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목성균 수필전집 |
누비처네 |
목성균 (지은이) | 연암서가 | 2010-12-20 |
추석을 쇠고 우리는 아버지의 명에 의해서 근친을 갔다. 강원도 산골 귀래 장터에 도착했을 때 이미 한가위를 지낸 달이 청산 위에 둥실 떴다. 그때부터 십리가 넘는 시골길을 걸어가야 했다. 아내는 애를 업고 나는 술병과 고기 둬 근을 들고 걷기 시작했다. 아내 옆에 서서 말없이 걸었다. 달빛에 젖어 혼곤하게 잠든 가을 들녘을 가르는 냇물을 따라서 우리도 냇물처럼 이심전심으로 흐르듯 걸어가는데 돌연 아내 등에 업힌 어린 것이 펄쩍펄쩍 뛰면서 키득키득 소리를 내고 웃었다. 어린 것이 뭐가 그리 기쁠까. 달을 보고 웃는 것일까. 아비를 보고 웃는 것일까. 달빛을 담뿍 받고 방긋방긋 웃는 제 새끼를 업은 여자와의 동행, 나는 행복이 무엇인지 그때 처음 구체적으로 알았다.
아버지는 푸른 달빛에 흠뻑 젖어 아기 업은 제 아내를 데리고 밤길을 가는 인생 노정에 나를 주연으로 출연시키신 것이다. ‘임마, 동반자란 그런 거야’ 하는 의미를 일깨워 준, 아버지는 탁월한 인생 연출자였다. 처네 포대기가 그 연출의 소도구인 셈이었다.
그때 “그 처네 포대기 아버지께서 사오라고 돈을 부쳐 주셔서 사온 거야.” 내가 이실직고를 하자 아내가 “알아요” 했다. 그러고 말하기를, 추석 대목 밑에 어머니가 아기 처네 포대기 사게 돈을 달라고 하자 아버지가 묵묵부답이셨다는 것이다. “며느리를 친정에 보내려면 애를 업고 갈 포대기가 있어야 하잖아요” 하고 성미를 부리자 아버지가 맞받아서 “애 아비가 어련히 사올까” 하시며 역정을 내셨다고 한다. 아내는 그때 시아버지께서 무심한 신랑과 친정을 보내 주실 모종의 조치를 꾸미고 계시다는 것을 눈치채고 가슴을 두근거렸다고 한다.
교교한 달빛 아래 냇물도 흐름을 멈추고 잠든 것 같았다. 나는 기억이 안 나는데 그때 내가 아내의 손을 잡았던 모양이다. “그때 내 손을 꼭 잡던 자기 얼굴을 달빛에 보니 깎아 놓은 밤 같았어.” 아내가 누비처네를 쓸어보며 꿈꾸듯 말했다.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아내의 칭찬이었다. 아마 그때 내게 손을 잡힌 걸 의미 깊이 받아들였던 모양이다. - 본문 27p 중에서
늦가을인지 초겨울인지 추울 때다. 하루 종일 햇볕에 단 부엌궁둥이에 기대 서서 초저녁별을 바라본 적이 있다. 부엌궁둥이가 그렇게 따뜻하고 은밀하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무슨 잘못을 저질렀던지 나는 저녁 밥상이 들어갔는데도 방에 들어가지 못하고 부엌궁둥이로 돌아가서 숨었다. 고샅에서 할머니가 나를 찾는 소리가 들리고, 방안에서는 “그 놈에자식, 밥도 주지 말어” 하시는 아버지의 역정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부엌궁둥이로 돌아가서 바람벽에 외로운 신세를 기대게 될 줄을 알았는지 모를 일이다. 정남향의 바람벽이 동지 섣달 막 저녁 밥상이 들어간 부뚜막처럼 따뜻했다. 거기에 등을 기대고 서서 어두운 산등성이 위로 돋는 별을 바라보니까 서러웠다.
그 후 새신랑인 나는 꽤 여러 번 해질녘이면 부엌궁둥이의 바람벽에 기대고 서서 초저녁별을 바라보았다. 꿈과 현실의 괴리가 너무 심한 농사를 지어야 할 건지 말 건지, 이 부엌궁둥이에 와서 젊은 인생의 전말(顚末)을 화두(話頭)로 잡고 고뇌하면 응결된 가슴이 열렸다. - 본문 34p 중에서
나는 어려서부터 바깥 사랑방에서 증조부와 같이 잠을 잤는데, 증조부께서는 한밤중에 내 엉덩이를 철썩 때리셨다. 오줌 싸지 말고 누고 자라는 사인이었다. 그러면 나는 졸린 눈을 비비고 사랑 뜰에 나가서 앞산 위에 뿌려 놓은 별떨기를 세며 오줌독에 오줌을 누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증조부 머리맡에 놓여 있는 자리끼가 담긴 사기대접을 발로 걷어차서 물 개력을 해 놓고 말았다. 아닌 밤중에 물벼락을 맞으신 증조부께서는 벌떡 일어나서 “어미야-” 하고 안채에다 벽력같이 소릴 치셨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란 말처럼 어머니야말로 잠결에 달려나오셔서 죄인처럼 황망히 물 개력을 수습하셨다. 그동안 나는 놀란 토끼처럼 구석에서 꼼짝을 하지 못했다. - 54p 중에서
그래도 나는 그런 실수를 두 번 다시는 하지 않았다. 그 실수가 있은 후에는 증조부가 밤중에 엉덩이를 ‘철썩’ 때리시면 나는 일단 일어나서 어둠이 눈에 익기까지 서 있었다. 그러면 어둠 속에서 하얗게 정체를 드러내는 자리끼가 담긴 사기대접. 그것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사기대접은 마치 노출된 매복병처럼 ‘어디 한번 걷어차 보시지, 왜-’ 하고 하얗게 내게 대들었지만, 천만에, 나는 그 자리끼가 담긴 사기대접을 잘 피하고 지뢰를 밟지 않은 병사처럼 의기양양해서 가소롭게 노려보았다. 그러면 주무시는 줄 알았던 증조부께서 “오냐, 그렇게 조심성을 길러야 하느니라” 하시는 것이었다. - 55p 중에서
우리 농사 중 파종의 대미는 천수답 모내기를 끝마치는 것이다. 힘들고 의미 있는 과정이다. 그 날 점심때, 우리는 오동나무 그늘에 점심 들밥을 차려놓고 먹었다. 신록이 우거진 그늘에서 뻐꾸기가 낭자하게 울었다. 소들은 모를 심느라고 일으켜 놓은 구정물로 엉덩이에 흙덩이가 엉겨 붙은 채 우리 옆 오동나무 그늘 아래서 풀을 어귀적어귀적 씹으며 흘금흘금 오월 강산을 건너다보고 있었다.
|
첫댓글 지난 수요일 반디고에서 [누비처네] 구입했어요. 책을 사다놓고 열어볼새가 없었는데 주말강행군의 후유증인지 목감기에 된통 걸려 마지못해 붙들린 오늘에야 책을 붙들고 있습니다. [목성균의 수필]을 읽고 있는데 자꾸 [김유정]이 떠 오릅니다. 가슴 저 밑에서 뭉클한 것이 올라와요. 김유정이 자연과 더불어 풀어놓은 봄봄이나 점순이를 읽을 때처럼..... 목성균이 그려내는 소재와 문채에서 묘한 향수를 불러 일으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