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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노(Aurelius Augustinus)
4세기 알제리 및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기독교 신학자이자 주교로, 로마 가톨릭교회 등 서방 기독교에서 교부로 존경하는 사람이다.
당시 서방교회의 지도자이자 고대 그리스도교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로 일컬어진다.
〈신약성서〉에 나타난 종교성과 그리스 철학의 플라톤 전통이 그에게서 완벽하게 융합되었다. 그러한 그의 사상은 중세 로마 가톨릭 세계로 이어졌고 르네상스 시대의 프로테스탄트를 낳았다.
유명한 〈고백록 Confessions〉이 없었더라도 그의 중요성은 인정되었을 것이다. 45세 때 쓴 〈고백록〉은 잘 알려진 대로 12년 전 로마 가톨릭에 귀의함으로써 끝난 그의 방황과 유년시절을 기록한 책이다. 그런데 잊기 쉬운 사실은, 아우구스티노의 진짜 작품이 〈고백록〉 이후에 나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게다가 〈고백록〉은 전기라기보다는 감사와 회개에서 나온 봉헌물이라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고백록〉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낀 주교가 무릎 꿇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기억해낸 사실들이라는 점이다. 그렇다고 아우구스티노를 이해하는 데 〈고백록〉이 쓸모없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그림은 적당한 비례로 그려져야 하며, 배후에 있어야 할 것을 앞으로 끌어내 지나친 찬양을 해서는 안 된다.
어린시절개요
현재 알제리 해안의 현대식 항구인 히포레기우스는 당시에는 로마의 속주 누미디아에 속해 있었다.
아우구스티노는 거기서 약 72km 떨어진 타가스테(지금의 수크아라스)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가정은 중산층이었다. 아버지 파트리키우스는 말년까지 이교도로 남아 있었다. 어머니 모니카는 열성적이고 경건한 그리스도교도였다. 어린시절 어머니의 교육으로 아우구스티노는 '그리스도의 이름'에 대해 경외심을 품었고 그 영향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유아세례는 받지 않았다. 초·중등학교를 거치면서 아우구스티노가 지적인 재능을 보이자 가족들은 학비를 마련해 공무원을 시키려고 했다.
19세 때 카르타고에서 학생이 된 그는 지금은 유실된 키케로의 글 〈호르텐시우스 Hortensius〉를 읽고 크게 감동을 받았다. 그때부터 그는 '철학'에 대한 정열로 가득 찼다. 그것은 단순히 진리를 추구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세속적인 야망보다 명상하는 삶을 더 낫게 여겼다는 뜻이다. 그의 눈에 비친 가톨릭 교회의 신앙은 문화인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비철학적이었다. 그래서 어느날 마니교를 알게 되었을 때 그는 권위보다 이성에 호소하는 마니교에 쉽게 심취했다.
마니교의 영향
서로마 제국에 퍼져 있던 마니교는 유물론적 이원론이었다.
세상을 빛과 어둠의 투쟁의 산물로 보고 인간의 영을 어둠 속에 있는 빛의 요소로 보았다. 마니교는 스스로 참된 그리스도교라고 주장하며, 그리스도를 옥에 갇힌 자녀들을 탈출시켜 본향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해방자로 보았다. 마니교회에서 '선택된' 고위 성직자들은 철저히 금욕적이고 독신이었다. 육적인 것은 모두 어둠의 세력에 봉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노는 마니교에 9년간 몸담고 있으면서 천한 집안 출신의 여자와 교제하여 아들을 얻었고 그 아들을 몹시 아꼈다. 그러는 동안 '청자'(聽者)라는 낮은 직책을 마니교에서 얻었는데, 그 직책에는 육신의 약함이 인정되어 결혼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이 '계몽의 종교'에 대한 아우구스티노의 열정은 오래 가지 못했다. 마니교 지도자들의 지적 수준이 낮아 아우구스티노의 물음에 대해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점차 환멸을 느낀 그는 꽤 널리 퍼졌던 반(反)영지주의를 수용했다. 그리하여 28세경 그동안 자유교사로 수사학을 가르치던 카르타고를 떠나 더 나은 학생을 찾아 로마로 갔다.
