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후모아의 전성시대
- 설득과 협상의 핵심 스킬은 유머다
2004년 17대 총선은 국내 정치판에 명 가지 지각변동을 가져왔다. 그 중 하나가 제도권 밖에서만 머물던 진보정당의 원내 진출이다. 배경에 대해선 구구한 설명이 뒤따른다. 기성 정치인들에 대한 실망, 미디어 선거의 본격화, 민주노동당의 차별화된 선거 캠페인 등.
그런데 진보정당의 원내진출에는 눈여겨 봐야 할 성공요소가 있었다. 민노당에 '노회찬'이라는 걸쭉한 '입'이 있었던 것이다. 등원하는 데 성공한 노씨가 유세 기간 동안 토론회 등을 통해 유행시킨 몇 가지 어록을 살펴보자.
"50년 동안 계속 쓰던 불판에 삼겹살을 구우면 시꺼메집니다. 이제 삼겹살 판을 갈아야 합니다."
"선거 때만 되면요, 갑자기 어디서 산천어, 열목어 다 나타납니다. 저마다 깨끗하다는 것이죠.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 경험으로는 깨끗하다는 산천어, 열목어가 3급수, 4급수에 들어가면 다 죽어요. 아니면 돌연변이한 물고기만 살아남는 거죠."
노 의원의 장점은 기성 정치인들의 현실적 한계를 거창하게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보다 유머를 가미한 '촌철살인'으로 풀어낸 데 있다. 대중들은 그의 주장에 담긴 논리적 완결성을 따지지 않는다. 단지 삼겹살불판, 산천어, 엶고어 등 몇 가지 키워드를 기억하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이다.
노 의원의 정계입문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유머 재치 지상주의, 구체적으로 '호모 후모아'의 등장을 잘 설명해 준다(호모 후모아는 라틴어로 '유머가 많은 사람' 이란 뜻. 존재론적 의미에서 세속적인 가치로부터 자유로운 유희의 인간형을 말하는 호모 루덴스 'Homo Ludens' 와는 차이가 있다). 각종 미디어를 잘 살펴보면 저마다 황금시간 대에 유머 관련 프로그램을 배치해 놓고 있다. 코미디언과 개그맨들만 웃기는 것이 아니다. 가수와 TV연기자들도 입담이 없으면 좋은 배역을 맡을 수 없다.
격식을 갖춰야 할 뉴스나 시사 프로그램조차 시트콤을 닮아가고 있다. 뉴스테이블 방송의 '돌발영상' 등이 대표적 사례다. 최근 H 케이블 방송의 증권분석 프로에서 해설자의 안경에 파리가 앉아 얘기가 중단되는 방송사고가 벌어졌다. 그러나 이 사고는 인터넷을 통해 '요절복통 에피소드'로 변모했고 출연진은 마치 개그맨처럼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 웃음이 스트레스 해소에 특효
한번 웃고 나면 그만일까. 그렇지 않다. 유머는 보기보다 많은 가치를 지닌다. 긍정적인 삶의 태도를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으며, 대화를 나누는 상대방이나 대중들의 방어, 경계심리를 약화시킨다.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는 의미다. 또한 자리가 높아, 혹은 아는 것이 많아 인정을 받는 조직의 리더들이 흔히 놓치기 쉬운 감성을 효과적으로 채워준다.
그런데 최근 우리 사회에 유머가 유달리 뜨는 이유는 뭘까.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우선 우리 사회의 갈등과 스트레스 수준이 높아진 현실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TV 뉴스에선 하루가 멀다 하고 정치권이 격돌한다. 집권당과 언론은 대놓고 상대를 몰아세우고 있다. 사회비리와 범죄는 왜 이리도 끝이 없는지... 유명 포털로 '따뜻한 세상 뉴스'라는 코너가 등장했지만 어둠을 밝히긴 턱없다. 유머가 이 같은 어둠을 날리는 빛은 아니지만, 잠시나마 잊게 해준다. 동시에 대화를 할 때 완곡한 표현과 부드러운 말투로 상대방의 거부감을 줄인다.
