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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원문보기 글쓴이: 기라성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뿌리깊은 식민사관 떨쳐내려 한국사 진실찾기 나서
제대로 된 역사해석은 궁극적으로 정의롭고 바람직한 사회 창조에 도움을 준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은 지도층일수록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굳이 서양의 예에서 찾을 필요도 없이 우리 역사에서도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참다운 모습을 찾아낼 수 있다고 강조한다.(송원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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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는 오늘을 있게 한 주춧돌이다.
오늘의 튼실한 ‘기둥’과 모나지 않는 ‘지붕’은 미래를 만들어내는 근거가 된다.
이는 역사학이 존재하는 이유다.
하지만, 역사를 쉽게 풀어내는 게 쉽지만은 않다.
역사 저술가로 이름을 알리고 있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은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역사 저술가다.
그는 광범위한 자료를 섬세하게 분석해 비판적인 글쓰기를 선보인다.
독자층은 폭넓다.
역사 책을 찾는 독자라면 그를 피해갈 수는 없다.
역사에 대한 그의 확실한 철학이 불러온 효과다.
그가 보기에 우리 사학계는
아직 조선 후기 노론사관과 일제강점기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주류 사학계가 총론에서는 식민사관을 비판하고 있지만,
각론에서는 일제강점기 일본 사학자들의 왜곡된 연구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가 지적하는 학계의 현실은 참담하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의 진실성에 의문을 품고,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 안으로 한정해 보고,
노론의 당파성을 언급 못하고,
현대사 연구를 백안시하고 있다.
이에 대한 그의 문제적 비판의식이 담긴 책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이 이달 중에 출간된다.
“아직도 우리 사학계는 식민사관의 뿌리가 깊어요.
노론사관이 조선사편수회로 이어졌고,
이런 흐름이 광복 이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어요.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왜곡은 비판하면서
식민사관은 떨쳐버리지 못한 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우리 내부를 향하는 그의 말이 폐부를 찌른다.
낯까지 뜨거워진다.
“역사전쟁에서 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교과서부터 바로 잡아야 합니다.
식민사관 잔재가 남아 있기에 역사 교육을 강화하면
특정 부문에서는 오히려 식민사관이 전파되는 모순이 발생하기 때문이지요.”
역사 교육의 잘못이 반복되고 있다며 고조선을 사례로 든다.
교과서에 고조선 중심부를 한반도 주변부로 표시하는 것은 ‘엉터리’라고 강조한다.
“고조선만 해도 그래요.
고조선 융성기에 중국 동북부에는 진나라가 있었는데,
두 나라는 2년에 한 번꼴로 전쟁을 했습니다.
속국들이 조공할 때
고조선이 방해를 한다면서
진나라가 곧잘 전쟁을 일으켰지요.
하지만 고조선이 한반도 인근에 있었다면
지리적으로 볼 때 방해를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진나라가 6만명이나 되는 거대한 병사를 동원할 이유가 없었겠지요.”
여러 차례 그를 만났지만, 비판 의식이 여전히 살아있다.
7년 전 처음 만났을 때, 이 소장은 달변가는 아니었다.
여전히 잔잔한 화법이지만 지금 거침이 없다.
그가 이어 ‘화랑세기’를 끄집어냈다.
화랑세기에 일부 향가가 나오는데,
기존에 인식되는 찬불가 형식이 아니어서
화랑세기를 위서(僞書)로 평가하는 학자들이 많은 실정이다.
“향가는 무조건 찬불가여야 한다는 게 말이 안 됩니다.
후대 학자들이 미처 알지 못한 종류의 향가가 있을 수도 있지요.
오히려 화랑세기가 진서(眞書)라는 자료가 더 많습니다.”
화랑세기 속의 성 풍속이 문란하기 때문에 지어낸 이야기라는
사학계 일부의 시각도 내켜 하지 않는다.
“성 풍속 문란이라는 가치 판단은
한반도의 유교화 이후에 생긴 논점입니다.
그 시대에 적용하기는 무리가 따릅니다.
더구나 원나라 세조가 고려에 보낸 즉위교서에는
‘동성동본은 결혼하지 마라’는 구절이 있어요.
이 구절 자체가 이 땅에 동성동본이 성행했던 것을 보여주지요.”
신라는 혈족의 배타성을 유지하기 위해 근친혼에 관대했다는 것이다.
상식적인 접근을 통해
역사를 학자의 전유물에서 대중과 호흡하는 학문으로 끄집어내는
그의 설명은 이처럼 쉽다.
