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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3:33 |
누가복음 13:20-21 |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
또 가라사대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할꼬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 |
다른 몇 개의 비유들처럼, 예수께서는 직접적으로 이 비유의 의미를 설명하지 않으셨다. 그래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다른 곳에서 상징들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이해한다면 그 의미는 명백하다.
I. 누룩: 이것은 성경에 나오는 상징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쉬운 상징 중 하나다. 누룩은 구약과 신약에 모두 언급되며, 그것이 모형적으로 사용될 때는 언제나 예외 없이 타락의 상징이며, 본질에 스며들어 오염시키는 것을 상징한다. 구약성경에서, 히브리어 스올은 네 번 “누룩”으로 번역되었으며, 한번은 “누룩이 든 빵”으로 번역되었다. 그것은 발효를 가리킨다. 이 단어와 관련된 단어들은 “남겨진 것”과 “남은 자”라는 단어들이다. 그 단어의 발전은 아마 발효된 반죽이 남아 발견된 것을 가리킬 것이다. 히브리어 케메츠는 “누룩”, “발효된” 또는 “발효된 빵”으로 번역된다. 그 의미는 발효되었거나 부풀어진 것을 말한다. 이 단어와 관련된 단어는 “폭력”이나, “잔인” 그리고 “시거나 쓴”이라는 단어들로 번역된다. 공통적인 것은 시고 타락한 것이다. “누룩 없는 빵”이라고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 말은 히브리어 마짜 matstsâh 에서 온 것이다. 그 기본적인 의미는, 빨아 마시거나 게걸스럽게 삼키는 것인데 그 까닭은 달콤하기 때문이다. 즉, 이것이 언급하는 바는, 시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우리에게 누룩이 든 빵에 대한 생각을 주는데, 그것은 마치 오늘날의 이스트(yeast)가 발견되기 전에 누룩이 든 빵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우리에게 준다.
효소를 담은 꾸러미나 항아리 또는 효소덩어리 같은 것이 언제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대부분의 시기에서, 누룩이 든 빵은 우리가 지금 효소가 든 밀가루반죽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누룩이 든 반죽은 가루반죽이나 반죽을 가지고 처음 만드는데, 기술적으로 그것을 스펀지라고 부르는데, 그 말은 발효가 되게 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발효가 되면, 자연 효모와 다른 미생물에 의해 발생한 가스로 말미암아 부풀어 오르고 거품이 생긴다. 이렇게 처음 발효된 것을 떼어 다른 반죽 덩어리에 넣어 그것이 다시 발효되게 한다. 이것을 빵 덩어리 속에 넣고 굽는다. 오늘날 이스트로 만든 빵이 신맛이 덜 나도록 잘 개량된 것과는 달리 효모로 만든 빵은 신맛이 난다.
이것은 때때로 괜찮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언제나 신맛 나는 빵을 먹고 싶어하는 것은 아니다. 유일한 대안은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인데, 그것을 맛짜 matstsâh(오늘날에는 마초 matzo라고 부름)라고 부르는 것은 히브리어로 “달콤한”이라는 의미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신맛 나는 빵과 비교해 볼 때, 그것은 달콤하다. 그래서, 사람들이 더 부드럽고 부푼 빵을 원할 때는 신맛 나는 빵을 먹는다. 그들이 신맛이 아닌 것을 원할 때는 무교병을 먹는다. 대신에 부드럽고 부풀어 오른 빵을 먹는 것을 포기한다. 일반적으로는 둘 다 먹는다.
