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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의 重光日은 언제 인가요?
교명은 시대에 따라 다르게 하여 부여는 대천교. 고구려는 경천교. 신라는 숭천교. 발해는 진종교. 만주는 주신교. 고려는 왕검교. 대한민국은 대종교등으로 변천하여 4천여년간 이여온 고유종교가 고려 원종(元宗) 임금 때 원나라 침입으로 교문을 닫으므로 그후 교명이 없어졌다가 본교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이 중광일이라 했습니다. 그 중광일은 다음 중 어느 날 인가요?
➊1904년10월3일에 포명본교대지서를 백두산 대숭전에서 도인 13명이 최 초로 선포하였습니다.
➋1909년1월15일에 서울 중구 재동 취운정에서 단군 신위를 모시고 포명 본교대지서서를 읽고 단군교를 시작 한다고 하였습니다.
➌1910년8월1일에 단군교를 대종교로 개명 공표한다고 신문에 광고를 내 었습니다.
1.대종교 뜻으로 보아서
⌜대종교 신리⌝는 1910.9.12 고경각 명의로 백봉신사가 최초로 반포하였습니다. (그 이전에는 本敎라 칭함. 檀君敎 용어는 사용하지 않았음. 그리고 홍암의 신리대전은 1911.1월에 완성하였음)
곧 大는 한이요 天을 뜻하고
倧은 神人 곧 한얼사람을 뜻하고
敎는 옛날의 수두를 뜻하니
大倧敎는 한검수 곧 한얼교 또는 天神敎이다고 하였습니다.
백봉대종사가 쓴 대종교신리를 인용하여 홍암선생이 신리대전을 썼을 가능성이 있으며 백봉은 시간적으로 제일 빠르고 또 처음부터 대종교를 선포하였고 그 뜻을 해석한 것으로 보아 대종교는 백두산과 관계가 더 깊습니다.
2.포명서로 보아서
①⌜포명본교대지서⌝를 발표한 날은 개극입도(開極立道)4237년 광무8년 (1904년)10월3일 백두산 대숭전 고경각입니다.
②4천여년 구교(舊敎)의 회이부명(悔而復明)이 기재금일(其在今日) 곧 구교가 그믐처럼 깜깜에서 다시 밝아짐이 바로 오늘 이라고 하였습니다.
⌜단군교포명서⌝를 발표한 날은 1909.1.15이며 서울 재동에서 고경각의 원문을 전해 받아서 그대로 읽었읍니다
단군교포명식에 대한 기록을 보면 “1909.1.15에 서울 재동 8동 10호 翠雲亭下 6간 초옥 북쪽벽에 「大皇祖檀君聖神神位」를 모시고 단군교포명서를 공포하여 명실공이 단군교를 민족종교로서 重光을 하였다. 참여자는 나인영(철) 오기호 이기 강석기(우) 최동식(전) 정훈모(선) 김인식 김춘식 김윤식 유근 등 10여명이었다. 이는 단군 국조가 창립한 한민족의 고유종교인 단군교를 계승한 것인데 고려 원종 때의 몽고 침략 이후 약 700년간 단절된 것을 한말에 나철이 민족의 앞날을 위해 다시 계승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포명서가 최초로 선포된 곳은 백두산이므로 중광을 붙인다면 백두산에서 선포한 날이 중광일이 되어야 합니다.
3.홍암 자신으로 보아서
홍암 선생이 기록한 중광가 18장에는
한배께 묵계받아 4361 개천날 옛敎 빛 밝혔도다 -- (4361년=1904년)※
중광가 45장
한울호적 펴노라 중광역사 추리자
표표연 신사영종 現世記 안 傳하고 --- 왜 안 전했을까?
묘묘연 13도형 實事蹟 없었으나 --- 진진공인은?
