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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張德, 영어: Deok Chang 또는 Deok Jang, 1961년 4월 21일 ~ 1990년 2월 4일)은 대한민국의 여성 싱어송라이터다. 그녀는 싱어송라이터로서 진미령 · 이은하 · 양하영 · 임병수 · 김범룡 · 국보자매 등 많은 다른 가수들의 음반에 참여하며 작사가 · 작곡가로 활동하였고, 음반 프로듀서로도 활동을 하였다. 그녀는 친오빠 장현과 함께 현이와 덕이를 결성, 만 14세의 최연소 싱어송라이터로 가요계에 데뷔하여 화제를 모은 바 있으며, 만 15세(고등학교 1학년) 때 서울국제가요제에서 최연소 작사 · 작곡가로 출전하여 입상하는 등 천재소녀라는 별칭을 얻기도 하였다. 또한 그녀는 예쁘장한 외모로 배우로도 활동, 10여 편의 영화에 주연 또는 조연으로 출연하며 하이틴 스타로도 거듭났다. 그리고 솔로로 독립해 성인이 된 후에도 더욱 많은 연예활동을 하여 스타의 자리를 지켰다.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 등록된 장덕 작사 · 작곡의 작품 개수는 총 129개(2015년 6월 기준: 신탁자코드 W0138300)이며, 생전 남긴 창작작품은 록 · 포크 · 리듬 앤 블루스(R&B) · 컨트리 · 댄스 · 펑키 · 트로트 · 발라드 · 융합(복합) 등 다양한 장르의 300여개 정도이다.[1] 장덕은~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첼리스트였던 아버지 장규상씨와 서양화가인 어머니 이숙희씨 사이에 1남 1녀 중 막내로 충무로4가에서 1962년 4월 21일 태어난다
연대 영문과를 나온 장규상씨와 이대 서양학과를 나온 이숙희씨는 명동의 돌체다방에서 처음 만나 장규상씨의 인자한 성품에 반해 결혼했다고 한다 클래식 음악광인 화가인 어머니 이숙희씨 덕분에 어린시절 오빠 장현은 바이올린을 덕이는 피아노를 배우며 자란다
유달리 정이 많아 몇달씩 고아원과 양로원에서 무료공연을 하거나 다른사람의 보증을 서서 전재산인 집이 차압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러던중 장덕이 흥인초등학교 2학년이 되던해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종교적으로 그리고 성격적 불화로 인하여 이혼하게 된다 이후 장덕은 고모집에 장현은 아버지의 친구집에 남겨 놓은채 아버지는 첼로 하나만을 메고 지방공연을 떠나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1970년 장덕은 어머니를 만나러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2달간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이때 어머니가 장덕의 병간호를 하게 되는데 비록 다쳐서 움직일수는 없었지만 어머니와 오랜 시간을 함께 할수있어 너무나 행복했었다고 한다 1971년 흥인초등학교 4학년때 <뿐철학>이라는 동양 사상에 심취했던 아버지를 따라 도봉산의 사찰비슷한 청기와집에서 1년간 살게되는데 그곳은 외부와 통제된 곳이라 두남매는 학교도 다니지 못한채 1년을 살게 된다 이때 장덕은 5살 위인 오빠 장현에게 처음으로 기타를 배우게 된다