신맛 나는 빵은 발효에 의해서 부풀어 오르고 거품이 생겨서 신맛이 나고 순수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었기에 오염된 가루반죽이다. 하나님이 이 개념을 사용하셔서 누룩이 든 빵을 이 덩어리에서 저 덩어리로 번지게 하는 부정과 타락의 상징으로 삼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고기를 드리는 제사나 번제에는 누룩이 든 빵을 일절 사용하지 못하게 하셨다. 왜냐하면 그 제사들은 무죄하고 순결하며 오염되지 않은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출 34:25, 레 2:11). 무교절에는 백성들의 가정에서 어떤 누룩도 먹거나 발견되어서는 안되었다. 간단히 말하면, 첫 번째 유월절이 일어난 때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족들에게 어린 양을 잡으라고 하신 때였다. 그리고 그 때 각자의 문설주에 피를 바르며, 문을 닫고 안에서 어린 양을 먹고 있으면 그 동안에 죽음의 천사가 장자를 죽이는 데서부터 보호를 받게 될 것이었다. 이것은 이제 새 언약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실제를 보여주는 그림이다. 어린 양은 우리 죄를 위해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을 보여주며, 문설주 위의 피는 주님의 보혈 아래 우리가 있음을 보여주는데,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보호를 받는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집에서 누룩을 깨끗이 제거해야 했으며 칠일 동안은 무교병을 먹어야 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얻는 순결과 무죄함을 상징하는 것이다.
누룩이 허용되는 다른 제사로는 번제가 아닌 것인데 그것은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오순절에 드리는 두 덩어리로 드리는 소제가 그것이다(레 23:16~17).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첫 열매를 보여준다. 즉,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 오순절 날 실제로 시작된 영혼의 추수를 말하는 것이다.
신약성서에서, “누룩”은 헬라어 쥐메 zume에서 온 말이다. 그것은 발효된 것이라는 의미다. 동사 쥐모오 zumoo는 발효시키다 또는 어떤 것을 부풀게 하다는 의미다. 명사는 이 비유의 첫 부분에 나오며, 동사는 끝부분에 나온다. “무교병”은 헬라어로 아쥐모스 azumos다. 그 의미는 발효되지 않고 부풀지 않은 것을 가리킨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신약성서가 누룩의 상징을 사용하는 것은 구약성경에서처럼 타락의 상징으로 사용한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배울 수 있다. 6절에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고 조심하라”고 하셨다. 이것은 12절에서 설명된다: “그제서야 그들이 이해하고서, 빵의 누룩에 대한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가르침을 주의하라는 것인 줄 알았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주의자들이었고, 사두개인들은 자유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둘 다 타락한 교리를 가르치고 있었다. 누가복음 12:1에서, 더 자세한 설명이 있는데,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 그것은 위선이니라.” 다시 한번, 우리는 타락이나 죄의 형태를 알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위선이다. 그리고 이 위선은 누룩으로 예표된다.
고린도전서 5장에서, 바울은 고린도인들이 용납하고 있던 뻔뻔하고 공적인 죄에 대하여 말씀한다. 그들은 심지어 방향이 잘못된 넓은 마음을 존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6절). 여기서는 누룩의 전염시키는 특성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작은 양의 누룩이 든 반죽이라도 순전한 반죽을 발효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 것이다. 이것은, 사실, 우리가 이 비유에서 보는 그림과 매우 유사하다. 바울은 7절에서 계속하여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유월절과 관련하여 무교절에는 자기 집에서 누룩을 깨끗하게 제거하던 것에서 온 그림이다. 바울은 말하기를, “너희는 누룩 없는 자다”고 했는데, 이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된 것이다. 즉, 우리의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셨기 때문이다(요일 1:7). 8절에서 바울은 말한다,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바울이 언급하는 절기는 날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무교절의 그림자가 그려내는 실제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무죄한 삶의 절기다. 주목할 점은, 바울이 구체적으로 누룩을 “괴악함”(까끼아 kakia 나쁨)과 “악독”(뽀네리아 poneria 무익하고 부정한 행동)과 연결지었다는 사실이다. 누룩이 없게 된다는 것은 “신실함”(엘리끄리네이아 elikrineia 깨끗함, 순결함)과 진실과 연결된다. 갈라디아서 5:7~9에서, 바울은 말하기를,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 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갈라디아 교인들은 진리에서 벗어나 영향을 받고 있었다 바울은 그들에게 경고하면서 누룩이 든 작은 반죽이 전체 반죽에 스며든 비유를 사용한다. 다시 한번, 누룩을 넣음은 타락한 교리를 나타내는 그림을 뜻한다.