古經閣 끼친빛은 큰 功德 길히 황황
중광가46장
한배핏줄 무진 수인데 그 사람 在在컨만
준준한 이 불초가 倧門主務 웬일고 --- 만들어져 있는 종문의 임무
을사 섣달 그믐날 노인만나 敎 받고 --- 입교했음
한얼빛 포명서를 一一이 감췄다가 --- 무관심으로 팽개치고
중광가47장
4366 기유해 상 보름 첫새벽에
천조신위 받들고 제향하며 道 펴니 --- 제사와 신봉 구분
이날 경절 거듭빛 거듭빛 잊지마세 --- 가경일로 단정하며 강조
백악하 취운전에 육칸 뜃집 잘있나
중광가49장
구슬바람 祖山 길 神兄님 어데 계심 --- 두절됨
오호라! 己酉가을 세외에 난가 편편 --- 탄식과 외로움
홍암의 외로움이 곳곳에 서려있음을 느낌니다. 앞 18장에서는 10월3일 날 옛교 빛 밝혔다고 하엿고 그러면서도 1월15일 선포한 그날을 경절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백두산과 자기 자신이 들어나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4.초창기 교인을 보아서
①1916.8.21. 홍암 발인제 때 조천소 앞에 표시하기를
⌜大倧敎 第二世 大倧師 弘巖 羅先生化神之地⌝ 라 했으니
그렇다면 제1세는 백봉신사이며 제2세는 홍암 대종사라는 것이다
②무원종사 승임식 때 최전도형이 축하 말씀에
“~한번 전해 두 대이오 세 번 만세를 부르는도다 공손히 생각”
“~~이제 도사교가 새로 오름은 실로 옛 선생님의 끼치신 명령으로 나 왔도다. 백봉신사의 전해주신 계통은 부탁함에 사람을 얻었고 취 운정에서 가만히 비시던~ ”
한번 전해 받은 홍암대종사가 제2세이고 금일은 세 번째 만세로 제3세 무원 대종사의 승임을 축하해주는 말이라면 제1세는 백봉대종사라는 것입니다
③구변도설에 - 백포 서일 (경전755)
伯峯神兄께서 以是傳之 弘巖神兄하시고 神兄이 以是授之 茂園道兄하시 니
백봉신형에서 홍암신형으로 다시 무원종사로 이여졌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5.대종교 발표로 보아서
1910.8.5. 황성신문 광고에 (양력 9월8~9일 이틀간 실림)
“古經閣 敎名을 奉承하와 本 檀君敎는 本名 倧敎로 紀年 開極立道는 본 기 天神降世로 발표하오니 兄弟姉妹는 량실(諒悉)하심
天神降世 4243년 경술 8월 초1일 大倧敎 白 “
고경각 교명을 이어 받들어 단군교를 개명한다고 하면서 종교라 했습니다. 맨 끝에는 大倧敎 白이라 했습니다. 또 開極立道는 왜 天神降世로 바꾸었을까요?
좌우지간 결정적인 당시의 자료입니다. 돈 까지 지불하며 광고를 이틀간 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大倧敎 改名의 이유는 백두산 고경각의 뜻이고 지시입니다. 혹 자가 말하는 것처럼 대종교로 개명함은 일제 탄압을 豫見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6.道人의 立場으로 보아서
①백두산의 백전道人은 서대문 路上에서 백봉대종사의 命을 받아서 홍암선 생을(동지로) 입교하게 했으며
②미도道人은 일본에서
“貴 羅公의 使命은 이 포명서에 관한 일”
이다고 한 것은 入敎人으로 보았으니
同志 또는 奉敎人으로서 여기고 해야 할 일을 지시한 것입니다
6.백두산 편지로 보아서
① 1909.6.30.미도가 홍암에게 보낸 편지인데 倧報 제2호 에 ⌜傳書⌝라는 제목으로 “북한에 있는 敎兄 杜誠이라는 사람이 彌島 道兄의 手札을 전함”이라는 글로 이 편지 전문이 실려 있었습니다.
⌈홍암현제대인(弘巖賢弟大人)을 오랫동안 못 보던 사이에 귀중한 편지를 옮기어 전하니 기쁨이 어찌 크지 않으랴? 때는 바야흐로 초여름인데, 도체 편안하고 왕성하시기를 거듭 바랍니다.
우형(愚兄)은 최근에 옛 기거하던 산으로 돌아와 식생활이 정상이 되었으니, 바라건대 수고롭게 원행하지 말기를 청하니 어떠신지요?
