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여법당<如如法堂>
12,<海眼禪師 법문法門>
*부처란 무엇을 가리킨 말인가?
부처란 형상이 있는 것도 아니요 형상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부처란 영혼이 있는 것도 아니요 영혼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부처란 아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요 아닌 것 없는 것도 아닙니다. 공한 것이 부처가 아니요 공한 것 아닌 것도 부처가 아닙니다. 부처란 사람도 아니요 신도 아니요 범천도 아니요 성현도 아니요 각(覺)도 아니요, 부처란 실로 부처도 아닌 것이 '부처'입니다. 그러므로 경에 이르기를 '일체 모든 상(相)을 여의어사 본 이름이 부처'라고 하였고, 또 법성게에도 '구래(久來)로 등하지 않는 것이 이름이 부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부처가 어떻게 설법을 하였을까하고 의심을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는 설법을 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에 이르기를 만약 사람이 말하기를 '여래가 설한 바 법이 있다고 하면 곧 그 부처를 비방한 것이요 능히 나의 설한 바 뜻을 알지 못하는 소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여러분은 석가여래가 사십구 년 설법하신 것은 천하가 공지(共知)하는 바요, 팔만 사천 대장경이 증명하는 바요, 불교 역사가 뚜렷이 입증하고 있거늘 이것이 부처의 설법이 아니면 누구의 설법이냐고 반문하실 것입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이것은 석가세존의 설법입니다. 석가가 인간의 한 사람으로서 생. 노. 병. 사의 무상을 느끼고 이것을 초탈하기 위해서 육년간 설산에서 수도하신 끝에 마침내 정각을 이루어 부처가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부처가 되신 석가는 부처의 자리에 주(住)하여 있지 않고 다시 중생의 세계로 발길을 돌이켜 중생의 몸으로 중생과 함께 괴로워하고 중생과 함께 울고 함께 밥을 먹고 중생과 함께 옷을 입고하였습니다. 부처는 가고 오고 앉고 눕는 것이 아니거늘 석가는 중생과 같이 가고 오고 앉고 눕고 하였습니다. 부처는 입이 없는 것이거늘 석가는 사십구 년이나 장광설로 사자후의 무진(無盡) 법문을 설하였으니 이것은 오직 환(幻)과 같은 대비(大悲)의 지혜로써 괴로워하는 모든 중생을 건지기 위하여 고뇌 망상의 탈을 쓰고 일대 극을 연출하신 석가세존의 설법이지 부처의 설법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석가세존 앞에 더욱 뼈저리게 감사하고 머리 숙여 경찬하고 싶고 그 위대한 덕상(德相)을 앙모(仰慕)하는 바이며 그 넓으신 대원의 바다에 들어가 목욕하고 싶은 것입니다.
*다음에 중생이란 무엇인가?
중생이란 한마디로 병든 사람을 가리킨 말입니다. 어째서 중생이란 모두 병든 사람이란 말인가. 중생이란 모두 체(滯)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중생은 모두 체한 사람이냐 하면 중생은 보면 보는대로 보는 병에 걸리고 들으면 듣는 대로 들리는 병에 걸리고 육진 경계(六塵境界)에 부딪치면 부딪치는 대로 모두 병을 이루고 말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산을 보면 산에 걸리고 물을 보면 물에 걸리고 종소리를 들으면 종소리에 걸리고 북소리를 들으면 북소리에 걸려서 통하지 못하고 막히기 때문에 천차만별의 전도(顚倒)되는 병을 이루어서 하나도 병 아닌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큰 것은 커서 병이요, 작은 것은 작아서 병, 긴 것은 길어서 병이요, 짧은 것은 짧아서 병, 유(柔)한 것은 유해서 병이요, 강한 것은 강해서 병, 미련한 놈은 미련해서 병이요, 영리한 놈은 영리해서 병, 낳은 놈은 낳아서 병이요, 죽은 놈은 죽어서 병, 이와 같이 팔만 사천의 병을 가진 것이 중생의 병이라는 말입니다. 이리하여 항하의 모래 수와 같이 무량무수의 많은 중생들이 하나도 병 없는 놈이 없다는 말입니다. 어째서 이런 것들을 모두 병이라고 하는가 하면 큰 것은 크기만 하기 때문에 작게 쓸 수가 없고 작은 것은 작기만 하기 때문에 크게 쓸 수가 없고 강한 것은 강하기만 하기 때문에 유하게 쓸 수 없고 유한 것은 유하기만 하기 때문에 강하게 쓸 수 없고, 미련한 놈은 미련해서 답답하고, 영리한 놈은 영리하기 때문에 너무 지나치고, 있는 놈은 있기 때문에 도둑이 두렵고 없는 놈은 없어서 구차하고, 낳은 놈은 낳기 때문에 죽음의 고가 있고 죽는 놈은 죽기 때문에 또 다시 생의 고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한량없는 병들을 가진 중생이기 때문에 중생이란 말은 병든 사람이란 말입니다.
