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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에 '인기척'을 만든 근.현대사의 주인공 |
대하기획 '제주잠녀'6부-제주해녀문화목록 바깥물질 3 독도 물질사 |
▲ 제주잠녀들의 독도 물질 작업은 일제강점기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사진은 '독도주민생활사'에서 발췌한 것으로 독도 바다사자와 있는 김공자씨(왼쪽)와 동굴에 있는 생활근거지의 모습이다. | ||
일제 강제 징용 성격→ 1950년대 자발적 물질로
울릉도에서 7~10시간 뱃길…'실효 지배적 상징'
출가잠녀 기억속에만… 기록 작업 등 속도 더뎌
'출가잠녀'라는 단어는 늘 끝이 가라앉는다. 그리움의 대명사이기 때문이다. 돈을 벌기 위해서건, '섬'생활이 단조로웠건 처음 제주를 떠날 때는 치열했지만 타향살이가 쉬울 리 만무했다. 지금도 바다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제주'라는 단어에 가슴 먼저 뛰는 잠녀들을 만날 수 있다. 동해 바다 외딴 섬 '독도'도 마찬가지다. 교통수단이라고는 풍선에 발동선이 고작이던 시절, 바다를 세 번이나 건너며 독도 물질을 했던 이들의 기억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한 페이지지만 많은 부분 활자화되지 못했다.
일본 기록 통해 확인
6.25 전쟁의 혼란을 틈타 독도 점유권을 차지하려던 일본에 맞섰던 '독도의용수비대'의 이야기를 담은 저예산 다큐멘터리가 제작됐다는 소식이 들린다. 권순도 다큐멘터리 전문 감독의 '독도의 영웅'이 5일 시사회를 통해 일반 공개를 한 뒤 교육용 DVD 등으로 만들어 국내는 물론 전 세계에 보급한다는 계획도 나왔다.
당시 수비대장이었던 고 홍순칠 옹의 부인 박영희 여사가 고증을 하는 등 생생한 재연에 도움이 됐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잘 된 일'이라 박수를 쳐주는 것이 맞는다 어찌된 일인지 섭섭한 마음이 앞선다. 당시 독도의용수비대를 지원했던 제주 잠녀들의 이야기는 아직 구체적인 기록 작업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는 상태다. 당시 독도 물질을 했던 잠녀들의 기억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언제까지'를 장담하기 어렵다.
현재 독도에 거주하고 있는 김신열 잠녀(78.한림 출신)는 1953년 제주잠녀들의 독도 물질 작업에 참여했고, 1975년부터는 아예 독도에서 살고 있다.
기억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1950년대 이후 부터지만 훨씬 이전부터 제주잠녀들은 독도 바다를 누볐다.
일본 시마네현의 '다케시마(竹島.독도의 일본 측 명칭) 관계철'에는 '1921년(대정(大正) 10년)부터 매년 다수의 조선인을 독도로 끌고가 전복과 소라 등을 따도록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1939년(쇼와(昭和) 14년)부터는 90t과 20t 짜리 어선으로 독도주변 해역에서 조업을 했는데 선원 40명 가운데 감독을 맡은 일본인 2~3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조선인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특히 1941년에는 제주도에서 잠녀 16명을 끌고 와 일을 시켰으며 주로 성게를 채취하도록 했다는 내용도 확인된다. 비슷한 시기 독도 어장을 배경으로 히사미(久見) 어업조합을 운영했던 야하다 사이다로(八幡才太郞)가 쓴 '다케시마 일지'의 '독도에는 30여명이 이용할 수 있는 우물이 있었고, 강제징용자들의 숙소로 추정되는 막사 2채가 있었다'는 내용은 실제 독도에 살았던 사람이 누구였는지가 보다 분명해 진다.
▲ 고순자 할머니 | ||
실질적 '독도살이' 의미
해방을 전후한 바깥물질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다. 1953년에 일본의 시네마호가 해산물 실험조사를 위해 독도 부근에 들어갔다가 약 30명의 한국인들이 독도와 그 수역에서 해산물을 채취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일본의 영토인 다케시마에 대한 불법침입으로 간주하여, 독도에 상륙했다는 기사 등에서 유추해 보건데 당시도 적잖은 제주잠녀들이 독도행을 감행한 것으로 풀이된다.