상사(商社)의 일을 나 또한 어찌 감히 소홀히 하겠습니까? 다만 널리 연구하고 깊이 생각하여 일시에 큰 이득을 바라지 않을 것이며, 오직 급선무로 해야 할 일은 사방에서 사원(社員)들을 증가시킨 후에 개업을 한다면 크게 판매를 일으킬 것입니다.
최근 들어와서 문서가 도착하는데도 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취하는 각 상점의 태도가 이곳저곳에서 함께 발생한다고 말하는데, 이 역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옛날부터 하나의 큰 가르침 -일대교(一大敎)-이 발생하는 초기에는 으레 이러한 폐단이 있었던 까닭에 오히려 정교(正敎)가 더욱 밝아지게 되었습니다.
비유하자면 만일 노자, 장자, 양자, 묵자가 없었더라면 그 누가 주공(周公)과 공자(孔子)의 대도(大道)를 알 것이며, 각종의 바라문들이 없었더라면 그 누가 석가의 본법을 높였으리요?
현제(賢弟)께서 근심하는 일은 오히려 이 형이 기뻐하는 실마리입니다. 안씨와 최씨 그리고 두 이씨가 함께 어울릴만한 좋은 사람이라면, 상사의 흥왕은 날짜를 손꼽을 수 있도록 기대됩니다.
바라옵건대 현제(賢弟)께서는 일시에 (흥왕을 바라며) 조급해 하지 마시고 오직 원대함을 요체로 삼아 백번 꺾여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품고, 한손으로 하늘을 지탱하려는 막중한 책임을 맡았으니 정치적인 일은 관여하지 말고 이득을 취하려는 생각조차 싹 틔우지 않으면, 광대하고 풍성함이 있어 하늘의 묵묵한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경전과 관계된 일에 있어 두암 형이 정론을 고집하여 급하게 퍼트리려고 하지 않는 것은 대개 깊은 뜻을 보전하고 있어서입니다. 이 경전이 한 번 세상에 나온다면 이른바 “문자를 개략적으로만 아는 자들이 공자의 (고매한) 학식으로 장구(章句)에 주석달기를 일곱 번이나 하는 것” 과 같으리니, 누구는 옳다 하고 누구는 그르다 하여 망론이 백출할 것이고, 문자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경전의 유래를 알지 못하고 오히려 문자만 아는 자들의 망론을 따라 (도를)믿지 못하는 마음이 쉽게 생길 것입니다.
이 경전이 나오더라도 곡식에 내리는 가뭄의 단비와 같고 사람에게 내리는 금덩어리 같이 귀한 것이 되지 못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빠르게 모여들고 다투어 달려올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예로부터 어떤 가르침이나 종교가 처음 세워질 시기에는 경전을 갖지 않았으니, ⌜중용⌝과 ⌜대학⌝은 공자가 살아 있었던 때의 글이 아니며, ⌜도덕경⌝은 노자가 함곡관을 지나간 후에 지어진 것이요, 신구약⌜성경⌝은 모두 예수의 제자들이 기록하고 편집한 것입니다.
도가 창성한 후에 경전이 나오면 자연스럽게 세상 사람들이 외우고 읽을 것이요, 도가 창성하지 않았는데 경전이 먼저 나오면 경전은 경전대로 나는 나대로가 되어버리는 한탄이 있어, 오히려 신이하고 성스러운 경문으로 하여금 세상 사람들이 모욕하고 업신여기는 바가 되게 할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이러한 뜻을 깊이 헤아리셔서 오직 (도를) 널리 퍼뜨리는 일에 온 힘을 기울이기를 요체로 삼으소서. 진실로 동생께서는 바삐 행하소서. 간략하게 줄여서 글을 올립니다. 미도가 보냅니다.⌋
①1909.6월 이전 초기상황에선 교명도 없이 상사로 사원 상점 판매등으로 통하였으며 백두산(미도)에서 볼 때 홍암을 현제 즉 어진 동생으로 생각 했다
②동생을 4번 언급함
③홍암을 바라보며 판단할 때
▝조급해 하지 말고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품고
▝정치적인 일은 관여하지 말고
▝이득을 취하려는 생각조차 싹 튀우지 않으면
▝광대하고 풍성함이 있어 하늘이 도운다
하며 오직 널리 퍼트리는 일에 온 힘을 기울이라고 사명을 독촉하며 권고한 내용이다
② 1909.8.27.에는 ⌜告書⌝가 발표되었다.