한때 대학에서 교수직을 제안했지만,
자유로운 글쓰기로 그는 지금 교수보다 더 영향력을 가진 학자다.
대학 문화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중세 시대에 대학의 공기는 자유로웠지요.
하지만, 지금 우리 대학들은 진리의 수호자도 탐구자도 아닙니다.
미국의 경쟁력이 대학의 경쟁력에서 비롯된 것인데, 우리는 그러지 못해요.
학문의 전당인 대학이 관료 출신을 총장으로 임명하는 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고도 창피해 하지도 않아요.”
역사를 배우는 목적은 과거의 교훈으로 현재를 살피고 미래를 대비하는 것에 있다.
역사적 진실이 보수와 진보를 뛰어넘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역사학이 사회통합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배경이기도 하다.
이 소장은 “직면한 상황이나 가까운 미래를 보는 정치·경제학에 비해 역사학은 종합학문”이라며,
“역사학은 헬기를 타고 산 위에서 조망하는 학문이기에 동시대 문제에 대해서 발언하는 것을 꺼리게 된다”고 했다.
그러나 오늘에 응용이 불가능하면 역사가 아니다.
다음 이야기로 꺼내든 것은 신라의 삼국통일과 조선의 외교방식이다.
삼국통일은 고구려가 했어야 하고,
조선은 사대외교를 버렸어야 했다는 게 일부의 시각이다.
“모두 역사적 맥락에서 살펴봐야 합니다.
후대인들이 ‘당대성’을 간과한 채 설명해서는 안 되지요.
고구려처럼 확실하게 싸울 것인지,
신라처럼 중국의 힘을 인정할 것인지는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의 문제입니다.
힘이 약한 처지에서 주변국의 공세적 외교에 대응해야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어요.”
역사학의 존재론에 의문을 품는 사람에게 줄 만한 답이다.
그러기에 그는 불리한 여건에서도 사회를 한 단계 도약시키고 변화시킨 역사적 인물에게 애정이 많다.
조선 정조는 오늘의 정치인들이 크게 본받아야 할 인물이다.
정조는
재위 첫해에 서자들을 등용하는 ‘서류허통절목’을 제정한 뒤,
재위 3년에 유득공과 박제가 등을 등용했다.
서얼 차별로 관직 진출이 막혀 있던 이들을 등용해 당대 최고의 지식을 유통시켰다.
단번에 조선의 지식계에 변화를 가져왔으니,
인사 때마다 몸살을 앓은 정부나 민간기업이 본받을 만한 일이다.
“정조는 내부적으로 소외된 인물을 발탁해 등용하며 미래지향 정책을 펼쳤어요.
직계인 영조와 사도세자의 차이를 뛰어넘어 갈등을 치유하는 데 앞장섰지요.
지도층이 본받을 위인이지요.
우리 사회의 좌파는 철학은 있지만 실천력이 부족하고,
우파는 실천을 강조하지만 철학 자체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갈기갈기 찢겨 있지만,
앞서가는 제대로 된 나라라면
좌파는 우파정책을, 우파는 좌파정책을 펼치겠지요.”
역사가 늘 모범 사례만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모순과 오류에서도 배우는 법이다.
조선의 우파라 할 만한 노론은 이론과 철학에 함몰돼 오히려 실천하지 않았다.
오히려 좌파라 할 만한 소론이나 그 뒤를 잇는 양명학파와 강화학파는 실천하는 학자들이었다.
이는 그가 양명학에 관심을 두는 이유다.
정조와 정도전 등 역사적 마디에서 사회를 한 단계 도약시킨 이들에게 관심이 많은 그가
설정한 장기적인 목표에는 양명학이 자리 잡고 있다.
조선시대에 유일하게 주자학과 ‘맞짱 떴던’ 학문인 양명학에 대한 연구는
우리 사학의 맥을 캐는 작업으로 여기고 있다.
“국가위기 상황에서 노론은 친일의 길을 걸었지만, 양명학은 국가를 구했습니다.
조선 지식계를 뒤흔든 강화학파의 시조 정재두 이래
정인보, 박은식, 이건창 선생 등이 모두 양명학을 공부했지요.
강화도에 양명학을 연구하는 기관이나 대학이 들어섰으면 좋겠어요.”
