서 수업 들어가 봐라 루성아. 그리고 집에 가면 엄마한테 고모한테 연락 꼭 하라고 해. 알았지? 미안하다...”
“그래, 루성아 교실에 가봐.”
그제야 루성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상담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온다. 상담실 문을 닫고 벽에 기대 잠시 숨을 고르며 서 있는 루성. 상담실 밖으로 나머지 세 사람의 말들이 새어나오고 있었고, 루성은 언젠간 겪어야할 하나의 관문을 통과해낸 듯한 느낌으로 터덜터덜 교실로 걸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