*다음으로 설법이란 무엇인가.
설법이란 한 말로 해서 의사가 약을 쓰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의사가 약을 쓰는 방법이란 눈 아픈 사람에게는 안약을 쓰고 체한 사람에게는 소화제를 주고 머리 아픈 사람에게는 진통제를 주듯이 병에 따라 각각 약이 다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석가세존의 설법도 일정하지 않습니다. 큰 놈은 큰 것이 병이기 때문에 작게 만들고 작은 것은 작은 것이 병이기 때문에 크게 만들고, 어두운 놈은 어두운 것이 병이기 때문에 밝게 만들고 굽은 놈은 굽은 것이 병이기 때문에 곧게 만들고 낳은 놈에게는 무상을 일러주고 죽은 놈에게는 불멸을 깨치도록 하는 등 하나도 일정한 설법이 없는 것이 석가세존의 사십구 년간 설법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경에 이르기를 '정한 법 없는 것이 이름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고, 가장 잘 사는 법'이라 하였고, 또한 '가히 설할 바 정한 법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불법은 중도(中道)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중도라고 하는 것은 상. 중. 하의 숫자에 떨어지는 중이 아닌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또 한 가지 알아 두어야 할 것은 백천 강하(百千江河)가 바다에 들어가면 짜고 싱겁고 맑고 탁하고 깨끗하고 더러운 차별이 없이 오직 바닷물 하나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과 같이 팔만 사천의 무량법문도 정각의 적멸바다에 들어가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 하나가 되고 만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또 이 하나라는 것도 일, 이, 삼, 사의 숫자가 아닌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것으로 부처는 무엇이고 중생은 무엇이고 설법이란 무엇인가를 아시리라 믿습니다, 해안선사 법문에서<옮겨온 글>
*해안선사海眼禪師님은 출가의 연을 고백 하실 때 난 새벽 종소리와 목탁소리에 꼬여서 머리를 깎았어! 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선사님은 전북부안에서 1901년에 태어나셨고, 어릴 때 붓 장사로부터 변산 내소사來蘇寺라는 절에 『맹자』를 천번이나 읽은 고매한 학자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서 한학자 고찬(高讚) 선생을 만나 한학 공부를 하던 도중, 당시 내소사에 주석하며 가람을 크게 중창한 만 허 화상 만났고, 3년 뒤에 백양사에서 만암화상을 계사로 만허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고 출가하게 되었다,
해안선사님은 출가한지 2년 만에 납월팔일 성도절날 7일 용맹정진에 학인들과 함께 참여하여 선원 학명선사鶴鳴禪師로부터 은산철벽을 뚫어라는 화두話頭를 받고 치열한 구도 싸움 끝에 견성見性 오도悟道를 하셨다고 한다, 그 때 읊은 오도송이 목탁소리 나자 종 울리고 또 죽비소리에 봉황은 은산철벽 밖으로 날았도다, 만약 나에게 기쁜 소식을 묻는다면 회승당 안에 만발공양이라 하리라,
鐸鳴鍾落又竹篦 鳳飛銀山鐵壁外 若人問我喜消息 會僧堂裏滿鉢供,
