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만나볼 이웃은 장평면 중추리가 고향인 윤병익(67) 공주농협 조합장이다. 공주농협에서만 23년 근무 후 2001년 봉황지소장으로 명예퇴임 한 그는 1년 만인 2002년 2월 공주농협 조합장 당선의 영광을 안았으며, 연이어 재선 그리고 3선 조합장이 되는 등 조합원들로부터 신뢰를 얻고 있는 사람이다. 낙천적인 성격이지만 일에 있어서만은 확실한 일처리와 투명 경영으로 공주농협 발전과 농민의 권익증진에 앞장서 조합원들로부터 두터운 신망을 얻고 있는 그를 소개한다.
시작하면 포기 안 한다 장평면 중추리가 고향인 윤 조합장은 함경도 문천에서 태어났다. 화약 면허를 소지하고 있었던 부친 윤상근(작고) 씨가 풍력광업소 사장을 역임할 때였으며, 이후 해방이 되면서 부친과 가족들을 따라 고향으로 왔다. 이후에도 그의 부친은 크고 작은 광산의 화약 주임을 맡았고, 그래서 가족들은 발령 때마다 이사를 다녔던 것 같다고 윤 조합장은 전한다. “제가 공주로 온 것은 1959년 장평초 졸업 후였고, 공주에서 봉황중·사대부고를 졸업하고 경희대 체육학과에 진학해 1년 수료 후 1965년 월남전에 참전했었어요. 건설지원단 소속이었습니다. 월남에는 돈을 벌기 위해 간 거였어요. 어린 시절에는 비교적 부유했는데 대학 입학 후 힘들어져서 참전을 결정했죠. 그곳에서 번 돈으로 당시 집에 빚이 있었는데 해결할 수 있었죠. 그리고 귀국해서는 복학 하지 않고 회사에 입사 했고요.” 그는 어릴 때부터 운동을 좋아했다. 사대부고 졸업 후 대학 진학을 체육학과로 한 이유도 운동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던 것 같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지자 그는 아직 어렸지만 월남전에 참전해 돈을 벌었고 가정에 큰 힘을 실어줄 수 있었다. “무엇이든 한번 시작하면 포기하지 않는 성격이에요. 월남에서도 그랬죠. 억척스럽게 지냈습니다. 그리고 귀국 후는 복학하지 않고 진해의 한화계열사였던 한국화성에 입사해 일하다 1972년 공주로 다시 왔고 이후 공주농협에 입사했죠.”
명예퇴직 1호…조합장 당선 농협 입사 후 그는 여러 부서에서 다양한 업무를 맡아보며 자신이 가진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 농협 발전과 농민 복지증진에 노력해 왔다. 특히 경매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던 그는 공판장장으로 오랫동안 근무하면서 많은 농민들을 만났고, 더욱이 한번이라도 인사를 나눈 사람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 남다른 기억력으로 농민들에게 친근함을 주기도 했다. “이곳 공판장의 장점은 소량의 농산물도 순서대로 경매를 해 주는 것이에요. 그러니 농민들께서 많이 오시고 따라서 만날 기회가 많았죠. 또 제가 성격이 굉장히 낙천적이라 사람 만나는 것도 좋아하고요. 누군가 나를 기억해 주면 기분이 좋잖아요. 농민들도 그러셨던 것 같아요. 좋아하셨어요. 이렇게 23년간 공주농협에서 근무했습니다.” 23년간 공주농협에서 근무해 온 그는 항상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는 호평을 들었다. 그 결과 공제세일즈왕․농민봉사상 등 다수, 특히 농협과 조합원들을 위해 헌신한 공로로 마을 주민 일동이 수여하는 감사패를 여덟 번이나 받는 등 두터운 신망을 얻어왔다. 그러다 2001년 공주농협 봉황지점장 근무를 마지막으로 명예퇴직을 했다. “명예퇴직 이야기가 처음 나올 때였고, 이야기가 나온 지 3일 만에 제가 퇴직 신청을 했죠. 57세 때였고 농협 명예퇴직 1호로 그만뒀어요. 퇴임하자 많은 분들이 조합장 출마 권유를 하시더군요. 하지만 당장은 그러고 싶지 않아서 1년 여 쉬고 2002년 출마 했습니다.” 2002년 공주농협 조합장 선거에는 윤 조합장과 당시 조합장을 포함 모두 3명의 후보가 접전을 펼쳤다. 그리고 윤 조합장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다. 농협맨으로 23년, 농협과 조합원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온 결과였다.