1972년 도봉산 청기와집에서 북한산 기슭의 작은집을 얻어서 이사 나오게 된다 하지만 오빠는 남의집 가정교사로 떠나게 되고 아버지는 매일 밤 술을 마시고 밤늦게 돌아와 빈집에서 홀로남겨진 고독과 싸우며 외롭게 생활했다고 한다 남다르게 감수성이 예민하고 외로움을 많이 탔던 장덕은 새엄마가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음독자살을 기도하기도 한다 1973년 <누가 누가 잘하나>등 동요경연대회에 나가 1등을 수상한 그녀는 이때부터 오빠가 주고간 기타로 어설프게나마 작곡을 시작하게 되었고 첼로,피아노 연주뿐만 아니라 그림과 글짓기에도 재능을 가진 소녀였다고 한다 1974년 가정형편 때문에 초등학교를 3번이나 옮기다 서울사대부중에 입학하게 된다 사춘기가 되면서 더욱 우울한 성격으로 변한 장덕은 "나는 왜 남들처럼 행복하게 살수 없는가?"하는 생각에 우울해 하다가 가을에 메모도 남기지 않고 무작정 친구집인 대구로 내려가 10일간 보내게 된다 10일만에 집으로 돌아온 장덕은 이내 수면제 10알을 먹고 음독 자살을 기도한다 미국의 남매듀엣 "카펜터즈"처럼 오빠와 함께 남매 듀엣을 결성시켜 준다
1975년 4월 13살이던 장덕과 18살인 장현은 <드래곤 랫츠>란 예명으로 미8군 무대에서 장덕이 작곡한 "To be a child again"이란 노래로 데뷔한다 5월 TBC TV "오라오라"에 출연해 창작곡 "꼬마 인형"을 부르며 장덕 장현 남매는 최연소 남매 듀엣으로 일반 무대에 데뷔하게 된다 이후 장덕이 작사,작곡한 "일기장" "순진한 아이"등을 부르게 되는데 이 모든곡들이 놀랍게도 장덕이 13살때 작사,작곡한 노래들로 당시 장덕은 데뷔 초창기부터 천재 음악소녀로 평가 받게 된다 1976년 4월 자작곡인 "친구야 친구야"등 3곡이 수록된 데뷔음반을 발표한다
1977년 3월 안양예고에 입학한다 5월 진미령에게 "소녀와 가로등"을 주어 제1회 <MBC 서울국제가요제>에 출전한다.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진풍경을 연출하며 많은 사랑을 받게 된다 (참고로 이대회에서 77년 방송가요대상과 mbc가수왕을 차지한 신데렐라 혜은이가 "당신만을 사랑해"를 불러 최우수 인기상을 수상하고 깡총깡총 뛰는 장면은 3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깊은 감명으로 남아있게 만든다) 1978년 7월 제2회 <MBC 서울국제가요제>에서 오빠인 장현이 부른 "더욱 큰 사랑"을 작곡하여 출전해 장덕은 2년연속 <서울국제가요제>에서 입선하게 된다 (참고로 이대회에서 박경애의 "곡예사의 첫사랑"이 최우수 작곡상을 윤복희가 최우수 가창상을 송창식이"토암산"으로 가창상을 수상하고 최연소 출전자인 정재은이 "무지개 피는곳에"로 특별상을 수상하게 된다) 1979년 6월 제3회 <MBC 서울국제가요제>에서 장덕이 작곡하고 박경희가 부른 "사랑이었네"가 가야금상을 수상하며 작곡가로 3년연속 입선하게 된다 (참고로 이대회에서 윤복희가 "여러분"으로 대상을 수상하게 된다) 10월 장현이 결혼하고 오빠집에 함께 살던 장덕은 월세방을 구해 혼자 살게된다 이때 장덕은 고독을 이기지 못해 동맥을 끊고 또다시 자살을 기도한다 78년 미국으로 이민온 친어머니가 이소식을 듣고 딸인 장덕을 간곡히 불러 장덕은 친어머니가 살고 있는 미국으로 들어가게 된다
1980년 델몬트 칼리지 음악과에 입학하여 한학기를 마친뒤 테니시 주립대학 실용음악과로 옮겨 2년간 작곡 공부를 하게 된다 이때 장덕은 내쉬빌 작곡가협회에 가입하고 한인 기독교 방송에서 1년간 MC로도 활동하게 된다 1981년 10월 미국에 있는동안 자신을 아껴준 이모씨와 내쉬빌에서 결혼하여 남편과 가족보컬그룹인 <리 패밀리>를 결성하여 한인회의 각종 행사에 참여한다 1983년 10월 이혼을 하게된 장덕은 아버지,오빠,친구에 대한 그리움등으로 고국에 대한 향수병에 걸려서 어머니에게 말 한마디도 하지 않은채 메모 한장만을 남기고 한국으로 귀국해 한남동에서 자취생활을 시작한다 1983년 11월 서라벌레코드와 3년간 1000만원에 전속계약을 맺은 장덕은 2집앨범에서 "날 찾지 말아요" "안녕히 계세요" "당신은 지금"등을 발표한다 특히 "날 찾지 말아요"는 발표한지 3달만에 가요순위에서 5위까지 오르며 맑고 어려보이는 창법에서 성숙한 노래를 부르며 순조로운 재기를 이룬다
