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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본문의 상황과 내용(본문 해설)
1. 본문의 역사적 상황과 문학 형식
(1) 본문의 역사적 상황
누가복음 저자가 가난하고 압제 받는 소외된 자들을 향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왜냐하면 누구보다도 가난한 자, 억눌린 자, 병든 자, 죄 많은 자에 대해 많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는 예수의 사역의 특징을 거론하면서,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고 말하며,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고 요약해 준다. 누가복음 15장의 잃어버린 것을 찾는 세 가지 비유나, 예수의 공생애 제일성인 누가복음 4장 18-19절에 보면 이러한 핵심 주제가 잘 표현되어 있다.
또한 누가복음이 정치적 변증을 주된 목적으로 하고 있음도 주지의 사실이다. 누가가 처해 있던 상황은 로마 제국이 강화된 권력을 휘두르고 있던 때였다고 말한다. 타이센 같은 학자는 누가복음이 자신을 신격화하는 일에 욕심을 숨기지 않은 도미티안의 통치(주후 81-96년)가 종식된 직후에 기록되었다고 추정한다. 그렇다면 누가의 교회가 로마의 박해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일 없이 생존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였을 것이다. 누가복음이 고위직에 속하는 데오빌로에게 보내진 것이나, 예수의 탄생을 기술하면서 가이사 아우구스투스의 칙령에 순종하여 세금을 납부하려고 하는 고분고분한 요셉을 등장시킨 것 등은 모두 누가의 독자들이 기독교가 유해하거나 반항적인 종교가 아니라고 하는 점을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로마 제국이 왕성하게 세력을 확장해 나간 배후에는 필연적으로 권력자와 부자가 득세한 세상이 있었다. 누가는 교회가 세상에 속하여 정착하여 나가는 시간의 경과 속에서 한편으로는 힘 있는 자들과 부자들에게 대한 마지못한 것이었을망정 긍정적 태도를 보여 줄 수밖에 없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난한 자들과 소외된 자들에 대한 애틋한 관심을 표현하였다. 이것은 아이러니지만 누가복음에서 이 둘 사이의 긴장이 노정되고 있다.
타이센의 말대로, 아마 누가 자신은 상류층에 속해 있었거나 상류층에 근접한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았던 것 같다. 그렇다면, 누가는 부자를 무조건 비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교회의 대다수 가난한 구성원들에 대한 연민과 더불어, 이 세상에 순응하면서 기독교의 복음을 전파해 나가야 하는 현실을 조화시키는 일은 피할 수 없는 과제로 등장하였기 때문이었다.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을 해결하는 길은 혁명적인 방법도 있지만,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섬기는 삶을 통해서도 가능하다. 누가는 원칙적으로는 복음의 이상을 외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공생의 윤리를 주장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 같다.
(2) 본문의 구조와 문학 형식
본문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잉태한 후 친족인 엘리사벳을 방문하였을 때,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축복한 내용을 담고 있는 1장 39-45절이 그 첫 부분이고, 마리아가 하나님을 찬양한 1장 46-55절(The Magnificat)이 그 두 번째 부분이다. 첫 부분이 마리아를 향한 엘리사벳의 수평적인 찬미송이라면, 두 번째 부분은 하나님을 향한 마리아의 수직적인 찬미송이다.
누가복음에서 보여 주고 있는 예수의 탄생 이야기가 특이한 점은 마태복음과 달리(마태는 요셉의 가족만을 보여 주는 데 비해) 세례자 요한의 출생 이야기와 병렬 배치시킴으로써 더 큰 가족의 의미를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가족은 좋은 것이지만 작은 자기 가족의 범위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엘리사벳의 찬미송은 아기 예수의 잉태가 사적이고 숨겨진 사건이 아니라 공적이고 외부로 드러난 사건이 되었음을 천명하는 기능을 한다. 마리아의 찬미송은 첫 부분의 내용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뚜렷이 밝혀 주는 역할을 한다[이는 세례자 요한의 출생 이야기가 1장 67-79절에 나오는 스가랴의 송가(Benedictus)를, 예수의 탄생 이야기가 2장 28-32절에 나오는 시므온의 노래(Nunc Dimittis)를 각각 동반하면서 그 의미를 밝혀 주고 있는 것과 같다].
