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1) 연구 목적
선진국 국제화시대에 맞는 외국어안내표지의 재작성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유적지를 방문하여 잘못 표기된 곳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하여 2014년 4월 26일 조사를 실시했다.
(2) 연구 장소
경상북도 포항시 장기반도의 구룡포와 호미곶
(3) 연구방법
유적지의 안내문 사진을 찍고 안내(설명)내용 검색자료를 찾아내기 위하여 포항시 홈페이지와 경상북도, 포항지역의 신문기사 자료를 찾아 올바른 역사 인식과 실용적인 내용으로 바꾸었다. 또 한국어 안내판은 한국인에게 소개하는 내용으로, 일본어 알림판은 일본인에게 알리는 내용으로 수정했다.
Ⅱ. 연구 지역의 개요
(1) 연구 장소
1) 구룡포란 어떤 곳인가
경북 포항의 어촌마을 ‘구룡포’에는 일제강점기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1923년 일제가 구룡포에 수산항을 축조하고 동해 어업을 점령한 침탈 현장이다.
바다에서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해서 이름이 붙여졌다는 구룡포에는 백년 전에 어장이 풍부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이전 한국인은 구룡포 뭍 안쪽에 모여 살았던 조용한 어촌마을이었다고 하는데 1883년 ‘재조선국 일본인민 통상장전 및 해관세목(약칭 조일통상장정조약)’이 체결되고부터 일본인 어부들이 이주하기 시작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후에 대전경기가 사라지자 ‘도가와 야사브로(十河弥三)’라는 일본인 수산업자가 조선총독부를 설득해 구룡포에 축항을 제안했다. 1923년 구룡포 항이 축항되고 방파제가 조성되자 수산업에 종사하던 일본인들이 대거 구룡포로 몰려왔고 골목길을 따라 1932년에는 287세대 1.161명의 일본인이 거주하는 적산가옥이 빼곡하게 들어섰다. 현재는 일본인이 거주하던 22채의 목조건물이 남아있는데 일본인 가옥은 2층까지 올린 큰 집이 대부분이다. 이것은 대량어획을 하며 많은 부를 축적한 일본인 수산업자들이 살았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당시의 구룡포 어업은 큰 배를 많이 소유하고 있던 일본인이 모두 장악했고 한국인은 일본인 밑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인부나 통조림공장의 직공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포항 시는 2010~2013년에 걸쳐서 85억원 이상을 들여 구룡포 근대 문화역사거리 복원과 역사관을 조성했다. 역사관으로 사용하는 건물은 일본인 수산업자인 하시모토(橋本)가 1920년대에 일본에서 직접 자재를 운반해 와서 지은 2층 일본식 목조건물이다. 포항 시는 이곳을 매입하여 ‘포항 근대 역사관’을 개관했다. 역사관 인근에는 100년 전 일제강점기에 구룡포 지역 최대 상업지구 역할을 했던 옛날의 거리와 일본가옥들이 복원되어 있다. 이곳은 1990년의 인기 대하드라마 ‘여명의 눈동자’ 촬영장소로도 알려져 있다. 이 거리 중간지점에는 구룡포 공원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있다. 돌계단 양쪽 끝에는 작은 돌기둥이 쭉 세워져있다. 이 돌기둥에는 일본인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고 하는데 시멘트로 덧칠을 해서 알아볼 수가 없다. 공원 위에는 선원들의 무사고를 빌던 신사와 구룡포 항을 축조했다는 ‘도가와 야사브로 공덕비(1944)’가 세워졌는데 1945년 가을, 구룡포의 대한청년단원 30여 명은 ‘일제말소’를 외치며 신사를 부수고 도가와 야사부로 공덕비의 비문에 시멘트를 발라버렸다고 한다. 현재 신사가 있었던 곳에는 대한민국 순국선열을 기리기 위한 충혼탑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충혼탑이 세워져 있는 이 공원에 침략자의 송덕비를 복원해 일본인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포항시와 지각 있는 주민들의 복원 반대가 아직도 진행 중이라고 한다.
포항 시에서는 백년 전 일본인의 건축양식과 생활양식을 보존하여 국내외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것이 목적이다. 우리는 일제 강점기의 아픈 역사를 되새겨보고 국권을 빼앗긴 암울한 기억과 되풀이 되지 않아야할 미래를 생각해 본다.
포항시 구룡포(九龍浦)와 호미곶 안내문 조사.pdf
2) ‘호미곶(虎尾串)’이란 어떤 곳인가.
호미곶은 경상북도 포항시 장기반도 끝 영일만을 이루면서 돌출한 곶으로 동외곶(冬外串)·장기곶(長鬐串)이라고도 한다. 원래 생김새가 말갈기와 같다 하여 장기곶으로 불렸다. 일제강점기 때인 1918년 이후에는 장기갑(長鬐岬)으로 불리다가 1995년 장기곶(長鬐串)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다 2001년 12월 ‘호랑이 꼬리’라는 뜻의 호미곶(虎尾串)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바꾸었다.
조선의 풍수지리학자 남사고(南師古)가 《동해산수비록(東海山水秘錄)》에서 한반도는 호랑이가 앞발로 연해주를 할퀴는 모양으로 백두산은 코, 이곳을 꼬리에 해당한다고 묘사하였다.
해안은 대부분 암석해안으로 해식애가 발달하였다. 내륙 쪽은 해발고도 200m의 산지지만, 대보리(大甫里) · 구만리(九萬里) 사이에 어촌이 발달해 있고 약간의 농경지도 펼쳐진다. 해안에서 2km까지는 수심 약 40m 정도이다.
호미곶 해맞이광장 상생의 손은 바다와 육지에 손이 하나씩 있는데 이를 '상생의 손'이라 부른다.
● 쾌응환호 조난 기념비
일본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우리나라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할 무렵인 1907년 9월 9일 일본 수산강습소(도쿄 수산대학) 실습선인 쾌응환호(137톤급)가 수산실험을 위하여 동해안 영일만까지 왔다가 태풍으로 떠밀려와 좌초되었다. 그 사고로 교관 1명과 학생 3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는데 그 후 일본의 압력으로 이 지역에 수중등대를 세우게 되었고 1926년 9월 9일에는 당시 그 배의 승무원과 학생이었던 사람들이 현재의 비석인 ‘수신강습소 실습선 쾌응환호 조난 기념비’를 이곳에 세워 해마다 참배를 해왔으나 1945년 광복 후 현지주민들의 반일감정으로 이 비를 훼손하여 방치해 오다가 1971년 10월 재일교포인 한영출의 주선으로 방치된 비석를 다시 세우게 되었다. 지금은 구만 2리 가꾸리계에 해안도로가 개설된 후, 도로변에 다시 세워 관리하고 있으며 일본의 후손과 관계자들이 참배하고 있으며 일본 도쿄수산대학 동문회에서 매년 10만엔씩 비석 관리명목으로 보내오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