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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抗日) 의병(義兵) 활동과 동로(東魯) |
하정학(河正學) |
*** 하정학 프로필 *** 1930년 동로면 간송1리 출신 동로초등학교 12회 졸업, 한학(漢學) 수학 육군보병학교 28기 졸업 육군 대위 전역(1967년) 동로면 예비군 중대장 역임(8년간) 농업협동조합 동로단위조합장 역임(6년간) 문경시 향토사연구위원(현재) |
하 정 학(문경시 향토사연구위원)
1. 19세기 말 국내 정세와 의병 활동의 태동
1876년 일제(日帝)는 병자수호조약(丙子修護條約)이라는 불평등 조약을 체결한 뒤 우리나라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면서 경제적, 군사적으로 침략을 시작하였다. 우리 국민은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분노를 나타내고 항거하였으나 일제의 야욕은 더욱 가속화되어 갔다. 당시 우리나라 안의 사회상을 살펴보면 유교국가의 고질적 병폐인 당쟁이 극심하였으며, 순조(純祖) 이후 세도정치(勢道政治)로 인한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갈등이 집약적으로 표출되어 1894년 갑오년에 동학교도(東學敎徒)가 주축이 된 농민 항거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갑오개혁운동(甲午改革運動)은 사회 발전 과정에서 불가피하였던 지배층에 대한 일반 민중의 항거로 전국에서 일어나게 되니 당시의 봉건정부는 자력으로 진압하지 못하고 외세를 불러들여 청ㆍ일(淸ㆍ日) 양국군의 우리나라 진입의 구실을 주게 되었다. 외세의 개입으로 농민군은 진압되었지만 그 잔존 세력은 전국 도처에 칩거(蟄居)하게 되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1895년 10월 8일 일본군에 의해 국모 민비(閔妃)가 살해되자(乙未倭變) 반일의 기치를 든 의병(義兵)들이 봉기하게 되었다. 의병의 선두에 선 사람들은 주로 갑오농민항쟁에 가담했던 사람들과 향촌에 기반을 가지고 있던 애국적 유생층(儒生層)이 중추를 이루었다.
초기 의병 활동은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의 학통을 이은 유생들이 주동이 되었으며,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맹렬한 상소운동으로 시작되었다.
일본에 의한 제국주의적 침략이 격화되자 이항로의 문인(門人)인 의암 유인석(毅庵 柳麟錫)이 양반 유생을 중심으로 충청도 제천을 기점으로 눈부신 활약을 시작하였다. 유인석의 창의(倡義; 국란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킴)에 우리 고장에서 운강 이강년(雲崗 李康秊)이 문경현(聞慶縣)에서 의기(義旗)를 높이 들고 가산을 비용으로 수백 명의 의병을 소집하여 농암 장터에 주둔하면서 이 지역 나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의병 활동의 계기가 되었다.
2. 격문(檄文)을 통한 이강년(李康秊) 부대 조직
의병 운동이 시작된 직접적인 원인은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1895년 10월 명성황후 살해사건과 그해 11월에 있었던 단발령 때문이었다. 이 두 사건은 전부터 쌓여왔던 배일 감정에 불을 붙여 유생들의 의병 궐기를 부채질하였고, 갑오농민항쟁 실패 후 흩어져 곳곳에 칩거하던 동학군의 잔여 세력이 여기에 호응하였다. 의병장은 대부분 위정척사(衛正斥邪; 주자학의 정통성을 고수하여 이외의 사상과 학문을 이단시하여 배척함)를 주장하는 유생들이었으나 대열의 기본 세력은 천민, 산포수(山砲手), 농민들이었다.
1895년(고종 32년 을미년) 12월에 운강 이강년이 거의(擧義)하면서 친일 수령인 안동관찰사 김석중(金奭中)과 순검(巡檢) 이호윤(李浩允), 김인택(金仁澤) 등을 잡아 문경 농암 장터에서 목을 베어 효수(梟首)하면서 전국 각도 열읍(列邑; 여러 고을)에 다음과 같은 격문을 보냈다.
“아아! 슬프구나, 어찌 차마 다 말하랴. 역적 놈들이 나라 일을 제 마음대로 하여 비밀히 왕위를 내놓게 하는 계획을 꾸몄고, 흉한 칼날이 임금을 협박하여 갖은 모욕을 주려고 했다. 조약을 강제로 맺어 우리 국권을 빼앗고 사문을 반포하여 우리 인문에 자갈을 물리며 시랑(豺狼; 승냥이와 늑대)이 밥을 다투니 백만의 생령(生靈)은 물이 새는 배를 탄듯하고, 밑 없는 항아리 같은 욕심을 채우기 어려우매 8도의 산천은 형세가 가을철 나뭇잎 떨어지기보다 쉽게 되었도다. 사당의 신주(神主)가 크게 놀라고 궁궐 안이 처량하도다. 산림천택(山林川澤)을 제 것처럼 여기고 재정과 백성을 제 물건 보듯 하며 머리를 깎고 복색(服色)을 변하게 하니 사람과 짐승을 구별할 수 없고 국모를 시해하고 임금을 욕뵈니 원수를 어찌 남겨 둘소냐?