성경을 구약과 신약을 살펴볼 때, 누룩의 그림은 타락의 형태-죄, 거짓 교리, 위선, 악독, 사악함 등으로 일관성 있게 해석하고 있으며, 그것은 전체를 쉽게 물들게 하는 것을 볼 때, 누룩을 좋은 것으로 해석해 내는 사람을 볼 때 놀랍기 그지 없다. 그러나, 건전한 주석을 훑어보노라면, 이것이 바로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하고 있는 현실이다. NIV 연구성경(The NIV Study Bible)의 주해에 다음과 같이 기록한 것을 주목해 보자: “성경에서, 효소는 대개 악한 것이나 정결하지 못한 것을 상징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성장을 상징한다. 효소가 반죽 덩어리에 스며들듯이, 하나님의 나라도 개인의 삶에 스며든다.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한) 성령의 내적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가 성장하는 것을 나타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저자가 하고자 하는 말은, 누룩이 대개,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항상 상징하는 것에 대해서는 인정하면서도, 어떤 성경적 근거도 없이, 그것을 무시하고 성경의 지지가 없는데도 해석을 만들어낸다. 다시 한번, 다른 주석가는 이렇게 말한다: “누룩은 종종 악한 영향력을 상징한다. 그러나 여기서 요점은 하나님 나라의 역동적인 영향력이다”(I. Howard Marshallin, The Gospel of Luke: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Grand Rapids: Eerdmans, 1978] 562). 이런 해석에 대한 성경적 증거가 무엇인가? 그는 아무 것도 제시하지 않는다.
누룩 = 타락과 스며들고 전염시키는 성질
II. 여자: “여자”로 번역된 단어는 귀네 gune인데, 그 의미는 보통 명사로서, “여성” 또는 “아내”라는 말이다. 모형론에서, 여성은 옛 언약의 이스라엘을 예표하거나(갈라디아서 4:25, 계12), 하나님의 새 언약 백성(갈 4:26, 계 21)을 나타내거나, 악하고 배도적인 이스라엘(스가랴 5:7~8)을 나타내기도 하며, 겨자씨 비유에 대한 글에서 본 것처럼, 우리가 바벨론 제국이라고 부른 거짓 종교(계 17, 계 2:20)를 나타내기도 한다. 여자가 가루 서 말에 넣은 것은 타락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여자가 나타내는 것이 하나님의 새 언약 백성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제거할 수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과 바벨론 제국을 남긴다. 유대교화된 사람들과 콘스탄티누스 이후 제도화된 교회 둘 다 복음을 오염시키고 타락하게 하려고 애를 썼다는 점을 우리가 생각해 본다면, 어쩌면 우리는 그 여자를 복음을 오염시키고 있는 배도자, 거짓 종교 체계라고 볼 수도 있다.
여자 = 거짓 종교 체계
III. 감추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간과하는 것은 그 여자가 반죽 속에 누룩을 감추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그 단어는 단순하게 “넣는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헬라어로 엥끄뤼쁘또 egkrupto다. 그 의미는 “~안에 감추다”는 말이다. 그 어근은, 끄뤼쁘또 krupto로서 그 의미는 “숨기다”다. 여기에는 은밀히 하는 일과 관련이 된다. 어떤 일이 손 아래서 일어나고 있다.
숨기다 = 은밀하게 숨기다
IV. 서 말: 성경에서 숫자는 종종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세 개가 가리키는 것은 완전함이다. 이 사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이 스스로 안에서 완전하신데 그것은 삼위일체로 계시기 때문이다. 몇 가지 다른 본보기를 임의로 제시해 본다면, 성경에서 삼(三)이라는 숫자가 의미가 있음을 알 것이다. 소제를 드릴 때 분량은 보통 삼이다(예, 레 14:10). 이스라엘 남자가 하나님 앞에 보여야 하는 회수는 일년에 세 차례다(신 16:16). 요나는 거대한 물고기 뱃속에서 삼 일 동안 있었고, 예수께서는 무덤에 삼 일 동안 계셨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세 번 부인했고, 예수께서는 그에게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셨다(마 26:70, 72, 요 21:15~17). 사울은 삼 일 밤낮을 시력을 잃었다(행 9:9).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그의 꿈에서 세 차례나 짐승을 잡아 먹으라고 말씀하셨다(행 10:16, 19).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이다(고린도전서 13:13).