친분관계를 통해 그는 당시 서로마 황제가 머물고 있던 밀라노에서 정식 교수로 일할 수 있었다.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오는 당대에 가장 뛰어난 그리스도교 성직자였다. 아우구스티노는 암브로시오를 소개받았으나 가까이 할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노는 암브로시오의 설교를 들으러 갔고 거기서 그리스도교 지성과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암브로시오의 설교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아우구스티노의 편견을 흔들어놓기에 충분했다. 그가 마니교를 버리기는 했지만 그때까지 유물론적 전제들이 남아 있어, 궁극적 실재에 대한 마니교의 교리를 대체할 만한 답을 발견하지 못한 채 회의에 빠져 있었다. 그리하여 설교를 들은 후에도 하느님의 존재, 죄의 본성과 기원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아 있었다.
신플라톤주의의 영향
신플라톤주의의 저술을 접하면서 그 2가지 문제가 동시에 풀렸다.
아우구스티노는 암브로시오의 설교를 통해 신플라톤주의에 대해 어느 정도 익숙해지게 되었다. 3세기의 철학자이자 신비주의자인 플로티노스에게서 비롯된 신플라톤주의는 오직 하나의 실체만 인정하는 영적 일원론이다. 그에 따르면 이 세상은 절대 단일체로부터 일련의 유출과정을 거쳐 이룩되었다고 한다. 초월적인 일자(一者)에게서 자의식을 가진 정신이 나온다.
그리고 그 정신으로부터 영혼 또는 생명이 나온다. 영혼은 정신과 육감 사이에 있는 매개물이다. 물질은 일자의 가장 낮은, 최후의 산물이다. 한편 일자는 실재이면서 선이기 때문에 악의 잠재성이란 결국 일자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진 물질이되 무형의 물질과 같은 것으로 여겼다.
따라서 악이란 모든 사물의 최소한의 가능성이요, 선의 결핍에 지나지 않았다. 한편 신플라톤 신비주의에는 내면이 외부보다 우월하다는 원칙이 있었다. 그러므로 선에 이르려면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궁극적 실재에 도달하는 정신은 인간의 가장 깊은 자아의 중심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고백론〉 제7권을 보면 아우구스티노가 그같은 내면화를 거쳐 하느님을 발견한 대목이 나온다.
내재적이며 동시에 초월적인, '변하지 않는 빛'인 하느님은 우리의 직관을 통해 진리와 선을 알려주는 근원이다. 그러한 하느님의 발견은 합리적인 추리의 결론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신비적인 체험이요, 환상이며, 왔다가 사라지는 접촉이었다. 하느님의 발견으로 아우구스티노의 오랜 의문이 풀렸다. 하느님은 빛이며 악은 어둠이다. 그것은 마니교에서 말한 바와 같지만 어떤 것도 물질은 아니다. 하느님의 영원한 빛은 순수하게 정신적(영적) 실체이며, 어둠이 실체가 아니라 빛의 결핍이듯이 악은 실체가 아니다.
그리스도교로 회심
아우구스티노의 신비체험, 하느님에 대한 경험은 순간적인 것으로 쉽게 사라졌다.
그는 자기가 최고가치를 정신(영적인 것)에 두지 않고 아직 육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사실 신플라톤주의는 마니교의 원칙을 더 강화하고 있었는데, 하느님에게 돌아가려면 육에서 떠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우구스티노에게는 우선 성적인 욕망에서 즉각 떠나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고백록〉 제8권에 나오는 유명한 회심 이야기는 어떻게 그가 동서의 그리스도교 금욕주의를 시행했는지, 어느 정도 그가 자기의 육체적 연약함 때문에 스스로를 경멸했는지 보여주고 있다.
그의 육체적 저항은 마침내 밀라노의 정원에서 끝났다. '집어 읽으라'(tolle, lege)는 어린아이의 소리에 그는 〈신약성서〉를 펼쳐 바울로의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온몸을 무장하십시오. 그리고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십시오"(로마 13:14).
386년 늦여름의 일이었다.