투명운영으로 3선 성공 조합장에 당선되면서 그는 사업계획을 세우는 일에서부터 각 분과위원회에서 토의를 거쳐 최종 사업계획서를 만들고 대의원 총회에 붙여 집행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을 투명하게 알리며 추진 해 나갔다. ‘투명운영’을 철칙으로 내 세운 것이다. 투명운영을 바탕으로 그는 초선 조합장이 된 후 마트의 획기적 신장, 농민단체별 연료 공급, 콩 탈곡기 구입 지원, 농지원부 대로 소득보전직불금 지급, 조합원 건강검진 실시 등 환원사업을 통해 농협발전 및 조합원의 실익에 보탬을 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 2006년 재선에 성공했다. 조합원 총 4100명 중 2126명이 투표 했고 68.4퍼센트인 1457표를 얻은 것이다. “선거 운동을 따로 하지 않고 그저 임기 내에 열심히 일하고 조합원들의 선택에 맡겼어요. 재선 때도, 이번 3선 도전 때에도 그랬습니다. 3선 선거에서는 투표 수 2930표 중 1849표를 얻어 당선 됐어요. 최선을 다하려는 노력을 봐 주신 것 같아요. 특히 고향분들과 사대부고 동문들이 격려와 지지를 많이 보내주셨어요. 너무 감사하죠.” 그가 조합장이 된 후 공주농협의 출자금은 26억에서 150억여 원으로 늘었다. 출자금이 늘어나면 그 만큼 배당금도 늘어 농협의 부담이 클 수 있지만 조합을 믿고 참여해 주는 조합원들의 마음이라며 그는 감사하다고 말한다.
촌사람은 일 못하나? 월남에 가서도 물건을 팔아 돈을 벌 만큼 강한 생활력을 가진 그는 모두가 알아주는 낙천적인 성격의 소유자이다. 또 한번 인사를 나눈 사람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 기억력을 가졌으며, 일단 얼굴을 익히면 ‘형님’ ‘동생’ 등으로 칭하는 친화력을 가지고 있다. “제가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고 또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즐겁게 살려고 합니다. 또 억척스럽기도 해서 사람들이 어디다 내놔도 먹고 살겠구나 해요. 청양 사람들이 뭐든지 열심히 하는 것 같아요. 공주 농협만 해도 청양 출신들이 꽤 있는데 그렇거든요.” 그는 이야기 하나를 전했다. 바로 그가 선거에 출마하기만 하면 경쟁자 쪽에서 ‘청양 촌사람이 도시 조합장 선거에 나오려 한다’며 공격을 하는 것이란다. 그럴 때면 그는 ‘청양 촌놈이라서 일 못 하냐’며 마음을 다지게 되고 더 열심히 임하게 됐었단다. “고향만 공주가 아닐 뿐이지 상대 후보보다 더 오랫동안 공주에 살고 있었는데도 그런 말로 공격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청양 촌놈이라서 못할 일은 없다고 당당히 이야기했죠.” 11대, 12대, 그리고 13대 조합장으로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 그는 현재 공주 12개 조합장 중 최고령이다. 하지만 직무수행에 있어서만은 가장 활동적이고 업무에도 꼼꼼함을 보여주고 있다. ‘청양 촌사람이어서 못할 일은 없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조합원 경조사 모두 챙긴다 현재 공주농협 조합원은 4000여명, 그는 조합원 모두의 경조사를 챙기고 있단다. 그 때문일까 하루 최고 26개의 경조사 봉투를 쓴 적도 있다고 전한다. 또 21개의 친목모임에 가입돼 있어 주머니에 돈이 남아있을 날이 없는 것은 물론 가족들과 함께 할 시간도 거의 없다. “아내 고향이 공주고 다른 가족들은 모두 외국에서 생활해요. 학창시절 만나 결혼해 아내는 저와 함께 공주에 둥지를 틀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제가 바쁘다는 핑계로 살갑게 못했어요. 요즘 들어서야 겨우 부부 동반 모임에 함께 갈 정도에요. 미안하고 앞으로 잘해야겠죠.” 윤 조합장은 정경원(62)씨와의 사이에 1남 1녀를 두었다. 그가 농협맨인 것처럼 농협에 근무하다 출가 후 그만 둔 딸, 아들과 사위는 공주 시내의 농협에 근무하고 있다. 공주농협 조합장인 윤병익씨는 143명 직원의 수장으로서 또 현재 한국자유총연맹 공주시지회장, 공주시 조합운영협의회의장, 지역농협 인사업무협의회 의장, 공주시 재향군인회 l이사 등 다방면으로 활동하고 있다. 특히 각 마을 주민들로부터 여덟 개의 감사패를 받을 정도로 그는 조합원들에게 신뢰를 얻고 있다. |
첫댓글 참으로 훌륭한 조합장님의 기사을 접하게 되어 영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