[이종탁이 만난 사람]‘도발적’ 역사평론가 이덕일 |
2009 07/07 위클리경향 832호 |
“동북아재단이 왜 동북공정 논리를 옹호하나”
역사평론가인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은 이 시대 최고의 문제작가 중 한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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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있는 한국사> 서문 **
인천국제공항에서 9시간을 날아야 비로소 닿을 수 있는 모스크바는
그 머나먼 거리와 이국적인 문화에도 불구하고
한인들의 자취가 적잖이 남아 있다.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한인들은 144명의 전체 공식대표단 중 가장 많은 52명이 참가했다.
여기에는 박헌영, 김단아 같은 공산주의자와
여운형, 이동휘 같은 민족적 사회주의자뿐만 아니라
김규식, 김승학 같은 민족주의자도 참가했다.
대회의장 지노비에프(Grigorii Zinoviev)는 '세계혁명'을 강조하며
한국의 민족혁명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해
서구 국가들의 이중적인 태도에 거듭 실망해 왔던 한국대표들을 고무시켰다.
독립운동가들을 이 머나먼 모스크바까지 오게 한 동력은
그러나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함으로써
일본의 발목을 한반도와 만주에 묶어두려는
소련의 동아시아 전략이 아니었다.
때로는 고비사막과 외몽고를 건너고, 때로는 유럽을 돌아
몇 달 이상이 걸려야 했던 이 머나먼 혁명의 도시로 그들을 이끈 동력은
바로 '민족해방'을 위한 '열정'이었다.
그 열정으로 독립운동가들은
만주와 시베리아, 중국 본토와 아메리카 대륙 그리고 멕시코까지,
그 머나먼 대륙과 해양을 넘나들었다.
그런데 그 열정은
우리 고대 선조들의 조국(肇國:나라를 세움)정신의 구현이기도 했다.
우리 고대 첫 국가 고조선을 필두로
부여와 신라, 고구려, 백제의 건국 정신은 대륙성과 해양성이었다.
조선 왕조 5백 년간 억눌리고 사장되어 온 선조들의 대륙성과 해양성은,
역설적이게도 조선의 멸망과 함께 독립운동가들에 의해 부활되었다.
대륙성과 해양성이라는 조국(肇國)정신은
박은식의 <한국통사(韓國痛史)>나
신채호의 사론(史論) . 논설들에 의해 다시 살아났다.
즉 이들은 민족의 해방과
우리 선조들의 대륙성 . 해양성을 부활시킬 것을 주창했다.
그리고 이런 조국정신의 부활은
끊임없이 대륙을 지향하던 해양국가 일본을 두렵게 했다.
우리 선조들의 해양성의 일부로 건국되었으나
이제는 역으로 한반도를 강점한 일제는
자신들의 제국(帝國)을 팽창하게 한 원동력,
바로 그 조국정신의 부활을 두려워했다.
일제는 이제 우리 선조들의 정신,
조국정신을 부활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1920년대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
우리 역사를 타율성(他律性) . 정체성(停滯性) . 사대성(事大性)으로
포장해 민족의 뇌리에 주입시켰다.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시타오카(下岡忠治)가 위원장이라는 사실 하나로
조선사편수회의 정치적 목적은 이미 드러난 것이었다.
여기에 스에마쓰(末松保和) . 이마니시(今西龍) 같은
일인 사학자들이 참여한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일부 한인 학자들까지 가담해 제 나라 역사 비하에 일조한 것은
비단 일제에 대한 부역일 뿐만 아니라 조국정신의 부활을 저지해
한국인들 자신이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을 불행으로 느끼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비극이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8.15 해방 이후에도
이들 식민사학자들의 영향력이 계속된 것은
우리 민족에게 더 큰 비극을 낳았다.
함석현선생이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얼마나 많은 역사가들이
공정한 객관적인 과학적인 역사를 쓰려다가
죽은 뼈다귀의 이름만을 적어놓고 말았나?"라고 탄식한 것처럼,
자국사(自國史)가
죽은 뼈다귀 이름 외우기로 전락한 것이었다.
오늘날 국사가 암기과목으로 전락한 가장 큰 이유는
식민사학자들이 실증사학의 토대 위에서 만들어 놓은
이른바 '정설(定設)의 역사학'때문이다.
사관(史觀)을 형성시키는 한 방법론에 불과한 실증주의에
사관의 외피를 입혀 실증사학으로 포장한 이유는,
실증의 이름으로 한국사를 '타율성 . 정체성 . 사대성의 역사'라고 비하하기 위함이었다.
식민사학자들은 실증사학을 마치 근대사학의 척도인것 처럼 주장했지만,
사실 실증주의란 굳이 일인 학자들에게 배우지 않더라도
예부터 존재했던 우리 선조들의 역사 서술방식이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얼마나 실증에 바탕한 역사서인지는
1970년대에 발굴된 무열왕릉 묘지석과
<삼국사기> 기록의 놀라운 일치에서 이미 확인된 바 있다.