마리아의 찬가는 찬양의 이유를 밝히는 부분(1:48-55)이 핵심인데, 이는 다시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 전반부(1:48-50)는 비천한 여종을 돌아보신 하나님께 대하여 개인적으로 감사하는 내용이고, 후반부(1:51-55)는 공동체 전체로 확산된 하나님의 긍휼을 노래하고 있다. 전반부는 a(48절)-비천한(humble) 계집종의 복, b(49절)-능하신(mighty) 이의 큰 일, a'(50절)-대대에 이를 긍휼하심(mercy)이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주제 면에서 aba'의 구조를 보여 준다. 이에 비해 후반부는 a(51절)-팔로 힘(might)을 보이사……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반전], b(52절)-권세 있는 자(mighty rulers)를……내리치셨으며 비천한(humble) 자를 높이셨고[반전], b'(53절)-주리는(hungry) 자를 좋은 것으로……부자(rich)를 공수로[반전], a'(54절)-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mercy) 여기시고[반전]이라는 abb'a'의 구조를 보인다. 위에서 보는 것처럼 각 구절은 서로 대조되는 내용을 표현하고 있으며, 서로의 위치가 역전되는 반전의 주제를 보여 준다. abb'a'라는 전체 구조를 통하여 ‘비천함-주림-긍휼’의 주제가 강조되고 있고, 이와 대조적으로 ‘교만-권세-부’의 주제가 부정적으로 부각되고 있다.
마리아의 찬가는 한나의 노래(삼상 2:1-10)와 유사하다. 한나의 노래에 나오는 반전과 전복의 주제를 비롯하여, 악한 자에 대한 보복(vindication)과 거룩한 자들에 대한 보호의 내용이 마리아의 찬가에 반영되어 있다. 마리아의 찬가는 한나의 개인적인 찬송의 차원을 확장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이라는 주제로 나아가고 있는 점에서 발전을 보이고 있다.
2. 본문의 석의(주석)와 해석
(1) 본문의 석의
전반부인 1장 39-45절은 마리아가 급하게 나사렛으로부터 유대 산중 마을로 엘리사벳을 방문하는 내용으로 시작하고 있다. 천사의 고지를 통해 마리아는 이미 엘리사벳의 잉태 사실을 알고 있었다(36절). 엘리사벳의 마리아의 방문을 받게 될 때 복중의 아이가 뛰노는 것을 체험하면서 마리아를 가리켜 “내 주의 모친”이라고 고백한다. 두 여인은 상대방의 아이에 대한 정보를 서로 나누면서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찬양을 드리고 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복된 여인이 되었음을 찬양한 것은 ‘주님’의 어머니가 된 것에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하게 된 것은 마리아의 ‘믿음’(45절) 때문이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1장 38절에서 마리아는 천사의 설명을 듣고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믿음을 고백하고 있는데, 이는 마리아의 입장에서 볼 때 엄청난 위험과 수모를 각오한 결단이었을 것이다. 이로써 마리아는 신앙의 모범으로서 등장한다.
복중의 아이가 뛰놀았다는 내용은 이미 구약에서도 전례를 찾을 수 있다. 창세기 25장 22절에는 리브가의 태중에서 쌍둥이가 뛰노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구약에서는 두 형제의 갈등을 상징하고 있는데 비해, 본문에서는 세례자 요한과 주 예수의 상생과 협력의 기쁨을 표현하고 있다. 요한은 복중에서 이미 예수의 선구자가 되었다.
마리아의 찬가(1:46-55)는 엘리사벳의 찬미에 대한 응답송으로서 소개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마리아의 찬가는 한나의 노래와 유사하지만, 구약에는 이와 유사한 찬양시가 많이 있다. 특히 시편 33, 47, 48, 113, 117, 135, 136편들을 보면,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를 포함한 전형적인 찬양시의 구조를 보여 주고 있다.
