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땅공회항' 사태로 촉발된 '갑질' 논란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을(乙)에 대한 갑(甲)의 횡포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법정에서 눈물을 흘렸던 조현아(41) 전 대한항공 부사장은 결국 '영어의 몸'이 됐다. 전문가들은 이번 '갑질' 논란이 재벌가를 비롯한 한국 사회에 큰 경종을 울렸다고 평가했다.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능력 검증 없이 혈연관계로 기업을 상속받아 경영하다 보니 항공기를 되돌리는 비상식적 행동을 저지른 것"이라며 "대중은 실질적으로 인격이나 능력이 부족한 인물이 책임자로서 과도한 권력을 가진 것에 분노한 것 같다"고 분석했다(서울신문 기사 중에서)
2월 12일. 땅콩 회항' 사건으로 구속기소 된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에 대한 1심 선고공판이 열린 서울 서부지법에는 취재진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그 중에는 외신기자들도 상당 수 있었다. 그만큼 국민들의 관심이 뜨거운 사건이었다. 법조계에서는 실형이 불가피하다는 의견과 집행유예가 나올 수도 있다는 의견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오후 3시 30분. 대한항공 조현아(41) 전 부사장이 풀색 수의를 입은 채 서울 서부지방법원 303호 법정에 들어섰다. 피고인들을 위해 마련된 재판정 내 참관인 좌석 앞 2줄 곳곳에는 두툼한 짐이 놓여 있었다. 통상 피고인들에게 집행유예가 선고될 경우 공판 직후 법원 대기실에서 사복으로 갈아입고 구치소가 아닌 집으로 곧장 돌아갈 수 있기 때문에 미리 준비한 것이다.
기자와 일반인 방청객이 발디딜 틈 없이 좌석과 복도까지 가득 메웠다. 평소처럼 쑥색 수의를 입은 조 전 부사장은 처음으로 방청석 쪽으로 얼굴을 돌리는가 하면 변호인과 눈인사를 하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기도 했다. 앉아야 하는지 서있어야 하는지 고개를 들고 두리번거리기도 했으나 이내 고개를 숙이고 귀 뒤로 넘겼던 머리카락을 빼내 얼굴을 가렸다. 몸을 바르게 세우고 고개를 든 채 재판을 지켜보는 여유까지 보였다. 하지만 재판부가 주문을 읽어내려 가자 긴장이 되는지 일어선 상태로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인 채 바닥만 응시했다. 재판부가 자신이 제출한 반성문 6통을 읽어 내려갈 때는 눈을 감은 채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녹색 수의 주머니에서 꺼낸 휴지로 눈물과 콧물을 닦아내기도 했다. 반성문을 대신 읽어내려가는 재판장의 목소리는 낭랑했다.
“저는 그 모든 일을 제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렇게 상황을 만들었고 화를 표출했습니다. 사람에 대한 배려 없이 분노를…. 박창진 사무장과 김모 승무원을 비행기에서 내리라고 해 모멸감을 느끼게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제가 화가 났다는 이유로 일어났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어린 김 승무원이 받은 상처, 박 사무장이 짐을 싸 내릴 때 마음을 사건 당시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래도 될까하는 맘도 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김이나 박도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이고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가족에게도 면목이 없습니다. 지은 죄에 대해 깊은 사과드립니다. 감정은 시간이 지나면서 옅어지지만 어떤 것은 깊어진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일이 없었으면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하다가 김 승무원이나 박 사무장이 제 화를 풀어줬으면 하는 어이없는 생각도 했습니다. 적반하장일 수도 있지만 제가 처한 상황에서 왜 이런 생각이 들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사건 당일에 아무 일도 없었거나 박 사무장이 언론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면 회사를 나오지 않아도 됐겠죠. 하지만 운이 좋았다 하더라도 10년 뒤에는 이곳(법정)에 있었을 겁니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눈물을 흘리거나 모멸감을 느꼈을 겁니다. 저를 더 망치고 한없이 사랑하는 대한항공에 더 큰 피해를 줬을 겁니다. 찬찬히 생각해보니 사람이 그냥 아무 이유 없이 바뀔 수 없습니다. 왠지 그렇게 됐을 것 같습니다. 여기 오지 않았더라면 도움의 손길을 고맙게 여길 기회가 있었을까 싶습니다.