하는 김에 말하자면, 이 비유에서 “말 measure”은 실제로 특정한 단위다. 헬라어로는 사똔 saton이다. 이 말은 히브리어 스아 se'âh에서 온 것이다. 이것은 삼분의 일 에바(ephah)다. 그러므로 이 서 말은 한 에바를 뜻한다. 이것은 창세기 18:6에서 아브라함이 하늘의 방문자들을 위하여 떡을 만들어 드릴 때 나오는데, 그 분량이 동일하다. 한 에바는 부쉘(bushel)보다는 좀 더 많은 분량인데, 8 갤론(gallon)이나 40 리터(liter)보다 좀 더 된다.
서 말 = 완전함
V. 가루가 부풀다: 헬라어로 “가루, meal”는 알류론 aleuron이다. 그것은 알레오 aleo에서 온 말인데, 그 의미는 갈다 to grind는 뜻이다. 그러므로, 갈려진 곡물을 의미한다. 또한 “밀가루”라고 번역될 수도 있다. 곡물이나 갈려진 곡물은 성경에서 세상을 뜻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경주석가들에 의해 가장 일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그것이라 할지라도, 성경은 이 비유에 나오는 가루가 세상을 나타낸다는 가능성을 제거한다. 우리가 여기에서 알아야 할 것은, 가루만이 아니라 누룩이 없던 가루가 누룩으로 부풀려지고 발효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순결한 것이 더럽혀졌다는 의미다. 어떤 것이 점점 시간이 지나 전혀 다른 어떤 것이 되었다는 것을 전에 우리가 어디서 보았는가? 물론, 앞 비유에서 즉, 겨자씨 비유에서 보았다. 누룩의 비유는 겨자씨가 어떻게 나무가 되는지를 보여주는 배경 그림이다. 그것은 거짓 종교 체계에 의해 은연중에 타락되어 모양이 만들어진다. 그 상징은 우리가 알아야 할 것과 들어맞도록 변화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동일한 것을 보고 있다: 본래의 믿음이 타락하여 다른 것으로 바뀌어가는 것.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거대하고 가시적인 교회는 변절한 교회다. 왜 그런가? 타락이 덩이 전체에 퍼졌기 때문이다.
발효된 가루 = 본래적 믿음의 타락과 꼴지어짐
겨자씨와 누룩의 두 비유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순수하고 원래적인 믿음이 타락하고 부자연스런 제도로 바뀌는 것이다. 누룩의 비유가 우리에게 좀더 자세하게 보여주는 것은, 변화가 일어나는 이유는 거짓 종교(그 여자)가 믿음에 타락한 교리를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 교회 안에 타락한 가르침과 타락한 관습이 있을 것을 예상해야 한다. 그렇게 경고를 받았으니, 우리는 베뢰아 사람들처럼 되어야 한다. 우리가 어떤 것을 듣거나 읽으면, 우리는 이 말씀이 과연 그러한가 성경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이 비유를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1) 우리가 교회에서 듣고 읽는 많은 것이 타락한 것이라고 예상해야 한다.
2) 우리는 베뢰아 사람들처럼 되어야 한다. 우리가 어떤 것을 읽거나 들을 때, 우리는 이것이 과연 그런가 하고 성경을 찾아보아야 한다.
3) 위의 사항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말씀에 굳게 기초를 두어야 한다. 우리 각자는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분별하기 위해서 배워야 할 책임이 있다.
4) 우리는 타락한 체계를 개혁하려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당신은 밀가루에서 누룩을 제거해보려고 한 적이 있는가?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일어날 일은 신맛 나는 누룩에 닿은 것은 그것에 감염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해결책은 이것이다: “내 백성아, 거기에서 나오라. 그녀의 죄에 가담하지 말라. 그러면 너희는 그녀가 받을 재앙을 당하지 않으리라”(계시록 18:4). 제도화된 교회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믿음을 보존하는 길이다.