고경각 정참무 정승묵은 삼가 (본교의) 가르침을 받드는 모든 형제자매들에게 고하노라. (13인 가운데 한 사람)
아! 본교의 가르침을 포명한 지 오늘에 이르러 6주년이 되노라. (저는) 세상의 안과밖을 두루 돌아보고 그 기미를 조용히 관찰하여, 그 가르침을 베풀고 조치함에 급급해 하지 않고, 오직 근원되는 일에 힘쓸 따름이노라.
다행스럽게도 우리 동포 형제자매가 유연히 (대황조를)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을 발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낮고 습한 곳에서의 구원을 생각하여, 교단의 가르침이 이르는 곳이면 멀거나 가깝거나 와서 한 목소리로 감읍하여 춤추고 성심으로 신봉하는 자가 수만명이나 되도다. 이는 실로 우리 대황조의 깨우침과 그리로 인도하심에 연유하는 것이니, 또한 천도의 순환과 인심의 추구하는 바를 가히 볼 수 있도다.
그러므로 금년 개천경절에는 각지의 시교사(施敎師)와 파유원(派游員)들을 모이게 하여 옛날을 살피고 현실을 참작하고 삼가 엄숙히 협의하여 앞으로의 시교절차를 확정하고, 거듭 신형대종사(神兄大宗師)의 명을 받들어 이어나갈 것이로다. 내년부터는 장차 본교(本敎)의 오대종지(五大宗旨)를 천하에 선포하여 어두운 세상에 횃불을 밝히고 높은 누각에서 목탁을 울려, 우리 신주(神州) 옛 구역 내 7천만 형제자매로 하여금 친척을 친애하는 도리를 널리 돈독히 하고, 선한 이에게 선을 베푸는 행위를 더욱 닦아서, 우러러 대황조의 망극한 은혜에 보답하고, 굽어보아 일대족(一大族)의 도탄에 빠진 고통을 함께 덜어주려 하노라.
아! 우리 모든 형제자매여, 오늘날 우리가 받은 신체발부는 모두 우리 대황조의 신성한 유맥(遺脈)이요, 오늘날 우리가 사는 산하토지는 곧 우리 대황조의 신성한 유적(遺蹟)이라.
이러한 신체를 가지고 이러한 토지에 살면서 어찌 감히 하루라도 대황조의 지극한 은덕을 잊을 수 있으며, 또 어찌 감히 한 사람이라도 대황조의 큰 뜻과 큰 가르침을 봉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 형제자매는 한마음으로 엄숙하고 성실하게 더욱 더 힘쓸지어다.
여기서 6주년 이라함은 곧 1909년-6주년=1904년입니다.
백두산에서는 1904.10.3을 포명식을 시작한 날이며 이 날을 重光日로 여기는 것이며 고경각은 본교 행정의 중심기구를 말함입니다.
1908.11.12 일본에서 미도가 홍암에 전한 ⌜입교의절⌝에는 ⌜신입교자는 전교자에게 고경각 인정을 궤수하고 상견례를 행함⌟ 이라 했으니 입교자에게는 고경각에서 발행한 도장이 찍힌 문서를 주었습니다.
이렇게 백두산 고경각을 중심으로 본교가 발전되어 가고 있으며 행정이 이루어 졌습니다.
7.그런데 홍암선생의 전수도통문에
① <大倧師 都司敎 第二世
한얼명령의 큰 운수가 너의 밝은 몸에 있으니 힘쓰고 공경할지어다
단제강세 4373년 병진 8월 15일
大倧敎 都司敎 羅喆
사교 김교헌 哲棣(철체)>
홍암은 제1세이고 무원은 제2세라는 뜻으로 홍암 대종사께서는 자기가 행한 것을 들어내고 싶었고 정론화(正論化 )시킨 것 같습니다
②중광가47장에
<이 날 경절 거듭빛 거듭빛 잊지마세>
1.15일 이날을 경절로 거듭 잊지 말라고 강조함은 자기가 행한 것을 엄청난 일로 곧 경절로 강조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③홍암은 중광가 18장에서는 “1904년10월3일에 옛교 빛 밝혔다”고 하였고
중광가47장에서는 “1009년1월15일에 도를 펴니 경절로 거듭빛 잊지 마세”라 하여 두 개의 말을 하였습니다.