마리아의 찬가는 도입부(46-47절)에 이어 찬양의 이유를 말하는 부분(48-50절)이 나온다. 찬양의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의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능하신 이가 큰일을 내게 행하셨다”는 것이다. 사내를 알지 못하는 정숙한 처녀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된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속한 것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사건이었다. 그러나 비천한 인간에 불과한 한 여자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임한 것은 또한 크나큰 영광이었다. 마리아는 교차되는 이러한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에 의한 구주의 잉태는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능력만이 이러한 일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러한 하나님의 행동은 죄 많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에 근거한 것이었다. 49-50절에서 하나님이 능력, 거룩, 긍휼을 가지신 분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마리아의 찬가 중 두 번째 부분인 51-53절(54-55절은 결론 부분으로 본다면)은 49절에서 언급한 “큰일”을 세부적으로 설명해 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부분에서 중요한 것은 여섯 개의 동사다. 이 동사들은 하나님의 행동을 강력하게 표현해 준다. 헬라어 구문으로 확인해 보면, 이 동사들은 문장의 첫 부분에(53절만은 목적어가 앞에 있지만) 위치하여 하나님의 결연한 행동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그의 팔로 힘을 “보였으며”,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으며”, 권세 있는 자를 그 권좌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으며”, 굶주리는 자를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행동은 반전과 전복의 주제를 잘 표현해 준다. 이는 한편으로 도미티안 황제의 통치 이념에 대한 적대감을 표출하는 동시에(특히 “권세 있는 자를 그 권좌에서 내리치셨다”는 부분), 누가의 전반적인 휴머니즘 사상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멸시를 당하던 한나와 수치를 당할 지경에 놓여 있던 마리아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이 선포되고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위대한 행동은 결국 구원사의 흐름 가운데서 이스라엘의 구원으로 나타날 것이다(54-55절).
(2) 본문의 해석
본문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교회는 가난한 자와 압제 받는 자, 소외된 자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교회는 힘 있는 자와 돈 있는 자의 편에 서서 그러한 사람들의 눈물과 탄식을 외면하고 있는가? 오늘날 한국 교회는 누가가 비판 받았던 것처럼 세상에 너무 깊숙이 빠져들어 버렸는가? 교회는 세상에 안주하면서 편안함을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 한 분만을 두려워하고 신앙하면서 어떠한 절대적 권력이나 권위에도 굴복하지 않는 특성을 강조하여 왔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의 대상인 인간과 자연을 소중히 여기고 그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투쟁하여 왔다. 기독교는 어떠한 우상도 배격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기독교는 인간을 그 중심에 놓고 있다. 물론 하나님 중심 사상에 기초한 것이지만. 그러나 오늘 우리는 하나님 대신에 권력과 돈을 우상으로 숭배하면서 동료 인간을 억압하고 소외시키는 행동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오늘날 우리는 개인주의로 인하여 공동체성을 상실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개인과 공동체는 분리되어 존재하게 되었다. 특히 본문은 사회적 부조리와 불의를 심판하고 반전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관심과 위대한 행동을 보여 준다. 한 개인의 슬픔과 아픔을 외면하면서 하나 된 공동체가 만들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마리아는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신 하나님의 긍휼을 통해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구원이라는 비전을 보았다. 개인과 공동체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거창한 구호는 있지만 정말 아픈 가슴을 안고 살아가는 개인들의 삶에 관심을 보여 주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잘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3. 본문의 신학적 메시지와 설교 주제 : 설교 구성을 위한 제언
본문은 반전과 전복의 주제를 보여 주기 때문에, 성탄의 의미를 이에 맞추어 설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과 긍휼은 이를 가능하게 한 원천이며 동기다. 마리아라는 한 개인의 비천함을 돌아보신 하나님은 한 개인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하였지만, 사실은 전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위대한 행동을 계획하셨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한나나 마리아의 비천한 처지를 설명하는 것이 효과적일지 모른다. 가능하다면 우리 주변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러한 예를 든다면 더 좋을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거대한 이야기의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우리의 피부에 잘 와 닿지 않을지 모른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경우를 들어 설명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감성적으로도 잘 통할 것이다.
성탄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행동이나 긍휼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우리의 믿음은 뒷전으로 밀려나기 쉽다. 하나님의 구원은 결국 우리 인간의 믿음이 결부되지 않으면 실질적으로 우리에게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믿음에 대한 강조는 지나칠 수 없다. 긍휼에 기초한 하나님의 위대한 행동과 우리의 바람직한 믿음의 태도를 대조시켜 가면서 부각시킨다면 효과적인 구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한 설교에서 모든 것을 다 말할 수 없기 때문에, 51-53절에 나오는 여섯 가지 동사에 바탕을 두고 설교를 구성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하나님의 능력, 거룩하심, 긍휼’이라는 하나님의 속성에 초점을 맞추어도 좋을 것이다.