방학이 가까웠으므로 그는 학교를 떠나 그의 제자들, 아들 아데오다투스, 어머니 모니카와 함께 시골로 내려가 친구에게 빌린 집에서 독서회를 가졌다. 거기서 행한 문학수업과 철학토론에서 현존하는 아우구스티노의 최초의 저술들이 나왔다. 그것은 주로 대화들로서 종교적 회심에 대한 강조가 별로 없고 그리스도교적인 주제도 별로 다루지 않고 있다. 그때문에 훨씬 후에 씌어진 〈고백록〉의 정확성에 대한 의문이 학자들 사이에 많이 제기되었다. 성적 본능에 대한 아우구스티노의 투쟁이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를 읽고 결심한 '철학적 삶'의 최종 국면이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387년 봄, 그가 암브로시오에게 세례를 받을 때 이미 그리스도교도였음을 부인할 이유는 없다. 물론 3, 4년 후 〈참된 종교 De Vera religione〉를 쓸 때까지도 그는 그리스도교를 신플라톤 철학으로 푼 것이 사실이다. 〈참된 종교〉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느님의 말씀(로고스)은 플로티노스의 정신과 같으며, 인간의 이성을 비추고 인간으로 하여금 초월자 하느님에게 도달하도록 한다.
또 그리스도의 인간적 삶은 육적인 고통과 쾌락을 이겨낸 금욕의 표본으로 그려졌다. 그리스도교의 도덕은 영혼을 맑게 하여 관조의 삶에 이바지한다고 생각했고, 훈련을 위해 교회의 권위를 받아들이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이라고 보았다.
주교 및 그리스도교 철학자 아우구스티노개요
세례를 받은 직후 아우구스티노는 어머니와 친구 몇 명과 함께 밀라노를 떠나 아프리카로 돌아갔다.
로마의 항구 도시 오스티아에서 어머니가 죽었다. 아우구스티노는 어머니와의 마지막 대화를 기록해두었는데, 거기서 그는 신플라톤주의의 용어를 빌려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올라가는' 이야기를 나누어 어머니와 함께 영생의 신비체험을 했다. 타가스테의 집으로 돌아온 뒤, 친구들과 소공동체를 만들어 종교적인 명상과 연구에 몰두했다. 그러나 391년 히포를 방문했을 때 그의 평화는 깨졌다. 아우구스티노는 권유에 못 이겨 사제서품을 받고 늙은 주교 발레리우스의 보좌사제로 일했다.
5년 후 발레리우스가 죽자 아우구스티노는 주교가 되어 죽을 때까지 봉직했다. 로마령 아프리카의 주교는 교구의 사제, 교사, 설교자일 뿐 아니라 자주 발생하는 민사사건의 즉결 재판장 역할도 해야 했다. 아우구스티노의 건강이 아주 좋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막대한 분량의 저술은 속기사의 꾸준한 봉사와 그의 정돈된 사고력 덕택이다.
남아 있는 400개의 설교문이 그것을 입증한다.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명성이 높아짐에 따라, 그에게 해결을 요청하는 질문들이 많아졌는데, 그의 저술은 대부분 그런 질문들에 대한 답변으로 작성된 것이다. 그의 편지가 200개 이상 보존되어 있는데, 대부분이 소논문이 될 만큼 긴 분량이다. 그는 끊임없이 이단과 논쟁을 벌였다. 마니교·도나투스파·펠라기우스주의가 대표적인 이단들이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노주의라고 할 만한 그의 심오한 사상은 성서주석과 설교집에 들어 있다.
특히 〈시편〉 주석과 〈요한의 복음서〉·〈요한의 첫째 편지〉에 대한 글들이 뛰어나다. 그가 이룩한 신학적 특징은 논쟁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의 사상이 형성되는 데 결정적인 전환점은 사제서품이었다. 그결과 그는 원래 뜻을 두었던 명상의 생활에서 떠나 세상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그의 연구도 철학에서 성서로 방향전환을 하게 되었다. 그의 목회지 아프리카는 아직 사람들이 완전히 그리스도교화되지 않았던 반면 그의 마음은 급속도로 성서적 종교에 심취했기 때문에, 신플라톤주의와 바울로의 그리스도교의 차이를 더이상 묵과할 수 없었다.
세례 이후 그가 원했던 유일한 지식은 하느님과 영혼에 대한 것이었다. 하느님을 발견하려면 내면으로 들어가라는 플로티노스의 가르침도 무익한 것은 아니었다. 성서에도 사람의 영혼 속에 하느님과 비슷한 것이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플라톤주의에서 말하는 인간 영혼의 신성(神性)이 축소된 신성이라면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신성은 '영원하고 변치 않는' 것이 잠깐 스친 것이요, 그래서 변하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노는 영혼에 들어 있는 형상을 따라 하느님을 아는 작업이 그리스도교 철학자의 임무라고 믿었다. 물론 그리스도교 철학자는 성서적 계시의 인도를 받아야 했다. 바로 그런 길을 따라 쓴 위대한 논문이 〈삼위일체론 De Trinitate〉이다. 영혼의 본성을 알려면 즉각적인 자기의식이 있어야 한다고 그는 믿었다.