먼 후일 지나서 대종교의 교인들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좌우지간 대종교라는 중광의 발단은 백두산에서 백봉신사가 단제님의 묵계를 받음으로 인하여 고서를 발견함으로서 시작했습니다. 포명본교대지서도 백두산 고경각에서 백봉과 동지 13인이 작문해서 발표했습니다. 홍암 선생도 1905년 백전도인을 만나 본교로 입교했습니다. 포명본교대지서를 고경각에서 발표한 그 날이 晦而復明한 날이라고 했습니다. 곧 1904년10월3일은 대종교 중광일이고 1909년1월15일은 대종교 서울지부 창립일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종교의 중광일은 바로 10월3일입니다.
만약 1909.1.15을 중광일로 보면 홍암은 백봉을 단절하고 새로 첫 출발로 보야야 하는데 백봉을 뺀 홍암의 중광은 성립조차 될 수 없습니다. 또 홍암은 스승을 배신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됨니다. 홍암의 인생개심의 시작에서 삼일신고의 전수, 포명서 받음, 입교, 대종교명을 받음, 대종교 신리, 의절 법규등 제반사항을 백두산으로부터 받았으며 또 미도도인으로부터 혹독하게
“공의 금후의 사명은 이 포명서에 관한 일이라̋̋는 걸 명심하라”고 받았던 것이다.
포명본교대지서 발표에 의하면 앞으로 때에 따라 다른 책도 세상에 내놓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홍암선생에게 더 이상의 책은 안 전해주었습니다. 중광가에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런데 대종교 아닌 다른 곳에서 대종교신원경과 삼일신고 필사본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백봉신사가 홍암선생을 버린 것인가요? 아니면 홍암선생이 백봉신사 스승을 따르지 안한 것인가요?
백봉이 홍암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숨어 버렸는가요? 아니면 홍암이 잘못 행하는 것이 있어 마음과 책을 더 주지 않고 더 이상 관계하지 않았는가요?
홍암은 자기가 들어 나는 것을 좋아하여 스승이나 도인 만남을 귀하게 생각하지 안했는가요? 아니면 자기 것이라는 사심을 가졌는가요?
미도 편지에서도 주의를 당부하는 말을 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 확실한 자료가 또 나올 것입니다.
만약 금후 20년 또는 50년 후 홍암선생은 스승을 배반한 인물로 말하게 된다면 결국 그것은 홍암선생만의 일이 아니라 모든 大倧敎人의 수치이며 나아가 대종교의 수치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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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대종교 에서도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근거없는 것이라 하기에는 많은 의문을 남기고 있으며 앞으로 이러한 연구는 계속 되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옛날 어두웠던 시절을 살아온 세대는 이해 할 수 없는... 그리고 버리면 그만 이겠지만 15분 이면 모든 정보가 세상을 한 바퀴 돌수 있는 이 시 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아주 작은 의문 이라도 집고 풀고 넘어가야 하는 호기심을 대종교에서는 답변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먼 훗날 이러한 사실이 밝혀져 내 아이가 엄마 왜 대종교 다녔어 라는 질문을 한다면 난 부모로서 한 없이 부끄러울 것입니다
우린 언제나 진정한 공부를 할 수 있을 지 ?
진정한 공부는 지금부터 차근차근 해나가면 될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많이 부족하고 아는 것이 적을 지라도, 티끌모아 태산이고 진인사대천명이라 어찌 사람이 가는 길에 방해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작은 먼지하나라도 쌓이기 시작하면 산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렇듯, 우리가 서로 손을 마주잡고 앞으로 나아갔으면 합니다. 힘내시고 용기 가지시길 바랍니다.
늘 건강하시길 원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