이렇듯 우리 선조들의 역사 서술 전통은
실증을 밑바탕에 깐 것이었다.
연산군 때의 사관 김일손(金馹孫)이 사형 당한 이유도
바로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과 단종 시해를 실증으로 남기려던 때문 아닌가!
일제시대,
한국사 비하 도구로 기능했던 실증 사학은,
8.15 해방과 동시에
사관(史觀)을 형성시키는 한 방법론이라는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고,
식민사관에 맞서
민족해방과 대륙성 . 해양성의 복원을 주창한
박은식 . 신채호의 사관이 우리의 주류 사관이 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일제가 패망한 뒤에도 일인 식민사학자들과 그 한국인 제자들은
자신들의 역사 서술에 실증이란 갑옷을 입힘으로써 살아 남았다.
그 결과 실증사학에 의한 '정설의 역사학'의 영향력은
더욱 커지는 기현상이 발생했다.
현실의 권력으로 이들은
자신과 다른 이설(이설)들을 이단의 학설로 공격해
학계에서 축출해 나갔다.
그럼으로써 자신들의 이론에 스스로 '정설'의 지위를 부여했다.
스스로 역사학의 사제(司祭)가 되어
마치 중세의 신부들이 성서 해석권을 독점하고
그와 다른 해석에 이단의 딱지를 붙여 화형에 처했듯이,
현실의 학문 권력으로 역사에 대한 해석권을 독점하고
정설과 다른 이설에 이단의 딱지를 붙이면서 자신들만의 성을 견고히 지켜왔다.
이런 의미에서 정설의 역사학은
전근대적인 '교조(敎條)의 역사학'에 다름 아니다.
일제가 우리 역사를 말살한 것처럼,
많은 이설들이 교조적인 정설의 역사학에 의해 말살되어 갔고
그 결과 우리에게는 하나의 '정설'만이 암기과목으로 남게 되었다.
정설의 역사학의 뿌리가 일제 식민사학에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우리 위에 군림하는 식민사학의 극복이라는 현재적 임무를 띠게 된다.
식민사관이
실증사학이라는 이름으로 주도적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역사서술은
인용 자료나 주석(註釋) 개수를 가장 중시하는
서지학(書誌學) 비슷하게 전락했고,
그 빈 공간은 전문적 역사교육을 받지 못한
재야사학자들의 덜 다듬어진 주장들로 채워져 나갔다.
그 결과 자국사가 자국민 대다수와 괴리된 채
소수 학자들만의 전유물로 전락했던 것이다.
해방 이후 한 갑자(甲子)가 다 되어가는 이 때,
교조화된 정설의 역사학,
죽은 뼈다귀의 이름만 외우는 죽은 역사학이 아닌,
식민사학의 진정한 극복과
우리 민족 본연의 대륙성과 해양성의 복원을 지향하는
'살아있는 역사학'의 출현은 시대적 요구다.
물론 이 책은 이런 시대적 요구를 충족시키기는커녕 욕하게 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누군가 거친 연장으로라도
덤불 속에 뛰어들어 가시나무들을 베어내지 않는다면
후인들이 어찌 가시나무 숲 너머 있는 푸른 초원을 볼 수 있을 것인가?
21세기의 한국사가 지향할 바는
일제시대가 아니라 미래라는 점에서
식민사학의 극복은 이 책의 부분적 목적이다.
이 책의 진정한 목적은 식민사학이라는 가시덤불을 제거하고
우리 선조들의 역동적인 대륙성과 해양성의 조국정신을 현재에 복원하는 데 있다.
가능한 한 많은 1차 사료를 제시한 이유는
이른바 정설의 근거가 되는 1차 사료를 직접 대함으로써
정설이란 가시덤불에 가린 그 시대의 원형질을 함께 보기 위함이다.
물론 이 책에 제시된 1차 사료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
이를 통해서도 선조들의 원형질의 삶과 만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와 함께 '정설의 역사학'에 구애받지 않는 다양한 해석들을 제시하려고 노력했다.
민족해방에 대한 신념 하나로 이 머나먼 모스크바를 찾았던
독립운동가들의 열정을 간직하고 서술한 이 책은
이제 나의 손을 떠나 역사의 대륙, 역사의 해양으로 나아간다.
순항 여부는 역사의 신, 진리가 판단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