영혼의 자기의식은 하나 속에 셋으로 되어 있으며, 그러한 자기의식이 '어두운 유리처럼' 창조주의 존재를 반영하고 있다. 그는 사람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 생각한다는 것, 의지한다는 것은 전혀 의심할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존재하고, 인식하고, 의지하는 내가 있다. 그러나 그 3가지 가운데 어느 것도 혼자 따로 떨어질 수 없다. 어느 것 하나만으로는 존재를 유지할 수도 없고 욕구를 채울 수도 없다.
하느님은 "모든 존재의 조물주요, 모든 진리를 비추는 빛이시요, 모든 복을 주시는 분"(〈신국론 De civitate Dei〉8:4)이다. 그는 그것을 플라톤주의에서 배웠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우주론·지식론·윤리학은 그 자신의 것이다. 그의 이론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우주론
플로티노스가 말하는 창조는 아무런 목적도 동기도 없고 신의 자기 관조의 자동적인 부산물이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노는 창조를 "선한 것이 있도록 한 선한 하느님의 의지"(〈신국론〉 11:21)의 결과라고 보았다. 뻗어나가는 창조적 사랑의 힘이 그의 신학 전체의 핵심을 이룬다. 하느님의 창조 의지 없이는 아무 것도 존재하거나 존속하는 것이 없으므로 '존재를 가지고 있는 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선하다. 그리고 분명 선의 등급이 있으니 존재의 등급도 있다. 그러나 '비존재'에 가까운 무형의 물질이라도 하느님이 만들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선하다.
악의 기원을 물질에서 찾으면 안 된다. 아우구스티노는 악의 책임을 물질적 조건에 돌리려는 데 반대했다.
지식론
플라톤을 따라 아우구스티노는 참된 지식을 만드는 능력을 밖에서 주입되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교사가 할 일은 학생이 이미 알고 있되 다만 의식하지 못하는 것을 스스로 보도록 돕는 데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직관적 지식의 예로 수학적 명제들과 도덕가치의 인식을 들었다. 그것들은 어느 한 개인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누구나 똑같이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사상가는 진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다. 사상가가 진리를 발견하는 것은 계시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인 그리스도가 '내면의 스승'이 되어서 그에게 귀기울이는 자마다 진리를 스스로 볼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윤리학
아우구스티노는 고대 윤리이론의 기본 가설을 수용했다.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 즉 인간의 보편욕구인 행복 또는 복지를 위해 행동하라는 것이다. 질서정연한 아우구스티노의 우주 속에서 가치의 등급은 존재의 등급과 일치했다. 존재 등급이 낮은 것은 높은 것에 복종하도록 되어 있었다. 육은 영, 곧 정신에 복종해야 하고 정신은 하느님에게 복종해야 한다. 인간은 우주 속에서 자기의 위치를 알아야 하고, 또한 흔쾌히 받아들여야 한다. 자기 자신과 다른 모든 것에 각기 합당한 상대적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
행동에 영향을 주는 윤리적 가치평가를 위한 아우구스티노의 용어는 '사랑'(amor)이다. 사랑은 사람이 행동하도록 하는 도덕적 힘이다. 사랑의 방향이 올바로 되어 있을 때는 등급이 낮은 존재에 높은 가치를 두는 일이 없다. 낮은 선은 높은 선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어야 한다.
최고의 선만을 궁극적 목표로 마음에 두고 '즐겨야' 한다. 인간은 최고의 선 속에서만 완전히 도달하는데, 아우구스티노에게 있어서 최고선은 하느님이다. 하느님은 사랑이며, 〈신약성서〉에서 말하는 '아가페'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사랑이 하느님을 즐기는 데 이르면 그는 '아가페', 곧 사랑 자체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하느님이 자신을 사람에게 주었으니, 그런 하느님의 사랑 속에서 사람은 서로를 사랑할 수 있고, 하느님처럼 자신을 남에게 줄 수 있는 힘을 지닐 수 있다.