하늘이 노하시고 사람마다 죽이려 하는지라. 한번 죽을 결심을 하고 성토하니 누가 이 나라에 사람이 없다 하랴. 한밤중에 울리는 대포소리, 군인들의 순절(殉節)이 더욱 기특하구나. 진정 제 몸을 돌이켜 보고 반성해 보라. 아마도 입장을 바꾸면 다 그러리라 할 것이다. 마침내 갈수록 포악하여 무엄하게도 하늘을 쏘려 대드니 나중에는 반드시 패하여 땅에 떨어지고 말리라.
아아! 노예의 근성은 한(漢)나라 공향(公鄕)에게도 있었지만 간악한 심장은 어찌 모두 여진의 침군만 같으냐? 앞잡이가 많이 생기고 연맥이 멀리 뻗혀 제 주인을 적에게 주어 사나운 범의 창귀(倀鬼; 범을 인도하여 먹을 것을 찾아주는 귀신)노릇을 하고 왜(倭)에 결탁하여 영화를 도모하는 것은 마치 교활한 토끼가 굴을 만드는 것과 같도다. -중략-
염파(廉頗)와 이목(李牧)(중국 전국시대의 유명한 趙나라 장군)이 초야에서 일어나니 찬바람이 엄습하고, 한세충(韓世忠)과 악비(岳飛)(중국 宋나라의 충신)가 유림(儒林)에서 나오니 칼 빛이 하늘을 솟구친다. 오랑캐의 머리로 술잔을 만드니 원수 갚을 말이 멀지 않았고, 동탁(董卓)의 배꼽을 불태우니 광복하기 무엇이 어려우랴. 서울 안에 부노(父老)들은 예전의 관원을 다시 보게 되고, 개선가를 부르는 군사들은 왕실의 기업을 중흥하였도다.
무릇 모집에 응한 우리 충의의 군사들은 누구나 나라에 보답할 강개한 마음이 없겠는가! 고래와 새우를 합하여 함께 수용하니 토책(討策)이 빠짐없고, 의리를 위하여 죽음을 택했으니 사사(私事) 생각 모두 버렸도다. 산천초목도 적개심을 머금은 듯한데 천지신명인들 어찌 순리를 도우지 않으리요. 이 어찌 일시의 전공만이랴. 실로 만고의 중화 명맥을 붙든 것이다. 제각기 노력하여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모두 상벌(賞罰)은 산하를 두고 다짐한다.
이렇게 충성을 다하여 포고하는데도 불구하고 만일 영(令)을 어기고 도망하거나 태만하는 자가 있으면 이것은 곧 적당으로 볼 수밖에 없으니 당연코 먼저 군사를 옮겨 토벌할 것이다. 이미 선의(善意) 어두우면 뉘우친들 소용 있으랴. 말은 여기에 그치는 것이니 잘 생각하기 바란다.”
이와 같은 격문을 받고 모여든 의병이 수백 명의 대부대가 되어 그 진용(陣容)을 편성하고 대오를 정제(整除)하니 최고 지휘관인 총대장에 이강년(李康秊;1858년 문경 도태에서 출생, 무과에 올라 宣傳官을 지냄)이 올랐다.
3. 동로 출신 의병들의 활약상
동로 지역은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 초까지 충청도와 경상도의 경계로서의 성격뿐만 아니라 조령로(鳥領路)가 개통되기(근세조선 태종 13년) 전까지는 중요 교통의 요충으로 매우 요지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전략, 군사면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조선 말기 각지에서 전개되었던 동학군(東學軍, 農民軍) 항쟁으로부터 의병 활동(義兵 活動), 광복 이후 6.25전쟁에 이르기까지 숱한 전화(戰禍)를 감당한 것은 동로면이 지리적 요충지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하는 동로면 출신으로 이강년(李康秊) 의진(義陣)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전력투구한 분들의 면면들이다.
이동하(李東下, 호적명 淨來장래) : 명전 출신, 운강 이강년 의진(義陣)에서 참모장(參謀 長) 겸 군자장(軍資長)으로 활약. 항일 비밀 결사인 민단조합(民團組合) 설립, 군자 금 조달 임무 수행. 모사(募士)
장복삼(張復三; 召集, 字 寺文) : 노은 평리(坪里; 지금의 평지, 사평)출신, 운강 의진에서 의병(義兵) 충원에 막대한 공을 세움.
신병선(申秉善; 字 掎) : 생달 출신, 적성리 전투에서 전사. 순종(純宗) 원년(丁未年) 1907년 5월 15일
김상욱(金尙旭; 德松) : 적성리 출신, 경주 김씨. 벼슬이 승지(承旨). 운강 의진 좌종사부 (坐從事部)에서 군자금 모금에 많은 공을 세웠음.
