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동창회
구례 산수유 꽃 축제에 갔다. 원촌초등학교23회 동창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2015년3월21일 오후 한시, 전주에서 승용차를 운전하고 고속도로로 갔다. 차가 막히지 않아 산수유 꽃 축제가 열리는 구례군 산동면 까지는 쉽게 도착 했다. 산동면사무소에서 4km 떨어진 이평리 에서부터 차가 막히기 시작 했다. 도로가 마치 주차장 같았다. 한 시간 반가량 막혀 있다가 4시경에 동창회 장소인 중동 상아파크호텔에 도착했다. 동창회는 오후 5시에 하게되어있어 별 문제 없었다. 참석자는 모두13명(남7,여6)이었다. 여자들은 동창생이 아니고 회원의 부인들이다. 객지에서 온 사람은 나와 목포 최석재 두 사람 뿐이었다.
우리 동창회는 1995년11월1일 원중회(院中會)란 이름으로 결성했다. 원촌초등학교23회와 중동초등학교2회 졸업생이 공동으로 결성하였기 때문이다. 중동초등학교와 함께한 이유는 중동초등학교가 여순반란사건 때 원촌초등학교로 피난을 나와서 함께 공부를 했기 때문이다. 창설할 때의 인원은 46명이었다.
회장은 여수에 사는 차기술, 부회장은 원촌초등학교를 졸업한 임병기와 중동초등학교를 졸업한 임창규다. 총무는 안건선이, 감사는 정중래가 맡았다. 기금은 회장과 내가 50만원을 내고 회원들이 형편대로 20만원등 각자 힘닿는 대로 내서 제법 많았다. 차회장이 여수 자기 집으로 초대를 해서 오동도를 관광 하고, 돌산 회집에서 잔치를 했다. 버스를 대절해서 지리산 노고단 아래 있는 하늘아래 첫 동네 심원마을에 가서 밤을 새면서 동창회를 했다. 차회장이 여수에서 주꾸미 등 생선을 많이 가지고 와서 잔치를 벌이기도 했다. 안건선이 아코디언을 가지고 와서 ‘목포의 눈물’을 연주하면, 회원들은 도구대춤을 추면서 목청껏 따라 부르기도 했는데, 안건선이 뇌출혈로 떨어져서 아내의 도움을 받아 잠긴 친구들 얼굴만 보고 갔다.
차회장은 회장 3년을 하더니 안하겠다고 하여 내가 회장을 맡게 되었다. 내가 회장을 맡으면서 부터는 모임안내를 우편으로 전부 보냈다. 회원이 죽기도 하고 객지에 있는 사람들이 참석도 안하여 많이 줄어들었다. 부회장 두 명과 감사도 죽었다. 그 뒤부터는 회칙과는 달리 회장과 총무만으로 회를 운영하였다. 회의 소집도 객지에 있는 사람은 회장이, 산동면에 거주한 사람은 총무가 전화로 연락을 했다. 동창회 시기는 참석하기 좋은 한여름에 하고 가을에도 했다. 그러다가 <구례산수유 꽃 축제>가 열린 뒤부터는 축제 첫날 했다. 금년이 산수유 꽃 축제가 16회이니 동창회를 축제 때 한 것도 16년이 되었다. 동창회를 결성한지는 20년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강산이 두 번 변한 셈이다. 축제가 열리는 산동면 중동의 산천도 많이 변했다.
저녁식사를 한 다음 산동산수유막걸리를 한잔씩 마시면서 동창회를 시작 했다. 회원7명중에서 몸이 아픈 사람과 아내가 몸이 아픈 두 사람은 집에 가고 5명이 회의를 했다. 안건은 동창회를 계속하느냐 마느냐 였다. 왜 이것이 안건이 되었느냐 하면 총무가 같은 면에 사는 회원들에게 동창회를 알리니 이제 그만 하자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서 결정하자고 했다. 계속하자고 하는 사람은 나와 목포에서 온 최석재 두 사람이고, 그만하자는 사람은 총무인 김해식과 윤권호, 임찬수 였다. 그만하자는 사람들의 이유는 몸이 불편해서 참석을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전원이 다 80세가 넘은 사람들이라 몸이 성할 리가 없다. 회비는 그동안 참석한 사람에게만 3만원씩 거출하고, 나머지는 기금에서 먹고 자고 해서 다 써버렸다. 아침 일찍 온천장에서 목욕을 하고 아침밥을 먹고 동창회는 막을 내렸다. 20년간 희로애락이 점철된 동창회를 끝내고 돌아서니 만감이 교차되어 눈물이 앞을 가렸다. 이제는 누가 죽어도 알려줄 사람도 없게 되었다. 유행가 <고장 난 벽시계>처럼, 동창생들 내외의 세월이 고장 나기를 바랄 따름이다. 동창생들이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기 바라면서 마지막 동창회장소를 떠났다. 운전을 하고 오는데 20년간 동창회에서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갔다.
(2015.3.22.일. 맑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