도나투스파 분리주의에 대한 아우구스티노의 투쟁
주교 재임 첫 15년 동안 아우구스티노는 목회로나 저술로나 그 열정을 대부분 분리주의를 종식시키는 데 바쳤다. 아프리카 교회에 퍼져 있던 분리주의는 거의 1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그리스도교 분파인 도나투스파(지도자 도나투스의 이름을 땄음)의 숫자는 여러 지역에서 가톨릭교도보다 많았다. 그들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발생한 대박해(303~313) 때 배교한 자들의 때가 묻지 않은 자기들만 참된 교회라고 주장했다.
분리주의를 제거하려던 제국 정부의 노력은 오히려 순교자 정신을 부추겨 도나투스파에게 득이 되었다. 순교자 정신은 당시 아프리카 그리스도교의 특징이었는데, 종교적 차원보다는 사회·경제적인 차원에서 슬픔을 안고 있던 아프리카 원주민들에게 도나투스파의 순교는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한편 분리주의는 폭력을 통해 세력을 유지했기 때문에, 평화적 토론을 통해 문제의 핵심을 풀려 했던 아우구스티노의 노력은 무위로 끝났다.
결국 제국 정부는 도나투스파가 아프리카의 안정을 해친다고 믿게 되었다. 도나투스파 주교들은 411년 정부의 중재로 카르타고에서 열린 공식회의에 참석하여 가톨릭 주교들을 만나도록 강요되었는데, 그 회의는 가톨릭 교회의 승리로 끝나도록 되어 있었다.
사제가 집전하는 교회의 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은총이 신자에게 전달된다는 것이 도나투스파와 가톨릭 교회의 공통된 견해였다. 그런데 도나투스파는 사제가 심각한 죄에 오염되어 있지 않아야 성사가 타당성을 지닌다고 주장했다. 하느님의 은총은 죄인을 떠나며, 죄인은 '자기가 지니지 못한 것을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우구스티노의 답변은 성사가 하느님의 은총을 전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기름부음 때문이므로 사제의 품행과는 상관없다는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교회의 통일성은 성령의 최고 선물인 사랑에 근거하는데, 분리주의자들은 그것을 부인했다. 분리주의를 종식시키는 수단으로 설득 이외의 다른 방법을 계속 반대했던 아우구스티노는 불행하게도 끝내 도나투스파에 대한 법적 제재를 승인하게 되었다. 그것은 도나투스파의 폭력이 무서워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랑이여, 네가 원하는 것을 하라"는 그의 명언은 사실 사랑으로 행한 추방을 정당화하는 말이었다.
이단 펠라기우스주의에 대한 아우구스티노의 투쟁
도나투스파 논쟁이 끝나기 전부터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서방교회의 전통적인 죄론과 구원론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펠라기우스는 그리스도교의 도덕이 느슨해지는 데 반발하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인간의 연약함을 이유로 실패에 대해 변명하자 펠라기우스는 하느님이 누구에게나 동일한 자유를 주어 선을 선택하고 완성할 수 있게 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하느님이 금지한 행위, 피할 자유가 있었던 그런 행위를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 죄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만일 그러한 자유가 없다면 하느님의 심판과 보상이 정당하지 않다고 보았다.
이처럼 그리스도교를 냉엄한 도덕주의로 환원했기 때문에 펠라기우스주의는 교회의 평범한 성사나 전례와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회는 세례를 베풀어 '죄를 씻어왔고', 유아도 아담의 죄를 이어받았다고 하여 세례를 주었다. 바울로의 가르침에 따르면 아담의 범죄가 인류 전체에게 사망을 가져왔다고 했기 때문이다. 원죄의 교리는 아우구스티노 이전에 이미 서방교회의 확고한 교리로 뿌리를 내렸다. 따라서 펠라기우스의 제자 켈레스티우스가 공개적으로 원죄를 부인했을 때, 펠라기우스주의는 이단으로 단죄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펠라기우스가 발을 빼자 교황 조시모(417~418 재위)는 전임자 인노첸시오 1세가 내린 단죄를 번복했다. 그러다가 418년 봄, 아프리카의 주교들이 이단자를 추방하는 칙령을 황제 호노리우스로부터 얻어내자 조시모는 거기에 동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우구스티노는 교회를 위한 투혼으로 가득 찼다.