주시혁(周時赫) : 생달리 출신. 좌종사부(坐從事部)에서 의병 활동에 필요한 군자금 모금 에 많은 공을 세웠음.
한용국(韓用國; 字 周彦) : 노은 평리(坪里) 출신, 청주 한씨. 운강 의진 좌종사부(坐從事 部)에서 모금에 종사함.
이 밖에도 요직이 아닌 무명인으로서 오직 구국 일염으로 몸을 불태운 동로 출신 인사들이 많이 있다.
4. 동로 적성리(赤城里) 전투 상보
운강(雲崗) 선생 창의록(倡義錄)에 실려 있는 적성리에서의 전투 상보를 소개한다.
1896년(고종 33년) 2월 13일
이강년 대장이 동원(東院)으로 돌아왔는데 임세연(林世淵)이 10여 명의 적을 거느리고 몰래 기습해 왔다. 그만 황장(생달)의 큰나무 아래로 퇴군하였다. 원주 포수 이석길(李錫吉)이 부상하여 죽으므로 덕주의 백성을 시켜서 매장하였다.(李康秊 大將 還東院 林世淵帶十餘賊暗襲 遂退軍黃腸大樹下 原砲 李錫吉 被殤死 令 德周街民 瘞之)
1896년(고종 33년) 2월 13일
예천 부장(副長) 장문근(張文根)에게 글을 보냈다. 문근은 군사 500명을 거느리고 적성(벌재)에 있었는데 이강년이 급한 일이 있어 구원을 청하는 글을 보냈다.(書 醴泉 副長 張文根 汶根 率 五百軍 駐赤城 時公有急故請援書之)
1907년(순종 원년) 7월 15일
선봉장을 시켜서 적성(東魯) 집강(執綱; 면장, 이장) 김동태(金東泰)를 다스리게 하였다. 적성 평촌(坪村; 지금의 평지, 사평)에 이르러 그 부근 포수가 몇 명이나 되느냐 물었는데 김동태가 거절하며 대답하지 않으므로 그 죄를 다스린즉 동태를 소모장(召募將)으로 임명하여 밤까지 포수 5명을 모집해서 진중으로 나오게 하고, 김상집(金商執)을 파수장(把守將)으로 삼고, 절의 중을 불러 속히 화승총(火砲) 10정과 화약, 자기황(自起黃) 등 물품을 바치게 하였다.(令先鋒嚴治執綱金東泰 至赤城坪村問砲丁兵器多少 金拒令不受 故治之 卽差東泰召募將夜募砲丁五人 赴陣 以金商執爲把守將 招寺僧督納火砲十柄火藥自起黃等物)
1907년(순종 원년) 8월 8일
정묘일(丁卯日) 8월 8일에 후군장(後軍將) 신태원(申泰元)이 적성(赤城) 전투에서 싸우다가 패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행군하여 월감(月鑑; 예천군 상리면)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상백(上白)에 이르러 후군의 패한 소식을 들었다. 이만원(李萬源)에게 명하여 천보락(喘普洛) 이하 7인을 거느리고 적성(赤城)으로 가서 적을 대항하여 싸우다가 죽은 의병 36명의 시체를 거두어 장사지내게 했다.(丁卯 聞後軍將申泰元戰敗於赤城 行至月鑑午饋到上白 聞後軍敗報 俟李萬源率千普洛以下七人往赤城 收死賊子三十六人葬之)
일본측의 기록인 조선폭도토벌지(朝鮮暴徒討伐誌; 1914년 3월 발간)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태봉(台封; 상주시 함창읍)에 주둔하고 있던 마쓰노(松野)중대는 삼해리(三害里)를 경유 대승사 부근을 정찰 중 적성(赤城) 일대에 폭도가 집결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9월 14일 적성시장 동서남방(東西南方)을 삼면에서 포위, 돌격하자 폭도는 당황하여 시장 동북방 고지로 퇴각하였다. 교전 중 약간의 저항은 있었으나 우리의 맹렬한 사격에 의하여 사상자(死傷者) 15명을 유기하고 드디어 영천(榮川) 방면으로 패주하였다. 이 폭도는 이강년(李康秊)이 인솔하는 것으로 반란병(무장 해제된 우리나라 군인)이 다수 섞여 있었다.”
5. 마무리하면서
운강선생 창의록(雲康先生 倡義錄)의 기록과 일본측의 기록이 날짜(음력과 양력의 차이인듯)와 전투 상황 및 통계 등에 차이는 있으나 아무튼 적성리 전투는 의병 활동사에서 하나의 큰 족적이며, 36인의 전사자가 나올 정도라면 소규모 전투 치고는 상당히 격렬했던 전투 상황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패인이 무엇이었으며 당시 이만원, 천보락 이하 7인이 와서 뒷마무리를 했다 하나 전사자가 누구인지 그 장지가 어디인지조차 몰라 안타까울 뿐이다.
첫댓글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