독도의용수비대가 조직된 것이 이 시기였다. 의용수비대 대장이었던 고 홍순칠 대장을 비롯한 의용수비대원들이 독도 방위를 담당해왔는데 서로 한 달에 한번 씩 교대로 번갈아 가면서 3년 8개월 정도 근무를 계속했다
제주잠녀들의 '자발적' 독도 출가물질도 이 시기 시작된다. 자발적일 수밖에 없던 이유도 분명하다. 독도 물질을 했었던 잠녀들의 기억을 종합해보면 제주 잠녀들이 독도를 찾은 것은 1954년 어간이다. 처음부터 독도 바다를 목적했던 것은 아니지만 울릉도 미역 작업을 하러 바다를 건넜던 잠녀들 중 제주와는 다른 '바다밭'관리 기준과 현지 잠녀와의 차별을 견디다 못해 독도까지 갔다는 얘기가 가장 신빙성 있다. 당시 울릉도에서 독도까지 가는데 약 7~10시간이 걸렸다고 하니 여간해서는 선택하기 힘든 일이었다.
1956년 울릉도수산업협동조합이 독도미역채취독점권을 갖게 된 이후에는 기업형 미역 채취가 가능해져 독도 잠녀들의 규모 역시 커졌다.
경북일보의 독도 관련 기사를 보면 1953년 최초로 박옥랑·고정순 등 4명과 1954년 김순하·강정랑 등 6명이 독도에서 물질을 했다. 이후 1955년 홍춘화·김정연 등 30여명이 독도 바다에 자맥질을 하는 등 독도 물질이 본격화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 1956년 이후에는 한해에 많게는 30~40명의 잠녀가 독도에 입도해 물질 한 것으로 확인된다.
해마다 미역철인 3월에 독도에 들어가 5월까지 석달 정도 생활하고 겨울에도 해삼과 천초를 얻기 위해 한 두 달 사는 일이 다반사였다.
'물'불편을 던 것은 1960년대 들어서면서 부터다. 인위적으로 물을 저장할 시설이 만들어지며 사정이 나아졌다. 간이 화장실이라 부를 수 있는 편의시설과 작업한 미역 등을 임시 보관하는 창고 같은 것도 이 시기 생겨났다.
1970년대 양식 미역이 나오면서 울릉도·독도로의 출가 물질은 자연스레 줄어들었지만 없어지지는 않았다. 1973년 이후는 전통 나잠이 아닌 머구리 작업으로 형태가 바뀐채 독도행이 이어졌고, 완전히 발이 끊긴 것은 1990년대 초로 추정된다.
국내 독도 사이트 '잠녀' 정보 전무 | ||||||||||||
생태지도중 '해녀바위' 유일 지난해 해양수산부는 처음으로 독도해역 지형, 어족 등 생태환경과 수중경관을 생생하게 그린 독도 바닷속 생태지도를 만들었다. '독도의 지속가능한 이용을 위한 기본계획'에 따라 2008년부터 조사를 해왔던 독도 해역 가운데 수중 경관이 빼어나고 해양생물이 다양하게 분포하고 있는 5곳을 대상으로 제작된 생태지도에 반가운 이름이 나왔다. '해녀 바위'다. 현재 독도를 홍보하고 있는 인터넷 사이트들에서 잠녀나 해녀 등의 연관어를 통해 정보를 찾을 수 있는 곳은 단 한 곳도 없다. '해녀 바위'가 검색되는 것이 유일할 정도다. 본의 독도 도발을 부추겨온 '다케시마의 날'(2월 22일) 제정 10년을 맞아 진행된 한.일 양국의 국가기관 독도 홍보 웹사이트 비교 학술대회에서 조차 접근성의 문제만 지적됐을 뿐 '실효지배적 의의'의 상징인 제주 잠녀의 역할을 부각시킬 방법은 거론되지 않았다. 생태지도 속 해녀 바위에는 '녹색정원'이란 수중 명칭이 부여됐다. 잠녀문화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 등재 작업과 더불어 국내에서 제주 잠녀의 역할을 강조하고 국가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작업을 서둘러야 할 이유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