그는 펠라기우스주의가 단지 그리스도교의 세례를 반대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치명적으로 오해하고 있음을 즉시 알아차렸다. 사람이 자기 노력으로 의로움을 얻는다는 것은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그리스도교의 기본 진리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논쟁이 있기 전에 아우구스티노는 원죄와 은총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작업을 했다.
물론 합리적 설명을 교회가 완전히 받아들인 적은 없다. 아무튼 그는 원죄를 믿는 교회 전통을 받아들였다. 원죄는 아담이 지은 죄의 결과인데, 아담의 죄란 창조 질서 속에서 인간이 자기 위치를 지키지 않으려 한 것이다. 그결과 인간 자신의 질서마저 혼란하게 되어 육이 영에 대적하게 되었다. 아우구스티노는 주장하기를, 모든 사람이 아담의 죄와 벌에 참여하고 있는데, 그것은 성교를 통해 출생한 점에서 분명하다고 했다.
성적 충동이란 영이 육을 다스리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노 말년에 에클라눔의 펠라기우스주의자 주교 율리아누스가 치명타를 가한 것이 바로 원죄를 성교와 연결시킨 부분이다. 그는 인간의 피조된 본성에 속하는 본능은 도덕적으로 중립이라는 대담한 주장을 했다. 그는 아우구스티노가 마니교로 되돌아갔다고 공격하면서 싸워 이겨야 할 충동을 아우구스티노가 악으로 만들고 말았다고 했다. 아우구스티노는 사랑의 질서가 파괴된 데서 인간타락의 의미를 찾았다.
하느님의 사랑에서 떠나 인간은 자기사랑을 추구하고 자기보다 낮은 것에 예속되었다. 인간은 자기 행위로 타락했으며 자기의지로는 타락의 결과를 돌이킬 수 없다. 영이 육에 예속되었으므로 인간은 노예이며, 그러한 노예의지는 구원 자체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를 구원할 수 없다. 필요한 것은 무게중심을 뒤집는 일이다. 밑으로 내려가는 사랑을 위로 올라가는 사랑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리고 그 일은 죄인 안에 있는 하느님의 사랑의 은총으로만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것이 강생과 성령 강림의 복음이라는 것이다.
한편 펠라기우스의 주장은 다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보기에 옳다고 생각되는 것을 행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도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모범 속에서 도덕적인 빛을 필요한 대로 모두 얻었다고 했다. 아우구스티노는 펠라기우스의 주장, 즉 자유를 타고난 것으로 보는 관점이나 환경에 관계없이 선택할 수 있는 절대적 힘으로 보는 관점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도덕적인 행위도 그 행위자의 상황에 따라 많이 좌우됨을 지적하면서, 똑같은 행위를 했어도 주체가 누군지, 어떤 목적으로 했는지, 어떤 감정으로 했는지 따위가 고려되어야 한다고 했다. 게다가 의지의 움직임은 지식뿐 아니라 감정에도 좌우된다고 하면서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옳은 일을 하지 않는다. 무엇이 옳은지 몰라서 그렇기도 하고 옳은 일이 달갑지 않아 그렇기도 하다.
그런데 몰랐던 것은 알게 될 수 있으나 달갑지 않은 것이 달갑게 되지는 않는다. 그렇게 되려면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하다"(〈죄의 용서 De peccatorum meritis et remissione〉)
옳은 것을 기뻐하는 마음 없이는 좋은 일을 하는 데 참자유가 없고 노예처럼 율법에 끌려다닌다. 이것이 아우구스티노의 주장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자유이다. 그리스도교도의 삶의 동기가 되는 그 하느님의 사랑은 바울로가 말한 대로 성령의 은총으로 인간 안에 들어간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노는 성령의 선물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 완전히 자유로운 것으로 보기가 어렵다고 생각했다. 은총에 인간의 완전한 자유가 끼어들 자리가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인간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하느님이 일으킨 것 아니면 사람이 일으킨 것이라는 생각에서 아우구스티노는 인간의 선한 행위를 오직 하느님 때문이라고 보게 되었다. 한편 주교 재임 첫해에 아우구스티노는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9~11장을 연구한 결과 시간 안에서 일어나는 어떤 사건도 어떤 사람을 향한 하느님의 영원한 뜻을 바꿀 수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하느님의 선택은 창조 전에 정해졌다. 성령이 어떤 특별한 상태로 주어질 때 한 개인이 어떻게 응답할지 하느님은 알고 있다. 시간의 흐름과는 별개로 알고 있다. 그래서 오직 선택된 자만이 은총을 받아들인다.