우리가 방금 살펴본 비유가 누가복음 18:8에서 예수님이 이런 질문을 하신 까닭을 설명해준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보겠느냐?” 주목할 점은, 헬라어 원문에 충실할 때, “믿음”이라는 단어는 그 앞에 정관사가 있다(KJV에서는 빠졌다). 예수께서 물으시는 것은 원래적 믿음을 찾아보겠느냐는 것이다. 예수님의 질문에 대하여 “예”라고 대답하는 것을 볼 수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타락을 보고서 스스로를 거기로부터 분리시키는 사람들에게서 찾을 수 있고, 또한 전염될 것을 감안하여 제도화된 교회로부터 격리하는 사람들에게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에 제안한 몇 가지와 같이, 나는 이 글을 마치면서 20세기 침례고 설교가 핑크(A. W. Pink)의 책, 구원자의 귀환(The Redeemer's Return)에서 다음의 글을 인용하고자 한다:
이제 우리는 마태복음 13장에서 네 번째 비유를 봅시다. 그것은 누룩의 비유입니다. 여자가 취하여 가루 서 말 속에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 말입니다. 이 비유는 후천년주의자들의 기반이 되는 본문이기도 합니다. 그 안에서 그들은 의의 통치, 황금시대가 교회의 노력으로 말미암아 올 것이라는 분명한 증거를 봅니다. 그 여자에 대해서 우리가 듣는 바로는, 교회를 상징하며, 서 말 가루는 인류를, 그리고 누룩은 복음을 상징하며, 전 인류에게 조용하고 확실하게 스며들어 하나님을 향하여 그리고 천국을 향하도록 영향을 끼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누룩이 복음의 영향력과 능력이라고 주장하는 가정은 성경의 시험을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서 “누룩”은 하나같이 악한 것의 모습으로 차용되기 때문입니다…… 건전한 주석가가 어떻게 신맛 나는 덩어리 – 부패의 초기 형태 – 를 인간의 마음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기는지 정말 놀랍습니다...... 여자의 행위는 또 하나의 증거로서, 이 비유에 대한 후천년주의자들의 해석이 오류임을 보여줍니다. 즉, 복음의 선포와 확산에 대하여 비밀이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어둠 가운데서 말한 것을 너희는 빛 가운데서 선포하라. 그리고 너희가 귀로 듣는 것을 너희는 지붕에서 선포하라”(마 10:27). 그리고 사도께서도 이렇게 기록하셨습니다: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고린도후서 4:2). 그러나 “궤휼”과 “혼잡”이라는 말이 이 여인의 행동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은밀하게 가루에 오염원을 넣었으며, 그 결과로 빵은 더 먹을만했을지 모르나, 그럴지라도 그것은 더럽혀진 것입니다. 서 말의 가루는 전체 그리스도교를 나타냅니다……
복음은 온 세상을 얻어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고 이 비유가 가르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둠을 빛으로 삼는 격이며 오류를 진리와 동등하게 여기는 격입니다. 만약 누룩이 복음을 상징하는 것이고, 여자는 교회를, 가루는 전 인류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우리가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 주님이 심판을 잘못하셨고 인간의 마음에서 반응하도록 하는 복음의 능력을 전적으로 과대평가하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18세기 동안이나 복음을 전했어도 우리는 단 한 나라에서도 그 백성 전체가 기독교를 고백하도록 만들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전 세계적으로 우리는 단 하나의 도시나 마을 또는 작은 부락에서도 그 거주민들이 다 주 예수님을 믿는 신자인 곳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비유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바는, 부패하게 하는 요인이 일으키는 은밀한 일이 전혀 없게 되는 것이 아니라 타락시킨다는 것입니다.
(출처: http://www.biblebelievers.com/Pink/return28.htm
이 부분을 인용한다고 해서 내가 핑크의 책 전체의 내용과 동의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음에 우리가 공부할 비유는 감추인 보화의 비유다.
한글 번역본: http://cafe.daum.net/Wellspring/TxEG/13
영어 원본: http://www.wordofhisgrace.org/par6treasure.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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