찬양은 믿음의 최고봉이다. 본문이 찬양시인만큼 구약이나 신약의 다른 찬양시들의 내용을 가지고 보완적으로 설명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특히 찬양의 이유를 설명한 부분에 착안하여 어떠한 형편과 상황에서도 우리의 찬양은 멈출 수 없음을 깨닫게 한다. 성탄의 계절에 우리의 찬양의 이유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 마리아의 찬양에서 보는 것처럼, 개인의 비천함에서 출발하여 하나님의 위대한 행동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 인류의 구원이라는 메시지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Ⅱ. 오늘의 상황과 본문 적용(설교 구성)
1. 설교의 도입
성탄절이 오면 성탄의 많은 이야기 중에 빠지지 않는 것이 마리아의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예수님을 낳으신 육신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야기를 하려면 언제나 마리아의 이야기를 하게 된다. 그러면 마리아는 어떤 여인이었는가?
Robert McAfree Brown이라는 신학자는 “Theology in a neo-key”라는 글에 이런 글을 썼다. “성화(聖畵) 속에 있는 마리아는 초승달 위에 서서 왕관을 쓰고 반지를 끼고 금으로 수놓은 파란 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화 속에 있는 마리아는 누가복음 1장 46-55절에서 성령으로 잉태하여 그의 신앙고백을 노래하고 있는 마리아와는 매우 다른 모습입니다.” 라고 지적하였다.
마리아는 어떤 여인인가? 왕관을 쓴 왕족이었는가? 그렇다면 예수님은 왕궁에서 태어나셔야 했을 것이다. 반지를 끼고 비단옷을 입고 있었던 부자였는가? 그렇다면 요셉과 마리아는 머물 곳이 없어 말구유를 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리아는 왕족도 부자도 아니었다. 당시로 보아도 아주 가난한 여인, 그리고 순박한 시골 여인, 낮이면 들에 나가 하루 종일 뜨거운 태양빛 앞에서 일해야 먹고 사는 집에서 사는 여인, 입은 것이라곤 남루한 베 조각을 걸친 여인, 마리아는 이처럼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는 비천한 여인에 불과하였다. 성탄절에 연극을 하려면 배역 중에 빠지지 않는 인물이 마리아이다. 그런데 마리아를 뽑을 때 보면 아이들 중에 제일 예쁘고 참한 아이를 뽑는다. 그것은 마리아는 예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마리아는 예쁜 여인일까? 나는 그 반대였으리라고 생각을 해본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인간의 판단으로는 가장 낮은 곳에, 가장 약한 곳에, 그리고 가장 보잘것없는 곳에 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이 본문에서 정말 찾고 싶은 것은 마리아의 겉모습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정말 보잘것없는 여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과 그 여인이 부른 노래가 너무나 아름답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약한 것은, 그리고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때로는 하나님의 더 큰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강점이 되는 것을 교훈하기 때문이다. 가난했기 때문에 더욱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함으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있고, 병들었기 때문에 더욱 하나님 앞에 겸손하여 은혜를 체험할 수 있다. 어떤 분은 평생 교회를 다니면서도 성경 한 번을 읽지 못하였는데, 사업이 망하고 부도를 내서 감옥에 가게 되었는데 거기서 성경을 읽게 되고 하나님을 만나 은혜를 입은 분도 있다.
우리가 평안한 때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기 쉽다. 하나님이 돈에 가려서 보이질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향락에 가려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탐욕에 가려서 보이지 않을 때도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있는지조차 모르다가 환난과 시험 가운데서 비로소 하나님을 만나고, 그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사람도 있다.
2. 설교의 본론
오늘 본문은 마리아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가 담겨 있다. 그녀가 받은 은혜가 너무 크기에 마리아는 자기에게 은혜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마리아는 입술로만 찬양한 것이 아니었다. 영혼이 찬양했으며, 감격된 마음으로 찬양했다.
사람은 아무리 좋은 것을 주어도 깨닫지 못하는 자는 감사하지 못한다. 좋은 것을 받아도 감격이 없고 기쁨이 없다. 그 이유는 감사의 이유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집으로 선물이 하나 들어왔다. 그냥 보통 감사하다 하고 지냈다. 백화점에 우연히 갔더니 우리 집에 온 물건과 똑같은 물건이 있었다. 얼마냐고 물었더니 꽤 비싼 가격이었다. “세상에 이런 비싼 물건을 보내다니…….” 보낸 분에게 다시 전화를 했다. 어떻게 그런 비싼 물건을 보냈느냐고……너무너무 감사하다고……. 몇 번이고 그 물건을 만지면서 기뻐하는 나의 모습을 보았다.