30일전 구치소에 들어왔을 때 저에게 주어진 건 작은 플라스틱 박스와 비누, 칫솔, 내의, 속옷, 양말이 전부였습니다. 수요와 공급이 맞지 않고 생필품을 사는 날짜가 정해져있어 물품 구매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제 주위 분들은 샴푸와 린스, 과자도 선뜻 빌려줬습니다. 고마웠습니다. 제게 땅콩회항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았습니다. 이게 사람에 대한 배려구나. 상대방이 어떻게 느낄까 생각하는 것이 배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든 것이 저의 잘못입니다. 이 사건이 있기 전 저는 맡은 일을 확실히하고 사람들과 스스럼 없이 어울리고 옳고 그름이 분명한 상사이고 싶었습니다.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여기(구치소)에서는 식사 시간이면 밥과 국을 나눠먹었습니다. 저희는 가끔 나름대로 특식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주먹밥, 비빔면 등 제법 공을 들인 음식도 먹었습니다. 제 말수가 적어서인지 저보다 두 살 많은 입소자 언니가 특식을 만들어주겠다고 했습니다. 양념고추장을 곁들여 먹었습니다. 마파람 게눈 감추듯 먹었다고 칭찬받기도 했습니다. 이번 사건에 대한 잘못을 인정합니다. 제 잘못을 알기에 피해자에게 정말로 미안합니다. 피해자들의 상처가 가급적 빨리 낫기를 소망합니다.”
조 전 부사장은 구치감에서 소지품들을 챙겨가지고 나왔을 만큼 실형 선고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징역 1년의 실형이 선고되는 순간 한쪽 손으로 입을 막은 채 계속 눈물을 흘렸다. 선고 전 자신이 쓴 반성문을 언급할 때는 방청객 앞줄에서 울음소리가 들릴 정도로 흐느꼈다. 지난 2일 재판 때의 최후 진술에서는 “엄마의 손길이 간절히 필요한 저의 아이들에게 하루빨리 돌아갈 수 있도록 선처해주시기 바란다”며 읍소까지 했었다. 대한항공 측도 집행유예 선고를 대비해 조 전 부사장이 타고 갈 차량까지 준비했던 터라 실형선고에 대한 충격은 더했다.
재판부는 이번 사건을 "돈과 지위로 인간을, 인간의 자존감을 무릎 꿇린 사건"이라고 규정하고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와 배려가 있었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사건이라고 했다”면서 실형 선고의 배경을 밝혔다. 하지만 일각에선 집행유예 가능성도 점쳤다. 재판부가 조양호 회장을 불러 박창진 사무장의 복귀를 약속받고 사과할 자리를 마련해준 건 집행유예를 염두에 둔 수순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재벌의 잘못된 행태를 비난하는 국민 정서를 재판부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재판부는 여론의 지지를 받고 있는 박 사무장에 대해서도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조직 내에서 '배신자'로 낙인 찍힐 가능성을 염려한 것이다. 재판부는 "사회적 지지와 보호는 일시적이며 국민들은 생계문제로 기억에서 금방 흐려지게 될 것"이라면서 "여론에 의한 사회적 지지가 사라짐에 따라 더 힘든 상황을 겪게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마지막까지 박창진 사무장에 대한 배려를 아끼지 않은 재판부에 경의를 보낸다.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에게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하고 국내에서 처음으로 항공기항로변경죄를 적용한 오성우(46) 부장판사는 ‘돌직구 판사’ ‘쓴소리 판사’ 등으로 정평이 나 있다. 오 부장판사는 지난 2일 열린 결심 공판에서도 조 전 부사장이 “관련자들 진술에 의하면 회사 임직원들에 대해 굉장히 불친절하다고 한다”는 질문에 “그 분들은 평상시에 제가 일하는 것을 보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소문이 그렇게 날 순 있지만 정확히 어떤 소문인지 모른다. 사실이 아니다”라고 대답하자 “피고는 지금 ‘내가 왜 여기 앉아 있나’ 이런 생각 하고 있는 거 아니냐”고 ’돌직구’를 날리기도 했다.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린다는 속담이 있긴 하다. 그만큼 돈의 위력이 대단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잘못된 생각은 고쳐져야 한다. 돈만 있으면 어디라도 갈 수 있겠다 싶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천국에는 갈 수 없다. 돈으로 좋은 침대는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달콤한 잠은 잘 수 없다. 돈으로 좋은 병원에 좋은 약은 살 수 있어도 다가오는 죽음을 되돌릴 수는 없다. 따지고 보면 이 세상에서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이 점을 돈 많은 사람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이번 사건을 담당한 오성우 부장판사는 십수년 전에 창원지방법원에서 근무했다. 내가 경매4계장을 하고 있을 때 경매 1계 판사를 담당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앞으로도 이번 판결에서처럼 정의롭고 사회적약자을 위한 판결을 많이 내려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