펠라기우스의 도전에 부딪혀서도 아우구스티노는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펠라기우스주의자들과 논쟁하는 동안에 썼던 걸작 〈신국론〉에서 보이지 않는 두 사회, 곧 선택된 사회와 저주받은 사회의 '처음과 중간과 나중'을 장엄하게 그려냈다.
작품의 구상은 410년 서고트족이 로마를 점령하여 제국을 뒤흔들어놓기 전부터 그의 마음 속에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신국론〉은 로마의 재앙이 옛 종교를 버렸기 때문에 받는 벌이라는 이교도들의 주장에 대해 그리스도교를 옹호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두 도시 가운데 하나는 그리스도교 교회이고, 다른 하나는 이교도나 세속사회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없다. 두 도시는 천사들의 타락 이후 하느님의 창조질서 속에서 서로 경합하고 있는 2개의 영적인 힘을 상징하고 있다. 하나는 신앙이고 하나는 불신이다.
그것은 '자기를 사랑하고 하느님을 미워하느냐, 아니면 하느님을 사랑하고 자기를 미워하느냐'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그 2개의 힘 가운데 어떤 것도 이 세상에 순수하게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는 하늘의 도성과 땅의 도성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만일 〈신국론〉에 역사철학이 있다면 그것은 종교적인 예정론 철학이 될 것이다.
노년에 아우구스티노는 자기 학설이 몇몇 제자들에게 이해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아우구스티노가 도덕적 노력을 무의미하게 만들었고, 칭찬이나 비난을 모두 근거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후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마지막 논문에서 예정론을 논리적으로 밀고 나가 잔인한 결론에 도달했다. 마지막으로 손질된 그의 학설이 교회에 의해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가장 예리한 사상가라고 할 수 있는 스콜라 학파의 토마스 아퀴나스나 종교개혁자 칼뱅의 작품에 그대로 재등장했다.
그의 작품은 진실로 이 세상에 얽매인 인간이 하느님의 영원한 눈으로 세상 존재를 관조한, 과감한 노력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영향
아우구스티노가 사망했을 때 히포는 반달족에 의해 포위되어 있었고, 아프리카의 로마 문명은 막을 내리고 있었다. 수년 후 레랭의 빈켄티우스는 가톨릭 교회의 정통성을 가리켜 '어디에나 있고, 언제나 있고, 누구나 믿는 것'(Quod ubique quod semper quod ab omnibus creditum est)이라는 유명한 구절로 표현했다. 가톨릭 교회를 그처럼 정의한 데에는 아우구스티노의 학설 가운데 들어 있는 좀더 터무니없는 주장들을 배제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렇지만 빈켄티우스는 감히 아우구스티노를 이단적이라고 하지는 못했다. 아무튼 아우구스티노의 학설 속에 끼여 있는 좀 터무니없는 주장들은 그의 권위 때문에 신학적으로 해로운 유산이 되었음은 사실이다. 그런 문제가 있지만 그가 그리스도교 사상에 끼친 엄청난 영향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의 사상은 서방 그리스도교를 하나로 묶어왔고 언젠가는 현재의 분열을 치유할 것이다. 그처럼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원인은 명쾌하고 심오한 그의 지성이나, 신비스럽기까지한 그의 품행이나, 거대한 학문체계보다는 그의 독특한 종교적 천재성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캔터베리의 성 안셀모,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B. 파스칼, 자크 베닌 보쉬에, 조지프 버틀러, 자크 마리탱, 라인홀드 니부어, 파울 틸리히 이 모든 사람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아우구스티노에게 큰 영감을 받았다. 그들은 아우구스티노와 함께 '문제의 핵심'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참된 철학자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이다"(Verus philosophus est amator Dei)라는 것이다. 〈신국〉에 들어 있는 이 말을 통해 그는 가장 훌륭한 자기 초상화를 남겼으며, 그의 저술들을 그보다 더 정확하게 평가하는 말도 없을 것이다. 중세 초기부터 그는 교회 학자로 존경받았다.