우리는 하나님께 구원의 선물을 받았다. 그런데 구원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그래서 이게 무엇인가 하고 눈만 껌뻑거리고 있다. 그러다가 깨닫는 은혜를 경험했을 때, 이것이 천하를 주고도 살 수 없는 귀한 것임을 깨닫는다. 이렇게 깨달은 사람들이 비로소 감동을 한다. “아! 구원이 이런 것이었구나. 나 같은 것이 받을 수 없는 것이었구나.” 하고 알고 나면 감사할 수 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구원의 기쁨은 어느 정도인가? 소리쳐 찬양할 만한 것인가? 소리쳐 자랑할 만한 것인가? 구원의 소중함을 알게 되기를 바란다.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마리아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감사하며 찬양했다. 기뻐서, 감격해서, 심령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찬양하는 내용이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중요한 말,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음이로다”라고 했다.
하나님은 이처럼 비천한 자를 돌아보셨다. 세상에는 비천한 자를 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은가? 연말연시가 되면 사람들이 고아원이나 양로원을 찾아간다. 왜 찾아가는 것인가? 비천한 자를 돌아보기 위해서 가는 것이다. 비천한 자를 돌아보기 위해서 간다고 해야겠지만 그러나 내면 깊이 따져 보면 자기만족을 위하여 가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나도 이렇게 선한 일을 했다.”는 모습으로 세상에 없는 선량한 사람인 것처럼 그렇게 자위를 하고 사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그 고아를 데려다가 자녀 삼으라 하면 할 것 같은가? 노인을 집에 모셔다 부모처럼 모셔라 하면 그들이 할 것 같은가? 모두 다 뒤로 넘어질 것이다.
마리아는 비천한 여자였다. 그는 나사렛 출신의 여자이다. “나사렛에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라고 나다나엘이 말할 만큼 형편없는 마을이다. 하나님이 아니었더라면 그저 그럭저럭 살다가 먼지같이 없어질 인생으로 끝나고 말 여인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비천한 여인을 값지게 만드셨다. 만대에 행복한 여자로 만들어 주셨다.
3. 결 론
오늘 보잘것없는 우리도 하나님은 그렇게 만드셨다. 만대에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 여러분의 천한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약점이 될 수 없다. 여러분의 약한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장애가 되지 않는다. 여러분의 모자라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부족함이 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 앞에 나오는 것이다. 거기에는 용서가 있고 축복이 있고 사랑이 있다. 그 주님 앞에 믿음의 손을 내밀기를 바란다. “주님, 제가 믿습니다.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대하게 만드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귀하게 만드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복되게 만드시는 분이시다. 그 하나님께 마리아는 이렇게 노래한다.
“능하신 이가 큰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큰일을 행하셨습니다. 내가 상상하지도 못한 일을 행하셨습니다.”
요즈음 텔레비전 프로에 사랑의 집을 지어 주는 프로가 있다. 그 찌그러져 가는 집을 다시 수리하고 새 집으로 탈바꿈해 가지고 입주하는 날 공개를 하는데 모두가 입을 딱 벌린다.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분들 하는 말 가운데 꿈에도 이런 집에서 살 줄을 몰랐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는 일을 하셨다. 사형수가 사면을 받은 것처럼 죄인이 의인이 된 것이다. 더 무슨 말을 할 것인가? 하나님이 큰일을 행하셨다.
마리아에게 능하신 이가 큰일을 하셨다. 비천한 여인이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었다. 하루 아침에 천지가 다 아는 여인이 된 것이다. 마리아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녀를 찬양하는 노래도 있습니다. ♫마리아 마리아 사랑하는 마리아♫ 아베마리아 성모여 ♫
이 세상 어떤 여인이 마리아만큼 사랑을 받고 있는가? 하나님이 그녀에게 큰일을 하신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도 이미 능하신 이가 큰일을 시작하신 줄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필연적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리를 행복한 자로 만드셔서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시도하게 하실 것을 나는 믿는다.
이렇게 행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긍휼하신 분, 교만한 자는 흩으시는 분, 비천한 자는 높이시는 분, 주린 자는 먹이시는 분, 도우시는 분, 말씀하신 것을 지키시는 분이시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우리 편이다.”라는 사실을 믿는다. 마리아는 그런 하나님을 믿고 찬양했다. 우리에게서도 찬양의 노래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 편이시다. 그럼으로 힘을 낼 수 있다. 힘을 내자 그리고 그분께 찬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