1984년 10월 이미례감독 김진아,남궁원 주연의 영화 <수렁에서 건진 내딸>의 주제가를 작곡하여 부른다 11월 3집앨범에서 "사랑하지 않을래" "사랑의 불길" "사슴여인"등을 발표한다 1985년 4월 83년 귀국후 솔로로 활동하던 장덕은 4년간의 공백을 극복 못하고 인기도 주춤해지자 장덕은 이무렵 또 다시 밤거리를 배회하게 된다 이런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울산에 살던 오빠 장현은 서울로 상경하여 78년 각자 솔로로 전향했던 장덕과 장현남매는 7년만에 재결합하게 된다 6월 재결성한 현이와 덕이는 "나너 좋아해 너나 좋아해" "이젠 안녕"을 발표한다
6월 4집앨범에서 "님 떠난후" "잠못드는 밤" "사랑해줘요"등을 발표한다 특히 "님 떠난후"는 KBS <가요톱10>에서 5주연속 1위를 차지하게 된다 그해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모습처럼"를 작곡하여 동료가수인 이은하에게 주어 빅히트를 치며 장덕은 다시한번 작곡가로도 인정받게 된다
1988년 9월 4집앨범에서 "얘얘"와 김범룡 작곡의 "서울의 밤거리"등을 발표한다 1989년 2월 당시 프로덕션인 코아기획을 설립하고 "훈이와 슈퍼스타" "박혜성"과 동생인 "장덕"의 매니저 일을 보고있던 오빠인 장현이 갑자기 혀가 붓고 호흡기 장애가 오자 국립의료원에 찾아 갔다가 설암3기 판정을 받게 된다
6월 6집앨범에서 "예정된 시간을 위해" "네가 나에게 어떻게 이럴수 있니"를 발표 6집앨범 발표후 반응이 좋지 못했고 오빠 장현이 설암으로 쓰러지게 되자 장덕은 오빠 병간호를 위해 음악활동을 중단하게 된다 이후 장덕은 수면제 없이는 잠을 이루지 못하며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게 된다 1990년 1월 21일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에 출연하는데 이것이 장덕이 대중앞에 선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다 1990년 2월4일 오전3시 마포구 염리동 진주아파트에서 장덕은 수면제와 기관지 확장제등 세가지 약을 일시에 복용하여 이상증세를 보여 신음중 인것을 의상을 담당하던 문인옥씨가 발견하고 서대문 고려병원으로 옮겼으나 상승작용에 의한 쇼크로 사망하게 된다 6월 장덕의 추모앨범인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를 발표하게 된다 이 앨범은 전영록,이선희,김범룡,박혜성,최성수,진미령,양하영,임지훈등 동료가수들이 참여하고 그녀가 작곡한 미발표곡까지 수록해 의미를 더한다 8월16일 설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던 장현도 11살난 아들 원이를 남겨둔채 34살의 젊은나이로 사망하게 된다 1993년 90년 8월 아들 현이의 장례식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간 어머니 이숙희씨는 93년 1월 먼저 떠난 현이와 덕이 남매의 숨겨진 과거를 담은 감동적인 통곡의 수기인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를 출간하게 된다 1999년 두자식을 같은해 떠나보낸 아버지 장규상씨는 첼로 하나만 메고 여행을 떠난다 결핵으로, 나병으로 고통받는 사람 그리고 교도소 고아원등을 돌며 사랑이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가 첼로를 켜며 희망과 행복을 전해주던 아버지 장규상씨도 봉천동 자택에서 70세 일기로 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
[출처] 박봉팔닷컴 - http://www.parkbongpal.com/bbs/board.php?bo_table=B12&wr_id=48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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