또한 유머는 직장사회에 많은 활력을 불어 넣을 수 있다. 최근 많은 기업들은 능력주의 인사 방식을 적용하고 있다. 조직원의 실적에 따라 보수를 달리하는 연봉제를 도입하는 기업이 늘어나고 있고 연봉의 차등 폭은 점점 커지는 추세다. 이러한 변화로 조직 내 관료적 병폐를 최소화하고 조직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나친 내부 경쟁으로 유능한 인력조차 일 자체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거나, 팀워크가 약화되느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이 같은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방안 중 하나가 바로 '재미있는 조직 만들기'다.
- 호모 후모아가 득실대는 사우스웨스트 항공
유머 경영 사례로 미국의 사우스웨스트 항공을 살펴보자. 이 항공사는 9.11 테러 이후 항공업계의 불황에도 불구하고 4,000명의 신규 인력을 뽑은 사실만으로도 유명해진, 국내선 전문 항공사다. 기내식은 물론 요란한 기내 서비스도 없고, 심지어 발권인력을 대거 줄여 시내버스 타듯 비행기에 오르게 만든 유별난 회사다. 그런데도 사우스웨스트가 승승장구한 것은 '유머'라는 자산 덕택이었다.
CEO인 허브 켈러허는 '미국에서 가장 웃기는 경영자'라는 별명을 가졌다. 그가 '펀(fun) 경영'을 중시하는 이유는 '유머가 조직의 화합을 위한 촉매'라고 믿기 때문이다.
사우스웨스트가 회사 로고를 둘러싸고 경쟁사와 분쟁을 벌였을 때 일이다. "팔씨름으로 승부를 냅시다."
캘러허 회장은 협상이 평행선을 긋자 마주앉은 상대방 CEO에게 느닷없이 엉뚱한 제안을 했다. 그러자 상태 CEO는 폭소를 터뜨렸다. 승부는 켈러허 회장의 완패였으나 상대방으로부터 로고 공동사용권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유머가 안겨준 절반의 승리였다.
직원을 뽑을 때에도 그는 유머 감각을 높게 쳐준다. 유머 있는 사람 치고 업무를 못 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점잖은 오찬장에 직접 엘비스 프레슬리 복장을 하고 나타나 주변 사람들을 박장대소하게 만들기도 했다.
"담배를 피우실 분들은 날개 위에서 마음껏 피우시기 바랍니다. 흡연하면서 감상하실 영화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입니다."
CEO가 웃기니 승무원들도 웃기지 않을 수 없다. 기내방송도 웃긴다. 근무기강이 느슨할 것 같지만 사우스웨스트의 정시 이착률과 수하물 분실류, 그리고 고객만족도는 업계 최고 수준이다. 임직원들의 월급이 높아서일까, 아니다. 사우스웨스트의 임금 수준은 경쟁사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이직률도 낮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해답은 이 회사의 기업문화에 있었다. 임직워들의 업무 만족도가 높은 이유는, 일하는 분위기가 좋았기 때문이다. 일하는 분위기의 중심에는 유머가 있다. 유머는 이처럼 복잡하고 정교한 여러 가지 제도 및 환경이 빚어내는 갈등을 해소하며, 동시에 많은 사람들에게 활력을 제공해 성과를 거두게 하는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
- 의사소통의 핵심, 유머
호모 후모아는 유머를 통해 상대방을 웃기고, 그 반응을 통해 자신도 만족하는 사람이다. 이런 호모 후모아가 사회 구석구석에 웃음 바이러스를 퍼뜨리면 어떤 변화가 올까.
아직까지 유머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국한되는 감이 적지 않다. 그러나 유머 바이러스의 확산은 점차 다른 산업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 기업에서도 마케팅이나 각종 기획단계에서 제품 서비스의 본질적인 가치에 더해 유머라는 새로운 인자를 어떻게 고려할 것인가가 화두로 등장할 것이다.
미래의 의사소통에서는 유머가 핵심 요소로 떠오를 것이다. 유머를 통해 상대방의 협력을 끌어낼 수 있는 사람이 갈등의 조정과정에서 많은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지금까지 재미와 유머를 갖춘 사람은 조직의 주류라기보다 조직의 양념 같은 사람으로 취급됐다. 그러나 앞으로는 조직운영의 핵심 요원으로서 위상이 높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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