해안선사님은 이후 해안은 동국 대학교의 전신인 불교중앙 학림에 입학해 2년간의 과정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내외전(內外典)을 두루 마치고, 선미(禪味)를 경험한 그였지만 조금도 정진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1922년 겨울, 해안은 살을 도려내는 듯한 삭풍을 뚫고 만주 벌판을 가로질러 중국에 유학했다. 중국의 선지식을 널리 친견하고, 탁마하는 한편, 북경대학에서 불교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타국에서의 정진과 수행은 말 그대로 형설(螢雪)의 과정이었다. 3년간의 공부를 마치고 내소사로 돌아온 해안은 오랜만에 행장을 풀고 은사 만허 화상을 정성껏 시봉하며 사제의 정을 돈독히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스승의 간곡한 당부를 거역하지 못해 내소사 주지직을 맡았지만, 조실 학명 선사가 월명암에 주석하면서 선도량을 개설하자, 자주 월명암으로 자리를 옮겨 안거 수행에 들었다. 천성이 선사요, 교화사였던 까닭에 주지직 같은 것은 해안에게 그리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뜻하지 않게 금산사 주지에 추천되기도 했지만 언제나 종무 행정은 실무를 보는 스님들에게 일임했다. 본사인 금산사 주지로 있을 때에도 사내에 서래 선림(西來禪林)이라는 선원을 개설해 참선 수행과 지도, 후학 및 납자 제 접에 전념했다.
해안은 언제나 좋고 나쁜 것을 가리지 않았고(無有定法), 시시비비에 상관하지 않는 초연한 입장을 실행에 옮겼다. 때와 조건에 따라
알맞게 맞추고, 고정 관념 없이 대중의 근기에 따라 교화에 나섰다.
어떤 때는 무섭기가 서릿발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인자하기가 봄바람 같았다. 때로는 방망이를 휘둘렀고 때로는 벽력같은 할도 사양하지 않았다. 선정에 들어있는가 싶으면 문득 북과 광쇠를 쿵쿵 두드리며 염불 삼매에 취하기도 했다. 달이 밝으면 시를 짓고 다정한 도반을 만나면 밤을 새워 곡차를 즐기기도 했다.
대도인(大道人)으로 추앙받았다. 당시 묵담(默潭)이 전주를 중심으로 선풍을 드날렸고, 구산(九山)이 광주와 순천을 중심으로 효봉의 가풍을 이어 갔다면, 해안은 김제와 부안을 무대로 선풍을 펼쳤다.
그러나 그는 결코 선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경에도 조예가 깊었다.
특히 『금강경』은 독보적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았다. 해안이 주석을 한 『금강경』이 오늘날까지 인정받고 있는 것은 선사님의 『금강경』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걸출했던가를 짐작케 하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해안 선사님은 후학들은 언제나 법회 뒤에 『금강경』을 독송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게 되었다. 1960년대 말, 해안을 만나 유발 제자가 된 서돈각 박사(대한불교 진흥원 이사)도 해안을 <선교(禪敎)에 두루 조예가 깊은 걸출한 선지식>으로 회고하고 있다.<발췌하여 첨삭 옮긴 글>
*해안 선사님의 제자 분으로 동명스님께서는 서울 성북동 전등사에서 전등선림 선원을 개설하여 해안 선사님의 선풍을 일반 불자와 함께 하루 15시간이상 참선 수행을 지도하고 계시기도 합니다, 동명스님은 해인 강원 학인 시절에 함께 공부했던 1년 선배님이기도 합니다, 참선에 뜻이 있는 불자님들께서는 전등사에 인연을 맺는 것도 좋을 것이라 생각이 듭니다, 뉴스보도에 의하면 성북동 전등사가 묻지마! 재개발로 철거 위기에 놓였다고 합니다, 전등선림은 해안선사님의 선풍 선맥을 이어가고 있는데, 재개발로 철거 위기에 처해있다고 하니, 마음이 아픕니다, 화정 합장,__(())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